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말 감염으로 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 바이러스'가 안정화를 찾아가는 시기에 이사카 고타로의 신작 《페퍼스 고스트》는 '비말 감염'을 통해 타인의 미래를 보는 주인공이 테러사건을 저지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그린 미스터리 소설이다.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초능력
일명 '선공개 영상'
비말 감염된 타인의 다음 날 체험할 일부 장면을 영화의 예고편처럼 본다.
인간은 똑같은 인생을 영원히 반복할 뿐이다. 요컨대 힘든 일을 당한 사람이나 곤경에 빠진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위기를 극복하더라도, 언젠가 또 같은 꼴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막막할뿐더러 헛수고한 느낌이라 정신이 아득해진다. 뭘 어찌해도 소용없다. 다 때려치워라. 그런 기분이 들 것이다. 허무주의의 궁극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사카 고타로 《페퍼스 고스트》 p.106
《페퍼스 고스트》는 인간은 똑같은 인생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바탕으로 크게 세 가지의 굵직한 사회적 이슈를 베테랑 작가의 필력으로 맛깔나게 버무렸다. 카페 테러 유가족 모임인 '동우회'의 폭탄 테러, 비말 감염을 통한 초능력의 발현 그리고 소설 속의 또 다른 소설의 고양이를 학대한 사람을 응징하는 '고지모 사냥꾼'이야기가 교차하다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재미가 극대화된다.
다이아몬드 카페 테러사건으로 절망의 낭떠러지에 선 이들이 만나 결심한다. 그들의 세계를 끝장내기로. 소설이기에 너무 딱딱 들어맞는 우연들이지만, '마치 소설 속 세계 라면 몇 번을 읽든, 어디서부터 읽든 일어나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야말로 영원히 똑같은 스토리 속을 살아가는 셈이다.'라며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해 웃음을 선사한다. 그러나 단과 학부형의 만남은 우연 아닌 필연이었다. 얼마 후 학부형의 실종으로 단과 동우회가 만나게 되고, 고지모 사냥꾼들이 사람을 찾다 우연히 단을 만나면서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발단이 되기 때문이다.
착실하게 살아온 결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독과 허망함이었어.
이사카 고타로 《페퍼스 고스트》 p.327
사건을 이어나가는 중학교 국어 교사 단은 아버지로부터 '비말 감염' 초능력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미래를 미리 알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공상에도 미래가 보이는 건 의외로 고통스럽다는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소설의 주인공의 경우, 영상의 등장인물이 일면식도 없어 도와주고 싶어도 충고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에 무력감이 쌓여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되도록 담아두지 말고 잊어버리도록 노력할 뿐 해결책은 없다. 하지만 단은 자신의 영상에서 본 테러 사건을 막기 위해 다소 무모해 보이지만 위험을 자처하며 이타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에 눈길이 간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참담함을 겪었을 때, 제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인생에 허무함을 느끼며 살아갈지라도,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영혼을 뒤흔들만한 행복한 경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이사카 고타로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선공개 영상'을 봄으로써 사전에 방지할 수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미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회귀 사상에 갇혀있기보다 한계를 뛰어넘어 고차원적인 인간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니체의 초인 사상이 녹아있었다.
인생을 살며 영혼이 떨릴 만한 행복을 한 번이라도 경험했다면, 그 때문만이라도 영원한 인생이 필요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말이죠. 만약 그런 삶을 살았다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듯이요.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사카 고타로 《페퍼스 고스트》 p.332
이사카 고타로는 30년 만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었다며 과거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쏙쏙 들어왔다고 한다. 《페퍼스 고스트》에 영원회귀 사상이 중심축을 이루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초반부에는 고사모 집단의 과격한 횡포가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는데, 고양이 학대가 일본에서 굉장히 큰 이슈였음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인간에게 말도 안 되게 대갚음해 주는 모습 역시 인과응보겠지?싶었으나, 홀연히 사라지는 장치로 설정한 것 역시 그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인간은 본디 망각의 동물이라 누군가가 처한 아픔을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물론 자기 삶을 살아가기도 벅차 타인의 아픔에 마음을 쓰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들이 진정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담담하게 전한다.
나를 일본 미스터리 소설에 첫 발을 담게 한 작품이 바로 이사카 고타로의 『골든 슬럼버』였다. 그의 작품을 10여 년 만에 다시 읽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특히 중반부 소설 속의 소설이 현재 시점과 합쳐져 허상과 현실의 모호함 속에서 미래의 선을 향해 하나씩 발 맞춰지는 스토리라인이 과연 대작가 답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초능력의 발현이 '비말 감염'이라는 독특한 전개는 물론이고,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현실에 불쑥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등 트릭을 사용해 관객 앞에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연극의 무대 장치 기법 '페퍼스 고스트'를 절묘하게 녹여내며 제목의 이유를 끄덕이게 하는 천재 작가의 매력을 아낌없이 쏟아낸다.
《페퍼스 고스트》는 시사성, 고발성, 작품성, 오락성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작품이다.
미스터리 소설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올여름 펼쳐 보시기를 추천한다.
책장을 덮고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책장의 철학서 코너를 보니, 니체의 책이 제법 보인다. 언젠가 니체의 책들을 쌓아놓고 다시 니체에 빠져봐야지...
무튼, 매일매일을 기쁨으로 채우며 살기로!
이 세계의 비애는 깊다.
기쁨은 깊은 고뇌보다 더 깊다.
비애가 말한다. 사라져라!
그러나 모든 기쁨은 영원을 소망한다.
이사카 고타로 《페퍼스 고스트》 p.481
제목부터 이야기하자면, 반전에 대한 상당분량의 스포일이 될 수 있어 리뷰에는 뺀다. 하지만 책을 사서 읽기로 결심한 분들은 책뒤지의 설명을 읽으셔도 괜찮겠다.
이야기는 세사람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먼저 단선생님, 그는 한 여중고의 국어선생님이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아니 보이지만, 사실 할아버지, 아버지대를 걸쳐 물려받은 초능력이 있다. 그것 타인의 비말감염으로 그 타인의 하루 가장 하일라이트되는 시점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걸 '선공개영상'이라고 부른다. 그는 어느날 자긴에게 접촉한 사토미를 통해 신간센사고를 만날 것임을 알아채고 이에 대한 경고를 애둘러 해준다. 결국 이 사고를 피해간 그를, 사토미의 아버지이자 테러내응 내각부 소속 요원이던 사토미 핫센이 만남을 요청한다.
한편, 국어선생님인 단 선생님은 후토 마리코란 학생의 소설을 읽어봐주는데, 진행되는 내용 속의 등장인물 러시안 블루와 아메쇼 (사람이지만 좋아하는 고양이의 이름을 각각 붙였다.)은 나름대로의 시간을 진행해가면서 우리에게 그들을 보여준다. 고지모, 즉 고양이를 지옥으로 보내는 모임이라는 끔찍한 집단에게 사랑하는 고양이를 잃은 어떤이가 로또에 2번 당첨되어 10억엔을 내놓고 이들에게 고지모에 연관된 인물들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염세주의자인 러시안 블루와 긍정적인 아메쇼는 하나씩 복수를 해가면서 자기들이 누군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단선생님과 이 러시안블루, 아메숏이 만나게 되는데....
그리고 한편, 테러로 관련된 이들이 다 죽게된 과거의 카페 다이아몬드 사건의 피해자 가족모임의 나루미 효코의 시선으로도, 단선생과의 만남이 이어지는데...
메타픽션이라 철저히 세계가 분리될 줄 알았는데, 글자들의 2차원이 3차원이 되며 마침 읽는 이와 마주치게되는 세계관이라니..하하하, 정말 귀엽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에는 [소설보다 이상한]이란 작품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무공무원은 정확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사랑에 빠지고 그리고 자신이 소설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때 그 작품을 보면서, [시애틀의 잠못드는 밤]과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떄]의 각본가 겸 제작자 노라 에프런의 [내인생은 로맨틱 코메디]라는 책도 읽으면서, 내 인생은 어떤 장르가 되었으면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은 카페 다이아몬드 사건의 피해자들과 니체의 짜라투스투라 이야기를 하게 되고, 자신이 바라보는 '선공개영상'이 니체의 '영원회귀성'에 따른 다음 회차수를 미리 보고 있는것이 아니가 해석을 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사랑하는 이를 잃은 지옥같은 이 인생을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니체의 사상에 진절머리를 낸다.
하지만 니체는 ...인생을 살며 영혼이 떨릴 만한 행복을 한번이라도 경험했다면, 그떄만이 아니라도 영원한 인생이 필요하단 걸 느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어떤 소설에서는 그 등장인물에게 너무나도 동화가 되어서 그녀가 떠날때 그 이후 잘살았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작가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속편도 써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소설의 등장인물은 나에게는 가끔 3차원의 인물로 다가오지만, 사실 보통이이에겐, 보통처럼 읽으면 이것들을 모두 2차원적인 문자의 나열일 뿐이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에선 본인들이 소설의 등장인물을 인지하면서 3차원으로 나서게 되며 현실진행중인 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그 부분이 꽤나 짜릿하다.
그리고, 암울하게 느껴지던 니체의 말 속에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등장인물들 (이제는 나에겐 살아움직이는 3차원 같은 말썽꾸러기들. 자이언츠와 이글즈 대결얘기가 나와서 야구에 빠진 나에겐 더욱 재미있고 몰입력을 높여주었다) 의 모습들과 책을 다 읽은 나는 맨 앞의 저자의 글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 이 소설속 주인공은 미래를 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 미래는 항상 불투명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피로와 불안을 모두 잊고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저 또한 생각하고 싶습니다.....라고.
2차원의 인물이 3차원이 되는 가운데, 3차원은 나는 2차원의 세상에 들어가 현실의 불안함을 잊어버렸다. 책 덕분에 읽는 동안은 아무생각없이 즐거웠다.
이 세상의 비애는 깊다. 기쁨은 깊은 고뇌보다 더 깊다. 비애가 말한다. 사라져라! 그러나 모든 기쁨은 영원을 소망한다... 니체
작가의 이름만으로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 아무래도 인기가 있고 이때까지 인기가 있는 작품들을 써왔고 그로 인해 팬층이 두꺼운 그런 작가들일 것이다. 장르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름을 들으면 안다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대표적일 것이다. 나의 리스트에는 이사카 고타로도 들어있다. 분명 안 맞는 느낌이 드는 그런 작품들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카 고타로가 쓴 책이라면 한번 읽어보고 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먼저다.
이사카 고타로의 사신 시리즈를 좋아했었다. 이때까지 다 읽은 작가의 책을 합하면 열 권은 넘지 않을까. 갱 시리즈도 읽었었고. 장르소설적인 면이 강하게 부각되면 그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편이고 과학적인 면이나 판타지가 강하게 들어가면 조금은 이라면서 안 맞는다고 느끼는 편이다. 이번 책은 그 두가지가 다 들어있다.
제목이 낯설다. 페퍼스 고스트라니. 페퍼는 고추인가 후추인가. 거기다가 고스트라니. 이 궁금증은 책의 뒷부분을 보면 바로 풀린다.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한번 더 언급하고 있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했던 페퍼는 바로 사람 이름이었다. 페퍼님 미안.
페퍼스 고스트라는 말이 떠올랐다. 연극 무대나 영상 분야에서 사용하는 기술 중 하나로 페퍼라는 사람과 관련이 있을 텐데, 아무튼 조명과 유리를 사용해 다른 곳에 있는 물체를 관객 앞에 보여주는 수법이다. 원래 거기 말고 다른 곳에 숨겨진 물체가 마치 거기 있는 것처럼 등장한다.
277p
여기 단이라는 한 남자가 있다. 국어교사다. 그는 능력이 있다. 바로 누군가의 비말에 감염이 되면 그 사람의 미래를 보는 능력이다. 뭐 그렇다고 거창하지는 않다. 그것은 단시간 지속되며 정확하게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걸 보기 위해서는 필수전제조건이 감염이 되어야 된다는 사실이다. 그의 능력은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이야기 속에서는 중학생이 쓴 이야기가 한 편 더 들어있다. 이 부분이 장르소설처럼 느껴지는 부분인데 바로 러시안블루와 아메쇼가 등장하는 이야기다. 그들은 고양이를 괴롭힌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처단을 한다. 앞서의 이야기와 별개로 흐른다고 느꼈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결합이 되는 그 순건이야말로 제목이 의미하는 페퍼스 고스트가 아닐까. 그 부분을 읽는 순간 짜릿함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것은 둘이다. 국어교사인 단은 누구의 앞날을 보며 예측을 할 것인가 라는 것과 러시안블루와 아메쇼는 어느 시점에서 단과 만나게 되는가이다. 그 두가지가 해결되는 순간 모든 것은 다 마무리가 되어지지 않을까. 작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흥미 있는 것을 함께 눌러 담았다는 이야기. 그의 작품의 특징을 그대로 담아 놓은 5백 페이지의 묵직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전체의 이야기는 탱탱볼 마냥 통통 튀어다니는 가벼움을 선사한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걱정을 하고 불안해하는 건 내 특기다. 비가 세차게 오기라도 하면 집 뒤에 산이 무너져 토사가 쏟아지지 않을까부터 해서 10일까지 계산서 발행 안 해주면 어쩌나까지. 다 쓸데없는 걱정인 거 안다. 산사태 방지 공사를 했고 10일까지 안 끊어줘도 올해 안에 발행해 주면 된다. 올해가 아니면 다음 해라도. 이월해서 장부를 맞추면 되니까.
그래도 걱정이다. 모든 게. 걱정을 잊기 위해 딴짓을 해본다. 그러다 지쳐 잠든다. 이사카 고타로의 장편 소설 『페퍼스 고스트』에도 딱 나 같은 걱정쟁이 인물이 등장한다. 이름하여 고지모 사냥꾼, 고양이를 지옥에 보내는 모임에 가담한 자들을 찾아가 벌을 주는 러시안블루가 그에 해당한다. 사냥꾼에는 한 명이 더 있다. 아메쇼. 둘은 고지모 회원들을 처리해달라는 고용인의 의뢰로 일을 한다.
러시안 블루와 아메쇼는 당연히 가명이다. 고양이 품종에서 따왔다. 러시안 블루는 줄여서 시안. 그가 걱정쟁이 캐릭터다. 핵무기 실험을 하는 기사, 태양이 8억 년이 지나면 소멸한다는 이야기에 마음을 졸인다. 그에 반해 아메쇼는 당연히 시안과는 반대되는 성격이겠지? 소설이니까. 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약간 심드렁하고 얼렁뚱땅 말장난을 좋아한다.
시안과 아메쇼 이외에 중요 인물인 단 선생님이 나온다. 그는 특이한 능력을 타고났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는데 남과 비말 접촉 시 타인의 시점으로 미래를 본다. 아버지와 단 선생님은 그걸 '선공개영상'으로 부른다. 미래를 본다고 해서 대단한 활약을 펼치지는 못한다. 공공장소에서 누가 재채기를 하면 침이 묻을 수도 있다. 생판 모르는 남의 미래를 보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단은 약간의 무력감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인다.
단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마리코의 소설을 읽는다. 순전히 그가 국어교사라는 이유로. 시안과 아메쇼는 학생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고지모 회원들을 찾아가 과거 그들의 행적을 상기해 주고 고양이가 당한 짓을 그대로 돌려준다. 단은 사토미라는 학생과 상담을 하다가 재채기 때문에 선공개영상을 본다. 사토미가 위험에 처하는 미래를 보고 점술가라는 허구의 인물을 내세워 조심할 것을 알려준다. 그 일로 단은 사토미의 아버지와 얽히고설킨다.
'페퍼스 고스트'는 연극 용어로 조명과 유리를 사용해 다른 곳에 있는 물체를 관객 앞에 보여주는 수법이다. 마리코가 쓴 소설 속 인물인 시안과 아메쇼는 분명 다른 공간에 있었다. 소설을 읽는 우리만이 그들의 서사를 따라갈 수 있다. 소설 속 다른 현실을 사는 단 선생님은 시안과 아메쇼와 만날 수 없다. 그들은 단이 읽는 소설 속 인물이니까. 『페퍼스 고스트』는 조명과 유리를 살짝 움직여 단 선생님에게 시안과 아메쇼가 사는 세상을 열어준다.
시안과 아메쇼, 단이 한 공간에 모이면서 『페퍼스 고스트』는 사건 해결을 위해 신나게 질주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이사카 고타로의 바람처럼 현실의 걱정은 잠시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설 속 인물이며 소설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거 아니냐고 끊임없이 의심한다. 의심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전염된다. 소설을 읽고 있는 나 역시 소설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 아닌지 하는 의심 말이다. 나의 결말은 소설가에게 달려있다는 허무주의적인 생각은 덤.
똑같은 고통의 삶이 반복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등장인물에 대입해 보았다는 이사카 고타로의 작가의 말은 『페퍼스 고스트』의 주제에 가닿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겠지만 살짝만 각도를 비틀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 우리의 미래는 다르게 변할 수 있다. 똑같은 고통을 겪으며 반복된 삶을 살바엔 다른 고통을 겪으며 사는 게 낫지. 걱정만 하다가 사는 결말이 정해져 있는 소설 속 세상에 살고 있으면 어때. 어떤 걱정은 아무도 죽지 않는 결말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