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고 하면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숙명을 끌어안고 사는 이들이 떠오른다. 작가인 엄마는 결혼을 하고 출산 과정을 거치며 아이를 양육하느라 작가로서 오롯이 글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어느 것과도 대체되지 않는 사랑과 관심, 정성을 기울여여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살다 영양을 공급하던 탯줄을 끊고 세상에 던져진 생명체는 혼자 행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엄마는 아기의 성장과 발육을 돕는 일에 주력한다. 밤잠을 설쳐 가며 아기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체의 크고 작은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고 반응하며 일상을 보낸다.
첫 아이를 낳은 지 보름 만에 신춘문예 등단 소식을 듣고, 출산의 통증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당선 소감을 적으며 글 쓰는 엄마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고백한 소설가는 작가로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삶을 글감으로 창작하는 과정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온 여섯 명의 작가는 보듬고 가꾸어야 할 생명을 끌어안고 작가의 길을 걸었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서 글을 쓰기도 했으며 떼쓰는 아기를 안고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던 지난한 과정은 한 편의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수고에 융해되어 있다.
백지에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글쓰기는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며 살아야 할지를 사유하고 감각하는 과정이다. 연속하는 시간을 혼자만의 시간으로 쪼갤 수 없는 육아 시간을 할애하여 글을 쓰는 일은 고단한 일상의 단면이다. 아이를 한둘 키워 본 엄마도 새롭게 태어난 아기를 키우는 일이 쉽지 않다고들 입을 모은다. 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매순간 육아로 힘든 상황에 놓은 자신을 발견하며 관찰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 아기와 함께 엄마도 성장하느라 분투하는 중이다. 마감일이 임박하여 마음잡고 원고를 완성해야하는데도 육아는 정해진 시간에 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를 재우다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지만 계속 잘 수만은 없어 아이 곁을 빠져나와 글을 쓰는 엄마는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모은다. 스스로를 고립시킬 나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한 작가처럼 엄마 작가에게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글로 삶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녹록치 않다. 시를 쓴다고 물질적 보상이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씀으로 스스로를 인정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 시인은 아이 돌봄과 가사 노동이 끝난 뒤에서야 글을 쓰지만 이마저 쉽지 않다. 가족 모두가 잠들어 부는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려도 멈칫하며 아이가 깨지 않게 살그머니 나와 글을 쓰기 위해 정신을 모은다.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내는 소리에 공명하며 감각에 반응하며 매일 쓰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굳어지는 것처럼 글을 쓴다. 헝클어지기 쉬운 긴 머리를 빗기기에 좋은 빗의 빗살 하나를 빼 숨구멍을 열어주는 공인의 지혜에 외경심이 든다. 글을 쓰는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사는 엄마들 역시 백지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 육아의 기쁨과 슬픔, 불안과 회한을 삭이며, 당위성을 들어 자신을 옭아매는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해방구처럼 보인다.
‘나’로 태어나고 존재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사라지고 나를 부르는 이름,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아이였을 때에도 학생이었을 때에도 나는 조금씩 사라지고 만다. 그러다 사회인이 되고 결혼이라고 하게 되면 누군의 남편, 아내, 아빠, 엄마, 며느리, 사위로 완전히 변한다. 자의가 아닌 타의 혹은 강제적으로 말이다. 누군가 선택했으니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고 할지도 모른다. 여성의 경우 아이를 낳으면 모성애까지 부여된다. 그러나 모성애는 준비땅 하면 바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출산과 양육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고 관여할 수도 없다. 구체적인 도움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그에 맞는 도움을 주기까지, 사회적으로 제도를 마련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하는 여성에게 육아는 이전과는 다른 생의 최고 어려움이다. 조력자가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엄마라는 역할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정확한 방법, 노하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나 선배가 있더라도 아이는 저마다 기질이 다르고 양육 환경도 다르니까. 그저 누군가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신적 위안을 준다. 맘 카페의 위력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여기 글을 쓰는 직업으로 삼은 엄마들의 이야기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는 전업주부 혹은 일을 하는 엄마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양육과 일을 하는 건 같지만 글을 쓰는 일의 어려움은 일하는 엄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엄마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모두에게 공통적인 고충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그랬어 하고 말을 덧붙이고 지금 그 과정에 있는 여성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전할 것이다. 그에 반해 글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직업의 엄마에게는 다른 일에 대한 이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독자에게는 좋아하는 작가의 근황이나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던 이유가 출산과 양육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시간이다.
김미월, 김이설, 백은선, 안미옥, 이근화, 조혜은 여섯 여성 작가는 모두 엄마이며 글을 쓰는 작가다. 엄마와 작가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글쓰기에 대한 절박함과 작가란 정체성의 고민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때로 눈물겹고 때로 가슴이 저리고 때로 답답하다. 이혼을 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는 백은선은 닥치는 대로 글을 쓰고 시인이지만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들은 전부다. 그러니 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좋은 엄마여야 하고 좋은 엄마로 보여야 한다. 왜냐면 아이의 아빠에게 양육권을 빼앗기면 안 되니까.
나는 지금 잠든 아이 곁을 몰래 빠져나와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두운 새벽에 혼자 깨어 있는 이런 시간이 없다면 낮 시간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함께 있기 위해서는 홀로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백은선, 15쪽)
누군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 글이 아닌 다른 일을 선택하라고 말이다.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어느 작가 가족에게 아직도 소설을 쓰냐는 질문을 받는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에도 유명한 작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글을 쓰는 일은 돈벌이도 안 되고 살림과 육아를 잘 하면 그만이라는 숨겨진 의미를 독자인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글은(문학포함 모든 예술) 엄마보다 우위 할 수 없는 일로 치부되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에 나는 작가들의 마음과 고뇌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전해지는 그 간절함에는 조금 다가갈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면서도 소설 쓰는 일에 대한 갈망은 당연하다. 그 과정에서 순간순간 엄마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아니가 수없이 자책하는 마음,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든 소설을 쓰고 싶어서 주말마다 서울에서 친정인 춘천으로 갔다는 김미월 작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전하며 그로 인한 기쁨과 함께 시를 쓸 시간이 나지 않지만 아이로 인해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는 안미옥 시인.
아이가 잠들기만을 기다리며 그 이후의 시간에 무엇 쓸지 차곡차곡 새겨 넣다가 아이와 함께 잠들고 속상해하는 마음,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이가 유아기를 지났다고 해서 수월할까. 그건 아니다. 엄마라면 모두 알 것이다. 어린이집에 가고 학교에 들어가고 새 학년을 맞을 때마다 챙겨야 할 것들은 늘어난다. 소설 쓰는 엄마를 둔 덕에 자신의 책장까지 침범하는 엄마의 책, 소설 쓰느라, 마감에 시달리느라 아이들에게 이해를 구했던 모든 것들이 미안한 김이설 작가. 그가 두 딸들에게 전하는 말은 세상의 모든 딸과 여성에게 건네는 말 같아 이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큰아이 희원아. “너는 네가 되렴.” 작은아이 효명아. “너도 네가 되렴.”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김이설은 ‘김이설’이 되고, 김지연은 ‘김지연’이 되렴. (김이설, 114쪽)
엄마로의 삶과 글 쓰는 삶,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그 두 가지 모두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엄마로도 최선을 다하고 글 쓰는 이로도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저 그들이 바라는 건 그 자신으로 살기를 바라봐 달라는 것, 어떤 강요도 어떤 책임도 전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은 저자는 바로 시인 조혜은이다.
나는 엄마로서도 시인으로서도 자주 실패한 하루를 산다. (조혜은, 152쪽)
두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시를 쓰는 시인. 조금이라도 엄마가 더 같이 있기를 원하는 아이들, 엄마와 시인이 아닌 아내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는 남편. 솔직하게 자신의 하루 일과를 낱낱이 드러내며 쓴 글은 뽀족한 송곳이 되어 가슴에 박힌다. 시를 쓰는 삶을 꿈꾸며 문학 안에서 만난 이와 꾸린 가정에서 어떤 순간 어떻게 자신을 잃어버리는지 들려주는 그 글에서 나는 그와 함께 절망하며 한없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쓸 거라는 걸 알기에 나는 독자로 그를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시를 찾아 더 자주 더 꼼꼼하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유일한 사랑을 묻는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바라는 아이에게 언젠가 말해주고 싶다. 모든 사랑은 불안을 껴앉고 사는 거라고, 불안하니까 서로를 꼭 껴안는 거라고. 오늘도 아이를 꼭 껴안은 가슴으로, 당신과 잡았던 손으로, 아프고 망가진 몸으로 쓴다. 나에게도 내가 필요해서, 나는 나를 데리고 가는 중이다. (조혜은, 185쪽)
어디 글 쓰는 엄마에게만 엄마로 사는 게 어려울까. 결코 아니라는 걸 안다. 쓰지 못한 몸으로 잠든 엄마들,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잠든 모든 엄마들, 나만을 위한 시간이 간절한 엄마들.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해 자책하는 엄마들은 잠들어도 잠들지 못할 것이다. 엄마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시간에 그들이 더 행복하면 좋겠다. ‘나’로 사는 일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엄마로 살아가는 일도 가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