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수도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30개 도시에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지안[集安 혹은 輯安, 국내성], 백제의 수도인 공주, 신라의 수도인 경주, 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락(駕洛) 혹은 금관가야[김해], 발해의 수도인 닝안[寧安, 상경용천부], 후백제의 수도인 완산주(完山州) 혹은 전주(全州), 고려의 수도인 개성, 조선의 수도인 서울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가 빠진 것이 의외였고, 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라(加羅) 혹은 대가야[고령]은 포함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옛 수도들 가운데서 아무래도 시선이 가는 곳은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지안]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닝안]다. 먼저 지안[集安 혹은 輯安]은 졸본(卒本) 혹은 홀본(忽本)에 이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424년이나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지만, 당대(當代)의 사서(史書)가 전해지지 않은 탓에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지안설이 대세이며, 이 책에서도 지안을 두고 국내성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유적 때문이다. 국내성 유적과 환도성 유적 외에 구 외곽에 있는 태왕릉,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광개토대왕릉비 등 오늘날 고구려 문화유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안의 유적들은 수백 년 동안 잊혀 있다가, 20세기 초 뒤덮은 나무와 잡초, 흙 등을 제거하고 무너진 부분을 복원하고 나서야 제 모습을 드러냈다. [p. 636]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것들로서, 성은 대씨다[渤海 本 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이라는 기록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가 아닌 중국사의 일부로 본다. 그들은 발해를 ‘당(唐))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粟末靺鞨)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연호1)와 고구려라는 정체성2)을 가졌으며, <신당서>보다 앞선 <구당서>에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渤海靺鞨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는 표현 등을 감안하면 발해는 한국사의 일부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장기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즉 닝안[寧安]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서술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지안에 이어 닝안 부분을 펼쳐봤다.
오늘날 발해 상경 유적지는 보하이진[渤海鎭]에 있다. 그곳에 가면 상경유지(上京遺址) 박물관이 있어서 1930년대 이래 발굴되고 조사된 발해 유적지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진열실 첫머리부터 발해를 설명하는 문구는 “당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계가 왕실을 구성하며 고구려의 후계국가로 존립했다는 진실과 당에 형식적으로 조공했더라도 결코 속국이라 할 수 없는 독립국가 해동성국이었다는 사실, 보다 나아가 발해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깡그리 부정하는 문구인 것이다. 이는 동북공정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기 전부터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곳을 들르는 한국 연구자와 관광객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고, 발해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때마다 ‘발해사는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를 두고 두 나라의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엉뚱하게도 러시아 쪽에서 두 나라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중재한다며 발해사는 중앙아시아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와 만주의 삼림 지대는 생활환경, 문화환경이 모두 판이하건만, 그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중앙아시아의 맹주가 러시아라는 의식 때문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만주 땅 전부가 일본의 터전이라 여긴 일본의 만선사관처럼 말이다. [pp. 685~686]
거란, 즉 요(遼)나라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28년 상천용천부의 주민을 이주시켜 상경용천부가 급격히 쇠락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다가 수만 명의 백성과 함께 고려로 망명했다. 이런 가운데 발해 유민들은 점차 응집력을 잃어버렸고, 이들을 대신해서 흑수말갈의 후예, 그 가운데서도 건주 여진이 이곳을 그들의 발상지인 ‘닝구타[寧古塔]’로 기억한다.
옛 수도이지만 우리가 가기 힘든 도시로는 평양과 개성도 있다. 여기서 가장 흥미 있는 도시는 ‘붉은 워싱턴’, 평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훨씬 뛰어넘는 무지막지한 폭격으로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 뒤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평양이 건설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평양과 비슷한 도시를 꼽는다면 어디일까? 서울? 아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자 혈맹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서 평양과 가장 비슷한 도시는 미국의 워싱턴이다.
누군가 워싱턴을 “죽은 사람들을 위한 도시”라고 폄하했었다. 과언이 아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오벨리스크를 본뜬 워싱턴 기념탑을 중심으로 넓고 긴 도로가 마름모꼴을 그리고, 마름모의 꼭지점마다 국회의사당, 백악관, 링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이 있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 정치권력의 두 정점이며, 링컨과 제퍼슨 기념관은 건국의 아버지와 현대 미국의 아버지이자 노예 해방자를 모신 신전이다. 고고한 백색으로 빛나는 건물을 넓고 푸른 잔디밭과 포토맥강이 둘러싸고 있다. 전후 평양시를 재건할 때 이 워싱턴을 참고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동강이 도는 도시 공간을 일정하게 구획하고 거대 기념물들을 배치한 점에서 이만큼 짝을 이루는 도시도 없다. [pp. 553~554]
이 곳도 한국사에 등장하는 30개 도시인가요?
이 책에 소개된 ‘30개 도시’ 가운데 가장 의아했던 곳은 ‘제주’와 ‘대마도’다.
우선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이 책, 아니 이 시리즈가 숱한 세월 속에서도 그 자리에 남아 축적된 도시 속 숨은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를 풀어내고자 하는 의도라고 알고 있는데,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밀어 넣은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로 본다고 하더라도 ‘대마도’의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바로 대마도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하느냐의 문제다. 만약 대마도의 역사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한다면 독도(獨島)를 다께시마[竹島]라고 하면서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 혹은 극우적인 사고 방식의 산물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저자도 여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지, 11장 대마도 편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마도를 이 책의 일부로 넣는 일은 많이 망설여졌다. 지안이나 단둥 등은 한때는 분명 한국의 영토였지만, 대마도는 ‘확실히’ 영토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칫 이 책이 ‘낭만적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어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불확실하게’ 영토였던 적은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비롯해 한일관계사, 한국이 일본과 겪은 여러 애증의 역사에서 대마도가 중심에 있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 장을 썼다. [p. 287]
라고 서술했다. 도대체 언제 대마도가 ‘불확실하게’나마 한국의 영토였을까?
대마도가 신라 땅이었다는 말은 조선 초에도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듯하다. 바로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 당시, 대마도주에게 보낸 유시문(諭示文)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해 있던 섬이니, 본래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느니라. 다만 그 땅이 매우 좁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오가기 힘든 관계로 백성들이 살지 않았다. 이에 왜노 중에 본국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자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어 소굴을 만들어놓고, 수시로 약탈을 자행하면서 약한 백성의 처자식을 잡아가거나 백성의 살림을 분탕질하기도 하니, 그 흉악한 만행이 여러 해 이어져 오고야 말았다.
종합해서 추정해 보면, 신라가 대마도를 내륙의 고을처럼 세를 거두고 법을 집행하며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방관도 주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군사적 거점 같은 것은 있었을지 모르며, 백성이 살지 않거나 별로 없지만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런 모호한 영토권은 왜의 입장에서도 주장할 만했다. [pp. 296~297]
1246년 백제계 아비루[阿比留] 가문에서 일본계 소[宗] 가문으로 대마도의 지배자가 교체되었고, 일본에서 ‘분에이[文永]의 역(役)’이라 부르는 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원정(1274년)을 계기로 모호한 경계선에 있던 대마도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아예 일본의 한 지방으로 확정되었다.
왜란 이전까지 일본 지도나 일본 행정 체제에 대마도는 없었다. 그러나 왜란 이후로는 일본의 한 지방으로 인정된다. [p. 308]
이 책에는 조선시대 8도를 대표하는 도시 가운데 독일풍의 도시로 재건된 함경도의 함흥, 평안도의 평양, 황해도의 해주,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경주, 강원도의 강릉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사라는 요소만 고려한다면, 고려 왕건을 지지하면서 후백제 견휜(甄萱)의 배후를 노리는 비수 역할을 했으며 전라도의 또 다른 대표도시였던, 나주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제외되어 아쉬웠다.
독일 태생으로 북한에 유학해 북한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빈 대학의 뤼디거 플랑크 교수는 현대의 함흥을 “독일풍의 도시”라고 말한다. 그렇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잿더미가 된 도시의 전후 복구 과정에 동독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진 이 동양의 고도(古都)는 근대 서구의 도시처럼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도시로 재탄생했고, 동독에서 유행하던 노란색 타일을 붙인 건물이 즐비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새로 닦은 가로의 이름을 빌헬름피크대로로 붙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슬그머니 그 이름을 바꾸고, 전후의 재건도 천리마운동 등 자체 노력의 산물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pp. 592~593]
어쨌든 이렇게 28개의 도시와 2개의 섬을 둘러보면서, 단순히 무슨 왕이 어떤 일을 했느냐 혹은 **년에 무엇이 일어났느냐를 외어야 했던 한국사에서 벗어나 여행하듯이 각각의 도시들이 간직하고 있는 얘기들을 듣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면의 10% 이상을 서울이 차지하고 있고, 30개 도시라는 제한으로 한국사에서 한 몫 했던 도시 모두가 포함되지 못해 다소 아쉬운 점은 있지만 한번쯤 읽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가 직접 가기 힘든 북쪽 땅과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도시들의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면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 이 리뷰는 다산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한 권으로 독파하는 우리 도시 속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한국인도 몰랐던 도시 속에 숨겨진 새로운 역사 이야기
“도시의 역사를 알면, 반드시 그곳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한국사’라 하면 흔히 삼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처럼 시대순으로 역사적 사건이 설명되기 마련이다. 이런 역사서는 교과서 같은 이야기만 나열되어 재미를 찾아볼 수 없고, 달달 외우지 않는 이상 시대와 시대를 잇는 전체적인 역사적 흐름을 알 수 없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는 틀에 박힌 역사적 서술에서 벗어나 숱한 세월 속에서도 그 자리에 남아 축적된 도시 속 숨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람이 모여 만들어낸 문화의 결정체인 ‘도시’는 세월이 흘러 모습이 바뀌어도 자기 역사를 간직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친숙한 도시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풀어내면 ‘역사는 어렵다’는 통념이 무너지고, 익숙하지만 몰랐던 우리 도시의 이야기까지 한 번에 알 수 있다.
01 서울 : 대한민국의 모든 기억이 담긴 중심
서울특별시의 면적은 605제곱킬로미터로 대한민국 도시 가운데 38위에 그친다. 그러나 인구는 단연 1위. 한때 천만 서울이라 불렀으나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인구가 계속 줄어 지금은 970만 명 남짓이다.
서울은 본래 지금의 강동구 일대에 해당하는 한강 유역에 형성되었다가 북악산, 안산, 남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바뀌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 점점 확장하여 한강 남북에 걸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서울은 권역마다 길고 애환이 넘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가장 먼저 이 권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에 세워진 나라는
기원전 194년 위만에게 배반당한 고조선의 준왕이 한강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한이다.
이 곳이 최초의 서울이었음을 오늘날에도 보여주는 증거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과 방이동의 고분군이다. 이는 한성백제의 자취로 여겨진다.
11쪽
02 수원 : 정조의 꿈이 담긴 물의 도시
경기도 도청 소재지인 수원특례시의 면적은 121제곱킬로미터다. 대한민국 도시 중 71위로 면적으로만 보면 대도시 같지 않다. 사실 경기남부의 도시들이 대체로 이렇다. 면적은 작은데 인구는 많다. 수원시 인구는 약 120만명으로 대한민국 7위이며 울산보다 많아서 사실상 특별·광역시급이다.
고대에서 중세, 근세로 이어지며 이름이 여러 가지로 뒤바뀐 도시들이 많은데
수원은 의외로 일관성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수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보이는 이름은 마한의 모수국이며,
백제로 넘어가서 모수성이 된 다음 광개토대왕이 4세기 말에
한강 유역의 백제 땅들을 빼았을 때 고구려로 넘어가 매홀군이라 불리게 된다.
그런데 '모수'는 '벌(들판)의 물'이며, '매홀'은 '물의 벌'이라 사실상 같은 뜻이다.
결국 '수원(물의 벌)'이라는 뜻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졌으니
한국사에서는 매우 진귀한 예다.
지금 봐도 수원 경내에는 호수가 2곳, 저수지가 5곳이라 물이 많은 도시다운데
과거에는 더했던 것일까?
86-87쪽
03 공주 : 찬란한 백제 문화를 품다
공주는 충청남도의 도시다. 면적은 864제곱킬로미터. 같은 충남의 천안보다 2배 좀 못 미칠 만큼 크지만 인구는 11만 명 남짓으로 천안의 6분의 1 정도이나 그나마도 점점 줄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어느 도시 못지 않은 역사의 영광과 한을 간직하고 있다.
머나먼 고대에는 더 험한 물줄기가 지나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고마나루는 웅진이라는 공주의 옛 이름이 유래할 만큼
오랫동안 공주의 중심이자 나라의 중심이었다.
이 곳에 사람과 짐을 실은 배들이 오가고,
점점 그 규모가 커져 주변에 집들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되고 도시가 된 것이다.
04 천안 : 어디로든 통하는 길
천안은 면적 636제곱킬로미터, 인구는 66만명 정도 된다. 면적상으로 충청남도에서 공주, 서사느 당진에 이어 4번쨰로 크며, 인구상으로는 가장 크다. 조선 시대까지 천안부와 별도로 직산군과 목천군이 따로 있었으나 1914년 이후 통폐합되었다.
길,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스쳐가고, 부딪치고, 웃고 울며,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태적 공간이다.
한반도에서 천안만큼 길의 의미를 짙게 머금은 도시는 없다.
그 도시의 내일, 그 도시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떤 영광과 아쉬움이,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깃들 것인가.
146쪽
05 전주 : 풍패지향의 문화관광 도시
전라북도 도청소재지이자 전북 제1의 도시인 전주는 면적이 205제곱킬로키터. 인구는 65만 명을 조금 넘는다. 면적으로는 대한민국 도시 중 66위. 인구로는 17위로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은 편이다.
풍패란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고향을 지칭하여
풍패지향은 건국자의 고향을 뜻한 관용어이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풍패지향이 바로 전주라는 뜻이다.
전주는 대대로 이성계의 조상들이 이곳에 뿌리내리고 호족 생활을 했던 곳이다.
148~149쪽
06 광주 : 끝나지 않은 그날
전라도의 대표 도시이며, 유일한 광역시인 광주의 면적은 501제곱킬로미터, 인구는 140만명이 조금 넘는다. 면적은 대한민국 도시 중 48위로 특별·광역시 가운데서는 제일 적다. 하지만 인구는 전체 6위이며 특별·광역시 중에서도 6위다.
광주는 오랫동안 호남의 중요 도시였으나 대표 도시로 떠오른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백제 때는 물이 많은 평야인 물들에서 무진주라는 이름을 얻었다.
왕건이 천하를 평정한 뒤, 940년에 이름을 광주로 고쳤다.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에서 딴 이름인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의 광주는 크고 중요한 도시일 수 없었다.
166~168쪽
07 남원 : 돌아올 봄날을 희망하는 예술의 고장
전라북도 남원시는 소백산맥 자락에 위치하며, 지리산을 끼고 있다. 면적 752제곱킬로미터에 인구는 8만명 정도이다. 면적은 부산에 좀 못 미치지만 인구는 그 4분의 1도 안된다. 인구 규모로 전국 시 가운데서 85위 남짓, 전라북도에서도 7번쨰로 10만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완주군보다 적다. 하지만 전근대 시대에는 호남의 중요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혀 왔다.
남원이 남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때는 진흥왕의 후대인 문무왕이 삼한을 통일하고,
이곳에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을 설치하고부터다.
187쪽
08 여수 : 세 빛깔의 바다
면적은 512제곱킬로미터에 인구는 28만 명 정도로 순위가 그리 높지는 않다. 20세기에 접어든 이후 인구는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1998년 여수시와 여천시, 여천군이 합쳐져 지금의 여수시가 되었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 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09 제주 : 잠들지 않는 섬
제주도의 전체 면적은 1850제곱킬로미터로 제주시만 본다면 남한에서 12번째로 큰 도시이고, 제주시가 서귀포시보다 조금 더 크다. 인구 수는 특별자치도 중에서는 2위로 2023년 기준 67만명이다. 지금은 국내 여행의 성지가 되었으나 탐라의 역사적 의미는 이후 말할 수 없을 만큼 깊다.
제주도는 삼다도로 잘 알려져 있다.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가 많은 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를 훑어보면 또 다른 삼다고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 특산물이 많았다. 한국 땅에서 유독 이 제주에서만 나는 특산물이 많고,
따라서 예부터 공납과 진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둘째, 이방인이 많았다. 풍랑에 휩쓸려 표착한 외국인부터 침략자들,
변방 중의 변방인 이 곳에 귀양살이를 온 벼슬아치들까지,
제주 땅에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셋째, 반란이 많았다. 그것은 이미 이야기한 두 가지 역사적 특성과 관련이 깊다.
특산물을 바칠 것을 강요당하다 보면 주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변방 중의 변방으로 푸대접을 받다 보면
아예 육지것들에게서 독립하자는 생각이 꿈틀대기 마련이다.
또 변방답게 중앙의 통제력에 한계가 있어
그 긴 세월 동안 반역의 정신이 잠들지 않곤 했다.
234~235쪽
10 부산 : 솥처럼 다시 끓을 날을 기다리며
부산광역시는 한반도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도시다. 부산의 면적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769제곱킬로미터로 대한민국 24위이며, 원주보다 좁고 남원보다 넓다. 하지만 인구수는 335만 명 가량으로 서울 다음인 2위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 노래를 부른 조용필을 일약 유명가수의 반열에 올렸으며,
어느새 부산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어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김영삼의 '로고송'으로도 쓰였다.
이 노래의 가사에는 원래 부관연락선(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연락선)을 타고
징용에 나갔던 사람들을 보내는 설움과 한이 배어 있다.
작사가 황선우는 부산 토박이인데,
어릴 때부터 사랑했던 소녀가 가족과 함께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는 걸 바라보던 아픔을 노랫말로 적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래 가사는 '내 님이여'였는데,
1975년 부산항에 처음으로 입항했던 재일동포 귀향방문단이 전국의 이목을 모았을 때,
'내 형제여'로 그 부분을 바꿔 부른 노랫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졌다.
277쪽
남한과 북한의 30개 도시에 대하여 역사를 풀어놓은 700페이지 가까운 방대한 양이다. 너무 두꺼워서 여러 날에 걸쳐 읽었고, 다 읽고 나서 궁금한 점은 두고두고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도시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날씨 좋은 주말에 가방을 둘러메고 길을 떠나게 만들 것이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한 권으로 독파하는
우리 도시 속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남한부터 북한까지 한반도 30개 도시를 통해 한국사 흐름을 펼쳐낸 도서로 30개 도시로 떠나는 한국여행지도 목차를 보기만 해도 궁금해지고 어떤 도시에 어떤 역사이야기가 깃들어 있을지 기대가 가득한 채로 이 책을 읽어보았다.
목차를 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대구가 궁금해 대구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대구
분지에서 저항 운동을 외치다.
갓바위 부처님의 눈길 아래
대구는 평균 해발 49미터로 시 전체가 분지 지형이다.
원래의 이름이 달구와 마찬가지로 높은 언덕을 뜻한다. 높은 언덕에 큰 평야가 있으니 달구벌이며, 그 평야에 오래전부터 사람이 모여 살아왔다.
달서구 월성동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지로 미뤄볼 때 아마 2만년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으리라 여겨진다.
기원전에는 부족국가가 세워졌고,
108년 신라에 병합되어 달구화현 그 후로부터 달불성, 달구벌 등으로 표기
757년 경덕왕의 지명 환화조치로 대구가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졌지만
천년 뒤, 1750년에 구丘는 공자님의 함자와 겹치므로 외람된다주장이 있어 대구大邱로 한자명이 바뀌었다.
대구의 가장 북쪽에는 팔공산이 있다.
신라는 삼한을 통일한 뒤 중국을 본 떠 5악 숭배체제를 세웠는데 토함산. 지리산, 태백산. 계룡산. 팔공산이 그 다섯산이 었고 임금이 오악에 직접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국가와 왕조의 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갓바위 석조여래좌상이 만들어졌다.
양식을 볼 때 신라시대 불상인 것만 확실할 뿐 정확히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른다.
이 불상의 전설에 따르면 의현법사가 입적을 지켜본 뒤, 집에 돌아가니 그 사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원광법사와 어머니 넋을 달래고자 혼자 망치를 끌고 팔공산에 올라 바위를 깎고 또 깎아 부처님을 이루어냈다.
6주동안 그리했는데, 학들이 날아와 굶어 죽지 않게 해주었고, 원광법사가 입적한 때가 640년이니, 전설이 맞다면 이 불상은 삼한 통일이 이루어지기 직전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이 파군재를 거쳐 달아나다 동화사근처까지 왔고 동화사 승려가 안전하게 길을 가르쳐 주어 왕건이 무사히 달아날 수 있었다.
얽히고 설킨 대구의 중심지
팔공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왕건이 패했던 파군재가 있고 파군재에서 남쪽으로 2킬로미터쯤 더 내려가면 불로동고분군이 나온답니다. 이 고분들은 5세기에서 6세기의 것들로 추정된다.
1601년부터 경상도 행정의 중심지인 감영이다.
감영공원은 선화당과 정청각이 남아 옛 감영의 흔적을 보여준다.
1862년 진주를 비롯한 농민들이 삼정의 문란 등에 분노해 임술민란을 일으켰는데 경상감영을 총본부로 삼고, 영남 일대우 민란운 수습했다고 한다.
1864년에는 동학교주 최제우가 처형
1906년에는 친일파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독단으로 허물고 경상감영 옆 측우기를 일본인에게 선물로 넘겨주고, 감영의 일부였던 포정문도 뜯어내어 달성공원에 장식물로 세워놓았다.
1946년 10월 1일사건 발반 좌익을 관용하는데서 탄압하는 쪽으로 바뀐 미군정의 태도와 그에 반발한 남한 좌익의 극렬투쟁 등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950년 7월 16일에 대한민국 수도가 되었다. 다만 북한군의 공세로 한달만에 수도는 더 남쪽으로 내려가고,
대구는 치열한 전쟁터로 바뀐다.
상업의 중심에서 외친 저항의 목소리
조선시대 경상감영 주변에 타지에서 드나드는 이들을 위한 시장 형성되었고 그 시장이 약령시장이다.
대구가 한양과 영남을 잇는 물류와 낙동강을 활용하는 영남 물류의 요지로 발전하면서 시장은 규모가 더 커졌다.
지금은 약전골목이 남아 있으며 한우원들과 한약재들을 파는 곳이다.
1893년 영남최초 개신교 교회인 대구제일교회가 세워졌고,
1899년 부속 서양병원 제중원이 세워졌다.
1899년 한옥성당인 계산성당이 세워졌고 이 성당은 프랑스와 수교 이후 오랜 박해의 멍에를 벗은 천주교에서 국내에서 4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1907년 서상돈. 감광제 등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
1960년 2.28운동은 대선을 앞두고 일요일인데 등교하라고 해서 경찰과 몸싸움을 한 운동이다. 이 2.28 학생 의거는 대구로서는 일제강점기의 학생운동과 10.1사건의 맥을 잇는 것이었고, 전국적으로 정부수립이후 처음 벌어자 민주화 운동이면서 4.19혁명의 선구였다.
천국의 정원을 품다
대구의 남쪽 끝이자 신천의 발원지가 나온다.
비슬산이디. 높이 1035미터로 꼭대기에 대견사가 있다
9세기 초 신라 홍덕왕대에 창건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두차례 중건되었다가 일제가 1917년 절 건물을 모두 허물고 삼층석탑만 남겨두었다
이유는 이 절의 대웅전이 대마도를 마주하고 있어 일본 땅의 기운을 빨아들인다는 하여 없앴다고 한다.
2013년 중창되어 팔공산 동화사 부속절로 운영되고 있다. 대견사뒤에 비슬산 참꽃군락지가 있고 마치 산 위에 꽃바다가 펼쳐진 듯 하다. 산 아래 두고 온 온갖 복잡한 근심걱정을 잊어버리고 천국의 정원에서 노닐게 된다.
이제껏 대구역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알고 있었던 내용을 정리하기도 했다.
대구의 역사가 2만년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서 놀라긴 했다. 구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대구역사를 알게 되니 대구가 더 멋있어 보였다.
대구 다음으로 알고 싶은 지역은 제주도였다
제주도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지 궁금해졌다.
제주
잠들지 않는 섬
제주도의 새로운 삼다
제주도는 삼다도로 잘 알려져 있다.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가 많은 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를 훑어보면 또 다른 삼다도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 특산물이 많았다.
둘째. 이방인이 많았다.
셋째, 반란이 많았다.
제주에는 약 1만년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하지만 출발은 신화에 의존한다. 고조선. 고구려 신라 가야 등 한반도 고대국가들의 건국신화는 하나같이 하늘에서 사람이 내려온 이야기인데. 제주는 거꾸로다 땅에서 사람이 솟아났다니 말이다
고을나.부을나. 양을나라는 세 선인이 솟아났다는 풀 밭 위 세군데 구멍과 그 성역을 감싸고 있는 크고 묘하게 구불거리는 나무들은 사뭇 신비스럽다. 작은 신들의 정원처럼 산책하기 좋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 선인은 활을 쏘아 자신들의 터전을 정하고, 동쪽에서 바다를 건너온 여인들과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탐라를 가장 먼저 세력권에 넣은 본토의 나라는 백제였다.
고구려도 400년에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에게서 신라를 구원해준 뒤 신라 영토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신라를 통해 탐라와 연결했다. 그래서 탐라국은 삼국 사이를 저울질하여 복잡한 외교를 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귀한 특산물이 많은 도시
탐라. 제주의 첫번째 귀한 선물은 진주였다.
두번째는 귤. 세번째는 말이었다.
제주 조랑말은 제주 삼성이나 포세이돈의 신마처럼 땅에서 솟아나온 게 아니다.1277년 몽골이 고려를 무릎 끊리고 제주를 자기네 땅으로 삼은 다음 몽골 말을 대거 들여와 제주 초원을 목장으로 만들고 동서양속이라는 관리기구를 설치하면서 비로소 특산품이 되었다.
대구와 제주 이외에도 다양한 도시에 얽힌 역사이야기가 흥미롭다. 도시마다 위치나 상황에 맞는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이 이야기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루 한 도시
가볍게 여행 떠나듯 우리가 몰랐던 도시의 과거와 미래를 이해할 수 있다
여행을 떠나기전
여행하는 도시의 역사이야기를 알고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역사가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면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를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새로운 도시 역사 이야기에 흠뻑 빠지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