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러닝
『나이트 러닝』의 인물들은 모두 생에 유일하게 빛났던 무언가를 ‘상실’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 친구, 가족에서부터 꿈, 젊음, 추억, 낭만으로 다양하게 확장되지만, 소설은 그 상실의 순간들에 침잠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상상하던 미래가 지금이라는 걸 믿을 수 없다”라고 푸념하면서도, “우리는 아주 작은 일에도 웃고, 달린다”라며 쾌활하게 한 걸음 나아간다.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잃어버릴 테지만 어김없이 시간은 흐르고 결국은 ‘살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의 응결 안에서 『나이트 러닝』이 보여주는 삶의 관성은 곧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된다. 한겨레출판 펴냄
염혜진 지음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얼룩, 주머니, 수염〉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담배를 든 루스》로 제7회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했다. 고양이 토란, 살구와 함께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올해부터 읽기 시작한 소설. 책을 읽기 시작한 지는 꽤 되었지만 이전까지는 과학, 언어, 에세이 등만 읽어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과정 속에서 무언가 유익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허구적인 소설은 읽지 않았던 것이다. 과학을 좋아하고 전공했기에 호기심에 SF 소설을 접하기 시작했고, 이후 소설에 더 손이 갈 만큼 재미있고 상상력도 커지는 느낌이다.
이번에 읽어본 소설은 한겨레출판의 <나이트 러닝>. 8편의 개성있는 소설이 담긴 단편집으로, 저자 이지는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작품이 당선된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사랑, 삶, 꿈 등을 이야기한다. 너무나 보편적인 소재이기에 어쩌면 더 다루기 어려울 수 있으나, 저자는 보편적인 소재로 이전엔 읽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소개한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편인 동시에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이트 러닝>부터 굉장히 신선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문체는 덤덤하고 무난하다. 이러한 점이 이 소설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나는 소설의 서평을 쓰다보면 책 속 줄거리들을 죄다 풀어내는 습관이 있어 최대한 줄거리와 거리를 두고 쓰곤 한다. 그러다보니 책 속 줄거리보다는 이를 아우르는 공기나 읽고 난 느낀점을 주로 쓰곤 한다. 이 책은 단편마다 무언가 마무리를 독자에게 던지는 느낌이 든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다음 단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 마치 "이야기는 계속 되지만 이제는 다음 이야기를 할 차례야."라고 말하는 기분이 든다. 이게 이 소설을 계속 읽게 하는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개성있는 8개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을 단숨에 읽어내려가게 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나이트러닝 #이지작가님
나는 우리가 멧돼지 떼 같다고 생각했다. 혼자는 다니지 않는 멧돼지 가족. 덩치만 크고 겁 많은 잡식성 동물. 달릴 수 있으니, 그래서 겁을 감출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잠시 생각했다. 누군가 감전돼도 함께 달리는 밤의 멧돼지들. (「나이트 러닝」, p. 28)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 이지 작가님의 소설집 『나이트 러닝』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애도에 대해 프로이트는 "애도할 때 빈곤해지는 건 세상이지만, 우울은 자아가 빈곤해진다"고 했다. 지난 신형철 평론가님 강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애도란, 나의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너의 나를 보내는 것"이란 말.
죽은 사람을 혹시라도 볼 수 있을까 봐 팔을 자르던 인물이 떠올랐다. 잘린 팔들이 있던 곳으로, 밤의 언덕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비슷한 상실의 경험을 지닌 두 인물이 나누던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나도 그 마음을 알아요. 팔을 자르는 마음."(p. 31) 마음이란 건 형태가 없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을 텐데, 가끔은 마음이 다독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에 드는 사람들이 그렇다. 죽음이란 게, 상실이란 게 어디서든 매일 소리 없이 일어나는 일이라서. 곁에 있는 사람의 슈슈, 숨소리가 나를 안도하게 한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내게서가 아닌 타인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이 뭉클했던 대목들이었다.
모두를 잡아끄는 중력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그것이 아버지와 저 같은 가족이라 해도 말이죠. 우리가 붙인 발의 무게는 그래서 각각 다 다른 게 아닐까요. (「모두에게 다른 중력」, p. 165)
어떤 애도는 슬픔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지만, 어떤 애도는 속죄처럼 느껴진다. 과거의 우리를 돌아보는 과정처럼. 이젠 네가 죽고 없으니 나 혼자 돌아보는 길이라서, 여기의 속죄는 "돌을 들고 직접 걷는(p. 113)" 일인 것이다. 왕릉에 누워 무덤 속을 상상하던 ‘나’와 애도를 위해 꽃을 사러 간 유구가 그렇다. ‘나’는 세상에 눈물이 가득 차서 무덤과 무덤 위를 걷는 우리의 몸들이 녹아 섞이는 것을 상상한다. 그렇게 섞이고 섞여 끝내 없어져 버린다면,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것도 영원히 오해하는 것도 다 용서가 될 것 같았다”(「우리가 소멸하는 법」, p. 138)고 생각한다. 라캉은 "사람은 자신의 결핍이었던 사람만을 애도한다"고 했었다. 우리가 상실에 아파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이 사랑했던 나로는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너의 나를 보내는 일'이 애도인 것임을 이 장면에서 불현듯 떠올렸다.
“주저앉아 울고 싶지만 일으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기에” 울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있다. 왜 상실과 슬픔에 잠겨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인 걸까. 상실이 휩쓴 세상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데, 하필이면 떠난 사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 사람뿐이라서 우리는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 노력을 죽은 사람들은 영원히 알지 못할 테지만, 이 슬픔의 행위는 결국 나만의 것이겠지만 우리는 무심코 다짐하고 마는 듯하다. “나는 두 묶음 사람”이지만 그래도 “일단 혼자 해보기로 했다”(p. 271)라면서.
우리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호기도 죽지 않고, 할머니도 죽지 않고 제리도 나도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천히 굳어져버리겠지. 제리는 캠핑카를 찾지 않을 거고, 나는 굳이 곰팡이를 노려보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에 어떤 죽음도 없다면,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나는 곰팡이도 수해도 가뭄도 무섭지 않을 거야. (「에덴―두 묶음 사람」, p. 244)
결국엔 모두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 지금의 관계와 일상에는 ‘끝’이, ‘결말’이 있다는 깨달음이 우리의 등을 내민다. 멍이 들더라도 계속해서 부딪히게 한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도, 그게 안 되어서 오해를 거듭하고 질문을 품어 보는 것도 다 우리가 죽음을, 상실을 무서워해서 나온 행동이라는 게 묘하다 사람들의 연약하지만 다정한 마음을 엿본 것 같다. 뒤표지의 우다영 소설가님이 쓴 문장이 인상 깊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외에 무엇으로 세상을 채울 수 있다는 듯이." 상실로 빈곤해진 세상을 채우는 게 도리어 슬픔이라는 깨달음. 각자의 마음을 그러모으는 것이 애도의 순간이라는 게 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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