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진트리의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시리즈, 5번째, 레일라 슬리마니 작가의 베네치아 푼타 델라 도가냐 미술관 이야기, <한밤중의 꽃향기>.
제대로 읽어본 것은 한 권밖에 없지만, 각 권의 안내글부터가 무척 인상 깊은 책들이라서 '다 탐독해야지' 하고 리스트업 해놓은 시리즈다. 여기에서 새 책이 나왔다고 하니 또 얼마나 두근두근 했었던지!
이번 주인공, 레일라 슬리마니 작가는 이 제안을 수락한 주요 이유에 ‘갇힌다’는 것이 주는 유혹 때문이었다고 하고 있다.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공간에서 온전히 혼자만 있는 것에 대한 소설가의 환상...
하지만 그녀는 이 공간과 시간에서 혼자가 아니였다. 보수적이였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갑작스레 떠올랐고, 자신의 첫 소설 주인공인 아델의 육체가 함께 했고, 죽음과 작가들, 익숙한 유명인들이 스쳐지나간다.
무엇보다도 글쓰기가 업인 저자의 깊은 속내가 인상 깊었는데, 은둔과 고독, 고립에서 파생되는 글쓴이의 생각들이 힘을 가지고 나를 압도하는 느낌이여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미술관의 작품들이 단초가 되어 기억과 생각을 끄집어내어 글이 진행되지만 더 깊은 고찰로 자연스럽게 써내려가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은이의 삶과 일, 인문예술까지 고루 즐길 수 있었던 뿌듯한 시간이였으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시리즈, 한 편이였다. 이렇게 그림을 즐기는 다른 방법을 또 배운다. 슬픔에 대한 언급에서는 한참 빠져있는 정호승님의 시들이 떠올라 문학작품을 완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생각까지 닿아서, 개인적으로 기억에 많이 남는 독서가 될 것 같다.
적극 추천하고픈 도서다.
_글을 쓴다는 것은 곧 절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 치유하거나 마음을 달래려고 애쓰면 안 된다. 오히려 실험실 조수가 표본 병 속에 박테리아를 배양하듯 자신의 슬픔을 배양해야 한다._p12
_“그렇게 공손한 표정 짓지 마. 네 마음에 들고 널 감동시키는 그림을 향해 가라고.” 그 뒤로 나는 미술관을 여러 곳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마다 그 친구의 조언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다._p51
_칠레 작가 로베르트 볼라뇨는 이렇게 말했다.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싸움터에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_p65
_글을 쓴다는 것은 또한 확장하고 정복하겠다는, 그리고 세계와 타자, 미지의 것에 대한 꿈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 성벽 뒤에서 살면 무관심해질 수 밖에 없다.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환상에 불과하다._p75
_글을 쓰다 보면 타인들의 허약함과 결함이 좋아진다. 우리는 모두 혼자지만 우리는 모두 같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_p121
「한밤중의 꽃향기」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뮤진트리(펴냄)
2018년 12월의 파리와 2019년 4월의 베니치아라는 두 개의 축과 이어지는 에세이. 2016년 공쿠르상 수상에 빛나는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현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중 한 명이다. 모로코의 라바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저자에게 유럽의 미술관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현대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작가에게 아마도 권위적이자 엘리트주의적인 미술관이 낯설고 이질적이었음은 분명하다.
과연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 , 그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절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 치유하거나 마음을 달래려고 애쓰면 안 된다. 오히려 실험실 조수가 표번 병 속에 박테리아를 배양하듯 자신의 슬픔을 배양 해야한다. 상처를 헤치고 기억을 더듬고 부끄러움과 이전에 느꼈던 고통이 되살아나게 해야한다. p12
작가의 사유는 이어지고 이어져, 수많은 필사하고픈 문장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작가들과 작품을 언급하는데 마침내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에게로 닿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라는 조건이 내부와 외부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살도록 강요하는 정도를 가장 잘 이해한 여성임이 틀림없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방이 제공하는 안락함과 은밀함도, 동시에 타인들과 관계를 맺고 모험을 하는 외부세계의 풍요함도 거부된다. 여성의 문제는 곧 공간의 문제다. p78
죽음에 관한 사유가 독특했다. 죽은 자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이 살아있을 때까지도 죽은 자는 죽은게 아니라는 말, 어느 예술가의 책에서도 본 문장이다. 죽음이 위로되는 순간이다. 사랑하는 잃거나, 위대한 성인을 잃었을때 슬퍼하고 애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의 죽음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에 나도 평소 깊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
베네치아에 대해 서양에 속해 있으되 또한 동양적인 도시라고 말한다. 나는 단지 베네치아를 물의 도시라고만 상상해왔다^^ 책은 미술, 예술, 여성, 글쓰기, 문학, 삶에 대한 모든 부분을 묘사한다. 책을 받은 날 푹 빠져서 그날 하룻밤 만에 다 읽은 책이다. 어쩌면 이리 단단한 문장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완벽하게 혼자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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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여행을 떠나서 혼자 너무나 설렌 사람처럼 작은 책을 아껴 읽었다. 미술, 예술, 문학에 대해 골고루 무지해서, 모든 짐작과 예상이 빗나가는 문장 전개와 이야기의 펼쳐짐에, 들뜬 호흡을 자주 의식하며 골랐다.
“소설을 쓰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지켜야 하는 규칙은 아니오, 라고 말하는 거예요. (...) 아니오, 라는 말을 되풀이하다 보면 병적일 정도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거만한 인간 혐오자 취급을 받게 돼요.”
내밀한 고백 같은 글의 농도가 짙어서 모든 문장이 뜨거운 온도로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이처럼 진솔하고 절절한 글에, 생존을 위한 도피처나 힘을 내기 위한 식량으로 문학을 소모하는 얄팍한 독자가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등장인물들이 곁에 있으면 나의 삶 전체가 이 강박관념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외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나는 은밀하게 살아간다.”
치열하고 솔직하게 살지 못해도, 그저 살아간 시간이 쌓이면, 단단한 심지 같은 게 조금 생기기도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거나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에 흔들리거나 현혹되지도 않는다. 하기도 싫지만 참 듣기도 싫은 말이다.
“관심의 과잉, 빛의 과잉은 우리 내면의 어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없애버리는 듯하다.”
문득 뜻대로 되는 일 별로 없는 모두의 삶이 애처롭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뜻대로 흘러갈 수 있는 삶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풍경은 모호해도, 내 자신의 삶의 태도를 가능한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의견을 표명하든 폭력과 증오에 노출되고, 예술가는 여론을 따라야 하는 우리 시대를, 충동적으로 백마흔 개의 글자를 쓰는 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베네치아와 미술관 사진들을 괜히 뒤적거리다가, 아래향나무를 찾아보고 밤의 서늘한 온도에서 피어나고 퍼져나가는 신기하고 신비로운 향을 상상해본다. 아쉽도록 적은 분량에 퍼진, 감각과 감수성과 감정이 번지듯 공기 중에 떠돈다.
새로운 생각, 도전,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한다.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아무도 없어 나(의 것들)로 가득했던 미술관에서의 밤은 우아한 환상임에도 그 결실이 탐스럽다.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한 것은 바로 갇힌다는 사실이었다. (...) 나도 나갈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장소에 혼자만 있는 것.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소설가의 환상이다.”
‘아니면 말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그런 건 어쩌면 꿈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꿈을 이루는 건 자신을 만들어가는 조각과 같을 지도 모른다. 이 꿈이어야 하는 수많은 이유들은 고유한 나를 구별하게 하는 정체성일 지도 모른다.
레일라 슬리마니Leila Slimani 작가가 던지고 문답하는 문학, 글쓰기, 삶에 대한 사유는 패배를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 고군분투의 전장 같았다. 불안하고 허약하지 않다. 결연하고 단호하고 섬광처럼 빛난다.
작가란 암흑 속에서도 어떻게든 써내는 그런 존재라는 생각은 이 책 덕분에 믿음으로 변화했다. 떨렸다. ‘밤(레일라, Leila)’의 이름으로 불리는, 경계인이 아니라 두 세계 모두에 사는 그에게. 문학에게.
“모든 것이 허용되며, 실수는 잊히고 잘못은 용서 받는다고 상상한다. (...) 밤은 현실적인 것과 평범한 것이 더 이상 우리를 강제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소다. 밤은 (...) 무수한 목소리와 무한한 세계가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꿈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