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과 쇼핑에 중독된 혼탁한 사회다. OTT 영상물로 밤을 새는 시대가 되었다. 남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다. '활자중독자'로 자처하던 내가 드라마 '무빙'을 보기 위해 날밤을 샜으니 말이다. 돌연 현타가 온다. 아, 나는 '영상중독자'가 되었구나. 재미난 영상물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요즘, 누가 시집을 손에 잡겠는가. 어쩌면 시인조차 나처럼 영상중독자가 되어버리진 않았을까. 그런데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이처럼 요란하고 짤막한 영상물이 범람하는 지금이야말로 시 문학이 가장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가장 최근에 내가 읽은 시집은 박노해 시인의 『너의 하늘을 보아』(느린걸음, 2022)였다. 여기에 장석주 시인의 시평론집 『지금은 시가 필요할 때』(나무생각, 2023)를 한 권 더하니, 그나마 활자중독자로서의 근성과 존심을 지켜낸 것 같은 뿌듯한 느낌이 올라온다.
시란 무엇인가. 시의 효용을 따진다면, 시는 언제나 내게 영양제이면서 해독제였다. 소아과 의사 출신이던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처럼, 나는 시를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약'으로 본다. 시인은 마음의 멍을 치유하고 병든 영혼을 달래는 그런 '마음과 의사'다. 장석주 시인은 도가적인 입장에서 시의 유용함을 바라본다. "시는 무위에 헌신하는 일, 아무 쓸모가 없는 아름다움을 구하는 일"이라면서 말이다. 시가 가진 좋은 약성이 바로 그런 헌신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또한 시는 개인의 무의식은 물론, 당대의 집단 무의식과 욕망에 기반한 시대의 다양한 무늬를 드러낸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밖으로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데,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있다."(11쪽)
저자는 스물 아홉 분의 시인을 소개한다. 김승희, 이기성, 이병일, 유진목, 이원, 유계영, 오은 등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의 시편에서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보는 능력, 의외성을 가진 이미지들, 무의식에서 솟는 돌연한 감정들, 다양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들, 이제까지 없던 음악, 어디서 오는지 모를 에너지, 순진무구한 주문, 기다림과 숙고와 완전한 몰입" 같은 것을 만끽할 수 있다. 이들 시인이 길어 올린 시는 "불행과 격투를 마다하지 않는 시, 낡은 사물이나 생각을 바꾸는 상상력으로 가득 찬 시, 청춘의 착란 속에서 빛나는 미래 비전을 담은 시"다.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시란 무엇인가? 가장 숭고한 문학의 형태로 인식되는 시는 언어의 리듬감을 통해 전달되는 인간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다. 시의 핵심은 자기 자신, 독자, 더 넓은 세상, 심지어는 우리의 일상적인 이해 너머에 있는 형언할 수 없는 경험과의 연결에 관한 것이다. 시에서는 모든 단어가 소리, 의미, 리듬에 따라 무게가 매겨져 메시지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또한 시는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법이자 탐험의 행위이기도 하다. 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경험을 심오한 것으로 승화시키거나 숨겨진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 시는 익숙한 것에서 의미와 깊이를 찾거나 추상적인 것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시를 평론하는 것은 시의 구조, 언어, 근본적인 주제에 대한 철저하고 성찰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평론가에게는 시의 리듬, 소리, 이미지,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감정과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무수한 방식에 대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시평론은 시의 정서적 울림도 고려해야 한다. 독자를 어떻게 느끼게 하는가? 어떤 생각이나 질문을 불러일으키는가? 도전, 위로, 당혹감 또는 영감을 주는가? 시는 감동을 주고 감탄을 자아내는 예술 형식이기 때문에 시가 이끌어내는 정서적 반응은 기술적인 기량만큼이나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시를 평론한다는 것은 텍스트, 시인, 문화적 맥락, 그리고 자신의 주관적인 반응과 함께 대화하는 것이다. 작품의 다면적인 특성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시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심화시킬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시를 읽는 독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문학적 분석이라는 공유된 담론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나는 시를 읽을 때면 감정이 은유로 소용돌이치고 의미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거미줄 같은 시의 언어에서 아름답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난무하는 낯선 땅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처음 접한 시평론집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에서 운율과 리듬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시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시적 감수성을 겸비한 평론가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손이 닿지 않던 것이 닿을 수 있게 되는 순간에는 심오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책은 시평론을 넘어 낯설게만 느껴졌던 시 작품을 조명하고 친밀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치 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내 손을 잡고 친절하고 박식하게 시의 고동치는 심장에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인도하는 것 같았다.
한때 위압적이었던 시의 가장자리가 부드러워지고 그 매력의 보편성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이 책은 사려 깊은 평론이 시의 예술을 해부할 뿐만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한다. 비 내리는 가을밤 시의 품에 안기려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책과콩나무 서평단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요즘
시를 잊었다. 잊고 있었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시를 잊고 있었다.
게다가 시를 읽는 법도 잊었다.
그러니
예전 국어 시절에
다음 시를 읽고 주제를 찾아보라는 문제,
별다른 의식도 없이 시를 문제 지문으로 삼아 읽어보던 때,
힘겨운 첫사랑에 한숨이 저절로 시가 되어 나오던 때로
돌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이 가을에 했었다.
그래서 잡은 책이 바로 이 책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이다.
이 책은
이 책, 잃었던 시를 되찾게 해준다.
시에서 생각의 줄을 찾아내고, 생각을 완성하게 만든다.
내가 이 가을에 기다리는 시는 어떤 시인가?,
저자가 말해준다, 이런 시라고.
우리가 기다리는 시는 불행과 격투를 마다하지 않는 시,
낡은 사물이나 생각을 바꾸는 상상력으로 가득 찬 시,
청춘의 착란 속에서 빛나는 미래 비전을 담은 시다. (5쪽)
그러한 시가, 이 책을 통해 나에게 찾아온다. 오고 있는 중이다.
시를 음미하다, 글을 음미하다.
그래서 이런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또 씨름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발원하여 이성복의 <남해 금산>으로 이어지는 우리 서정시의 흐름 안에는 늘 ‘당신’이나 ‘님’이 남아있다. ‘나’의 안에서 ‘님’은 결핍과 부재의 흔적으로 생생하다. (9쪽)
우리가 즐겨 읽는 시는 바로 그런 결핍과 부재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그래서 필연적으로 늘 슬픔과 허무로 주저앉는다는 것이다.
그런 슬픔과 허무가 시가 되어 나오는 게다. 아, 그게 바로 시라는 것이구나.
모두 29편의 시, 읽어보자.
시에 대한 흐름을 조금이나마 듣게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를 읽어볼 차례다.
저자는 모두 29편의 시를 보여준다. 나에겐 모두 처음 보는 시들이다.
저자는 시를 이렇게 읽어준다.
먼저 운을 뗀다. 시를 읽기 전에 은은하게 우리 마음을 덥히는 것이다. 시를 맞이할 준비 운동을 하는 셈이다.
이렇게 말이다.
사랑하는 자의 얼굴이 빛나는 것은 사랑이 감히 신의 영역인 무한과 불멸에 기대고 그 불기능성을 욕망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43쪽)
사랑을 말하다니, 기대가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 그 자체로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고 기다리게 만든다. 이어지는 말에 무언가 마음을 건드리는 그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진부하지만 ‘사랑한다’는 선언 속에서 그 생명을 얻는다. (43쪽)
그 단어, 사랑은 진정 진부한 단어이지만, 그 사랑이 사용될 때는 늘 새로운 게 사랑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랑이란 말만 나와도 사람들은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에 대한 담론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 저자는 이윽고 시를 한편 열어 보인다. <포옹>, 이기성 시인의 시다.
비가 수천의 하얀 팔을 뻗어
너를 안는다.
흰 도화지 같은 공중에
너의 입을 예쁘게 그려줄게
주르륵 녹아 흐르는 입을 다시 그려줄게
똑같은 노래를 반복하는 파란 입술 그려줄게
......(이하 생략)
저자는 이 시를 이렇게 말한다.
처음엔 <포옹>을 사랑의 시로 읽었다. 사랑에 빠진 마음을 보여준다고 믿었던 탓이다. 사랑은 삶을 약동으로 이끌며 메마른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고, 타자를 끌어들여 외로움을 해소하고 정념을 충족시키려는 욕망이 추동한다. (45쪽)
그 다음 계속 읽어보자..
사랑은 영혼이 고갈되고, 전에 없던 혼란과 위기를 겪는 존재 사건이다. 그런 까닭에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수시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45쪽)
저자가 시에서 주목하는 것은 ‘너를 안는다’에서의 ‘너’이다.
‘너’는 ‘나’의 저편에 있는 대자적 존재이다. ....시인이 ‘너’를 특정하지 않은 까닭은 ‘너’가 멀리 있기 때문이다.........지금 여기에 없는 ‘너’는 헤어진 연인일까? 그렇다면 ‘나’는 마음이 허전하거나 슬프거나 쓸쓸할 것이다. 한때 사랑했던,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너’는 여기에 없다.
그다음, 시의 제목 <포옹>에서의 '포옹'이 등장한다.
비에서 연상한 ‘하얀 팔’로 누군가를 포옹하는 상상은 그래서 가능했을 테다.
......너를 끌어안는 이 포옹은 환대의 행위이고, 애틋한 다정함의 표현이다. (49쪽)
다시, 이 책은
역시 시인은 다르다. 사물을 보는 눈이 다르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포옹을 떠올리다니.
또한 시인의 시 풀이 역시 다르다. 단 한마디 등장하는 ‘너’를 가지고 포옹을 정의하고 더 나아가 환대와 다정을 확신하다니!
그래서 이 책에는 그런 시를 쓴 시인과 그 시를 풀이하며 또다른 세계로 독자를 안내하는 시인이 있다.
이 가을에
누군들 시가 필요하지 않을까마는
요즘 시가 필요하다. 시가 필요하다. 절실하게.
그 필요를 충만하게 채워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아, 라는 영탄의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이런 가을날,
시를 쓰는 것도 좋고,
저자가 보여주는 시를 새롭게 읽어보는 것도
가을이니까.....
아니, 가을이어서만 그런 것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외로움의 촉수를 한 편의 시로 번역하는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장석주(2023).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서울: 나무생각.
저돌과 파격으로 낡은 세계를 새롭게 건축하다
글을 쓰기 위해 새로운 영감이 필요할 때, 타성에 젖은 언어에서 벗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발상을 뒤흔드는 언어가 필요할 때 시집을 꺼내든다. 시인들의 언어 사용 방식을 배우기 위해서다. “시인들은 항상 다르게 보고, 다른 것들을 들으라는 정언적 명령의 세계에 속한다. 그리하여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시각으로 보고, 같은 것을 들으면서 다른 귀로 들으며, 같은 목소리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목소리를 듣는다”(146쪽). 장석주 시인의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은 29명의 시인이 세상을 다르게 보고 듣고 느끼며 관성의 늪에서 벗어나 “상상력의 촉수”(257쪽)를 뻗어 건져올린 풋것들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풋것들은 에두르는 법 없이 사물의 핵심으로 직진한다. 풋것은 무지와 무감각으로, 저돌과 파격으로 낡은 세계를 새롭게 만들고 눌리고 찌든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한다”(163쪽). 절제와 압축미로 담아낸 시어는 몸을 관통한 흔적을 얼룩에서 무늬로 바꾸어 언어로 번역해내는 시심의 산물이다.
시인은 절망이 오면 절망의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 또는 희망의 언어로 얼룩진 행간에서 의미를 채굴하고, 낙엽에 쌓인 그리움이 추위에 떨어도 추억으로 한 동안을 버티며 살아가는 주어진 현상의 이면을 파고든다. 폭설에 새겨진 아쉬운 발자국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지워져도 새벽 찬이슬 맞으며 땅바닥에 엎드려 그 자리를 지키는 족적도 시인에게는 시심을 자극하는 위대한 족적이다. 누가 입을 지도 모르는 생각의 옷을 입은 언어들이 동맥을 타고 흐를 때 시인의 촉수는 피로써 울분을 토하며 얼룩을 무늬로 만드는 언어적 기적을 선물한다.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에 바람을 타고 지나가던 서글픈 소식들이 가지가지 사연으로 매달려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시심은 언제나 심심하지 않다. 얼마나 외로운 사연 많이 품었으면 무거움을 참지 못하고 구름은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비의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는 찢어진 노트에 담긴 서글픔 한 페이지다
“우리가 기다리는 시는 불행과 격투를 마다하지 않는 시, 낡은 사물이나 생각을 바꾸는 상상력으로 가득한 시, 청춘의 착란 속에서 빛나는 미래 비전을 담은 시다”(5쪽). 누구나 시인이 되면 강물이 훑고 지나간 모래알의 그리움을 긁어내 어루만져줄 비법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나이가 들어 시심이 무르익으면 새벽이 찬이슬 앞에 머뭇거리다 먼동이 터옴을 시로 번역해내는 경이로운 작법을 구름에 달가듯 자연스럽게 포착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또 한 번 착각했다. 쟁반에 맴돌던 달밤의 낭만이 소나무 가지가 속삭이는 연서와 만나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싹을 틔우는 순간에도 싯구가 폭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도 하늘이 품고 있는 변덕스러운 생각에 조응하는 명령을 따를 수 있을 정도의 혜안과 안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늘도 시인은 쓰다 남은 메모장에 적힌 그리움 한 조각과 찢어진 노트에 담긴 서글픔 한 페이지를 붙잡고 새벽으로 향하는 밤의 적막속에서 끝을 모르는 유영중이다.
“시는 개별자에게 발화하는 슬픔의 결, 실패의 광휘, 패자의 심오한 승리 등을 포함한 경험에 주목한다. 그것은 시가 고백의 건축술이기 때문이다. 시는 과거의 멜랑콜리를 소환하고, 한심한 영혼의 낡은 미래를 노래한다. 고백의 언어를 펼치는 가운데 잔혹한 존재의 내출혈, 독백의 만다라, 팬터마임을 시연(試演)하기도 한다”(5쪽). 시인에게는 비극도 어제와 다른 삶을 작곡하는 음악적 선율의 다른 이름이다. 시인에게는 정답도 없고 다양한 가능성을 잉태한 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해답만 존재할 뿐이다. 해석이 바뀌면 지금껏 골머리를 앓던 문제도 해결되는 삶의 지혜가 든든한 위로로 엄습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걸어가는 길은 아직 가보지 않은 위험한 미지의 길이며, 읽히지 않은 소설속에 잠복근무하고 있는 갈등과 절정의 어느 순간이다. 시인은 어떤 풍경으로 그려내도 화폭에 담을 수 없는 그림이며, 여전히 어제와 다른 영감을 기다리며 그리움에 젖어 사람이 지금 이 순간도 시어를 기다리며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
“모든 참다운 시는 그 불행의 참상을 낱낱이 고지하여 기소하고 동시에 사면한다. 그게 시의 숭공한 소명이라는 걸 되새기며, 여기 숭고한 소명을 향해 나아간 시인들과 시들을 불러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12-13쪽). 지금까지의 생이 아픔과 슬픔이 씨줄로 날줄로 직조된 얼룩과 무늬라면 그런 생에게 따듯한 입맞춤해주며 헐벗은 옷 갈아입혀 따듯한 온돌방에 잠재우고 싶은 마음을 견디다 못해 몇 줄 쓴 시가 이 책 곳곳에서 긴 한 숨을 쉬며 독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소리 없는 아우성이 저마다 시인이 겪어내는 삶의 절규였음을 증명해주고 싶은 것이다. 비바람을 등지고 안간힘을 써가며 간신히 켜진 성냥불에 주변이 잠시 밝아진 틈을 타서 돌아온 지난 생의 어둠을 잠시 잊고 싶은 게 이책에 등장하는 시인들의 작은 소망이다. 그럼에도 시인의 주변에는 희망보다 절망의 늪으로 점철되어 있다.
김승희 시인의 희망이 외롭다에 나오는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희망과 나/희망은 종신형이다”는 구절은 절망과 희망을 다르게 해석하는 시인의 역발상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절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희망이 우리를 자주 속인다. 희망이 절망보다 더 가혹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의 종신형을 선도받은 채 그 가느다란 끝을 붙잡고 있는 죄수들이다”(24-25쪽). 절망의 종신형이 아니라 ‘희망의 종신형’이라는 시어 앞에 절망과 희망의 의미를 타성에 젖은 의미로 해석했던 나의 언어사용 방식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의 종신형 앞에서 나의 관념적 언어는 바닷가에 객사(客死)한 모래알이고, 땡 빛에 힘없이 죽어가는 들국화의 쪼그라듦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전히 구체적 맥락성을 품지 못하고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허공을 넘다는 관념의 파편임을 알아차렸을 때, 장석주 시인의 언어는 현실 속에서 진실과 진심을 건져올리는 서광이나 다름없었다. 시인은 그래서 “알은 어둠 속에서 절망에 복무하며 기다려야”(32쪽)하고, “머뭇거림과 숙고, 무작정과 막무가내의 기다림”(33쪽) 속에서 더 적확한 언어를 벼리고 별러서 적확한 한 문장을 완성한다.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39쪽). 시은은 오르락 내리락 우여곡절의 전반전을 뛰고 나서 한눈팔고 딴 짓 하다 바라본 구름 한 점도 섣불리 흘려보내지 않는다. 거기에는 기꺼이 기록을 거부하는 비애 한 권의 서글픔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모든 시간과 그 시간이 머물렀다 떠나는 공간은 서성거림의 방황과 배회가 남긴 시 한편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내는 모든 순간은 한 두 문장으로 압축되거나 요약되지 않고 양극단의 스펙트럼에서 언제나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린 상식과 신념의 종합선물 세트다. 처절함과 처연함 사이에서 처참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어딘지 모르는 중간 간이역에서 시인의 발걸음은 잠시 쉬고 있다. 그 순간에도 우리에게 던져주는 삶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파고들어 의미의 지층을 깨부수는 언어광부가 시인인지도 모른다.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시가 타오른다
“연애는 상대를 낳는 산파술이다”(64쪽). 비단 연애 뿐만 아니라 시인이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대상이 품고 있는 의미의 뒤안길을 추적해서 잠복중인 새로운 깨달음을 출산하는 산파술의 터전이다. “우리는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타오른다. 이 타오름의 중심에 욕망이 있다. 이 타오름에서만 우리는 살아있음을 실감한다”(67쪽). 시인은 바라보되 그냥 바라보지 않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뭔지도 모르는 숙제를 끌어안고 해결을 위한 단초나 단서를 잡아보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 만난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친다. ‘목소리들’을 쓴 이원 시인의 상상력 촉수는 한 글자로 된 단어의 숨겨진 아픔과 몰래 꿈꾸는 이상 세계의 한 단면을 포착한다.
돌, 거기까지 나와 굳어진 것들
빛, 새어 나오는 것들, 제 살을 벌리며
벽, 거기까지 밀어본 것들
길, 거기까지 던져진 것들
창, 닿지 않을 때까지
겉, 치밀어 오를 때까지
안, 떨어질 곳이 없을 때까지
피, 뒤엉킨 것
귀, 기어 나온 것
등, 세계가 놓친 것
색, 파헤쳐진 것, 헤집어놓은 것
나, 거울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
늪에는 의외로 묻을 게 많더군
너, 거울에서 이미 빠져나온,
허공에도 의외로 묻힌 게 많군
눈, 깨진 것, 산산조각 난 것
별, 찢어진 것
꿈, 피로 적신 것
씨, 가장 어두운 것
알, 거기에서도 꼭 다문 것 격렬한 것
뼈, 거기에서도 혼자 남은 것
손, 거기에서도 갈라지는
입, 거기에서도 붙잡힌
문, 성급한, 뒤늦은, 때늦은
몸, 그림자가 실토한 몰골
신, 손가락 끝에 딸려 오는 것
꽃, 토사물
물, 끓어오르는
칼, 목구멍까지 차오른
흰, 퍼드덕거리는
한 많은 세월의 얼룩이 서글픈 사연을 머금다 목구멍 사이로 터져 나온다. 차갑게 식은 냉가슴을 달구는 한 잔 술이 온몸을 휘감을 때 시인은 텅 빈 종이를 바라보다 어둠을 밝히는 밤하늘의 등불로 번역한다. 하루 종일 수영 하다 지쳐가는 몸을 가누며 물고기가 하품을 하는 순간 숱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물가의 갈대가 온몸을 떨고 있을 때 시인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빛나는 배경의 안간힘을 포착한다. 긴 밤을 뒤척이다 깨어도 여전히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다가도 문득 스쳐지나는 영감을 포착했을 시인은 그것이 내가 찾는 정답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을 반복하다 새벽을 맞이한다.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는 순간 고속으로 질주하던 자동차의 경적이 세월의 흐름을 추월할 때에도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어슬렁거리며 유유자적하는 산책자다.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에는 장석주 시인이 다른 시인의 삶의 내면과 이면을 파고드는 의미의 산책자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는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다
이원 시인의 ‘목소리들’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쓴 진은영 시인도 타성에 젖은 교과서적 정의에서 탈피, 언어적 의미를 재정의하는 짧은 사전을 보여준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언제나 주소 불명의 곳곳에서 날아든다. 정처도 없고 장기간 머물로 살아가는 터전도 없다. 순식간에 날아들다 기분이 내키면 잠시 머무를 뿐이다. “시인은 만물이 내는 목소리를 경청하며 동시에 이것을 세계에 중계한다”(147쪽). 시인은 언제나 삼라만상을 경험하면서도 다른 감촉으로 상상력을 잉태한 다음 아무도 모르는 시기에 어제와 다른 문장을 아무때나 출산한다. 시인의 삶은 하루도 마음 편안하지 않다. 오히려 시인은 불편함과 불안감이 창작의 꽃을 피우는 앙스트불뷔테의 전형이다. “시인은 모든 도약에 실패한 호랑이들로, 날마다 포효를 하며 제 존재의 벽을 할퀴어댄다”(162쪽). 자기 몸에 새겨진 상처 위에 또 다른 앎의 상처로 덧씌우며 탄생하는 쓰라림으로 애쓰며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나는 이런 고통의 무한 반복이 자신이 없어 시인(詩人)이 될 수 없음을 시인(是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를 읽어야 되는 이유는 시 한 편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소우주가 들어 있고 자연의 위대한 법칙과 원리가 숨어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순간에 무릎을 치는 통렬한 깨담음의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새해 첫 기적’을 쓴 반칠환 시인은 한 해를 정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서늘한 뜨거움을 전해준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저 너머에 가장 아름다운 시와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항해해야 할 가장 넓은 바다와 추지 않은 불멸의 춤이 있다.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날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263쪽). 시인에게는 비극도 어제와 다른 삶을 작곡하는 음악적 선율의 다른 이름이다. 저마다의 사유로 작별을 고하고 이별을 경험한 씁쓸한 시인은 새벽이 다가와도 잠이 오지 않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에 시름을 희석시켜 새벽별을 위한 아침을 준비하는 시인은 그럼에도 숱한 작별과 이별에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는다. 작별이나 이별보다 더 슬픈 결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 속에 간직한 사전을 펼쳐놓고 단어들이 품은 의미를 선별하며 문장을 건축해보지만 여전히 언어는 하늘을 날며 허공에 펀치를 날릴 뿐이다. 어두워야 읽히는 시인의 문장들, 여전히 난해한 상형문자로 건축되어 있는 해독의 대상이라 스스로 좌절을 밥먹듯이 한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이 축조한 지혜의 보고에서 며칠 밤 지새우면 세상의 언어로 옷을 갈아입을 것이라는 어설픈 희망을 가져본다. 그때는 어둠의 이불을 박차고 나와 하늘의 명령에도 불복하지 않고 구름이 안내하는 길로 총총 걸음 내딛으며 또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용기로 두려운 불확실성 앞에 도전하는 한 줄기 싯구절을 상상해본다. 장석주 시인의 시와 시를 해설하는 언어에는 저마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머물렀던 공간의 기억을 되살려 번역해낸 체중이 실려 있다. 살갗을 파고들고 전두엽을 자극하는 전광석화의 깨달음이 스며드는 이유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데,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있다”(11쪽). 지층을 뚫고 나오는 글을 쓰기 위해 어제와 다른 삶의 차이를 반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2분의 1: 인생반전을 일으키는 절반의 철학》 책을 내면서 저자 소개에 나의 인생이력을 짧게 써 봤다. 내가 살아온 삶만큼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다는 신념에서다. 20대는 뒷굽이 다 닳은 서글픈 신발을 신고 갈 길이 먼 다급한 마음 억누르며 그래도 분발하려는 대책없는 방랑자였다. 30대는 바람타고 쓸려간 상처 속의 신음도 찬란한 슬픔의 화음으로 재생하는 어설픈 작곡가였다. 나에게 사십은 상처입은 짐승이 내면의 아픈 기억을 어루만지다 몸부림치며 행간의 의미를 밝혀보려는 섣부른 저자였다. 나에게 오십은 새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 타고 밀려오는 파도에게 술 한 잔 사주고 싶은 철부지 예술가다. 60대에는 몸에 외로움의 촉수로 박혀 있어도 건드리면 아무데서나 한 편의 시로 승화되는 시인의 삶을 살고 싶다. 걸어가는 족적마다 다 음악이며, 달빛에 그을려진 서글픔도 그림이 되는 아슬아슬한 기적을 쓰고 싶다. 나에게 육십은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도 유유자적하며 삶의 순간을 만끽하는 산책자이고 싶다. 언제나 신인의 자세로 애쓰며 상상력의 텃밭에서 비상하는 글을 써야 작가로서의 본분과 작은 사명을 다할 수 있음을 장석주 시인의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을 읽으며 깊은 깨달음의 선물을 받았다. 깊어가는 가을, 겨울 추위가 다가오기 전에 서늘한 따듯함으로 삶의 고단함을 위로받고 싶은 분들에 일독을 권하고 싶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절반의 기쁨을 발견하라.
시가 어렵다고 한다. 현대를 사는 오늘날 독자들에게 시가 왜 어려워졌을까? 시가 어려워진 것은 시인이 시를 어렵게 쓴 탓일까, 아니면 현대인들이 시를 읽지 않아 어렵게 느끼는 것일까? 혹시 모두 다 이유가 되는 것인가? 정확한 이유는 시를 잘 읽지 않는 독자가 알 수 없지만, 느낌은 확실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시를 잘 읽지 않는 독자의 얄팍한 상식으로는 시가 시인의 상상력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형상화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언어를 통해 나오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추측은 해본다. 같은 예술인 미술도 예전엔 실재 형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미술이란 예술로 이해했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미술이 시대를 거쳐 오면서 표현 방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 잘, 그리고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에서 대상을 속을 들여다보는 화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것은 문예부흥을 거치며 근대에 들어오며 추상적인 모습으로 변해 갔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표현해주는 것이 '예술'이다는 생각이 싹 트기 시작할 때부터 관람자들의 눈에 비친 형상이 무엇을 표현하는 것을 읽어내지 못할 정도여서 외면하고 어렵다고 판단해 버린 이유가 아니었을까?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시인의 마음을 형상화해 글로 썼다. 그 과정엔 '은유'와 '상징'이라는 비유로 형상화되면서,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에게 '시는 어렵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아닐까?
위의 내용은 독자 개인의 단견에 불과하지만,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장석주가 이 책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에서 보여준 '시론'과 맥락은 통하는 데가 있다. 저자 장석주가 「시는 미래의 언어다」란 부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을 펴내면서 29편의 시를 선정해 시의 아름다움과 시대정신을 담은 날카로움 등을 분석하면서 오늘날 시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하면서 드러난다. "무의식과 충동들, 시작도 끝도 없는 모호함들 속에 우리의 길이 있을까? 시에는 전복적 상상력으로 시대를 가로지르고, 공중을 떠도는 유언(流言)과 비어(蜚語)를 채집하며, 시대정신을 꿰뚫어 보고 표상을 찾는 숭고한 소명이 있다." 저자는 한 시대의 삭막함과 불행에 맞서며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힘과 용기를 주는 시편들을 뽑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삭막하고 절망으로 둘러싸인 시대, 시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했을 것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시의 숭고한 사명을 되새기며 자기의 길을 용기 있게 걸어가는 스물아홉 편의 시, 시인과 함께 삶의 깊이와 방향을 다시 묻는다. "시가 어렵다"는 오늘날 시를 대하는 독자들의 태도에 변화를 줄 만한 이야기를 저자가 한 적이 있다. 전작 『은유의 힘』을 출간한 후 온라인 서점과 가진 인터뷰를 통해서다. "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시의 비밀을 좀 알려주고 싶었던 거예요. 시의 비밀을 은유라고 봤고요. 그 은유를 보면 시라는 수수께끼를 다 풀 수 있다고 힌트를 준 거죠. 사실 시는 은유의 덩어리거든요. 왜 은유를 쓰는지, 어떤 은유가 좋은 은유인지, 이런 것들을 정말 자유롭게 펼쳐놓았으니까요. 시를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시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주면 좋겠어요."(2017년 9월 〈예스24〉와의 인터뷰 중에서)
저자는 문학평론가로서 기회가 될 때마다 "시를 읽어야 우리 삶을 더 풍요로워지고 미래 발전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해 온 저자는 시인이자 비평가이기도 하다. 그는 독자들의 시 읽기를 권유하고, 한편으로는 시가 그렇게 씌여야 한다고 자신의 시론을 일관성 있게 펴왔다.
이 책도 그의 시론과 독자들의 시 읽기를 권장하는 차원에서 집필된 것으로 이해된다. "시대가 삭막할수록, 그리고 미래가 암울할수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좋은 시는 외롭고 허기진 우리를 살게 하면서 삶의 의미와 방향을 가르쳐주는 이정표와 같다. 시는 먹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것이라지만, 그 어떤 것보다 집요한 관찰과 무수한 고뇌, 통찰로 한 글자 한 글자가 빚어지기에 지층을 뚫고 올라와 찰나를 증언한다.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이 멋진 안내자는 우리에게 해갈할 물을 주고, 여행의 목적과 방향을 알려준다."
이 책은 자본주의에 밀려 시의 효용을 불신하는 시대를 비판하며 다시 우리의 시 정신을 가다듬어 사회 변화에 발맞춰 재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의한 황금만능주의에 따라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데도 우리의 정신은 더 가난해지고 심지어 퇴보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시와 관계없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 대부분이 느끼는 그대로다. 저자는 물질 만능주의가 지난 세기 인류 문명을 이룩하고 발전시켜 온 시를 외면한 탓이 크다고 지적한다.
시 평론집 『지금은 시가 필요할 때』는 시의 효용을 다시 전면에 들고 나와 시가 이 시대와 개인을 어떻게 보살피고 새로운 길을 안내하는지 말하기 위해 출간됐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은 상상하고, 숙고하고, 꿈꾸는 능력으로 얻은 상징 능력으로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지의 지평으로 들어선다. 상징의 이해와 세계의 심연을 여는 키를 갖게 된 인간은 그만큼 더 유능해졌다.”라고 말하며 시의 유용함을 거듭 역설한다.
세계의 심연을 여는 키를 가진 인간이 얼마나 유능했는지는 역사가 증언해 주고 있다. 시는 하나에서 하나를 얻는 산수식이 아니다. 상징과 은유를 총동원해 인간의 정신을 깨우고 하나에서 열을 만들어내는 상상으로 세상을 확장하고 생동하는 기운을 가득 불어넣는다.
시의 능력을 설명하는 저자는 시의 '독창성'을 가장 우선으로 꼽는다. 문명의 기반은 상상력, 그중에서도 독창적인 상상력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메리 올리버 『마음 산책』을 인용한다. "인간은 독창성으로 이름을 떨친다. 독창성이야말로 우리 종(인간 호모사피엔스를 말하는 듯하다)의 트레이드마크다. 시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다. 낯선 것에서 낯선 것을 보는 능력, 의외성을 가진 이미지들, 무의식에서 솟는 돌연한 감정들, 다양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들, 이제까지 없던 음악, 어디서 오는지 모를 에너지, 순진무구한 주문(呪文), 기다림과 숙고와 완전한 몰입, 이런 것이 없이는 시도 없다.
저자의 시론에는 분명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 '참여문학론'에 가까이 다가간다. 앞서 열거한 시의 기능, 시의 능력은 시인의 독창적인 상상력 없이는 분출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다. 시인이 현실을 외면하거나 힘에 부친다고 도피한다면, 시는 앞서 열거한 여러가지를 시를 통해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란 시에 대한 사랑과 순기능을 말하고 있다. 이런 성분 없이 나왔다면 시는 언어의 무덤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독설처럼 내뱉는다. 우리가 기다리는 시는 불행과 격투를 마다하지 않는 시, 낡은 사물이나 생각을 바꾸는 상상력으로 가득 찬 시, 청춘의 착란 속에서 빛나는 미래 비전을 담은 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저자 장석주는 「시가 나를 찾아왔다」란 제목의 〈들어가기〉를 통해 "놀랍도록 독창적인 상상에서 시작하는 시는 대체로 저 혼자 온다. 가늠할 수 없는 먼 곳에서 부재의 빛으로 오는 시는 스스로 발광체처럼 빛난다."고 썼다. 시를 쓰는 일은 개를 목욕시키는 일, 운동장을 가로질러 질주하는 일, 심심함에 못 견뎌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는 일과 다르다고 못박는다. 그렇건만 시는 무위에 헌신하는 일, 아무 쓸모가 없는 아름다움을 구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한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진리를 훤히 밝히는 기투의 한 방식"(하이데거, 『숲길』)이라고 단언한다. 시는 자아 바깥으로 송출하는 말의 한 방식, 즉 나에게서 너에게로 건너가는 말이라는 점에서 세계와 대지를 비은폐 차원으로 "언어 속에서 스스로 생기"(하이데거, 앞의 책)한다. 시를 쓰는 이들은 자신과 제 경험을 탈취하여 언어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렇다고 언어 자체가 시는 아니다. 시는 언어를 넘어서서 이미지가 이끄는 대로 미지로 나아간다. 물론 이것은 누구의 강압도 없는 자발적인 행위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시편들은 대체로 한국 현대시로 분류되는 시들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원류를 밝히듯이 우리가 잘 아는 시인들과 시를 설명하는 일을 〈들어가기〉에서 살펴본다. 김소월 〈진달래꽃〉이나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현대시인 이성복의 〈남해금산〉으로 이어지는 우리 서정시의 흐름 안에는 늘 '당신'이나 '님'이 있다고 말한다. '나'의 안에서 '님'은 늘 결핍과 부재의 흔적으로 생생하다. 그 결핍과 부재의 결과로 '나'는 삶의 보람을 거두는 일에 실패하면서 필연적으로 늘 슬픔과 허무로 주저앉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당신'은 '나'의 바깥에 있는 존재이면서 '나'의 안에 들어와 있다. '나'는 '당신'을 품고, '당신'은 '나'를 품는다. '당신'과 '나'는 연동되어 움직인다. 이처럼 시와 시어를 살핀 저자는 참여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김수영에 주목한다.
김수영은 시를 “세계의 개진”이라고 말하였다. 시가 세계를 쪼개고 그 안을 펼쳐 보여주는 것이란 뜻이다. 지금 이 시대, 길을 잃은 우리에게 시가 왜 필요한지를, 그리고 시인의 소명이 무엇인지 다시 일깨워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물질세계에서 물질로 이루어진 몸을 갖고 사물의 생리, 사물의 수량과 한도에 의지해 사는 삶을 비은폐의 차원으로 끄집어내는 펼쳐냄이다. 세계를 이루는 물성의 토대 위에 제 삶을 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세계의 물질성과 그 있음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물질세계와 상호 교섭하며 그것의 자장 안에서 존재한다. 김수영이 문제 삼은 것은 물질세계의 다양한 맥락들이다. 그가 열망한 것은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바꾸는 일이다. 김수영이 자주 '결의하는 비애'와 '변혁하는 비애'를 노래한 것은 그 때문이다. 김수영에 이은 이승훈도 저자는 소개할 만한 한국 시단을 한 단계 끌어올린 시인의 대열로 올려놓는다. 이승훈은 '언어의 무의식'을 제 시의 영역으로 개척했다. 언어는 항상 의식에 앞선다. 우리는 언어 속에서 나타나고 언어를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스물아홉 편의 시를 일일이 소개하기는 어렵다. 시 한 편과 저자의 해석을 여기에 적는다. 독자들이 시를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참고 사항이지만 독자도 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무작위 선정이라는 점을 미리 밝히고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사실 어느 시,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저자의 시론과 시 이해 방법에는 차이가 없을 터이니 독자가 자격지심에 괜한 우려를 하고 있겠지만. 시인 정진규의 〈옛날 국수 가게〉란 시다.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널듯 국수만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마치 한국 모더니즘 시의 시대를 연 이상의 시 같다. 일체의 문장부호를 쓰지 않았다. 연과 연 사이를 가를 필요도 없이 짧다. 아름다움을 말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했다. 우선 저자의 지적대로 상징과 은유가 있는지 찾아본다. 햇볕, 가을날, 골목길, 국수 가게, 백합꽃, 꽃밭, 공짜 등 낯선 단어도 없다. 저자의 시 해석으로 눈길을 옮긴다. "만일 골목길이 없었다면 내 감정의 정원은 폐허나 다름없었을 테다. 우리 모두는 골목길의 돌봄 속에서 자라난 골목길의 수혜자다. "골목길은 느림과 온정과 공동체와 유년과 놀이와 아늑함과 따스함으로 구성된 일련의 의미 계열"에 속하고, "속도, 계산, 계약적 관계, 성인 세계, 사회적 생활, 황량함, 차가움으로 구성된 대립적 의미 계열"에 맞선다."(김흥중, 『사회학적 파상력』, 저자 주)고 인용을 덧대 설명한다.
서울의 많은 골목길은 도시 개발이라는 미명 속에서 덧없이 사라졌다. 골목길이 소멸한 뒤 그것은 추억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나는 오래전 골목길을 떠났고, 새로 도착한 장소는 암흑이 펼쳐지고, 모래바람이 쉬지 않고 부는 곳이었다. 분명한 것은 골목길을 떠나면서 인생의 황금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이다. (이 시를 읽는 동안 독자는) 옛날과 골목길은 시간과 공간의 공간의 통합체로 우리의 기억에서 망각의 질료로 불꽃처럼 타오른다.(p.79~81)
시인은 상상한다, 불과 거품들, 물방울과 뱀, 바다와 소금, 행성과 별자리들, 흙의 향기, 과일의 진실을. 또 단맛과 쾌락을 상상하고, 그보다 더 많은 불가능과 전생과 영원 따위를 상상한다. 시인은 온갖 식물에 이름을 붙여 호명하며, “여름에 죽은 사람을” 생각한다. 야만의 도시에 살든, 기후 위기 시대에 살든 “마음껏 타오르는 색들, 오로라, 죽은 개”가 잠긴 물속 수도원을 상상한다. 내일이라는 추상을 처음 인지한 이도 시인이었을 테다. “언덕 너머에 진짜 언덕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다. 시인은 커다란 나무와 그 나뭇가지 위에서 수천 마리의 새들이 날아오르는 상상을 펼친다.(p.243~244)
시인은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다. 움직임이 없는 것들에 움직임을 부여하고 소멸하고 굳어가는 세상에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으며, 볼품없는 것들에 노래와 향기를 심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에 수록된 김승희, 이기성, 이병일, 유진목, 이원, 유계영, 오은 등 스물아홉 분의 시편에서도 우리는 시인들의 상상과 고뇌, 그리고 창조자와 같은 놀라운 헌신과 능력을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가벼운 평론이라 해도 좋고, 시담, 시 에세이라 불러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이 다양한 목소리에서 우리 독자들이 다시 한번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열린 세계’로 용기 있게 나아가기를 저자는 기대한다.
저자 : 장석주(張錫周)
날마다 읽고 쓰는 사람. 시인, 에세이스트, 인문학 저술가. 그밖에 출판 편집자, 대학 강사, 방송 진행자, 강연 활동으로 밥벌이를 했다. 현재 아내와 반려묘 두 마리와 함께 파주에서 살고 있다. 1955년 1월 8일(음력),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스무 살이던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하고, 스물 넷이 되던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시와 문학평론이 입상하면서 등단 절차를 마친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직접 경영하는 동안 15년간을 출판 편집발행인으로 일한다.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학교, 명지전문대에서 강의를 하고, 국악방송에서 3년여 동안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진행자로도 활동한다. 2000년 여름에 서른여섯 해 동안의 서울생활을 접고 경기도 안성의 한적한 시골에 집을 짓고 전업작가의 삶을 꾸리고 있다. 한 잡지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소장한 책만 2만 3,000여 권에 달하는 독서광 장석주는 대한민국 독서광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쓴다고 해서 안으로만 침잠하는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니다. 스무 살에 시인으로 등단한 후 15년을 출판기획자로 살았지만 더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되자 업을 접고 문학비평가와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왔다. 급변하는 세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보다 잘 소통하고 교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성에 있는 호숫가 옆 ‘수졸재’에 2만 권의 책을 모셔두고 닷새는 서울에 기거하며 방송 진행과 원고 집필에 몰두하고, 주말이면 안식을 취하는 그는 다양성의 시대에 만개하기 시작한 ‘마이너리티’들의 롤모델이다.”
저서로는 『몽해항로』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일요일과 나쁜 날씨』, 『행복은 누추하고 불행은 찬란하다』,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이상과 모던뽀이들』,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일요일의 인문학』,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고독의 권유』, 『철학자의 사물들』,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시간의 호젓한 만에서』,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공저) 등이 있다. 애지문학상, 질마재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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