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쓰기를 이용한 자기치료에 관심이 있다. 나아가 글쓰기를 이용한 치료활동을 전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문학치료로 박사를 수료한 박성미 작가의 이력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궁금했다. 어떤 식으로 트라우마적 글쓰기가 이루어지는지, 일상적인 글은 어떻게 쓰시는지, 자문화기술지와 관련한 논문은 어떻게 쓰였는지, 그리고 나도 이 책을 읽고 나의 아픔을 일깨우며 더욱 행복할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으로 2번 더 읽어야 한다. ㅋㅋ
애매모호하게 들릴 지 모른다. 더 읽어야 한다는 말은 더욱 자세히 읽어보고 싶다는 뜻이다. 횟수가 2번인 이유는 어머니께서 "넌 세 번은 읽어야 해"라고 하셨기 때문이고.
(부끄러운 나의 독서 습관. 쉬이 책장을 넘긴다. 일단 읽고 본다. 공감과 이해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좋은 글, 좋은 책을 만나면 여러 번 읽어야 한다.)
프롤로그가 좋다.
영화 <블랙스완>을 보진 않았지만 나의 블랙스완적 순간은 언제인지 생각했다.
블랙스완의 정의
1.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 강렬한 사건
2. 내가 외면하고 싶은 내 그림자(어두운 욕망, 열등감, 질투 등의 추악한 감정 혹은, 사건)
7p
무지 많다. 어렸을 때,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그 이후, 그 이후, 그 이후....
그런데 이제까지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많이 치유된 것 같다. 모든 사건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내가 글을 쓰면서 치유될 것을 안 것도 있고, 몰랐던 것도 있고.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더 밝은 미래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당면했던 그 문제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끄러운 과거도 들춰내야 한다고 믿었고.
잠깐! 이게 바로
델뵈프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심리학자는 어둠 속의 문제에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으면, 자신의 약점까지도 고백해야 한다.>
프로이트 전집 4 <꿈의 해석>
의 순간?
물론 난 심리학자가 아니지만 말이다! 하핫
요지는 나의 약점을 고백하는 글쓰기 과정을 통해 내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조금 더 나아질 그리운 미래를, 고통이 아닌 다른 삶을 경험해보고 싶어하는 상황이 내게도 있었다, 이 말이겠지.
나의 트라우마적 글쓰기는 이렇게 기술적인 문체보다는,
일정 부분 문답 형식으로 쓰였지만 말이다.
(처음 자신에 대해 글쓰기를 해보려는 사람은 이러한 접근법도 좋은 것 같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뭘 좋아하는지 또 뭔가를 싫어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나 ...
링크해 둔 글은 시리즈로 게시되었다. (무려 9회?!?)
나에 대해 알고 싶다는 연유로 작성되었으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그 생각을 품은 내가 되도록 한 기회였던 글.
때문에 트라우마 고백은 일부이고, 나의 취향이나 선호를 드러내는 부분도 다수 있다.
시간이 무려 2년이나 지났으니, 다시 해 보는 것도 좋겠다.
디자이너 임선생님께서도 근래 본 책 중 디자인이 가장 좋다며(특히 표지가) 극찬하셨다. 나는 이 페이지가 참 좋더라. 이미지도, 제목도.
제목의 괄호를 읽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안에 '나'를 넣어 읽었다.
나는 나로부터 갇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로부터 나를 파괴할 권리를 얻는다.
내가 나로부터 해방되려면
나를 가장 잘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옛 말이 여기에도 적용된다는 이야기~
갇힌 괄호에 '나'를 넣어 읽으면
언젠간 비뚜름해진 괄호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빛처럼
그렇게 뭉근해진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걸까?
작가님의 이야기는 참 마음이 아팠다.
그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깨끗한 문장으로 적어내려가면서
얼마나 많이 혼자 우시고, 얼마나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얼마나 많이 불안해하셨을까?
고통은 겪은 만큼 체감된다.
작가님이 겪은 고통의 100%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물론, 그럴 수도 없지만,
내내 가슴 안이 망그러졌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이 개인의 내면을 무너트려도,
고통에 대한 의미를 구축하는 작업을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그러한 점에서 문학치료가 분명 필요한 지점이 있다.(나도 정말 배우고 싶다)
트라우마 사건은 우리에게서 언어를 빼앗아가고 고통스러운 시점에만 머물게 하지만, 증상을 통해 전해오는 메시지를 읽어내려 한다면 우리는 다시 트라우마로부터 언어와 현재에 대한 감각을 되찾게 된다. 이는 증상 경험에 대한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다.
262p
고통은 자기만의 고유성을 체험하는 과정이지만,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은 사회로부터 연결감을 회복할 수 있게 한다. 고통을 매개로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외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이야기 나누며, 고통을 이야기 속에서 흘러가게 해야 한다. 고통을 이야기 속에서 흘러가게 하는 것이 자기서사의 변화를 가져온다.
(중략)
비로소 내담자 스스로 자신이 고통보다 큰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263p
이 아래부터는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표시해 둔 부분이다.
귀여운 상상, 와! 싶었던 부분을 소개한다.
생각이나 느낌을 강아지라고 생각하고, 한 곳에 강아지를 모은다는 상상을 하라고 했다. 한 곳에 강아지를 모아놓아도 호기심 많은 강아지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금세 딴 곳으로 이동한다. 명상할 때 나를 방해하는 생각도 그러한 강아지처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라는 것 같다.
142p
프로이트가 싫었다. (중략)
남성성이란, 정말 인간의 정상성 기준으로 삼아도 되는 것일까?
앞으로 여성 프로이트가 나온다면, 그때에는 억압받은 남성성으로 히스테리 질환을 겪게 되는 사람들을 그릴 수 있을까? (이걸 sf로 쓸 수 있겠구나!)
153-154p
두고두고 다시 읽어보고, 나도 이렇게 글을 써 보고 싶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을 위한 회복과 치유의 심리 에세이!
조금 어렵다고 느껴도 마지막 부록에 실린 자기문화기술지에 관한 논문은 꼭 읽어보시라.
나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논문을 써보고 싶다는 학구열이 들끓는다.
건국대 문학치료 과정에 대해 궁금증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다.
불안이 젖은 옷처럼 달라붙어 있을 때,
옷을 벗어버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가장 빨리 젖은 옷을 말리는 방법은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불안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임을 깨닫고
있던 자리에서 나와 햇빛도 받고 바람도 쐐고 그렇게 거닐다 보면
어느새 편안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불안으로, 그러한 형태로 말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갑자기 <젖은 생각>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젖은 생각 / 권현형
마른 빨래에서 덜 휘발된 사람의 온기,
달큰한 비린내를 맡으며 통증처럼
누군가 욱신욱신 그립다
삼월의 창문을 열어놓고 설거지통 그릇들을
소리 나게 닦으며 시들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며
나는 자꾸 기린처럼 목이 길어진다
온 집안을 빙글빙글 바람개비 돌리며
바람이 좋아 바람이 너무 좋아 고백하는 내게
어머니는 봄바람엔 뭐든 잘 마르지 하신다
초봄 바람이 너무 좋아 어머니는
무엇이든 말릴 생각을 하시고
나는 무엇이든 젖은 생각을 한다
빨래가 불안이라면, 빨래를 젖게 하는 건 젖은 생각이다.
우리는 바람이 좋으니 빨래를 말릴 생각을 하자.
나와 우리와 이 세계를 둘러싼 모든 희망차고 행복을 주는 것들에 관심을 넓히는 일은
나를 둘러싼, 나보다 작아도 한참 작은 불안을 인식하고 기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게 내가 가냘프게나마 삶에 매달릴 수 있는 건 글이다. 글쓰기는 내가 어제를 견뎌 오늘을 맞이할 수 있게, 고통으로 끊어질 뻔한 시간의 틈을 이어주었다.
135p
내게도 그랬듯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글쓰기의 축복! 나는 오늘도 이 책을 읽고 하나를 더 알고 나를 더 알아서 행복해졌다.
+) 작가님 관련 인터뷰 추가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인문 #불안이 젖은 옷처럼 달라붙어 있을 때
들어가며
제목을 보고 읽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 책은 정말 오랜만이였다.
젖은 옷이 달라 붙은 찝찝함...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불안이라는 감정을 이 상황에 비유할 수 있는지..
젖은 옷을 벗어버리고 싶었던 나는 책을 안 펼칠 수 가 없었다.
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어린 시절의 고통이 회복되지 못한 채 현재 이르기 까지 어러형태의 정신적 혼란 및 신체적 질병을 통해 트라우마가 끊임없이 소환되는 경험을 겪으면서, 고통과 트라우마 외상 후 성장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저자는
살아있는 모든 이에게 존재하는 그림자는 겉으로 추구하는 사회적 페르소나와 다르게 '내가 외면한 나의 모습'이다.
내 안의 그림자를 억누르기만 한다면, 그림자의 힘은 더욱 강하게 나를 잠식한다.
우울이 될 수도 있고, 불안이 될 수 있다. 강박이나 공황장애로 극심한 고통을 초래할 수도 있다.
융은 내면의 그림자 존재를 인정하는 것, 다독여주는 것이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라고 했다.
저자는 내안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과정을 (영화 블랙스완에서 모티브를 얻어) 블랙스완이라 정의내렸다.
블랙스완
1.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 강렬한 사건
2.내가 외면하고 싶은 내 그림자
<어두운 욕망 열등감 질투 등의 추악한 감정 혹은 사건>
인상 깊은 구절
1.
이렇듯 아픔은 존재를 알게 한다. 건강하다면 나에게 폐가 있는지도 전혀 느끼지 못했겠지만, 아프기 때문에 나에게 있는 것을 느끼고 알게 한다.
<중략>
글을 쓰기전에는 내가 어릴 때 상처받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며 우려했는데 글을 쓴 이후에는 내가 변화했음을 깨달아 '편안함에 이르렀다.'
내가 있는 곳이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라 여겼는데 가만히 어둠을 들여다보니, 바다 위에 달빛으로 반짝이는 윤슬이 보였다.
달빛의 윤슬을 발견한 뒤로는 어둠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2.
트라우마 글쓰기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지금도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치료와 더불어, 트라우마에 대한 글을 쓰기 바란다.
트라우마는 감정으로나 가득 차 있고,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정보 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기억의 한 지검을 선택해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기억의 빈틈을 찾아내는 동시에 트라우마 사건이 나에게 미친영향에 대해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 경우처럼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치료효과에 있어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편이 훨씬 좋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다 쓰고 버려도 좋다. 트라우마 글쓰기에 있어서 옳거나 정확한 사실관게를 파악할 필요도 없다 그저 글을 통해 기억에 닻을 내려 안개를 헤치며 잠시 살펴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3.
트라우마 사건은 우리게에서 언어를 빼앗아가고 고통스러운 시점에만 머물게 하지만, 증상을 통해 전해오는 메시지를 읽어내려 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 트라우마로부터 언어와 현재에 대한 감각을 되찾게 된다.
추천하는 독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합니다.
?우울한 고민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합니다.
후기
관심있게 읽었던 부분은 부록에 있는 논문이였다.
작가는 '자문화 기술지'라는 논문형식을 통해
성장 과정에서 이인증, 성인이 된 이후 기흉, 자궁내막증, 난임 다양한 육체적 통증 뿐만 아니라
본인의 트라우마인(1.아동기 트라우마의 영향 /2.외환 위기 /3.젊은 여성 환자로 살아가며 경험한 사회적 인식등)
자신의 트라우마가 어디서 왔는지 어떠한 사건 때문에 발생했는지 그 트라우마의 영향들을 논리적으로 구성하였다.
우울한 감정으로 책을 읽으니.. 우울함으로 가득 찼던 내 감정을 개선하는데 많이 도움이 되었다.
나는 서평을 하기전에 책을 2번 이상 읽고 게시하는 편인데,
보통의 감정일 때 읽을때와 지금처럼 디프레스한 감정일 때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두 가지 감정일 때 총 2회독 해보는 것을 추천 드린다.
괴롭다고 생각만 하지말고 괴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저자는 명상을 도전해봤다고 한다.
명상을 지속하고 바뀐점은 평안해졌다고 한다. 내일은 한번 명상을 해봐야겠다.
#인문 #불안이젖은옷처럼달라붙어있을때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다양한 경험들 중에서 어떤이는 별일 아닌거처럼 자나가고 또 어떤 이는 너무 괴로워서 힘들어한다.
이런걸 보면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의 강도는 다른것 같다.
그 감정을 컨트롤 하는 것은 무엇일꺼??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감정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동안 나와 비교하며 나는 어떤가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울과 불안으로 가끔 힘든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겠지 하며 지나쳐버렸는데
그게 지나쳐서는 안되는 마음의 신호였다는걸 알게 되었다.
속은 힘들어서 "나 좀 봐줘 하고있는데" 겉은 "웃으면 괜찮아 정말 괜찮아" 하며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러면 나의 마음도 괜찮을거라 최면을 걸고있었던 것이다.
괜찮다는 가면속에 있으면 정말 별일 아닌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숨을 쉬고 살수있으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힘들었다. 나의 불안한 마음이 자꾸 올라와서 나를 우울로 가득 채웠다.
한동안 마음이 너무 어두웠다. 감쳐둔 어두운 마음이 올라와서 가끔 감당하기 힘든 시기도 있었는데
그러고 나니 조금은 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않아 혼자 조용히 조용히...
저자는 그 고통을 아주 어두운 곳으로 밀어넣지 말고 조금은 꺼내서 보라고 하는것 같다.
그래야 나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스스로 알아내고 그 부분에 대해 대처할수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면서 그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나서 내가 조금더 클수있다는 것..
아이만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도 성장해야한다.
아이는 몸과 마음이 성장해야하고 어른은 마음이 성장해야한다.
나의 우울과 고통의 시작이 어디쯤부터에서 시작되었는지 원인이 무멋인지를 알아야
스스로 치유하고 그리고 회복 할수있으니 말이다.
나의 마음을 나의 고통을 감추려고 애쓰지말고 꺼내서 말려봐야겠다.
습하고 어두운 곳에 넣어두지 말고 꺼내서 햇볕도 보고 바람도 쐬어서 건조하게 만들어보자.
밝음도 어두움도 나의 마음이니 서로 서로 잘 다독여서 지내봐야겠다.
나는 엄마의 언어로는 성질 머리가 더러운, 남편의 언어로는 까탈스러운, 나의 언어로는 예민한 사람이다.
남편과의 산책에서 뱀, 멧돼지, 죽은 새, 쥐 등은 항상 나의 눈에만 보이며, 사람들이 건내는 단어 하나에 숨겨진 뒷 마음이 훤히 보이고, 거짓말은 열에 아홉 쯤은 가려낼 수 있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그날의 학교 생활이 대충 짐작이 되고, 열이 나거나 병원에 가야 할 증상들도 하루 또는 반나절 전 쯤이면 알아차린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진심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클수록, 나와 가족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나는 더 예민해졌고 예민함을 넘어 불안을 안고 살게 되었다. 또 그 불안은 원인모를 신체적 고통으로 이어졌다.
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예민할 뿐이야, 그냥 더 안전하기 위해 조금 불안할 뿐이야 스스로 다독이며 위로하지만 젖은 옷을 입고 있는듯한 찝찝함, 불쾌함에 만난 책.
저자는 어린 시절 고통이 회복되지 못한채 성장 함으로써 불안, 고통 신체적 증상으로 발현된 병증들로 피폐해 지게 되고, 자신을 억누르는 그림자와 싸워 이기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마주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고 글쓰기를 통해 고통을 성장과 성공으로 바꾸려 노력한다.
저자의 신체적 고통을 통해 난 이정도는 아니잖아라고 위안을 삼으며, 나 불안해 미칠지경이라고 스스로 인정할 용기가 없는 모습에서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나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나의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시점에서부터 객관적인 글쓰기를 해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의 그 시점은 어느 부분일까?
부록으로 실려 있는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논문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YES24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불안이 젖은 옷처럼 달라붙어 있을때"
박상미 지음
언어를 잃은 짐승소리를 낸다.
그런 나를 관찰하던 나로 분리되었던 느낌.
블랙스완은 일어날 가능성은 적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작가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짓밟히는 장면을 보고서 심각한 트라우마에서 블랙스완까지 경험하였다.
나 역시 2018년 12월 17일 오후 4시 42분에 그런 끔직한 경험을 했다.
직장에서 승진은 계속되고 경쟁도 없고 탄탄대로 순탄한 하이웨이로
즐겁게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회사의 대표는 마무런 특별한 사유없이 밑에 직원은 타부서로
나는 당장 내일부터 팀장이 아닌 팀원으로 강등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머리에 벼락을 맞은 느낌이다.
벌써 5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 느낌은 머릿속에서 지울수 없다.
그 이후 5년간은 늦은 나이에 퇴사와 입사를 번복하면서 마지막을 걸어가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쉬지 않고 일은 한 결과는
갑자기 아침에 일을 하면서 오른쪽 눈이 형광등이 나간것처럼 일시에 눈이 멀었었다.
건강에는 어느 정도 자신하고 있었으나 한꺼번에 무너졌다.
바로 입원해서 MRI 검사를 했다. 다행히 이상은 없었으나, 친구의 조언대로 일주일간 무작정
휴식겸해서 입원했다.
일주간은 모든 생각을 내려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판단은 옳았다.
그 이후에는 사무직에서 현장의 잡부일, 막노동을 1년간 했다.
오히려 정신은 맑아졌다.
다행히(?) 지금은 다시 재입사해서 8개월째 연구분야 사무직을 하고 있지만, 지난 세월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당시 덕분에 10년 일찍 삶에 대한 성숙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나에게 역경을 주신 주위 분 들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 생각한다.
지금도 가끔씩 꿈에서도 나쁜 생각에 트라우마를 느낀다.
그리고 나 자신을 관찰하는 제3의 나 자신도 바라본다.
다행인 것은 이제 직장에 연연하지 않는 삶의 지혜를 익혀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50대에 이제 사회생활을 접을 수 있지만,
막상 회사 밖을 나가보니, 또다른 인생의 삶을 경험했다.
50대에 저와 같은 분들께 내 인생의 경험을 나누고 싶다.
오늘 하루도 감사히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