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영미쪽의 문학에 얼마나 기울어져 있었는가를 이 책을 통하여 실감했다. 특히 헐리우드 영화로 인해 더욱 얄팍하고 편향되었음을. 유럽이나 남미문학을 가끔 접하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특히 영상 매체를 통해 익숙해진 미국식 사고의 영향으로 인해 읽지 않은 책(대개는 대중적이지만)들도 아는 척하거나 궁금해서 사서 보게 된다. 문학성이나 사색적인 측면에 대한 검토는 결여된 채.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처음 듣는 이름이기도 하거니와 내용 조차 너무 낯설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난 후 역시 서구 정신의 원형질은 유럽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미국과 차별되는 뿌리다. 그렇다고 현대적인 내용을 토대로 한 미국 문학의 가치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과 비교하면 그 깊이 있는 정신, 사상적 배경에서는 현란할 뿐 그윽하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이 책은 내용이 어지러워 처음에는 지루하다는 기분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러나 중간을 넘어서면서 집중하게 되었고 역자 해설을 통해 저자의 지성과 통찰에 감사하게 되었다. 역시 독서는 고독과 인내의 산물이며 그 단조로움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56 강한 자는 책을 읽지 않는 법. .. 권력의 심장부는 세상뿐 아니라 책과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 이유를 여기에서 확인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나라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책상에는 몇년전 바닷가에서 주워온 돌이 몇 개 놓여 있다. 퇴적의 흔적이 그대로 새겨져 있어 그 세월이 얼마인지 가늠하다보면 겸손해진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리도 대단하단 말인가. 유배된 오비디우스의 흔적을 좇아 가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멸을 앞둔 존재의 허무함 아니었을까?
116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의 영고성쇠를 초월하는 돌이 아니라면, 또 연약하기 그지없는 생명체로부터 해방된 돌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물질이 침해할 수 없는 위엄과 지속성, 나아가 영원성을 약간이라도 보여줄 것인가.
오비디우스의 이야기처럼 모든 것이 위치를 바꾸며 돌이 되거나 새로 변신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는 곳, 유배자와 도망자들의 땅 토미. 끝없이 돌들이 무너져 내려도 늑대의 울음소리가 그 속에 파묻히는 것에 더 마음이 진정되는 백일몽 같은 곳. 로마법과 이성 같은 것이 굳건히 서 있을 수 없는 세계를 그린 소설이다. 굶주린 독수리가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부위를 가장 먼저 공격하듯이 인간의 부주의, 무지, 가장 연약한 지점부터 무너진다.
“벌레가 득실거리는, 구역질 나고 악취 나는 유기체의 부패 과정에 비하면 화석의 운명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또 인간의 품위에 어울리는 일인가. 이런 역겨움에 비하면 화석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구원이며, 언덕과 협곡과 황무지로 이루어진 낙원에 이르는 과정이다. 유성과 같은 인생의 영화는 무에 불과하다. 돌의 위엄과 지속성만이 최고의 것이다...... 하고 오비디우스가 말했다고 했다.”
짐승들조차 화석이 되는 것이 존재의 혼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다.
˝돌, 언제나 돌이었어요. 유배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화석이 되는 것으로 끝났죠. 때때로 저는 오비디우스가 돌아가고 그가 지펴 놓았던 불이 꺼진 뒤에도 그가 불속에서 읽어 준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동굴의 바위벽에 몇 시간씩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어요. 항아리 위에, 또는 아궁이의 시뻘건 불속에 돌로 된 코와 뺨과 이마와 입술과 슬픈 눈들이 어른거렸어요. 오비디우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놀랍고도 신기했어요. 그는 마른 개울 바닥의 침적물과 자갈에서도 시대와 생명을 읽어 냈어요.˝
혼돈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돌을 만드는 여정. 파도에 모두 휩쓸려가는 걸 재차 겪더라도. 작가는 이 여정에서 피타고라스가 오비디우스의 하인일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피타고라스는 오비디우스의 대답과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에서 점점 자신의 생각과 느낌 일체를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그 일치감이야말로 후세에 전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조화(調和)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모래에 글쓰기를 멈추고 어디를 가나 비문(碑文)을 남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하 술집의 책상에만 손톱과 주머니칼로 글을 새겨 넣더니, 나중엔 점토 파편으로 집 벽에 글을 쓰거나 백묵을 가지고 나무에 글을 남겼다. 때로는 길 잃은 양이나 돼지의 몸에도 글을 써넣었다.”
유배 당한 오비디우스를 찾아 코미에 온 코타는 그리스인 피타고라스가 그의 주인 오비디우스의 운명을 따르려 한 것과 닮았다. 그가 토미 해안에서 모두의 운명이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는 건, 신화 속 인물을 통해 세계를 재해석한 이 소설, 이 소설을 읽으며 세계의 진면목을 보려 하는 독자의 상황과 동일하다. 모두가 결국 미치는 것, 미치지 않는 세계란 없다는 것은 진실일까 비유일까. 꿈꾸지 않는 사람이 없다면 미치지 않는 사람, 세계도 없다는 소리겠다. 아무튼 독자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소설은 코타도, 독자도 자신이 되기 위해 왜 이렇게 힘든가를 생각하게 한다. 돌에서 이야기를 읽는 일과도 비슷할 것이다.
덧)
신화를 독특하게 재해석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존 바스 《키메라》도 추천한다. 이 작품과 견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