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이를 갖고 있을때만 하더라도 내가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쿠키를 굽고, 케이크를 만들고, 글을 쓰며 보냈던 나의 시간들. 적어도 스스로를 먹여살 수 있던 자립의 시간들. 그 모든 시간들이 적어도 뱃속에 들어있을 때까지는 지켜졌거늘. 아들 녀석이 세상에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며 나옴과 동시에 모두 무한대기로 일시정지가 되어버렸다
쉬는게 쉬는게 아닌 나날들이 이어졌다. 집에 있는데도 도무지 편하지 않았다. 젖주고 치우고 우유병 닦고.. 재우고 똥치우고 오줌 치우고. 세상에. 단순노동이 주는 무게는 생각보다 너무도 무거웠다. 게다가 독박이라는 족쇄가 나에게 채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건마는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나라니. 무엇 하나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나날들, 마음껏 생각할 수도, 꿈을 꾸는 것도 사치인가 싶던 시간들. 자그맣고 버둥거리며 온종일 내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핏덩이를 돌보는 동안 나는 매일매일 소실되는 자신의 존재감을 부여잡기 위해 버둥거려야 했다.
아이가 얼추 자라 어린이집을 가기까지. 30개월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에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책은 손에도 못 댔다. 눈에도 머리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의 시간은 빛처럼 빠르게 흐르고, 훅훅 자라났으며. 아이는 날마다 울었고, 날마다 변했다. 겨우 책을 손에 댄다면 그건 육아서적과 아기 동화책정도. 모든 타임라인이 아이에게 맞춰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모든게 처음이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손길도 거의 없이 혼자 해내야 했으니까. 아이 키우는게 이렇다고 알려주는건 친정엄마가 물려주신 육아일기 정도랄까. 백권의 육아서적도 당장 처한 내 현실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당장 아이를 낳을때 회음부를 절개한다는 것도 안 알려주는 판국에 무슨.
과자향내가 나던 집에서는 우유냄새와 아기의 토사물 냄새, 분변의 냄새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거즘 일년은 꼬박 아이에게 매달려야 했다. 학교에서는 아이가 생기는 과정을 과학적으로는 알려줄지언정 애 키우는 법을 알려주는 곳은 없지 않은가. 낳기 전에 많은 채널을 통해 충분히 준비했다고해도 실전은 다르다.
이건 프린세스 메이커가 아니니까. 아이는 살아있고, 생을 리셋이 불가능하고.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기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혹은 어설프게 아는 채로,
상실감. 무력감. 그즈음 내가 느끼던 감정들이다.
나는 워킹맘들이 부러웠다.(지금도 부럽다.) 자기의 일을 가지고 치열하게 버티고 살아간다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는내게 있어 하나의 신화에 가까웠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자신이 해오던 것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녀들은 버티고 버티고, 죽어라 버티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적어도 자신을 무력하게 여기지도, 상실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순간 일과 양육의 파도 위에서 흔들리고 양손에 잡은 그 줄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여자들에게 "부럽다"는 나의 철없는 말은 얼마나 비수였을까. 일과 양육은 늘 대립하고. 여차하는 순간 둘 중 하나는 놓치고 만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주 양육자가 어머니인 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양육을 놓치는 순간 여성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모성성은 의심을 받는다. 일을 놓치는 순간, 여성은 '그럼 그렇지'의 표상,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표본이 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같은 모양새였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세상 저편에 나와 같은 고민, 나와같은 갈등을 겪었던 여자들이 또 있다니. 심지어 꽤나 유명세를 탄 사람들이다. 많이 배우건 적게 배우건. 작가건 주부건. 어째서 다 똑같은 생각과 삶을 사는가. 시간이 꽤나 지났음에도 왜 여전히 그들의 고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가.
이 책은 단순히 여성의 일(그중에서도 자율성과 독립성이 유지되어야 하는 창작활동)과 육아의 양립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양립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며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자했던 존재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창작자로서는 성공했을지언정 어머니라는 이름에는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힌 이들도 있다. 두가지 타이틀 모두를 지켜낸 사람도 물론 있다. 성적인 욕망의 주체로써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에 거리낌이 없던 세상이 원하지 않는 어머니상을 가진 창작자도 있다. 다양한 장작자들이지만 그들이 직면한 상황은 하나다. 양육과 창작. 이타적 돌봄과 스스로를 돌보는 것. 그 두 사황의 양립 속에서 발생하는 내면적이자 동시에 사회적인 갈등.
이 책은 어떤 방법으로 창작을 지켜나가라 던지, 혹은 모성을 이렇게 지켜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여성들이 처한 모성과 일의 양립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각 사례를 분석하고, 그들이 겪었던 심리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정말 어떤 존재로써의 존재감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양육자라는 이름을 잃지 않으려면 시간과 자기돌봄이 필요한데, 어떻게 해보실래요? 대신 스스로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좀 더 너그러워지세요. 조금 더 이기적이 되어봐요. 뭐 사실 둘 다 잘 할 순 없어요. 그건 좀 운이 좋아야하고. 둘 다 엉망이 되지 않는 법은 있지만, 꽤 어려운건 사실입니다.
양립된 갈등상황 속에서 명쾌하게 떨어지는 해답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고구마같은 결론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답이 아닌 생각을 원하고 공감대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이 긴 여정의 모험은 생이 다할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작은 희망이 있다면 옮긴이 후기에 나오는 어술러 르 귄의 마지막 인터뷰 중 마지막 대목에 있달까.
"제가 말하려는 건 작가들이 수십 년을 살아가는 동안 아기들은 영원히 아기로 머물지 않는다는 겁니다. 작가로서 당신의 수명은 당신의 아기보다 훨씬 길어요."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라면 충분히 읽어볼만 하고, 이 세계에 발을 들이 이들에게도 함께 할 것을 권한다. 동시에 선택적으로 이 모성의 세계를 기꺼이 거부한 이들에게도, 결혼의 세계관속에 자신을 던지기를 거부한 이들도. 한 사람이 또다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 괜찮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슬며시 권해보는 바다.
이 책은 창조적 작업을 하는 여성들이 그들의 일과 양육을 어떻게 병행했는지 엄마였던 여러 여성 작가와 예술가들의 삶 속에서 그것의 여러 양립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결코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양육과 창작의 올바른 양립 가능성에 대한 끝없는 갈구와 가능성을 제시하며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임을 보여줄 따름이다.
사람은 어떤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준비와 연습이라는 과정을 가진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일은 반드시 존재하고 그중 하나가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일 것이다. 설령 다른 아이를 돌봐준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직접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양육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양육은 환경이나 처해진 상황에 따라 모든 사람이 똑같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양육의 과정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여성들은 주체가 아닌 주변인으로 밀려나고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 모든 관심과 초점의 대상이 된다. 아이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배우자 혹은 타인들을 향해서도 여성은 자신을 내세우지 말 것을 강요당한다. 이것을 모성 플롯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여성의 창조적 자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20세기를 살아간 엄마들 대부분은 역사와 관습이 정하고 제시한 이러한 이야기에 따라 살았다.
작가가 보여주는 여성 창작자 중 어슐러 르 귄(1929~2018)은 세 아이의 엄마였지만 글을 쓰기 위해 모성 플롯을 탈피하기 위한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남편 찰스는 자신을 우위에 둘 것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녀가 글을 쓰는 시간 동안에는 당연하다는 듯 아이들을 돌보아 그녀의 창작 시간을 존중해 주었다. 그렇기에 엄마가 된다는 점은 어슐러를 자신의 삶에서 밀어내는 것이 아닌 삶의 중앙에 오롯이 자리 잡게 했다.
어슐러는 자신이 창조한 개인적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길을 육아를 통해 쉽게 찾았기에, 글을 고립된 상태에서 써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녀는 아이들의 행복과 글의 완성도 모두를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삶은 힘들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말하며, 결국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나 장소가 아닌 창작 가능한 시간 동안의 집중적인 창작 활동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컬러 퍼플』의 작가 앨리스 워커는 인종 간 결혼이 불법이었던 시절 그녀의 정치적 열정과 문학에 대한 감정에 반한 유대인 법대생 멜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한 번의 유산 뒤 임신에 성공한 앨리스는 임신으로 인한 생리적 반응과 우울증으로 고통받는다. 이때의 경험 즉, 몸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체험과 그녀를 냉대하는 의료진, 모욕, 두려움 등은 앨리스의 소설에 도움이 되었다. 출산과 육아에 대한 암울한 시각은 그녀의 초기 소설 세 편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어슐러의 남편 찰스와는 달리 육아에 대한 것을 앨리스와 공유하지 않았던 남편 멜과 극심한 인종주의가 만연했던 당시의 미국은 그녀로 하여금 심한 고립감과 우울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피난처는 글을 쓰는 창조적인 행위이었다.
그녀는 흑백 혼혈의 딸에 대한 사랑이란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흑인인 자신의 삶이 가져다주는 협소한 가능성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라 생각해 자유라는 이름하에 딸 리베카는 홀로 남겨 두길 반복했다. 하지만 딸 리베카의 입장에서 이 자유는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 위협적인 것이었다. 성인이 된 리베카는 자신이 앨리스의 창조적 작업에 밀려났었다고 말하며 어머니와의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앨리스는 여전히 모성에 대한 모호한 신화를 거부하며 성공적 커리어를 위해 모성과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작가는 앨리스 닐, 도리스 레싱, 오드리 로드, 수전 손태그, 앤절라 카터 등 20세기에 창작자로서의 삶을 살며 동시에 어머니였던 여성들의 다양한 삶 속에서 그들의 성공과 모성적 삶의 공존이나 이율배반 등을 보여주며 양육과 창작자로서의 조화로운 삶이 가능한지 혹은 그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한 사람을 특정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닌 작가가 제시하는 각 장의 주제에 따라 여러 여성 창작자들의 삶 중 알맞은 이야기들을 믹스해서 보여주는 전개는 모성적 삶과 창작자로서의 삶을 넓고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능동적으로 사고하게 만들고 있다.
어머니로서의 삶에 창작자로서의 삶을 덧입혀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을 통해 여전히 존재하는 모성 플롯을 극복하거나 혹은 그것과의 타협점에 대한 힌트를 구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구상하여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는 전기 작가이자 비평가인 줄리 필립스가 10년간의 자료 조사와 정리, 집필을 거쳐 출간한 책으로 '자기만의 방'에서 '고독한 천재'의 호사를 누릴 수 없었던 여섯 명의 여성작가들의 창작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 사랑스러운 방해자는 바로 그들의 아이를 말한다.
독자들이 상상하는 예술가 내지 작가는 어떤 모습일까? 프루스트는 모든 틈을 막은 방에 처박혀 글을 썼고 예이츠는 자기만의 탑에서 내려오다가 본인의 두 자녀와 마주치고는 '얘들은 누구지?"라고 말했다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음식 냄새의 미묘한 변화마저 사고를 방해할까 봐 수 주 동안 같은 샌드위치만 먹었다 한다. 한국의 어떤 남성 소설가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 호텔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 모든 사례를 거칠게 엮어 공통된 이미지를 뽑아낸다면 모두 가정생활과 집안 일과 양육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방으로 들어간 이미지이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사소한 허드렛일에 몰두해야 하는 여성의 단절적 삶"을 살아내는 와중에 "생각의 기류에 올라타 속도를 올리며 날아갈 자유"를 헛되이 갈망했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작가는 스스로의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아주 어렵게 아이들을 떼어내기에 성공했을지라도 아이들은 문 너머에 존재하고 있다. 그들의 존재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나오미 미치슨은 런던의 한 공원에서 유아차에 판을 깔고 그 위로 겨우 글을 써내려 갔던 나오미 미치슨, 가스레인지 앞에서 저녁밥을 먹으며 주방에서 플롯을 구상한 셜리 잭슨, 차가 정자할 때마다 무언가라도 끄적이고자 수첩을 쥔 채 출근길 운전을 한 토니 모리슨. 이 모습들이 아이를 키우는 작가의 모습이다. 고독이라는 환희를 누리며 한 점의 구름처럼 떠돌며 글을 쓸 호사 따위는 없다.
저자 줄리 필립스는 전기의 형식으로 양육에 대해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담아내고자 한 것들이 이러한 생생한 경험적 특징이었다 한다. 양육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삶의 전체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 프로이트는 여자가 엄마가 되면 그녀의 이야기가 끝난다고 생각했지만 책의 저자 줄리 필립스는 고립된 작가에 대항하는 이미지를 내세우려면 방해는 물론 변화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섯 명의 여성작가는 앨리스 닐(1900-1984), 도리스 레싱(1919-2013), 어슐러 르 귄(1929-2018), 오드리 로드(1934-1992), 앨리스 워커(1944~), 앤절라 카터(1940-1992)이다. 이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엄마가 됐는데, 배우자 유무, 자산, 양욱에 있어 주변의 도움 등은 제각기 상이했다. 공통된 패턴이나 하나의 길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들 모두 20세기를 살아간 엄마들로 모성 플롯을 통해 해석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모성 플롯이란 전통적 결혼환계와 출산이 곧 여성의 성취이자 삶의 목표이고 경제적 생존 수단이자 정서적 지지에 대한 보장을 말한다. 여성들 중에 모성 플롯이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살지 않은 경우 자신에게 어떤 선택지가 주어져 있는지 예민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날카로운 지성을 가졌던 에이드리언 리치도 본인의 책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에서 가족 중심의 1950년대를 살아온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내가 무얼 원하는지, 내가 무얼 선택할 수 있고 없는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모성 플롯은 창조적 자아를 위해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내가 낳은 아기들은 엄마 자아 전체를 요구하고 아이를 출산하기 전 겪어 보지 못한 생경한 자아에 상당 수준의 자기희생을 수반하여 요구한다.
여섯 여성 작가들 모두 모성 플롯을 따르는 데서 시작해 모성 플롯과 결렬이 시름했고 모두가 모성 플롯에서 벗어났다. 어울리지 않게 일과 양육을 겸하면서 그들은 배우고 싸우고 고통받고 성장했다. 20세기 여성 창작자들은 자신의 자녀, 남편, 애인들에게마저 이타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고 여기에 맞서 싸워야 했다. 남성 작가들이 자기만의 방에서 오로지 창작에만 매달려 칭찬과 인정을 성취할 때 여성 작가들은 이타적이지 못한 '창조'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전통적 결혼 관계 안에서 양육은 이들 여성을 정서적으로 갉아먹었고 창작에 필수적인 독립심을 빼앗겼다.
부모가 되는 일은 자기 상실과 자기발견을 거듭 넘나들기 때문에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고 부모가 되는 일에서는 자신의 은밀한 광기, 파괴된 모습, 격분과 생생하게 대면하여야 한다. 모성이란 하나의 정체성이었고 모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성인기에 발생하는 가장 심대한 정체성의 변화이다. 부모가 된 여성은 아이와의 관계 스스로와의 관계를 계속하여 재정의하며 맺어가야 한다.
저자는 결론에서 이 여섯 여성작가들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 번째는 창작활동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이고 두 번째는 바로 자기(Self)이다. 여성 작가들은 자신이 예술을 창조할 권리가 있다는 확신과 자기 둘레의 경계선을 만들어야 했다. 여성 작가들에게 창작활동은 "작은 이기심"의 연속이었다. 가족을 앞에 두고 문을 닫는 이기심,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현실 세계를 잊는 이기심, 무표정한 익명의 연인인 독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기심, 단순히 할 말은 하는 데서 솟는 이기심.
옮긴이 박선영은 책 말미에서 우리를 위로한다. 우리 시대의 양육은 르 귄 때와 달라 아이가 일곱 살이 되어 학교에 입학한다고 해서 그 과업이 종료되지 않고 엄마의 시간은 끝없이 지체되는 시간이라 말한다. 돌이킬 수 없는 모성의 함정에 발이 꽁꽁 묶여 있다면 울지 말고 더 오래 살면 된다고 말이다. 앤절라 카터가 연애와 결혼과 학업과 직업적 성공과 불륜과 이혼과 출산이라는 삶의 시퀀스를 완전히 새롭게 조립해 자기만의 버전을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삶의 시퀀스를 다시 짜고 다르게 배열된 생애 주기를 살면 된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여, 오래 살지어다."라고 위로한다. 나는 이 대목을 우리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읽어 줄 것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성의 창작, 글쓰기와 관련한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을 손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단연코 버지니아 울프일 것이다. 그녀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누구보다 통렬하게 그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번에 만나 본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머니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 그 사이에서 과연 어떻게 양립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창작활동을 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여전히 참 쉽지 않은 삶이구나 싶다.
모성과 창조성,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 때로는 질타를 받기도 하면서 어느 하나를 쉽게 놓을 수 없었던 삶을 살았던 여성 작가들의 삶이 비단 이 책에 언급된 이들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앨리스 닐, 도리스 레싱, 나오미 미친슨, 루이스 어드리크, 어슐러 르 귄, 에이드리언 리치, 엘리자베스 스마트, 수전 손태그, 오드리 로드, 다이앤 디 프리마, 셜리 잭슨, 앨리스 워커, 토니 모리슨, A. S. 바이엇, 로나 세이지, 마거릿 애트우드, 앤절라 카터 등의 명사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들이 지금 그렇게 평가받기까지 어떤 치열한 삶을 살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책이기도 한것 같아 새삼 책을 보면서 나의 지금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나태한 삶, 나만 힘든가 싶은 삶을 살고 있다면 또 반대로 일과 육아의 양립이 어려운 가운데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따끔한 질책 같은 조언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고.
솔직하게 담아내되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 책의 매력이라 어떻게 보면 다큐를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여전히 여성이기에 강요된 모성애가 존재하고 부성애보다 더 큰 모성애가 요구되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각자가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그 상황을 이겨내는 모습은 참 대단하다 싶어지며 동시에 그 순간 그녀들이 포기하지 않고 창작을 이어왔기에 누군가에게 그 모습마저 힘과 용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