소설을 읽다 보면 놀라는 게 가출하는 아버지가 많다는 거다. 자기 삶을 찾겠다고 집을 나선 아버지. 아버지의 부재로 가슴 한쪽이 시린 감정을 느꼈을 주인공들은 오늘도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그렇다고 어머니와 각별한 관계에 있지도 않다. 이런 걸 보며 우리 삶은 상실과 부재의 순간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맞이하는 계절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 꽃 피는 봄을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라고 일컫듯,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시작의 단계에 있는 것 같다. 하나의 계절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계절이 오는 시점에 우리는 주로 몸살을 앓는다.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공통적인 주제 또한 외로움이라는 거다. 떠난 남편, 헤어진 연인, 함께 살지만, 마음이 닿지 않은 부부. 물론 함께 살아도 마음이 닿지 않으면 외로울 수밖에 없다. 단순한 관계, 복잡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이 현대의 표상인 것 같다. 아마 1인 가족이 많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저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 시간을 그저 견디는 것 같다.
표제작 「가벼운 점심」에서 봄을 맞이한다. 봄을 좋아해서 오히려 좋아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나온다. 아버지는 꿋꿋하게 참다가 장문의 편지를 써 놓고 가출했다. 할아버지의 자랑이었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나타났다가 누구보다도 서럽게 울었다. 미국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배웅하면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가벼운 점심을 하기로 한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며 만족한 삶을 사는 듯했다. 표정이 밝고 바쁘게 일하며 햄버거에 콜라를 마셔도 맛있다고 말했다. 봄이면 우울한 낯빛을 하고 있었던 과거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등에 짊어진 무게를 내려놓으면 만족한 삶을 사는데 우리는 너무 보이는 모습에 맞추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피아노, 피아노」는 내일을 위해 서울살이하는 원룸의 한 청년이 주인공이다. 경비실 입구에 누군가 버려놓았던 피아노를 집에 들이고 피아노와의 동거를 시작한 청년은 연인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도 쉽게 답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 자금을 마련한 뒤에 연인과 결혼하고 싶었다. 서울살이는 청년을 외롭게 했지만 피아노가 있어 덜 외로웠던 거다. 절약하고 사는 것도 좋지만 그러느라 때를 놓치지는 말자고 했던 남자의 연인이 했던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품」은 중편소설에 가깝다. 헌책방을 하겠다는 아내의 행동에 그게 가벼운 일탈이기를 바라는 음악가인 남자의 독백은 함께 있어도 외로움이 짙게 풍긴다. 행동이 느려지며 말을 잃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이 느껴진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 좋아했던 아내를 위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지만, 아내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일상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픔의 한 표현이다. 상실에 무너지는 한 젊은 어머니의 절규가 느껴지는 듯했다. 아내를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 또한 애틋하다.
형광등이 나가 방에 불도 돌아오지 않은 시골집으로 몇 달간 살러 온 여자, 오랫동안 집을 비워 귀신이 살지도 모르는 집에 돌아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하는 여자의 행동은 「고전적인 시간」을 비롯해 최근 소설에서 자주 나타나는 양상이다. 고향을 지키고 사는 사람이 있기에 돌아가서 머물 수 있는 것 같다. 대문을 열고 밥상을 들고 오는 이. 나물을 맛있게 먹어서 챙겨와 밥상을 펴 함께 먹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시간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던 주인공이 시계의 배터리를 교체하며 다시 시간에 편승하게 되는 안도의 한숨 같은 것들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가을 날씨를 닮은 「나의 루마니아 수업」은 가을이라는 계절처럼 쓸쓸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에게 체보타루 소설을 함께 공부했던 은경을 기다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서랍 깊숙이 그녀에게 전해줄 소설을 가지고 있었던 남자의 마음이 보이는 듯했다. 어떤 사건이 생긴 뒤로 귀에 물이 차는 듯한 증상을 겪는 철도 관리원의 이야기 「파수꾼」은 십 년 전에 일어났던 사고가 생각났다. 두려움이 커서 귀에 물이 차는 증상을 느꼈던가. 길고양이를 구해 보살폈던 그는 이제 관리원의 생활을 마쳐야 한다. 삶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모든 일이 그렇다. 봄이 오면 여름과 가을이 오고, 겨울도 찾아오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계절처럼 반복된다.
다가오는 계절을 우리의 마음처럼 엿보고 계절을 계절답게 느끼게 해주었던 작품이었다. 감정이란 계절같은 것. 그 어떤 감정이 와도 우리는 흐르는 시간처럼 계절을 보내는 거다. 장은진의 소설 제대로 읽은 게 처음인 것 같은데,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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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만나는 건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나는 장편을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면 단편도 즐겁게 읽는 편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장은진 작가의 단편 소설. 작가의 전작들을 다 읽었고, 그래서 더욱 기대를 했던 책이다. 모두 6개의 단편. 가장 충격적인 단편은 첫 번째 소설이지만 그녀의 책은 내 삶을 다시 한 번 뒤돌아 보게 한다.
‘가벼운 점심’ 결혼을 앞둔 나는, 가출해 10년이 지난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 나타난 아버지. 아버지는 가벼운 회포조차 풀지 않고 바로 출국하려고 한다. 이런 아버지와 나는 아버지가 왜 가출했는지 알게 된다. ‘피아노 피아노’ 서울 생활 5년. 여자친구 진아는 결혼을 할 건지 말 건지를 묻지만 대답할 수 없다. 서울 생활 5년. 조그만 원룸 생활자. 그런 어느 날 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집에 들이게 되는데.. ‘하품’ 세 번의 유산 후 느려지고 게을러진 아내. 잘나가는 피아니스트 나는 아내 함께 헌책방에서 생활하게 된다. 한남동 집을 놔두고 이곳에서 생활하는 나는 아내의 행동이 답답하고 짜증난다. 그러다 자신에게 레슨을 받겠다고 후배가 찾아오게 되는데.. ‘고전적인 시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집으로 내려온 나. 그곳에서 친구를 만나게 된다.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 대학 시절 가을 날씨와 같은 눈동자를 지닌 후배. 그녀가 떠올라 2달 동안 카풀하게 된 후배에게 소식을 묻는다. 후배는 그런 아이가 우리 과에 있었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얼마 후 후배가 전해온 소식은 충격이었다. ‘파수꾼’ 기찻길에 뛰어들어 죽은 사람을 목격하고부터 귀에 물이 찬 것처럼, 먹먹해지는 증상에 시달리는 건널목 관리인 강씨. 건널목이 폐쇄될 거라는 소식에 마지막 열차를 떠나보내기 위해 건널목에 서게 되는데..
인생은 그 자체로 버거울 때가 많다. 어떤 날은 그냥저냥 살다가도 또 어떤 날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불안할 때도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고민이나 걱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은 죽을 때까지 걱정을 안고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 주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마음 안에 크고 작은 상처로 아픈 사람이 있듯, 이번 단편은 우리 삶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가장 충격적인 단편은 가벼운 점심. 아니 어쩌면 이런 결말도 이제는 ‘충격적’이 아닐 수 있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니까.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내 가정도 버릴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대단한 것인지. 내 가족도 버릴 수 있고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거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랑이라니.
아버지의 그런 사랑을 아들은 이해할 수 있었을까? 가족과 있었던 시간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지금 현재가 행복하다면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부모님의 인생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고, 그래서 훌쩍 떠날 수 있었던 아버지의 배려일까? 그래서 인생은, 삶은, 세상은 요지경인지도. 나처럼 조금은 유교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아버지의 사랑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행복하다면야. 어차피 한 번 살다 갈 인생이니까. 그래도 씁쓸한 건 어쩔 수 없구나. 장은진 작가의 다음 소설은 장편으로 만나고 싶다.
세 번의 유산 후 느려지고 게을러진 아내를 두고, 지난날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 팍팍한 서울살이에 여기저기 치이다가도 어느 날의 피아노 연주에 다시 한번 삶의 의지를 다 잡아볼까 생각하는 남자. 가을을 담은 고요한 눈을 마음에 담았다 그 마음 주고받을 새 없이 이별하게 된 남자. 봄이 와도 행복하지 않다더니 가족을 떠나고서야 봄을 알게 되었다는 아버지.
작품 내내 그려지는, 먼지 같이 부유하는, 혹은 끈적하게 눌어붙은 인물들. 동시에 그이들을 차갑고 건조한 시선으로 관망하는 듯한 인물들. 그들 면면에서 보이는 무심함, 이기심, 그로 인해 주변인들이 느끼는 심적 폭력은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온전히 이해할 순 없는 삶들이나 그럼에도 함께 가벼운 점심을 나누며 축복을 빌어주고 싶은 사람들.
하니포터, 한겨레출판으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