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 한마디
[낯설고 아름다운 세계로 나아가는 힘] 김초엽 작가가 인간의 시점으로만 살아온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보인다. ‘범람체‘라는 균으로 인해 지하로 쫓겨난 인류. 주인공 태린은 지상을 탐구하는 파견자 시험을 보면서, 뜻밖의 운명에 처한다. 어디에도 없으나, 어딘가에는 있을 것만 같은 세계를 놀라운 상상력으로 그려냈다. - 소설/시 PD 김유리
기대만 가득한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다. 내가 마주할 미래가 아닐지라도 마냥 유토피아를 꿈꿀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 지구가 온전히 인간을 위한 공간이 될 거라는 예측도 할 수 없다. 우주 그 어딘가에 미지의 생명체가 존재하고 그것이 언제든 지구에 정착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김초엽이 그려낸 『파견자들』의 모습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지상이 아닌 지하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떤 조건을 통과한 후 지상에 나갈 자격이 주어지는 파견자들로 구분 짓고 지하 세계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미래의 모습은 얼핏 보면 SF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에게만 공개가 허락된 정보들, 현재의 환경과 체제에 수긍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불확실한 어떤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사람들. 어찌 보면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나는 어디에 속한 존재이며 무엇을 원하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와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
소설로 돌아가 보면 주인공 '태린'은 어려서부터 파견자가 되고자 했다. 자신의 스승 '이제프'처럼 파견자가 되어 그와 함께 지상으로 나가 탐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걸 참고 견뎠다. 기억 보조 장치 뉴로브릭의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 해야만 했다. 뉴로브릭과의 연결이 끊긴 게 한 번씩 말썽을 부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환청처럼 들리는 이상하 목소리가 태린은 익숙하고 친근해 '쏠'이란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모든 과제를 통과하고 파견자가 된 태린의 첫 임무는 맡고 지상으로 나갔다.
범람체에 둘러싸인 인간은 광증을 유발한다고 보호소에서 치료를 받는 줄로 알았던 태린의 눈앞에 펼쳐진 지상의 모습은 숨 막힐 듯한 아름다운 그 자체였다. 놀랍게도 범람체의 일부가 된 늪인들은 스스로 그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범람체의 존재를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공존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기이한 모습, 그러니까 인간이라 규정지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지하의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언어로 소통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진동을 통해 지하로 보내고 있었다. 여기, 자신들이 살고 있다고 말이다.
도시는 기이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색채로 일렁이는 세계. 곳곳에 강렬한 원색의 물감들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빠짐없이 찬란했다. 도시를 점령한 범람체들이 각가 경쟁이라도 하듯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색이란 색은 모두 사용한 거대한 유화 작품으로 지상을 덮은 것처럼, 마치 색이 그 자체로 살아 있어 도시를 통째로 움켜쥔 것처럼 범람체는 존재감을 발했다. (114쪽)
태린은 그 존재가 낯설지 않았다. 이상했다. 늪을 발견하고 늪인을 만났을 때도 혐오나 거부가 아니라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쏠이 그랬던 것처럼. 태린은 그제야 이제프가 파견자란 매료와 증오를 동시에 품고 나가는 직업이라는 말을 이해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보낸 파견자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돌아오지 않은 파견자들이 있는지, 왜 그들에 대한 정보를 감추고 찾으려 하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형체와 목소리가 다른 그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지상은 오직 인간의 공간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지상의 범람체는 제거의 대상이었다. 이제프가 태린에게 보여주고 싶은 지상의 아름다움도 그러했다. 범람체는 인간과 함께 살 수 없는 존재, 지구에서 사라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태린의 생각은 달랐다. 뉴로브릭의 오류라 여겼던 목소리의 존재, 쏠과 함께 살아가는 게 나쁘지 않았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자아가 깃들 수는 없어. 네가 혹시나 그것에게 마음이 있다고 믿을까 봐. 난 그게 걱정이야.” (109쪽)라며 이제프는 걱정했지만 태린은 뇌 속을 침입한 범람체인 쏠과 지낼 수 있었다.
인간이기를 고집하지 않고 범람체와 결합한 삶이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것이 미래의 삶이라는 걸 태린은 알게 된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삶이지만 여전히 삶이었고 지상에 그런 선택을 한 삶이 있다는 건 숨기고 감춰야 할 비밀이 아니라 모두가 알아야 할 일이었다. 우주로부터 불시착한 먼지로 인해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지구, 그리하여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다른 목소리로 살아가는 존재가 있다는 걸 말이다.
더 이상 지상과 지하의 구분할 이유가 없었다. 태린이 쏠의 자아를 인식하고 그와 한 몸에서 지낼 수 있는 것처럼 범람체와 인간은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했다. 누군가 그것을 거부하고 누군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무조건 거부하거나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선택과 존중의 문제니까. 지금까지 김초엽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그것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유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무엇과도 공존하며 동등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인공지능, 돌연변이, 사이보그, 동물, 식물, 범람체(균류)이든 말이다. 대로는 흡수되거나 때로는 일부가 되어 다른 형태가 되었을 뿐 삶은 이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김초엽의 단편에서 만난 문장처럼.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방금 떠나온 세계』 수록, 「숨그림자」)
신비롭고 아름다운 소설을 읽으면서 범람체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존재, 나와 다른 존재와 살아가는 모습은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깨닫는다.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삶이라고 해서 그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되고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내 삶이 역시 다른 형태의 삶이라는걸.
*일부 스포일러 주의
왜 소설을 읽는가?
많은 사람들의 제 1 목적은 '즐거움'일 것이다.
독서가 주는 즐거움은 철학이나 역사, 과학 서적 등에도 있으나, 유독 소설이 가장 많이 읽히는 이유는 인물과 서사를 통해 비교적 쉽게, 때로는 가장 크게 '즐거움'을 얻기 때문 아닐까. 소설은 지식이 주는 즐거움, 사유가 주는 즐거움 이전의 원초적인 즐거움, 혹은 '예술적 체험'을 포함한 즐거움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문학이나 순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예민한 감성과 풍부한 독서 경험이 없다면 이를 충분히 누리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즐거움'이란 목적에 가장 맞는 소설은 장르 소설이 아닐까. 성별/세대/문화에 따라 '판타지', '로맨스', '추리', '무협' 등 다양한 장르/테마 소설들이 인기를 얻기도 하고 사그러들기도 하고 나름의 변모도 해왔지만, 이러한 장르들은 '캐릭터와 이야기를 작품에서 어떻게 풀 것인가', '독자의 1차적 욕구, 즐거움에 대한 갈망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를 과업으로 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SF소설은 조금 다르단 생각이 든다. 분명 SF소설도 독자들이 '즐거움'의 목적을 달성토록 해주는 특징을 갖고 있지만, 이는 '소설'이란 범주에 속하여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속성이다. 모든 소설의 공통 분모인 셈이다. 따라서 SF소설에도 '인물'과 '이야기'가 있고, 소설의 그 자체이기도 하며 즐거움을 주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목적의 달성을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도구인가?
작가가 작품 내에서 과학지식을 동원하여 '무엇'에 대해 '어떠한 입장'으로 풀어내는 지를 보여주는 도구이자 미래를 예언하는 도구이다. 현대의 SF 소설은 아래와 같은 세 층위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1. 새로운 철학적 사유 (예언, 무엇+입장)
2. 새로운 과학 지식 (철학 기반, 무엇)
3. 기존의 철학적 사유 (과학 기반, 입장)
위 층위가 피라미드 구조처럼 이뤄지면서도 순환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SF 소설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과거의 상상이 이뤄진 현실 속에서, 한번 더 '상상의 도약'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며 사유한다. 이는 단순히 미래에 어떤 기술이 등장할지, 얼마나 신기할지 설레며 기대하는 유아적 상상이 아니다. 미래의 '인간'과 '생물'이, '지구'와 '우주'가, 이 세계가 어떻게 변모할지를 예측하고 예언한다. 동시에 이를 현실로 끌고와 '현재'에 갇힌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시도를 하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김초엽의 <파견자들>은 어떠한가? 분명 흥미로운 지점들을 담고 있다. 현대의 신경과학과 생물학이 밝혀낸 많은 이론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며 그려낸다. '범람체'의 정체나 '자아', '생명'에 대한 사유는 과학적 지식들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태린과 범람체, 선오, 이제프와 지하도시 사람들, 마일라 등 각 인물들을 통해 기존의 사유와 새로운 사유 그리고 그 사유들 간의 충돌과 갈등을 보여준다. 미래 사회나 AI에 대해 생명 혹은 자아에 대해, 더 깊이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사유의 갈래들이다. 이런 면에서는 SF 소설의 기본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하고 싶다.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 '자아'에 대해 짧게나마 이야기하고 싶다.
지구를 두고 이뤄지는 범람체와 인류의 대립은 결국 '자아'에 대한 관점에서 비롯된다.
범람체들에게 인류는 지구 표면을 향유할 자유를 빼앗긴 것인가?
범람체에겐 인류에게서 자유를 박탈할 의도도 없었다.
분명 명목적 자유를 빼앗긴 것은 아니지만, 범람체와 접촉 시 사망에 이르기에 실질적으로 자유를 빼앗긴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는 인류의 입장이다.
범람체의 입장에선 범람체와 닿고, 자아를 읽고 사망하게 되는 것은 개체로서의 '자아의 소멸' 이다. '생명'의 죽음이 아니다. 범람체와 연결되어 '우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사실을 모르며, 이러한 설명을 들은 태린 또한 쉬이 납득하지 못한다.
이에 대한 범람체의 말을 살펴보자.
<?자아란 착각이야. 주관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착각. 너희는 단 한 번의 개체 중심적 삶만을 경험해 보아서 그게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우리를 봐. 우리는 개체가 아니야.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하고 세상을 감각하고 의식을 느껴. 의식이 단 하나의 구분된 개체에 깃들 이유는 없어. 우리랑 결합한 상태에서도 너희는 여전히 의식을 지닐 수 있어.>
p.241
자아란 착각이란다. 우린 과연 이를 납득할 수 있을까? 납득해야만 한다. 과학을 신뢰한다면. 인간의 자아는 존재에 후행한다. 존재가 있고나서, 발생한다. 자아를 지닐 가능성을 품고 태어나서, 자아를 획득한다.
범람체는 인간이 저런 착각을 하는 이유를 '개체 중심적 삶'만을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에서 범람체가 인간을 개체로서 인식하고 말한 것인지, 인간 스스로가 자신들을 각 개체로서 인식한다는 것인지 파악하긴 어려우나, 인간은 '개체(individual)'가 아니다. 유기체로서, 분할된 수십조의 세포들의 '연결'로 이뤄진 존재다. 단 하나로 이루어진 단일 개체가 아니다. 기억 또한 '뇌'와 자아에만 놓이지 않는다. 기억상실증에 걸려도 자전거 타는 법은 안 까먹듯, 기억은 몸에도 새겨진다. 이는 뇌와 자아는 나(우리)의 '일부'이지 그 자체가 아니란 뜻이기도 하다.
<어떤 기억은 몸에 새겨질거야.> p.12
자아도 착각이고, 착각하는 이유도 착각이라면 자아는 그야말로 허상인가? 그렇다. 생물의 자아는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발달하였다.(획득되고 보니 생존에 유리하여 퍼졌다). '자기보존' 욕구의 발현인 셈이다. 자아가 있어야만, 개체처럼 보이나 개체가 아닌 인간의 신체를 적절히 통제하여 각 개체의 연결로서의 존재와 그 안의 각 개체 모두 자기 보존의 가능성을 높인다. 이는 진화론을 비롯한 생물학과 분자 생물학, 다양한 뇌과학/심리학 실험으로 밝혀낸 사실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자아는 생명 자체가 아니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자기 보존을 위한) 도구이다.
2. 인간은 단일한 개체가 아니다. 수십조 (혹은 그 이상)의 개체들 간의 연결로 존재하는 유기체다.
3. 자아를 잃으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우며, 마찬 가지로 수십조의 세포들(개체들) 간의 연결을 끊으면 생명을 유지하기(유기체로서 유지되기) 어렵다.
위 사실들을 연결하면 아래와 같다.
4. 자기 보존이란 선결 과제가 달성된다면, 인간의 관념에 따른 자아 존재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하는 것은 아니며, 얼핏 단일 개체로 보이는 형태를 유지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범람체는 지구에 뿌리를 내리고 지배해나가는 동안 인간을 이해하고 배우며, 4번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기존 관념에만 들어맞는 '자아'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기존의 형태를 유지해야만 할까?
이를 받아들이냐 못 받아들이냐는 기분의 문제다.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혐오감 등으로 인한 기분의 문제. 생존에 있어 순간의 판단은 기분과 감정에 따를 수 있어도, 종의 절멸에 관한 판단은 이성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범람체와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범람체는 말이 통한다. 심지어 범람체와의 협의를 통해서 기존 자아와 비슷한 정도의 '자기 의식' 또한 지닐 수 있다.
태린이 쏠과의 경험, 일체화가 없었다하더라도 범람체와 대화 후, 충분한 사유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며 이성적 판단을 내린다면, 분명 늦더라도 그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인류는 결국 '자아'를 잃고, 호모 사피엔스의 외형적 특징을 잃게 되겠지만 이는 결코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며, 지구 표면을 향유 할 '자유'를 잃은 것도 아니다.
현대인들에게 아주 당연하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아'의 개념과 '나'와 '뇌'를 동일시하는 태도 모두 과학으로 반박되고 있지만, 아직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들은 아니며, 더욱이 알려진다 하더라도 감정적으로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 김초엽은 <파견자들>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을 상정하여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과학적 지식들을 기반으로 자아, 의식, 존재, 생명, 자유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유도한다. 그렇기에 <파견자들>은 현대 SF 소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잘 제시하는 혹은 그 길 위에 위치해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점을 4점 부여한 것은 아쉬운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내용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탓에 모두 애매해진 느낌이다. '삶과 죽음', '자아', '자유', '기억', '에로스', '혐오', '디아스포라', '생물학' '뇌과학' 등 너무 다양하다. 장편소설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양한 면모들을 살피며 그리는 것은 필요하고 당연할 수도 있다. 다만 그러기엔 작품의 분량이 다소 짧다. 혹은 불필요한 사건과 묘사가 길다. 그렇다고 심층적인 심리묘사가 이뤄진다고 보기도 어렵다.
일반적인 '소설'의 관점에서 논하자면, 초반부는 다소 루즈한 느낌이 있고, 후반부엔 캐릭터의 연속성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고, 이야기는 너무 급박하게 이뤄진 느낌이다. 분량의 분배가 적절히 이뤄지지 않은 느낌이다.
'파견자들이 시리즈물로 최소 두 권, 혹은 세 권 분량 정도로 나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혹은 '각 편마다 하나의 핵심 주제와 사유를 예리하게 짚어내는 단편 소설들로 구성된 연작 소설이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또한 시종일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작품의 묘사가 군데군데 '만화적' 혹은 '영화적'이란 느낌을 받았단 점이다. 묘사들이 섬세하여 '그림처럼' 그려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느낀 바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화나 영화를 본 뒤 이를 잠시 멈추고 그 자리에서 재묘사하는 듯한 글이었다. 씬과 씬 간의 연결 또한 만화나 영화 때론 '게임'을 떠올리게 했다. 김초엽 작가 특유의 작법/문체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묘사와 연결은 나름 흥미롭고 재밌지만, 분명 내 취향은 아니다. 그렇지만 <파견자들>은 여전히 SF소설로서 좋은 작품이며, 주변에도 권해보고 싶은 소설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퍼블리온 출판사에서 출판된 김초엽 작가님께서 쓰신 파견자들을 읽고 나서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전작을 재미있게 읽었던 작가님이셔서 이번 신작도 구매했습니다. 역시 김초엽 작가님 작 답게 세계관과 인물간의 관계성이 너무 좋았습니다. 읽고 나서 인간과 지구, 공존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라 좋았습니다.
인간에게 광증을 퍼뜨리는 아포(芽胞)로 가득찬 지상 세계. 지상은 인간에게 범람체가 끊임없이 창궐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범람체에게 지상을 빼앗긴 채 지하로 숨어들었다. 햇볕이 들지 않아 더이상 식물을 키울 수 없고, 계절을 느끼며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는 지하로. 지상은 범람화된 온갖 동물들의 사체와 그것들에 얽혀 자란 덩굴, 그리고 사체를 양분삼아 인간의 키만큼 자라난 거대한 형형색색의 범람 산호로 가득했다. 이 세계에서 파견자는 '매료와 증오를 동시에 품고 나아가는 직업'이다. 잃어버린 지상을 되찾기 위해 그곳에 파견된 사람들. 인간의 자아를 파괴하는 범람체들이 정복한 지상을 되찾기 위한 임무. 태린은 누구보다 파견자를 꿈꾸고 지상을 갈망했다. 파견자로 지상에 다녀 온 이제프는 노을의 황홀한 빛깔과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들의 반짝임을 태린에게 알려주었다. 태린은 언젠가 자신도 파견자가 되어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탐사하기를 꿈꿨다.
이제프는 태린에게 지상을 주고 싶었다. 노을과 별들을 주고 싶었다. 언젠가 태린이 파견자가 될 수 있다면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보게 되겠지만, 그것은 갈망을 증폭하는 일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지상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지상을 돌려주기 위해서는 지상을 되찾아와야 했다. 별과 노을과 바다가 있는 행성은 다시 인간의 것이 되어야 했다. _p.313
김초엽이 상상하는 미래에서 가장 놀라운 지점은, 독자인 나 자신이 얼마나 이 세상을 인간 중심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최근 사람들이 지구의 환경 문제를 거론하며 '지구는 망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류는 망할 수 있지만, 지구는 새로운 생명체를 길러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인류는 지구를 자신들만이 거주할 수 있는 땅으로 여기고 소유하고자 했다. 언젠가 지구가 멸망한다면 인류의 전쟁이나, 핵폭탄 또는 소행성의 충돌 같은 사건으로 소멸될 거라고 단순하게 상상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상상해온 형태의 지성 생명체가 아닌 범람체가 지구를 차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 외계인은 우리가 기대한 모습이 아닐지 모른다. 예를 들면, 음악이 외계 생명체라면, 그래서 우리 주변을 파고들어 함께 공존하고 있는거라면?
지상 어딘가에 범람체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지상에서도 죽지 않는다고. 썩어가는 것들을 먹을 수 있으며, 그들 자체가 부패하는 것들의 일부라고. 그들 각각은 지상에서 독립적 의식을 가진 개체로, 그러나 때로는 전체의 일부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자아라는 개념은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지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약간은 남아 있다고 했다. 여전히 삶이라는 이야기였다. _p.36
『파견자들』을 읽으면서 '인간'의 정의에 대해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사람도 아니다'라고 혀를 찰 때는 그 사람의 성품을 두고 하는 말인데, 어제까지만해도 함께 지낸 평범한 사람이 외형이 변이되고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생명체로 변해버린다면 나는 상대를 인간으로 여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범주는 어디까지로 정의내릴 수 있을까. 동그란 머리와 긴 팔다리를 가진 외형을 지니고 언어를 사용하고 고유의 자아를 지녀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아란 착각이야. 주관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착각. 너희는 단 한 번의 개체 중심적 삶만을 경험해 보아서 그게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의식이 단 하나의 구분된 개체에 깃들 이유는 없어. 우리랑 결합한 상태에도 너희는 여전히 의식을 지닐 수 있어. _p.241
진화론의 관점에서 인류는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을 포함하는 종에서 진화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인류는 변화에 적응하며 지금과 다른 변이가 얼마든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김초엽이 상상한 늪인은 범람화되어 처리해야할 인류의 적이 아닌 신인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파견자들』를 읽으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상상과 질문을 하며 인류의 미래를 그렸다. 정의내릴 수 없는 상상의 범주이지만, 그렇기에 김초엽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초 중반까지는 좋았다.
뭔가 세계관이 넓어지는 듯 하며, 스페터클 해지는 기분..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감동받으며 한페이지 한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왠지 중후반부터는 내가 생각 해 왔던 그림들과 조금씩 비껴나가기 시작했다.
범람체들과의 공존을 외칠 수 있지만.
갑자기 태린이 자신의 모든것이었던 사람을 배신(?) 하고 행한 행동들이 약간은 억지 아닌 억지스러운 것 같았다.
물론 태린의 역할이 중요했기에, 어떤 부분이 필요할 수 있겠지만.
갑자기...??
초반에 등장하는 선오와 함께 좀 더 큰 세계를 헤쳐나갈 거라 생각했기에.
선오의 역할이 미미하게 느껴지고, 서브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빠져버린것이 서운했다.
초반에 너무나도 서브주연의 느낌이 뿜뿜났었기에..
가면 갈수록 그의 소설속에 보여지는 역할이 줄어듦이 마음아팠다.
무엇보다 태린에게 상냥했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이제프였는데.
그가 아끼는 태린에게 바깥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펼친 횡포 아닌 횡포가 씁쓸했다.
그래도 두꺼운 책 한권을 순삭하게 만드는 필력은 역시 대단한 듯.
아마도 내가 지금 그리려는 책 속의 세상과 작가의 세상이 다름에 서운 할 수 있지만.
작가가 그려내고 싶은 이야기를 이해하게 된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에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제는 어느덧 필독서의 굴레에서 벗어날 법도 한데 아직까지 수필이나 에세이에 손이 쉽게 가는 것은 너무 현실적으로 변해버린 나를 방증하는 기분이 든다. 얼마 전 '서탐대실 - 똑같은 책, 다른 그림?'편을 보고 같은 시각적인 정보이지만, 영상 미디어에 의존하기보다는 텍스트에 기반한 상상력을 더욱 자극해야 함을 절감했다. 그리고 현실의 세계를 넘어, 존재 그 이상의 영역까지 확장하고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장르가 소설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 소개된 김초엽 작가의 장편소설 [파견자들]은 감히 가정해보지 못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인류는 소통을 위해 말과 몸짓 혹은 홀로그램, 뉴로브릭과 같은 장치를 활용한다. 그리고 지구는 범람체들의 행성이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우주에 제2, 제3의 행성을 찾아 나선다면 과연 이것만으로 모든 소통이 가능할까? 행성 생태계에서 적응하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 인류는 또 다른 진화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성공적인 진화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게 될 감각의 혼란은 중요한 유흔이며 자아 해체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리라. 마침 동물들의 커뮤니케이션을 소개한 프로그램을 볼 기회가 있었다. 꿀벌은 날개 근육을 통해 개별단어를 형성하고 진동으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한다. 돌고래는 가슴지느러미의 촉각을 사용하여 상대와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날여우원숭이는 포식자가 감지할 수 없는 초음파를 이용하여 소통을 한다. 이러한 동물들의 소통방식을 참고해 볼 때 인류는 지금보다 더욱 세밀히 여러 감각에 의지해 복합적으로 반응하고 이를 커뮤니케이션에 활용하도록 진화할 수 있다. 이 감각적인 세계는 '전체'이자 '부분'이고 '충돌'이며 '통합'이라고 표현이 가능하겠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는 무엇일까? 나는 현재 하나의 자아를 가진 사람. 그런데 나의 정체성에 관해 수만 개의 관점과 수만 개의 가닥을 설정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내 몸은 수많은 분자와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들 역시 감각의 활성화를 통해 나의 의지와 행동결정에 지분을 갖고 있다는 가정을 해보자. 마치 '최고다! 호기심딱지'에서 알려주는 피삼총사, 혀의 요정, 표피장군 등 내 몸 하나하나의 구성요소가 각기 목소리를 내며 최선의 결정에 도달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의 자아는 주관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착각일 뿐이고, 개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각하고 의식을 느끼는 전체이자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내 '안에 있는 무언가'는 무의식에 묻혀있는 연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태린은 흡사 (바람계곡의)'나우시카'를 연상시킨다. 균사, 탐욕스러운 인류, 그리고 오무에 맞서 인간을 대변하고 결국엔 그들과의 공생의 과정을 겪게 되는 과정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자신의 성장과 더불어 자기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태린만의 특징은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더욱 중요하게 와닿았다. 여러 직함으로 구분되는 나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그리고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 앞에서 진정한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진정한 용기'란 신념을 위해서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태린 안의 '또 다른 의식체'가 본능과 감각으로 그를 돕고 있었지만, 결국 그 절박한 용기가 새로운 시대를 인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태린이 자신의 운명을 마주할 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불행할 때도 있다. 하지만 태어난 이상 살아가야 한다. 이 삶도 마찬가지다. 난 이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가야 해"라고 소회한 스벤과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용기를 얻게 된다.
"모든 상상 가능한 미래에서 (오로지) 당신이 바라는 것은 나와 함께 지상으로 가는 것뿐"이라는 이제프의 마음을 태린은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이제 지구본과 은목걸이는 서로가 돌아와야 할 이유이다. 그들의 유산이 범람체로 뒤덮여 거듭된 변화를 거쳐 이 행성 마지막까지 남아 있음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슬퍼하는 누군가의 마음에 위안을 주고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비단 인류만의 삶의 원리가 아니라 모든 자연의 법칙이리라. 그래서 지상의 노을과 별들, 하늘 그리고 바다가 있는 풍경은 여전히 낯설고 아름답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온전히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껏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나 뮤지컬의 원작은 제쳐두고, 별다른 궁금증 없이 2차 창작물에만 큰 관심을 갖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앞으로 원작 소설에서 더 풍부한 상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고, 이 책이 그 계기가 되었기에 더욱 뜻깊게 생각한다. 나는 소설 [파견자들]을 통하여 작가가 묘사한 각가지 '범람 생태계'를 마음껏 상상해 보았고, 평소 무심결에 받아들였던 단어의 개념과 그에 따른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이 정도 분량의 소설에 소요될 시간에 비해 생각보다 빨리 완독을 했는데, 아마도 몰입도가 상당했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문득 오늘 저녁 퇴근길의 쾌청한 하늘과 밝은 달 그리고 무미건조한 바람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집에서 나를 반겨줄 가족을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한다.
김초엽 작가의 파견자들은 sf 세계관 속에서, sf세계관의 여러 흥미롭고 매력적일 것 같고 기대되는 많은 소재와 설정으로, 예측될 법한 내용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으면서도 방대하고 극적인 스케일의 이야기를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풀어내고 있는 책입니다. 특히 초반에 주인공 태린의 눈으로 모든 사건이 서술되고 묘사될 때, 태린은 그때까지 제한된 정보만 들었으면서 그것이 곧 모든 정보이자 진실이라고 믿고, 그런 내용과 다른 현상이 일어나도 헛것인 게 태린 입장에서 유리하다면 그저 헛것을 본 것쯤으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면모까지 비칠 정도인데, 그런 제한된 시점에서 태린이 해석한 내용과 나중에 진실이 밝혀질 때의 간극이 인상적인 여운을 남기는 듯합니다. 특히 소설 후반부에서, 태린이 믿었던 내용과 확신했던 내용과 뭔가 아주 조금씩 어긋나게 묘사되던 부분이 모두 숨겨졌던 진실에 대한 복선 내지 실마리처럼 그 의미가 드러나면서 맞아떨어지고, 진짜 진실 및 그에 대한 최종 전개로 이어지는 구성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얼마 전에 읽었다. 2019년에 출판된 책이니 최신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한국 SF로서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큰 인기와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너무 뒤늦은 독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이야기들은 세월이 얼마만큼 흐르던 간에 그 가치가 흐려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의 최신 장편소설인 『파견자들』은 출간 후 바로 읽었으니 빠른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읽은 전작이 흥미롭고 여러 생각할 지점들을 많이 안겨 주었기에,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서점 사이트에서 발견하고는 제법 빨리 구매하여 읽었다.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많이 궁금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여러 단편들을 묶은 모음집이었던 데 반해, 『파견자들』은 하나의 긴 이야기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머릿속의 '범람체'를 경험하듯이 작가의 전작들을 비롯한 다른 작품들을 참고사항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어느 부분들, 어느 요소들을 읽어나갈 때마다 작가의 전작이 좀더 넓은 하나의 이야기로 확대되어 이어졌음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작품들이 떠오를 때마다 마치 『파견자들』 속 '범람체'가 이야기를 걸어오듯 내 머릿속에 참고할 수 있는 다른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파견자들'이라는 제목과 이야기의 구성부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포문을 열었던 첫 이야기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이하 「순례자들」)를 떠올리게 했다. 제목의 유사성도 있지만 지구의 지상과 격리된 어떠한 장소에 거주하는 인간 집단과 지구(지상)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본성, 금기되고 격리된 장소로서의 지구(지상)이지만 그곳을 순례하거나 파견을 나갔다가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는 것을 택하는 사람들 같은 설정은 「순례자들」과 유사했다. 전작에서는 우주 행성에서 지구로의 여정이었지만, 이번에는 지하 세계에서 오염된 지상으로의 여정이라는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주인공 정태린의 머릿속에서 말을 거는 '범람체', 태린이 '쏠'이라고 이름 붙인 범람체의 첫 등장에서는 작가의 단편 「공생 가설」이 연상되었다. 그 이야기 역시 오래 전 폭발하여 사라진 머나먼 행성에서 온 외계의 존재들이 인간의 내부, 머릿속에 깊숙이 잠들어 함께 공생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이번 '범람체'의 존재 역시 그 이야기의 설정이 확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편이었을 때부터 이 주제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추후에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외계의 존재가 사실 오래 전부터 우리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는 가설이 예전부터 종종 언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들을 접하다보니 지금 나의 생각, 나의 자아 역시 진정한 '나'인지 다시금 의심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보다 깊이 사고할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의 전작이 아닌 다른 작가의 작품이 연상되었는데, 미국 SF인 제프 밴더미어 작가의 『서던 리치』 시리즈였다. 이 작품의 설정 역시 외계 생명체에 오염된 지구의 일부 지역을 탐사하는 내용인데, 『파견자들』 역시 유사한 설정이라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었다. 사실, SF에서 외계와의 조우는 자주 접하는 소재이고, 환경오염, 기후위기의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디스토피아와 SF가 결합된 많은 이야기들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에 지구 환경의 외계적 변화는 이제 그렇게 드문 소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해당 소재들을 현재 시대의 심각한 문제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김초엽 작가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그려내는 디스토피아 SF의 세계가 현실주의 소설보다 더 가슴 깊이 울리기도 한다. 특히나 여러 문제들을 복잡다단하게 얽어내는 장르소설의 특성상 생각할 거리가 더 많기도 하다.
환경과 얽혀 인간은 하나의 독립체가 아니라는 생각은 전보다 더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와 공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많은 거부감이 있다. 가깝게는 AI의 문제만 하더라도 AI의 지능과 그들의 생성물에 과연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있다. 인간은 도구적 존재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물체를 이용하고 물체를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는, 어떻게 보면 물체와 결합된 존재이다. 그래서 '사이보그'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기계 문명 속에서 기계와 결합되지 않은 인간이 없는 것처럼 인간은 독립된 고유체만으로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은 수많은 원자로 구성된 존재라는 점에서 하나하나의 원자 단위로 내려갔을 때 그들의 집합체이기도 한 인간은 고유의 독립된 단일체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신적인 측면, 즉 '자아'의 문제에 들어섰을 때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파견자들』에서는 신체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공생하는 '인간+비인간'의 존재들이 등장한다. 기계와의 결합은 SF에서 오랫동안 다루어졌지만, 생물학적으로 변이된 인간,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정신(자아)를 형성하는 인간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이들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나? 아니면 인간이 아니라고 배척할 것인가? 혹은 제3의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다면 원점으로 돌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떤 존재를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등등의 여러 존재론적 생각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친다.
유일한 태린의 모습이 정말 인상깊었다
남들보다 늦은 변화로 분명히 뭔가가 다른 것을 직감하고는 있었는데
스무스하게 잘 넘어가고 있길래 아 얘도 일원이 되는구나 싶었죠..
계속해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가 맴도는 걸 보고
판타지의 시작인가 했는데 독자는 그대로 어? 하는 영구 박터지는 소리와 함께
미친 서사시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살려
평소에 SF는 이해가 잘 안돼서 못보지만, 최근에 몇몇 여성작가님들의 감성이 섞인 SF는 정말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그 작가님들중 가장 대표겪인 김초엽 작가님의 신작 파견자들. 작가님의 전작은 다 재미있게 잘 봤는데 이번 작품 역시 재미있어요. 작가님 특유의 감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스토리는 더 단단해진 느낌이에요. 쉽게 잘 읽히긴 하지만 이전 작품들보단 더 꼼꼼하게 읽어야 할 요소는 있는것 같아요.
김초엽의 파견자들입니다 인간에게 광증을 일으키는 아포로 가득찬 세상 사람들은 광증에게 벗어나기 위해 지하로 떠나고 지상에 미련이 남은 인류는 파견자들을 파견 지상을 갈망하는데 태린은 스승 이제프처럼 파견자가되기를 꿈꾸지만 최종시험을 앞두고 환청이 들리는데 과연 태린역시 아포로 인한 광증에 걸린것인가 아니면 지상에 닥친 위험 낯선행성으로 변한 지구 그속에서 벌어지는 사건 그리고 진실은
퍼블리온 출판사에서 출간된 김초엽 작가님의 파견자들 리뷰입니다.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 해당 도서를 읽지 않은 분께서는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관적인 감상이기 때문에 다수 독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초엽 작가님의 소설 중에 우빛속, 지구끝의온실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번 신작은 앞선 두권보다는 살짝 어려웠지만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과학에 문외한이라 그런지
저에게 초엽작가님 작품은
도입이 조금 어렵습니다.
설명 없이 당연한 듯 튀어나오는
생소한 이름들 때문에요.
하지만 읽다 보면 자연스레
파악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쭉쭉 읽어 나갑니다.
전작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이었는데
이번엔
후반부에 가서야 의문점이 풀려요
그때까진
태린과 함께
답답한 마음으로
달려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지구가 외계 생명체에 점령당해
지하세계에 살게 된 인간들.
다시 지상을 탈환하려는 계획과
이를 위해 육성되는 파견자들
외계 물질에 오염돼
죽음으로 취급되는 발현자들
그리고 선오와 태린
이 소설은 '다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굳이 외계 생물체로 생각하지 않고
인종, 장애, 종교, 성적소수자 등
우리 사회의 다름을 대입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이야기
결국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으니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거나
적대 할 것이
아니라
연대하고
소통하며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간이므로
더이상의 스포는 생략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초엽작가님
강추~! 얼른 읽어보세요!!
증오하는 것들이 처음부터 분리될 수 없는 자신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면, 더 멀리까지 올 수 있다고....-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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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유목민
@dreamingnomad_book님께 받은
#yes24북클럽
#크레마이용권
으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