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형식의 책을 종종 읽는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의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했냐」 이슬아의 「새 마음으로」 최현숙의 「할매의 탄생」처럼 내가 사는 동네에 한 명씩은 꼭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읽을 때 나의 감정은 일정한 틀로 집약된다.
놀람, 감탄, 경이로움, 존경심…
“나도 이런 굳센 마음으로 살아야지” “나도 이 분처럼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아야지” “나도… 나도… 나도…”
그러다 문득 내 자신에 참담한 심정이 될 때가 있다.
“나는 이 분처럼 이렇게 힘들지 않아서 다행이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와 비교하며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들. 어떨 때는 나의 과거와, 가끔은 지금의 나와, 때로는 미래의 나와.
행복의 지표는 왜 이리 상대적인가. 이렇게 내 삶을 상대 평가하려고 책을 읽는 건 아닐텐데, 독서의 목적이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아… 나는 오늘도 독후감이 아니라 반성문을 쓰고 있다)
정성은 대화 산문집 「궁금한 건 당신」 서평단으로 뽑혀 책을 받은 날은 아이와 동남아여행을 떠난 날이다. 아이와의 여행이 늘 그렇듯 열흘간의 외유는 즐겁고 힘들었다. 어쨌든 내 일상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에너지가 채워지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부랴부랴 책을 읽었다. 부모의 마음을 전하는 남성 택시기사, 육아와 일 모두에 가치를 부여한 공인중개사 여성, 가족 결핍이 있는 삶을 헤치고 뉴욕에서 세탁소를 하는 여성. 작가의 열린 마음과 귀를 통과한 덕분일까. 이들의 이야기는 곧바로 내 마음으로 직행했다. 삶의 태도와 궤를 설정할 때 이분들을 떠올리면 될 것 같았다.
‘몸 쓰는 일에 대하여 : 포장이사 고수 조대원’ 편을 읽다가 움찔했다. 사는 게 바빠서 스타벅스도, 해외도 가본 적이 없다는 대목을 읽다가 휴양지의 뜨거운 태양에 까맣게 탄 내 피부를 들여다보았다. 도쿄에 오픈한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땡처리항공권을 검색한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는 건 바쁘고 고달프다. 나도 아이와 도쿄에 가려면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려야 한다. 일거리를 더 받아내야 한다. 뱜을 새는 날이 더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같은 노동이라도 누군가는 유희가 아닌 생존을 위해 하는 것일 수 있다. 이 맥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책을 읽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멈칫하게 되는 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신은 착한 사람이군요 : 공무원 이승훈(가명)’ 편에 이런 문장이 있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많이 애썼던 것 같아요”(p. 70)
이거였나보다. 이 책에 나오는 20여 명의 ‘당신’들의 삶의 이야기는 그 형태도 질감도 다르다. 누가 더 행복하고 불행한 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평가지도 아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삶의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다. 추측컨대(아니 확신하컨대)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보다 훨씬 오래 살아온 나는 어떤가. 나 또한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며 산다. 과거에도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책을 읽다가 멈칫하는 순간도, 누군가의 이야기에 별 생각없이 지나치는 순간도 모두 애쓰고 있는 내 일상의 부분이다.
결국 모든 이야기의 발화점은 내가 있는 바로 이곳이어야 한다. 정성은 작가는 그 이야기가 뻗어 나가는 방향을 함께 바라봐주는 사람이다. 그 능력이 얼마나 특별한지는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궁금한가? ‘궁금하면 500원!’(아, 이거 모르면 세대차이 나는 건데)이 아니라 정성은 작가를 호명하시라. 그가 쓴 책 「궁금한 건 당신」을 읽어 보시라. 어쩌면 그 안에 당신의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마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