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테제베를 처음 타봤다. 어려서 순천까지 가는 11시간 완행열차를 기억하면 과학의 발전은 정말 편리하다. 700km에 가까운 거리를 4시간 조금 넘어서 데려다주는 기차를 타 본 경험이 훨씬 좋은가? 빠르다는 것을 제외하면 서로 장단점이 있다.
덜컹거리는 기차에 앉아 꼼지락거리는 손주에게 사이다랑 달걀도 까주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기차는 지루하고 엉덩이가 쑤시지만 오래 기억이 남는다. 한밤에 순천을 돌아 여수항이 보이는 모습은 지금도 이국적인 야경으로 남았다. 빠르고 편리한 테제베는 창문을 바라보다 속이 울렁거렸던 기억, 빨리 움직이는 무언가를 타봤다는 기억은 있는데 그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추억, 실력은 사용한 시간에 비례한다. 이것들이 새록새록 살아나려면 좀 더 멀리서도 보고, 좀 더 가까이에서도 보는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테제베의 추억은 어쩌면 인스턴스처럼 내게 남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사는 내게 책 제목이 맘에 들었고, 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 골목길의 세상을 사진으로 남긴 김기찬 사진과 같은 기대랄까? 조금 더 감상적이지만 또 다른 맛이 있다.
표지의 분수 속에 있는 사람들처럼 사진과 글을 보며 몇 가지 느끼는 점이 있다. 우리가 찍는 대부분은 사진은 잘 나왔냐? 초점이 잘 맞느냐가 중요하다. 우스운 에피소드로 190의 독일 고객과 160이 안 되는 우리 직원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직원이 지나가는 중국인에게 찍어달라고 했더니 우리 직원이 한가운데, 독일 고객은 목 위로는 나오지 않았다. 직원은 짜증을 내고, 나는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한참을 웃었다.
그런데 소개된 사진들을 하나씩 보면 포커스를 어디에 두는지 찾아보는 것이 숨은 그림 같다. 처음엔 책의 재질 때문인가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있었다. 파인더를 보는 작가의 관점이 대부분 초점으로 남고, 그 초점은 관점의 연장선에 놓인다. 그런데 멋진 들판의 사진은 그림처럼 다가온다. 노출 때문일까? 바람에 너울거리는 들판의 사진이 기가 막히다. 정갈한 나무 사진과 달리 나뭇잎들과 가지들이 많은 사진 속은 태양이 조명과 더불어 몽환적인 기분을 준다. 평상시 생각하던 선명함과 다르지만 색다른 기분을 많이 준다. 사진을 웹으로 검색하면 디지털화된 익숙한 상태로도 볼 수 있다.
작가는 웬만하면 어디를 기어 올라가는 습성이 있나 보다. 시선이 그렇다. 한옥 지붕에 소복이 쌓인 눈은 누구 집 지붕 위에서 찍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거의 같은 눈높이에서 다가간다. 앞통수 건 뒤통수 건, 어른이나 어린이나 그렇다. 사람은 평등하기 때문일까?
사진들도 이름이 있다. 책에는 사진의 이름보다 사진 속에 담긴 이야기가 담겨있다. 낡은 철문 보다 반쪽짜리 하얀 벽돌이 더 인상적일 때도 있고, 수영하는데 어떻게 사진을 찍었을까? 하는 의문도 있다. 깊은 파란색이라 상상되는 하늘을 크게 담아 소품처럼 한 곳을 차지한 안테나, 도시를 담는 모습 풍성해서 좋다. 유화처럼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담은 사진도 인상적이고, 눈이 가득한 썰매장에 아이가 한 귀퉁이에 있어서 재미있다.
대부분의 사진은 우리들 주변에 익숙하던 것들, 이젠 추억이 돼가며 새로운 것들에 자리를 내주는 것들에 대한 추억들이 많다. 우리도 하루를 살아가며 밥 먹을 때만 쓰는 용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바쁘다', '빨리빨리'라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실제로 바쁘거나 급하면 숨쉬기도 바빠서 이런 감탄사가 나올 리 없다. 마음에도 숨을 크게 들이켜 공간을 넒히고 주변을 자세히 바라보며 세상의 숨겨진 발견을 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발견하지 못해도 어차피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기차역 한 칸을 차지하고 제임스 딘 느낌적 느낌이나 전혀 다른 포즈의 사진은 여러 번 봐도 참 재미있다.
#김병훈 #가끔은_느린걸음 #느린걸음 #사진작가 #에세이 #독서 #khori
김병훈 저
진선북스 | 2022년 07월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 속에서 채집한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의 조각들
가끔은, 느린 걸음
한 편의 시처럼 순간을 기록해 온 한 사진가의 에세이. 『가끔은, 느린 걸음』.
먼발치에서 바라보다
숨, 그리고 사람들
여름의 온도
비, 비 그리고 비
지나온 것들을 추억하다
여행, 뒤로 걷기
슬로우 슬로우 슬로우
차례
흑백사진과 짤막한 에세이들이 어우러져 그 때 그 시절,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지나간 날의 향취를 더듬어 볼 수 있게 하는 에세이집입니다.
나무, 풍경, 비, 사람들, 일상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진에세이집을 받았어요. 느리게 걷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일상의 소중함을 한컷의 사진에 담아 그 소회를 표현해내는 것. 어쩌면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일상의 한 페이지를 가장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 아닐까요.
흑백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정취가 기억 속 저편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을 추억을 소환해냅니다.
방구차를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이제는 일상에 지친 어른의 모습까지.. 퇴근길 하루를 돌아보며 나는 오늘 뭘 했는지 곱씹는 글을 읽으며 나의 하루도 돌아보게 되고요.
아련한 추억, 그리움이 묻어나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뷰파인더 너머에 있을 사진가의 모습도 한 번 그려봅니다.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는 사진에세이. 책장을 넘겨 어디를 펼쳐도 자신만의 옛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거예요.
때로는 먼 옛날처럼 여겨지는 날들의 기록도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흑백사진의 진한 향수가 느껴집니다.
흑백 사진에 어우러지는 사색의 걸음에 동참해보시면 어떨까요?
가끔은, 느린 걸음_김병훈에세이.
#가끔은느린걸음 #김병훈 #사진가의에세이 #진선출판사 #yes24리뷰어클럽 #서평단
※yes24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DSLR로 사진을 찍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나는 매일 사진으로 기록한다. 언뜻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말이나 도구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취미로 찍던 사진은 도구가 DSLR에서 스마트폰으로 변경되며 일상이 되었다. 이번 책은 그런 내 일상의 사진에 활자의 기록이 더하기 위한 시간이었을까? 사진으로 모든 것을 전할 수 없기에 해시태그와 짤막한 글을 적어 봤으나 과연 충분했을지…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책은 총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된다. 각각의 제목과 연관되는 저자의 사진과 글들은 페이지를 채워간다. 책이 담긴 흑백사진들과 그 옆의 글을 읽으며 내 어린 시절과 과거의 일들도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많은 것이 변했고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순간들도 보인다.
사진이 직접적으로 글과 연결이 되기도 하지만 저자의 기억으로 풀어지는 글들도 많이 보인다. 저자에게 책을 쓰는 동안 사진은 그런 기억과 연결을 해주는 다리가 되어줬을 듯하다. 흑백이기에 더 담담하게 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저자에게는 그 순간의 빛깔들로 사진이 보일지도 모른다. 내가 찍은 과거의 사진들이 비슷하게 다가오듯이…
장마철 여름이 한창이지만 책을 읽는 시간은 오랜만에 시원했다. 책 속에 보이는 이제 보기 어려운 픙경들, 조금은 긴 글 사이에 저자의 젊은 날이 녹아 있었다. 이상 기후로 내가 있는 곳과 남부 지방의 여름의 온도차는 크고 환경 또한 다른 듯하다. 몇몇 사진이 기록되던 시기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 같은데 편리해졌으나 그만큼 우리가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들도 더 늘어난 것은 아닌지도 생각하게 된다.
16년 전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사진과 글의 제목으로 검색을 하며 당시를 떠올려봤으나 기억이 없다. 내겐 큰 영향이 없었나 보다. 딱 이맘때였는데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했으나 망각의 여백이 많기에 몇몇 기억이 더 또렷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진은 그때의 기억을 열어주는 문 같은 역할을 한다. 물론, 내가 찍은 사진의 경우 그렇다. 또 어린 시절 봤던 이미지와 비슷한 피사체를 볼 때에도 발을 사이에 둔 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섯 번째 파트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도 잠시 떠올리게 하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레트로 감정이 되어버린 추억의 순간들…
내가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행지는 어디였을까? 문득 사진과 글을 읽으며 나에게 물어본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 않았던 시기라 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찾았던 제주의 1박2일 카페 투어가 내겐 여행다운 마지막 여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여행을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눈을 눈답게 대하지 못한 지 20년이 지난 듯하다. 사진 속의 풍경과 눈 내리는 풍경은 보기 좋으나 현실에는 방해가 되기에… 어쩌면 내 걸음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한다는 탓을 하며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군 시절처럼 제설 작업의 부담도 없는데 2년 2개월의 군 생활 중 두 번의 긴 겨울은 내게 눈의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주고 각인시키기 충분했다.
흑백사진과 글은 일상 사진을 담는 내게 어떻게 사진을 담을지에 대한 눈을 넓혀주는 시간이었다. 또 망각하고 있던 기억을 꺼내볼 수 있게 하며 내 오만한 일반화를 깨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걷기를 좋아하지만 내 걸음은 충분히 빨랐던 것 같다. 그러기에 지나쳐 가는 것들이 많은 시간이었고, 내가 놓치고 지나간 순간들이 책에 담겨 있다. 내가 사진을 취미로 하기 이전의 사진들이기도 했으나 그만큼 주위를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걷기 바쁘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이제라도 가끔은 느린 걸음으로 놓쳤던 것들을 바라봐야 하는 시기가 아닐지 충분히 빠르게 걸어왔던 시간이었음을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다.
나처럼 사진 기록이 생활이 되어가는 이들과 사진 찍을 게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 책이라 전하며 리뷰를 줄인다.
*이 리뷰는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했습니다.
" 사진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글이 돕고 글이 부족한 부분은 사진이 돕기를 바라며 사진과 글에 담긴 제 감정과 생각이 당신에게 오롯이 전해졌으면 합니다. " - 작가의 말
포토에세이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
사진을 바라보며 '나의 감정'에 몰입하다가도 책 속의 글을 바라보며 '작가의 감정'으로 빠져들 수 있다.
작가의 경험이 담긴 사진에 나의 기억을 넣을 수 있다.
글이 빼곡하게 적힌 한 장보다 더 오랜 시간 머무를 수도 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으면 그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바깥을 상상하곤 잠시 머무를 수도 있다.
[큰바람을 보고 싶다면 너른 들판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기다리면 된다. -47.p]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작가의 주변으로 흩날리는 바람과 들판의 자연이 서로 몸을 비비며 만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또 다른 사진을 보면 뒤편에서 소독차가 달려오며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소독차 특유의 엔진 소리와 그를 뒤따르는 불규칙한 발소리가 우다다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 다시 돌아온다.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홀로 저 먼 곳까지 다녀오고 다시 책으로 돌아와도 전혀 부담 없이 다음 장을 넘길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사진이 흑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눈으로, 느낌으로 색을 떨어뜨려 그곳을 상상할 수 있었다.
글과 함께 읽으면 색을 떨어뜨리는 것에 거침이 없으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단순히 차례만 보았을 때, 책 속에서 느껴지는 계절은 여름이었는데 장을 넘기게 되면 사계절이 온전히 책 속에 담겨있다.
그러니 장마에 잠시 공감하다가도 어느덧 머릿속에서 잊고 있던 눈이 쌓인 길을 바라보게 되면 과거 나의 겨울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작가가 가진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이다 보니 겪어보지 못했던 삶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이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느껴졌다.
혹은 비슷한 경험이나 TV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들로 하여금 그 사진이 생생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크고 두꺼운 잉어 모양의 누런 설탕 덩어리 아래에서 간절하고 엄숙한 시간이 흐른다. -177.p]
과거의 향수가 느껴지는 글 속에서 그날의 그곳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사진과 함께 있으니 그 공간에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숨을 죽이며 기웃거리는 누군가가 상상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진 속의 기억들은 이미 퇴색되어 불완전하기에 더욱 애정어리다 -205.p]
사진도, 기억도 그날의 감정을 제대로 떠올릴 수는 없다. 하지만 기록한 순간부터, 비록 부족한 면이 있어도 그날의 감정이 조금이나마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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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바라보는데 능숙함이 없으니 글을 먼저 바라보았다. 다 읽고 난 뒤 사진으로 시선을 옮기면 글 속에 담긴 감정이 사진 안으로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작가와 대화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은 우리가 그에게 집중하고 관심을 두는 순간부터 빨리 뛰던 것을 멈추고 느리게 걷는다. -55.p]
[열기로 가득한 도시 안의 모든 규칙적인 행동은 서로의 반응에 새로운 반응을 낳고 그 흐름은 다른 이에게로 전달된다. -111.p]
평상시에 자연을 볼 기회가 드물어 상상하지 못할 줄 알았건만, 영화 속과 음악 속에 담겨있던 자연의 소리들이 기억 속에서 조각조각 맞물려 사진 속으로 파고들었다. 포토 에세이만의 독특한 특징을 제대로 느끼며 온전한 나 자신에 집중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시간이 디지털 개념이라면 세월은 지독히 아날로그적인 개념이다 -179.p]
fin.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때의 순간을 사진에 담아 오래도록 추억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성 들여 초점을 맞추고 여러 각도에서 찍어보고 특정 지역의 풍경을 담아보고 느리게 걸어도 보았다.
내가 잡는 구도에 담긴 사진은 나만의 이야기가 들어간다. 상대는 어렴풋이 느낌을 공유할 수는 있지만 온전한 나의 마음을 읽기 어려운 법.
나는 <가끔은, 느린 걸음>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병훈 작가가 세상 속 풍경을 담으며 남긴 메시지만으로 내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꼼꼼하게 보게 된 사진과 함께 글의 감상이 들어가니 더욱 풍부해졌다.
“그날 가 본 곳과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한 곳 또 한 곳, 한 사람 또 한 사람씩 되새기며 기억의 저장고에 쌓아 둡니다.” (중략) “사진만으로 부족한 부분을 글이 돕고 글이 부족한 부분은 사진이 돕기를 바라며 사진과 글에 담긴 제 감정과 생각이 당신에게 오롯이 전해졌으면 합니다.”(들어가며)
「식물 이름 읽고 쓰기 먼저」
학원 가방을 들고 지나가는 아이의 사진을 담은 작가는 유년시절의 모습을 떠올린다. 학원은 못 다녔지만 스스로 터득한 방법으로 학습해 나아갔던 시설을 매우 만족해한다. 아마도 느리게 흘러갔던 시간에서 식물들과 함께 감성의 싹을 틔웠을 것만 같다.
「태양, 바람, 공기, 풍성한 나무와 참새 친구들」
작가는 나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눈높이에서 볼 수 없고 고개를 들어야만 볼 수 있는 풍성한 나뭇잎들. 이번 사진은 수개월이 흐른 후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남겼다. 올해의 태양과 바람, 그리고 공기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수개월이 지나 다시 찾은 나무. 그사이 길게 자란 머리 위에서 참새 한 마리가 지저귄다. 지나가던 바람도 그의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바람과 작고 귀여운 참새 친구들과 이 계절을 함께한다.”(p.33)
「복잡한 규칙성」
복잡해 보이는 나뭇가지들. 엉켜있는 듯하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침범하지 않고 뻗어나간다. 우리가 보이는 부분만 보고 판단하지만, 사실 뿌리 또한 돌과 다른 뿌리들을 피해 물을 찾아 넓게 뻗는다. 이 날의 작가는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습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막혀있었던 일의 실마리를 풀었으리라.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사진.
듀크와 오리건은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너른 들판을 만난다. 비록 목적지는 있었지만, 작가의 글을 읽으니 아마도 큰 바람을 보고 공기의 흐름을 느끼면서 다니는 이들의 여정이 힘들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다시 한 번 그림책을 펼쳐 본다.
“큰 바람을 보고 싶다면 너른 들판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기다리면 된다. 대기의 온도와 기압이 만들어 내는 공기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어느 나라의 속담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시청 앞 분수대 아이들」
여름 이맘때쯤 아파트 광장에 바닥분수가 가동된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동네 아이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룬다. 바라보는 사람도 흐믓, 즐기는 아이들도 흐믓. 나도 어릴 적에는 물에 많이 뛰어 놀았는데 지금은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어린이의 시선을 훌쩍 넘는 한 아저씨의 등장으로 아이들은 더 즐거워한다. 그때는 좀 지나치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즐길 줄 아는, 용기 있는 어른인 것 같다.
”이미 흠뻑 젖은 소년들은 물에 취해 있었다. 개천만 보면 뛰어들던 어린 시절과 동네 친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이런저런 옛 추억에 빠져 물속으로 뛰어들까 말까 망설이는데..., 지금 이 시간과 지난 추억, 그 공백이 너무나 크다. 얇은 실로 이어 높은 것같이 아슬아슬하다.“(p.109)
신년이 되면 다이어리 기록의 유혹에 빠진다.
결국 이어질 수 없기에 시작을 안 하지만, 가끔은 소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은 욕구는 있다. 그럴 때 <가끔은, 느린 걸음>을 떠올리며 사진에 담아보면 어떨까. 감정과 함께 기록되는 순간은 먼 훗날의 선물이 되겠지.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