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 작가는 일명 중국의 선봉파라고 불리는 작가 중 한 명인데 우리가 아는 말로 바꾸면 실험적이고 거친 작품을 쓴다는 뜻이다. 그런데 <허삼관 매혈기>로 입문해서 <원청>, <인생>을 읽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그가 전위적인 작가라는 게 잘 와닿지가 않는다. 무슨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날카로운 문자를 치켜들고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달려나가는 선봉장에서 저 뒤의 지원 병과로 소속을 옮긴 모양이다. 다만 지원 병과라고 해서 하릴없이 놀고먹으면서 세금을 축내는 게으름뱅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전투 병과가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면 지원 병과는 싸울 수 있게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선봉파 작가로 유명할 때 혼자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면 <인생> 이후로 위화 작가는 자기만 싸우는 대신 모두가 함께 싸우도록 독려하는 기분이다.
<인생>을 읽으면서 들었던 두 가지 소감은 쉽고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쉽다는 건 어려운 단어나 문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잘 아는 단어를 가지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만들어서 의식의 흐름에 충돌하지 않는 구조로 배치하는 걸 말한다. 요컨대 술술 읽힌다는 말이다. 이걸 한 단어로 말하면 가독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독성은 실로 마법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읽기란 근본적으로 힘든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도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읽으려고 마음 먹은 책이 아니라 지나가는 신문 기사나 칼럼 혹은 회사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게시글 등은 읽기가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대각선으로 스르륵 내려오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글자에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가로 읽기를 하게 만드는 가독성이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가독성에 대해서라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예전에 어떤 일간지의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한 심사위원이 수상작의 가독성을 칭찬하면서 “얼마나 읽고 썼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요컨대 가독성은 노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걸 그냥 노력이라고 하면 얼핏 와닿지가 않아서 그걸 부족한 내 머리로 고르고 골라 적당한 말을 찾아보면 바로 독자가 부담해야 하는 읽기의 고통을 작가가 가져가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읽고 쓰면서 독자가 느껴야 할 읽기의 고통을 작가가 미리 가져가 버린 것이다. 실제로 위화 작가의 에세이 중에는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이라는 책도 있다.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한다는 건 한 마디로 수감 생활과 같다는 얘기일 것이고 다르게 말하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읽고 썼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책은 분명 글자로 만드는 것이고 독자로 글자를 읽는 것이지만 작가도 글자를 쓴다고 생각하지 않고 독자도 글자를 읽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글자를 창작하는 게 아니라 인물과 사건을 창작하는 것이고 독자 역시 글자를 읽는 게 아니라 인물과 사건을 읽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독성이란 글자를 선택하고 배치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과 세계에 대해 이해하는 능력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쓴다는 건 같은 맥락에서 많은 사람을 보고 상상하는 일이고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무시하거나 흘려듣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건이 생겼을 때 그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났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의 고통과 행복은 또 어떤 식으로 교차했는지를 수없이 생각했을 때 비로소 작가는 독자에게 가로 읽기가 가능한 이야기를 꺼내줄 수 있다.
그러니 결국 가독성이란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가독성의 전제 조건이다. <인생>은 쉽다 못해 허술하게 쓰인 책처럼 보일 정도인데 그것은 작가가 보고 싶은 세상 혹은 보여주고 싶은 세상으로 책을 채우는 대신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책을 채웠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이 소설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 지면을 몽땅 푸구이에게 내어주듯이. 물론 화자나 푸구이나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므로 이 책의 이야기는 곧 작가의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작가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한다. 아마 그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말했듯이 작가가 이야기를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판단한다는 것은 결론을 낸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책 속에 주제라는 것이 생겨버린다. 독자는 그 주제를 찾고 나면 그 책이 몇 페이지든 몇 권이든 간에 한 줄의 주제로 요약할 수가 있다. 그리고 주제를 찾아낸 사람은 한 명만이 아닐 것이므로 주제가 있는 책은 몇 사람이 읽든 하나의 주제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좋은 책이 비록 한 권일지라도 읽은 사람의 수만큼 불어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인생>에서 푸구이 노인은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결론, 인생에 대한 철학 같은 것도 내비친다. 그러나 그 말은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짓는 결론이 아니라 그저 이제 이 이야기가 끝났다는 신호일 뿐이다. 적어도 내게는 <인생>의 이야기가 결론이 있는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게는 이 이야기가 전화위복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살다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서 들어오는 거라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생은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고 운명 같은 초월적인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 같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숱한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욕심이나 후회도 없이 인생을 관조하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할 거라는 말처럼도 들린다. 초년에 유흥을 즐긴 사람은 노년에 고생한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구성원 중 하나가 가족을 힘들게 해도 가족 자체가 흩어지지 않으면 어떻게든 뭉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 같기도 하다. <인생>은 아마 이 모두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재미있다. 인생은 정말 그렇지 않은가. 한 사람 속에 들어있는 서로 다른 많은 이야기의 집합이 인생이다.
2024년 8월 15일부터 2024년 8월 18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 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 작가 소개/위화
1960년 중국 항저우에서 태어났다. 1983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피와 폭력, 죽음에 천착한 실험성 강한 중단편을 발표하며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위화의 소설이 유명세를 탄 후 중국 비평가들은 그의 간결한 글을 칭찬했는데 위화는 어릴 적에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해 아는 한자가 많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답했다. 1993년에 발표한 장편 「인생」은 장이모우 감독이 영화화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으로 ‘위화 현상’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대표작으로 「허삼관 매혈기」, 「첫 번째 기숙사」등이 있다.
▶ 인물 소개
푸구이 노인-몰락 지주에서 농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인물. 젊은 시절 문란한 생활을 일삼다 가문의 재산을 모두 탕진한다. 중국의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전쟁터에 끌려갔지만 살아돌아왔고 해방 후 푸구이의 전 재산을 갈취해 간 룽얼이 총살당하자 자신이 살 운명임을 느낀다. 농민으로서의 가난한 삶을 헤쳐 나가던 푸구이는 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운명은 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전-푸구이의 아내. 성안 부유한 미곡상의 딸이었으나 푸구이와 결혼한 후 마음고생을 겪는다. 푸구이 집안의 몰락으로 친정아버지를 따라 성안에 들어갔지만 둘째 유칭을 낳고 다시 푸구이에게 돌아온다. 이후 평생을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푸구이와 가족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펑샤-푸구이와 자전의 딸. 푸구이가 전쟁에 끌려간 사이 큰 병을 앓은 후 말을 못 하게 되었다. 예쁜 외모에 착한 심성을 지녔다. 얼시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는데 아이를 낳다 죽는다.
유칭- 푸구이와 자전의 외아들. 양들한테 풀을 먹이기 위해 학교와 집을 오가며 오십 리가 넘는 길을 뛰어다니다 달리기를 잘하게 되었다. 학교 교장의 출산 과정에서 수혈을 해주다 온몸의 피를 모조리 뽑힌 채 죽고 만다.
쿠건-펑샤와 얼시의 아들. 펑사가 죽고 얼시마저 사고로 목숨을 잃자 푸구이 노인과 함께 살게 된다.
▶ 소감
한 노인의 인생 여정
<인생>은 사람과 그 운명에 관한 이야기로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개인과 그 가족, 지기들이 겪어야 하는 치열한 삶을 그리고 있다. 푸구이 노인의 40여 년 세월은 시간을 압축해 놓은 듯 빠르게 지나간다. 그가 덤덤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속에는 생을 살아오면서 느꼈던 죄책감, 분노, 두려움, 절망, 좌절, 희망, 기쁨, 용서, 후회, 슬픔 등 수많은 감정이 녹아 있었다. 한편 세상 모든 이치를 통달한 것 같은 여유가 묻어났다.
집안의 몰락 이후 푸구이는 소위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의 고난은 푸구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봐도 무방하다. 임신 중인 자전을 때릴 때, 아버지가 죽었을 때, 푸구이가 유칭을 모질게 대할 때, 가난 때문에 펑샤를 남의 집에 보냈을 때 나는 여러 장면에서 푸구이를 원망했다. 이 모든 일들을 담담하게 말하는 그가 뻔뻔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 막바지에 이르면 노인의 인생이 안타까움을 넘어 경건함을 느끼게 했다.
삶과 죽음. 만약 나에게 어느 쪽을 택할거냐 묻는다면 살아가기를 택할 것이다. 이왕 산다면 더 잘 살고 싶고 후회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인생이 그저 살아간다는 것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길에 가시밭이 있어도 헤쳐나가야 하고 사나운 동물을 피해 잠시 숨더라도 어쨌든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2. 중국 여성의 삶, 희생과 인내의 아이콘 자전
자전은 좋은 여자였어. 나 같은 놈이 그처럼 어질고 지혜로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건 전생에 개 노릇을 하며 팔자를 고치게 해달라고 짖어댔기 때문이라네. 자전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참아냈어. 내가 밖에서 터무니없는 짓을 하고 다녀도 속으로 가슴을 칠 뿐,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자전은 그런 여자였어. 속으로 불만이 많아도 얼굴에는 티를 내지 않았고, 예봉을 감추고 에두르는 말로 나를 일깨웠지. 그러나 난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말을 듣지 않았어. 아버지의 신발도, 자전의 요리도 내 발목을 붙잡지는 못했다네.
“내 한평생도 이제 다 끝나가네요. 당신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니, 나도 마음이 흡족해요. 나는 당신을 위해 두 아이를 낳았어요. 당신에 대한 보답인 셈이죠. 다음 생에서도 우리 같이 살아요.”
푸구이의 눈에 비친 자전은 이토록 지혜롭고 헌신적인 사람이다. 자전은 푸구이를 떠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고단한 삶에 다시 발을 디딘다. 푸구이가 살아 돌아와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자전의 마음을 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자전은 작가 위화가 바라는 지고지순한 여성, 그의 이상향이었을까? 아니면 과거 시대가 여성에게 요구했던 희생과 인내를 갖춘 여인을 담아낸 것일까?
펑샤는 엄마를 그대로 닮았다. 자전과 펑샤의 인생이중국 여성의 보편적인 삶이었다면 세상은 여성에게 참 가혹한 것 같다. 나는 〈인생〉을 읽고 난 후 푸구이의 아내 자전과 딸 펑샤의 삶이 너무 애달파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3. 중국의 현대 역사, 변화의 물결에서 인간의 삶이란?
대지주였던 쉬씨 가문이 몰락하고 푸구이는 다섯묘의 소작농이 되었다. 해방군과 국민당이 내전을 벌이던 막바지에 전쟁터에 끌려간 푸구이는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온다. 해방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세상은 공산당의 차지가 되었다.
인민공사가 생기고 모든 토지는 국가 소유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푸구이는 손바닥만 한 자유 경작지를 받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매일 새벽 일을 배정받고 공동작업을 한다.
한편 유칭이 돌보던 양과 다른 양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놓았는데 돌보는 사람이 없어 양들은 굶기 일쑤였다. 수많은 가축들이 식량으로 사라지고 이내 먹을 것이 부족해진다.
중국 역사에 문외한인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국민당과 해방군이 싸우던 시기를 찾아보다 이 책의 배경이 1930년에서 1960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산당 집권 후 사유재산이 몰수되고 토지가 재분배되는 과정이 푸구이의 삶 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세상이 거친 파도처럼 요동칠 때도 바닷속은 한없이 고요하다. 물고기들이 물살에 몸을 맡긴채 흘러가는 것처럼 푸구이를 비롯한 사람들은 역사속에 포함되어 평범하게 살아간다.
우리는 평범한 백성들이었지. 나라 일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다네. 우리는 모두 대장의 말을 들었고, 대장은 상부의 말을 들었지. 상부에서 뭐라고 말을 하면,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고 그렇게 행동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