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소설의 쓸모>는 제목에 이끌려 읽은 책입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소설도 적지 않게 읽어왔는데 그렇게 읽은 소설들을 어떤 쓸모로 사용할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다소 실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독후감 모음이었다는 생각과 여성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한 작가의 생각이 쉬이 와 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이라는 부제가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에게 부합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박산호 작가는 번역가이자 수필가입니다. 주로 범죄소설을 번역해왔기 때문인지 <소설의 쓸모>에서 다룬 17개의 소설들도 대부분 범죄소설들입니다. <너를 찾아서>라는 심리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소설의 쓸모>에서 다룬 17개의 소설들 가운데 유일하게 폴라 호킨스의 <걸 온 더 트레인> 하나를 읽었을 뿐입니다. 추리소설을 탐닉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박산호 작가와는 관심이 겹치지 못한 까닭인 듯합니다. <걸 온 더 트레인>을 읽은 것은 열차와 관련된 책을 써보려 생각할 무렵에 읽은 것입니다.
<소설의 쓸모>에서는 작가가 살아온 날들을 정리하기 위하여 작가가 번역을 하거나 읽은 소설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이라는 부제가 적절한가 싶었습니다. 외국 작품을 우리말로 옮길 때는 원어의 의미에 걸 맞는 우리말을 찾아 써야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나의 주 양육자는 엄마의 엄마, 즉 할머니였다”라는 들어가는 글의 첫 번째 문장에서부터 분명치 않은 우리말을 만나고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엄마의 엄마를 할머니로 일반화한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라는 우리말은 나이가 든 여성을 이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어머니를 이르는 친할머니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외할머니라고 구분하여 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각설하고 매일 밤 외할머니께서 이야기를 해주셨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부러웠습니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나 외할머니 댁에서 머물던 날이 적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해주셨던 기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모님이 가끔 집에 찾아오셨을 때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던 기억은 있습니다. 이야기를 즐겨 해주셨지만, “이야기 너무 좋아하지 말어.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라고 말씀해주셨다는데, 아이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이중적인 말씀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앞서 작가가 여성주의적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합니다. “나는 전라도 출신이라서, 싱글맘의 딸이라서, 다시 내가 싱글맘이 되어서 차별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차별을 당했다는 것은 본인만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전라도 출신입니다. 젊어부터 전라도가 차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차별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자는 이렇게 항상 아이를 낳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저자의 생각에도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아이를 남성이 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는 일은 도구로서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특별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최근에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즈음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데 이는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삶의 의미는 현재의 상황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 볼 때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자녀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을 때의 심정이 과연 어떨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혼하지 않을 자유를 생각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세랑 작가의 <아라의 소설1>에서 인용했다는 “어떤 모퉁이를 돌지 않으면 영원히 보이지 않는 풍경이 있으니까”라는 대목이 이 책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와닿는 대목이었습니다. 물론 작가의 해석은 저와는 다른 듯합니다.
사람들은 소설이 쓸모없다고 말한다. 자기계발서, 실용서는 날개 돋친듯이 팔려도 소설은 영상화 되지 않는 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작가가 만든 허구의 세계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쓸모 없어 보이니까. 한 마디로 필요없으니까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소설은 정말 읽을 가치가 없는 것일까?
여기 이 시대의 소설의 쓸모없음을 단정짓는 이 담론에 강하게 거부의사를 표하는 책이 있다. 스릴러 소설 전문 번역가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로 글쓰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산호 작가이다.
『소설의 쓸모』에서는 17편의 소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그려진다. 이 책에 소개된 열 일곱 편의 작품 중 아는 작품도 몇몇 보이지만 읽지 않은 작품들이 더 많다. (나 또한 나름대로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데 모르는 소설이 더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렇지만 상관 없다. 작가가 작품을 소개할 때마다 대략적인 줄거리와 함께 우리가 생각할 부분을 짚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질문을 품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시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이 소설을 쓴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동유럽에서 잠시 근무하면서 억압적인 여성들의 환경을 보며 받은 충격 속에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현 상황을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고민하며 그 현상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기 위해 써내려갔다.
나는 소설이 쓸모가 되기 위해서는 독자 또한 '좋은 질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이 <소설의 쓸모>에서 소개된 <베이비 팜>에서 출산마저도 외주화 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그리는 이 모습에서 그냥 소설이니까라고 읽고 넘겨버릴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게 편의에 따라 외주화되는 이 시대에 "경험"마저 빼앗기는 이 시대에 대한 경고등으로 바라볼 것인가. 그것은 바로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에 따라 달려있다. 우리가 소설 속 그려진 상황을 이해하고 질문하고 비판할 때 소설은 바로 힘이 생기고 독자에게는 문해력이라는 힘이 길려진다. 그래서 정여울 작가는 에세이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줄게>에서 문학이야말로 문해력을 키울 수 있게 도와준다고 말한다.
이 『소설의 쓸모』에서는 저자의 시선으로 묻고 답을 찾아가는 저자의 사유가 담긴 책이다.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미처 그 언저리까지 생각하지 못한 저자의 혜안에 놀라기도 하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를 길잡이 삼아 보기도 한다.
소설은 쓸모있는가? 그건 바로 읽는 독자에 달려있다.
질문하고 생각하는 독자만이 소설은 풍성한 선물로 다가올 것이다.
대리경험 기회 제공하는 소설
소설이 우리의 삶에 어떤 유용성을 가져다주는지 소개하는 책으로, 번역자이자 작가 #박산호 가 소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책이다. 주로 스릴러를 많이 번역해온 작가가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소설이라며 추천한 소설 17편이 담겨있다.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다양한 사람의 인생을 대리 경험 할 수 있는 것으로,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똑같은 소설을 읽어도 각자 다르게 장면을 구성하여 기억하기 때문이다.
소개한 소설 중에서 루스 랜들의 「활자 잔혹극」이 기억에 남았고, 이 소설을 다룬 소제목은 '만약 세상이 그토록 문자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았더라면'이다.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한글을 읽지 못하거나 쓰지를 못하는 데,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환경에 의해 언어를 제때에 배우지 못한 경 소설의 내용과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