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의 고작은 남의 고작과 같을까? 너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실은 그에게는 전부가 아니었을까? 이것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없다고 할 만한 것이, 너에게도 언젠가는 생길지 모른다.」 _116
≪화장花葬의 도시≫ _2021
아! 진정 기괴한 장례 방식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화장 ‘火葬’이 아니다. 화장 ‘花葬’이다. 혹시 시신을 꽃 속에 묻는 걸 상상했다면 구병모 작가를 너무 쉽게 본 것이다.
「이 경우는 일상생활 공간과 거리가 있었다 뿐, 꽃으로 덮이기 전에는 흘러내리고 녹아내린 살점마다 피어난 유충을 보게 되니 생활환경에 좋지 않다고 일부 시민들은 고통을 호소한다.」_16
나도 소설 #소년이온다 속 시체 더미가 떠올라 순간 나도 모르게 ‘흐읍’하고 숨을 삼키게 된다. 태어나자마자 몸속에 나노 시드를 심고 사람이 죽으면 그 나노 시드는 사체를 영양분 삼아 그 사람의 생전의 모습(성품, 행위 등)을 품은 꽃이 피어난다. 살점과 유충을 걱정하며 찾은 도시의 묘지는 대부분이 색색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로 뒤덮여 있다.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던 성인의 몸에서 사악한 꽃이 피어나자 그의 과거에 대한 심층 조사를 실시했고, 리베이트를 비롯한 25건 이상의 강력범죄에 연루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착한 척하며 살아도 죽으면 다 뽀록 난다는 얘기다. 살아생전에 밝히지 못한 악행을 후에라도 밝힐 수 있다면 좋은 일일까? 그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은 급기야 우울과 좌절로 이어지지 않을까? 그 모든 짐은 남은 이들이 지게 되지 않을까? 한 도시에서 시작한 미래의 씨앗 프로젝트는 세 번의 세대가 지나기 전에 실패한다. 그 이유가 이 글의 핵심이고 반전이다. 14페이지의 단편이 이토록 강렬하고 굵직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니 놀랍다.
≪동사를 가질 권리≫ _2022
책의 제목이 정말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입에 붙지 않아 로뎀 입술? 로렘 잎숨? 여러 번 다시 보고 읽어 보기도 했다. 로렘은 분명 사람 이름일 거라 추측하기도 했다.
*로렘 입숨은 1500년대부터 인쇄와 조판 산업에서 레이아웃을 편집하는 데 쓰인 무작위 더미 텍스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Lorem ipsum dolor sit amet consectetur>
[‘빠르게 후루룩 읽히는 가독성 좋은 글’을 쓸 생각이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어느새 스토리텔링이며 콘텐츠의 홍수 한복판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낯설게 여겨야 한다]고 믿는 구병모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한다. 그가 주로 긴 호흡으로 문장을 쓰고 스쳐가듯 읽을 때 한눈에 문장이 흡수되지 않는 글을 쓰는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동사를 가질 권리>에서 글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민을 느낄 수 있다.
≪날아라, 오딘≫ _2018
「그동안 위기에 짓눌리고 상황에 중독되며 군령과 지시에 따라 많은 개체를 죽음의 길로 보내고서도 알지 못했던, 굳이 알아내지 않으려 애썼던 감각이 너를 보자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올랐고, 수없는 죽음에 얽힌 통곡과 원망과 비난이 내 귓바퀴를 할퀴었다. 나는 이 죄를 씻지 못할 것이다. 네가 온 날부터 시작된 이 환청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_89
전시 상황에 많은 동물이 총을 맞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얼마 동안 버티는지 등의 고통스런 실험에 사용되고, 일부 동물들은 훈련 과정을 거쳐 등에 폭탄을 짊어지고 적의 탱크를 폭파시키는 작전에 희생된다. 유기된 아이들로도 부족해지자 국가를 위해 가족 같은 반려동물들이 착출된다.
실제로 전쟁터에서 탱크 폭파 작전에 개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물은 전쟁에 어떻게 사용되나 』참고) 이 시간에도 실험실에서 약에 취해,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있는 동물들이 실존한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 당신 곁에서 꼬리를 흔들며 촉촉한 눈망울로 놀자고 말하는 아이를 자폭작전에 내 손으로 내몰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상상해보라.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마지막에 화자를 바꿔놓음으로써 작가가 말하는 바가 더 오싹하고 강렬하게 전달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역시 놀랍다!
≪예술은 닫힌 문≫ _2022
「... 그 가운데 간혹 어떤 팀들은 ‘목숨을 걸고’, ‘사력을 다해’, ‘이번이 아니라면 정말 죽음뿐이라는 생각으로’, ‘이걸로 진짜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같은 표현을 간단히 동원함으로써 자신의 간절함을 피력했지만, 그 죽음이 문자 그대로의 사망을 가리킨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_98
수많은 서바이벌 예능을 보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구도 현저히 줄어드는데 사회문화 전반은 더욱더 서바이벌 경쟁과 승자 독식에 미쳐 돌아간다. 이런 사회에서 예술은 얼어 죽을······ 같은 마음이 든다’(109)
누가봐도 노래가 완벽하지만 ‘감동이 없다’, ‘자기만의 색깔이 없다’며 탈락이 되는 경연자들을 볼 때마다 ‘본인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차라리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고 말하면 더 노력할텐데.. 완벽한데 감동이 없다면 더이상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에도 꽤 좋은 연주와 노래를 한 첫 번째 팀은 탈락해서 구덩이로 떨어진다. 마치 죄인이 지옥에 떨어지듯. 반면 박자도 음도 어이없을 만큼 맞지 않은 세 번째 팀은 관객의 폭소를 유발하며 살아남는다. 과연 공정한가? 하루아침에 실력이 좋아질 리 없는 이 팀이 똑같은 방법으로 폭소를 유발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작가에게 거슬리는 무언가는 모두 글이 되나 보다. 그냥 보아 넘기지 않기에 가능할 것이다. 거슬리는 무언가에 대한 집요하게 파고드는 생각들이 다른 이들에게도 생각하게 하는 글이 탄생하게 하는 것이리라.
한두 작품은 조금 난해한 느낌이 있었으나, 완전히 열린 결말로 급하게 마무리하는 어떤 단편들과 달리 완성도 있고 깊이 있는 작품에 감탄했다. 즐거웠습니다!
<파과>를 읽은 뒤 구병모 작가에게 관심이 생겼다. 이 작가는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빠르게 후루룩 읽히는 가독성 좋은 글"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데, 그래서 그럴까 그의 글은 재미있어서 술술 읽히다가도 어떤 문장은 여러번 반복해서 읽거나 천천히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처럼 초단편이어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가볍지 않다. 구병모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은 역시 탁월하다.
"로렘 입숨(Lorem Ipsum)"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읽다가 사전을 찾아본 단어들이 적지 않다. 암튼 배움에는 끝이 없구나.
"입회인" 중 마음에 남는 문장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다.
- 죽음을 자초하지 말고, 자신이 지나치게 비겁해지지 않는 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모욕을 주는 자들을 섣불리 용서하지 않기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진심 없는 화해에 서둘러 응하지도 않기를 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세상은 너를 무너뜨리거나 해코지하기에 여념이 없을테지만, 무엇보다 용기를 잃지 말기를.
"궁서와 하멜른의 남자"는 제목만 보면 무슨 내용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내용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일체의 수리를 하지 않은 거의 유물에 가까워진 아주 오래된 아파트에는 사람과 쥐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쥐의 존재를 눈치 챈 한 남자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라고 치부되지만 결국 그의 말이 맞았다. 건물이 붕괴되지 직전에 쥐들이 먼저 알고 빠져나오고 말발굽 같은 소리에 놀란 아파트 주민들도 살기 위해 몸만 빠져 나온다는 얘기다.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게 그냥 소설 속 허구인 것 같지만 않아서 읽으면서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이 글은 거의 단편소설에 가까운 분량이다. 가장 재미있었다.
이 책 한권을 다 읽는다는 것은 "몇 개의 키워드로 간추릴 수 없는 뜻밖의 조우"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