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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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리뷰 총점 9.8 (15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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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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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누구도 쉽게 얘기하지 못할때 말한다는 것은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h*****o | 2022.11.14 리뷰제목
고전이라는 말에 솔깃해서 선택한 책이다. 표지의 강렬한 그림도 흥미를 유발했다. 고전의 기역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은 아닌지 책이 도착하자 살짝 겁이 났다. 하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읽으면 이해하겠지 생각하고 흐뭇하게 웃어본다.   네덜란드 출신의 사상가이자 신학자인 에라스무스는 21세에 아우그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했다. 5년 후 가
리뷰제목

고전이라는 말에 솔깃해서 선택한 책이다. 표지의 강렬한 그림도 흥미를 유발했다. 고전의 기역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은 아닌지 책이 도착하자 살짝 겁이 났다. 하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읽으면 이해하겠지 생각하고 흐뭇하게 웃어본다.



 

네덜란드 출신의 사상가이자 신학자인 에라스무스는 21세에 아우그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했다. 5년 후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리스 고전을 섭렵하며 비판적인 지성과 글쓰기 능력을 키웠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무어를 비롯한 영국의 인문주의자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다. 이후 부패한 가톨릭교회와 어리석은 현자들의 위선을 풍자한 <우신예찬>을 출간하면서 종교개혁의 불을 댕기는 역할을 한다.

라틴어 원전을 완역하여 풍부한 주석으로 읽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 주석의 수가 400개가 넘으며 우신의 연설체가 돋보이는 문장으로 실려 있다. 원문에서는 제목이 붙어 있지 않지만 이 책에서는 제목에 붙어 있어 흐름과 내용을 요약하고 이해하기 편하게 되어 있다. 책의 내용은 우신이 누구인지 설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상적인 사회 현상과 가톨릭 사제와 재판관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가 실려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 기득권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우신의 현명하듯 우매한 연설에 집중해 본다. 그 연설의 앞자리는 내 자리다! 의욕을 갖고 시작했으나, 끝까지 갈수 있을까?

 

또한 이국적이며 참신한 요소가 부족하다 싶으면 케케묵은 옛 책들에서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단어들 네댓 개를 가져와 독자들의 눈앞에 알 수 없는 연막을 펼쳐놓습니다. 이 단어들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가 어려운 것도 해독할 수 있다는 데 만족감을 느끼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 대단한 글을 쓴 저자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지요.(p27)

어리석음의 신인 우신이 대중 연설가들의 위선을 꼬집으며 하는 말이다. 간혹 뉴스나 정치인들, 학자들이 하는 말들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다. 쉬운 말이 분명 있을 텐데도 어려운 단어를 쓰거나 그들만 아는 단어, 혹은 외래어를 써서 자신이 뛰어남을 은근히 과시한다. 우신의 말처럼 이해하는 사람은 만족감을 느끼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말하는 사람에 대해 약간의 지적 우월함을 느끼게 만든다. 인간의 본성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자신의 우월함을 끊임없이 드러내려고 한다. 그 우월함이 낮아지려고 할 때 소위 말하는 전문용어를 쓴다. 전문용어를 쓰면 단번에 자신의 위치를 높여 놓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말과 문장을 쓰는 것이 더 우월한 것이지만 늘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물론 대중 연설가들의 위선도 그렇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법관들도 마찬가지다. 법률 용어는 정말 한글로만 되어 있을 뿐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다. 분명 다른 나라말은 아니지만 알아듣지 못한다. 왜 그런 말을 써야 하는가? 그 말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인가? 마치 가톨릭 사제들만이 성경을 읽었던 중세처럼.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위선들과 권력 유지를 위한 은밀한 통제들을 본다. 혹시 우신이 지금도 현명하게 끊임없이 활동하기 때문인가?

 

요컨대 옛적에 메니 포스(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철학자이자 풍자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달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펼치는 소동을 내려다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파리나 각다귀떼가 자기들끼리 다투고, 싸우고, 속이고, 약탈하고, 조롱하고, 난장판을 벌이며, 태어나 늙고 죽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너무나 하찮고 얼마 살지도 못하는 비천한 미물들이 이토록 엄청난 소통과 비극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p150)

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답게 책의 곳곳에서는 신학적인 관점이 흐른다. 위의 본문도 달에서 보는 것을 말하지만 읽으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싶어서 몸살이 나던 시기가 있었다. 일등이 되지 못한 다면 최소한 저 사람보다는 한발이라도 앞 서고 싶었던 욕심으로 마음이 힘들었던 때. 누군가 내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보시면 우리는 모두 개미 같지 않을까요? 그 개미 중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 나고 싶어서 아웅 다웅해봐야 개미일 텐데...”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랬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개미보다 못한 나 일수 있었다. 그 후로 다른 사람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그래도 그때 생각과 관점의 변화는 내 안에 갇혀 있던 좁은 생각과 시야를 넓혀주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면서 다시 한번 나를 다잡는 문장이 되었다. 그렇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인간은 하찮고 비천한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하찮음으로 비극을 만들지 말고 희극과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자. 그러기에도 짧은 인생이지 않은가?

 

그들 중 대다수는 기껏해야 자신들이 정한 규율과 인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애쓸 뿐인데도, 그들의 공로에 대한 상으로 천국 하나만 받기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리스도가 다른 모든 것은 무시하고 오직 한 가지 명령. “사랑하라”를 실천했는지만 본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p182)

책의 상당 부분을 가톨릭 사제들과 가톨릭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이어진다. 책을 읽어 보면 이 책이 왜 금서가 되고 종교개혁의 촉매가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연옥에 있는 사람이 구원받는다니 이런 터무니없는 말이 믿어지고 행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성경을 사제들만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성경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다고 하면 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신학을 알고 배웠던 사람들, 즉 저자나 루터 같은 사람들이 용기 있게 사실을 말했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명령 사랑하라를 지키며 실천했던 순수했던 개신교가 여전히 그 순수함을 갖고 있는지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감을 우리는 너무 자주 많이 보게 된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이 행하는 말이나 행동들이 은혜가 되지 않는다. 불법과 편법 사이 교묘한 줄타기를 하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양 떠든다. 부끄러움에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것이 은혜 인 양 떠드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저자의 말처럼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오직 한 가지 명령. 사랑하라를 실천했는지만 볼 것인데. 사랑이 그리스도의 본질이며 본체인데, 우리는 사랑을 너무 내 식으로만 이해하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믿는 사람으로 마음이 무겁다. 쩌렁쩌렁한 우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랑하라”

 

저자는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이다. 방대한 인문 지식들이 책의 곳곳에 빼곡하게 흩어져 있다. 그 자취를 주석을 의지하여 힘겹게 한걸음 한 걸음을 옮기며 따라갔다. 이름도 생소하고 낯선 그리스 로마신화의 가계부터 신들의 특징, 인문학자들의 비유와 책의 문장들을 저자는 자유자재로 사용하지만 따라가는 나는 숨이 찼다. 몇 번을 넘겨서 주석을 다시 읽어야 했고, 주석을 읽느라 글의 흐름을 놓치기도 했다. 중반쯤 읽었을 때는 뒤에 해제를 먼저 읽고 올까 하는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다. 지금 읽어도 시대 상황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풍자들을 읽으면서 사람 사는 곳은 어느 시대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전이 되는 것이겠지만. 또 이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것과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공감되지 않는다. 풍자나 비평이 그렇게 날카로운 것 같지 않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대를 생각해 본다. 그 시대에 저자 말고는 누구도 가톨릭을 이렇게 비판하거나 풍자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할 때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믿음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이런 어려움은 뒤에 실린 친구에게 쓴 편지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에게 비판받는 것과 이해받지 못하는 것을 저자는 견디기 힘들어한다. 조심스럽고 겸손한 마음을 담은 편지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우신을 등장시켜 사회 기득권의 부패와 위선을 말하던 저자는 실제 생활과 관계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한 번의 이야기, 책으로 끝나는 일이라면 누구나 개혁가나 풍자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말, 그 책 이후에도 그는 그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 자신의 삶에 더 무거운 책임을 지면서. 자신의 말과 글에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 때로는 조롱까지도 견디며 살아야 내야 하는 것이다. 기꺼이 감당해 준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누군가의 시작이 있어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고, 그 혜택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으니. 또한 번역을 한 박문재님께도 감사한 마음이다. 정말 상세하고 자세한 주석을 보며 에라스무스 못지않은 해박함에 감탄했다. 도장 깨기 같은 마음으로 도전했다가 오래 고생했다. 하지만 좋은 책과의 만남에 힘겨운 독서도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누구? 저처럼 힘겨운 독서를 행복한 만남으로 만드실 분 있으신가요? 손드세요~ 저만 혼자 고생할 수는 없잖아요. 혹시 당신은 힘들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용기 내서 도전해 보세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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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현대지성 클래식 45. 우신예찬 평점10점 | v*******8 | 2022.12.01 리뷰제목
15세기에 혜성처럼 등장해 16세기까지 인문학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인문학자이자 동시에 신학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에라스무스). 가톨릭 사제의 혼외자 출신임에도 당대 만연했던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위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유럽 내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에라스무스 대학교(Erasmus University Rotte
리뷰제목

 

15세기에 혜성처럼 등장해 16세기까지 인문학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인문학자이자 동시에 신학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에라스무스). 가톨릭 사제의 혼외자 출신임에도 당대 만연했던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위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유럽 내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에라스무스 대학교(Erasmus University Rotterdam)는 무려 에라스무스가 태어난 항구도시 로테르담에, 그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곳이다. 그만큼 당대뿐 아니라 그의 학문 활동은 아직까지도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그가 남긴 인문학적 유산과 사상은 위대하다고 여겨진다.

인문학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에라스무스의 작품 하나쯤은 제대로 독파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라스무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라틴어 원전을 바탕으로 번역된, 따라서 <우신예찬> 원본에 최대한 가깝게 번역된 현대지성 출판사의 <우신예찬>을 읽을 것을 권유하고 싶다.

 

아마도 이 글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어떤 사람은 신학자가 쓰기에 너무 경망스럽다고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기독교인이 쓰기에 너무 신랄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고희극이나 루키아노스를 다시 다시 불러내 무엇이든지 막무가내로 물어뜯고 공격한다고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글이 가볍고 장난스럽다며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은 이런 글을 내가 처음 쓴 것이 아니고, 이미 과거에도 위대한 저술가들이 자주 써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

그런데도 정히 나를 비난하고 싶다면 내가 따분한 나머지 장기 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아니 긴 막대기를 가지고 말타기 놀이를 하고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원한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인생의 다른 분야에서는 얼마든지 농담을 허용하면서도 학문에서는 농담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것, 게다가 실없게 들려도 사실은 진지한 성찰로 이끄는 농담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부당합니다. 앞뒤가 꽉 막힌 독자가 아니라면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난해한 연설보다 농담 같은 얘기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던 에라스무스인 만큼, <우신예찬>은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머스 모어에게 헌정하는 글이라 밝히는 서문. 학문, 특히 고전의 경지에 올랐던 에라스무스는 학문이 마냥 경직되어 있고 딱딱하고 따분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발상을 내놓았다. 심각한 문제를 가볍게 다루는 것에는 경박하게 느끼면서 하찮은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는 것에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어쩌다 보니 나도 오늘날 대중연설가들의 흉내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거머리처럼 두 개의 혀를 사용하고, 말할 때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여기며, 자신들의 라틴어 연설문 곳곳에 적절하지도 않고 빈약한 그리스어 단어들을 모자이크 장식처럼 끼워 넣는 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국적이며 참신한 요소가 부족하다 싶으면 케케묵은 옛 책들에서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단어들 네댓 개를 가져와 독자들의 눈앞에 알 수 없는 연막을 펼쳐놓습니다. 이 단어들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가 어려운 것도 해독할 수 있다는 데 만족감을 느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이 대단한 글을 쓴 저자에게 더 큰 존경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지요.

 

그저 '있어 보이는' 언어, 단어만 갖다 붙이면 그것을 모르는 이들은 쉽게 속을 것을 아는 '가짜' 대중연설가들의 모습이다. 당시에 그리스어를 아는,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에 '그리스어를 알 정도로 대단한 듯해 보이는' 대중연설가의 말에 '그리스어는 물론 지식의 깊이가 얕은' 일반 대중들이 쉽게 현혹되어 갔던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무언가를 들고 나와 그것을 일종의 장신구, 장식품처럼 사용하며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거나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혈안을 올리는 대중연설가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는 우신. 우신이 비판하고 있는 이러한 류의 '가짜' 웅변가, 달변가들은 <우신예찬>이 쓰일 당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기 마련이다. '말은 마음을 가장 정확히 비추는 거울'이라는 앞서 등장했던 우신의 주장이 연상된다. 그럴듯한,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는, 진실되고 순수한 목적이 아닌, 일명 '뒤가 구린' 목적을 달성하려 애쓰는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들이 쉽게 속는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뻐할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양심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말을 진정성 있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철학이나 심각하고 골치 아픈 학문에 몰두하느라 젊음을 꽃피우기도 전에 폭삭 늙고 수심이 가득한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혼과 생명력이 고갈되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우신인 나를 숭배하는 신도들은 '아카르나니아의 돼지'처럼 윤기가 좔좔 흐르며 토실토실하니 보기가 아주 좋고, 현자들과 일절 접촉하지 않는다면 노년의 고단함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물론 그들 중에 어쩌다 현자들과 접촉하는 바람에 곤란을 겪는 사람이 생기기는 합니다. 인생이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행복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어리석음만이 청춘을 달아나지 못하게 붙들고, 고약한 노년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라는 속담이 회자된다는 것은 나에 대한 결코 가볍지 않은 증언이 되어줍니다.

 

'배부른(만족한) 돼지보다는 배고픈(불만족한) 인간(소크라테스)이 낫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배를 채우기 위해 폭식을 하는 등 일차원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단순한 행동은 멀리해야 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등 지식과 교양을 쌓는 고차원적 행동에는 가까워지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렇기에 억지로라도 책을 한 권 더 읽으려 하고,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려 무언가를 계속해서 배우는 등 자기계발에 많은 투자를 한다. 그런데 우신은 이러한 '현자와 접촉하게 되는' 행동들이 결국 우리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우신예찬>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진리라 믿었던 것들에 대해 정반대의 관점을 내놓음으로써 다시금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든다. 나도 늘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그래서 매일 같이 독서를 하는 교양인이 되려 애쓴다. 진정한 교양인으로 거듭나려면 그저 '나는 매일 같이 책을 읽는 사람이다'라는 만족감, 합리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이를 의식하지 않고도 진지하게 스스로를 성찰할 줄 알고 그 성찰로 행동과 마음가짐에 변화가 생겨야 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철학이나 심각하고 골치 아픈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특정해 이들을 고도로 돌려까고 있는 우신의 모습이다. 이들 현자들과 단 한 번이라도 접촉하게 된다면 인생에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흠집이 생긴 것과 다름없다는 우신. 학문에 몰두하는 경험은 위대한 것이지만 학문에 몰두하느라 다른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라 느껴진다. 또는, 특정 학문에 심취해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줄 모른다던가 학문에는 능하지만 도덕적으로 결여된 이들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느껴진다.

 

인간은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태어나며, 가장 훌륭한 사람이란 다만 결점을 가장 적게 지닌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신의 경지에 이르도록 현명한 사람들 사이에 우정이 생겨날 리 만무합니다.

...

대다수는 어리석어 정신 나간 짓을 많이 하는데 우정이란 서로 닮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고 깐깐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쩌다 마음이 맞아 서로 호감이 생긴다 하더라도 불안정하고 그리 오래가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결국 서로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독수리나 에피다우로스의 뱀보다 더 날카로운 눈으로 친구들의 잘못을 기막히게 찾아내 신랄하게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결점이나 잘못을 보는 눈은 말할 수 없이 어두워 자기 등에 매달린 짐은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반면에 모든 친밀한 관계의 원천이자 아버지인 쿠피도는 어떻습니까? 정작 그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아무리 못생긴 사람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각자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답다고 여기게 만들어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지듯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사랑에 빠질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흔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곤 하지만, 사실 인생을 즐겁게 만들고 인간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랍니다.

 

서로의 결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자들은 현명한 사람으로 묘사한 우신. 이들은 엄격하고 깐깐해 설령 친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에게 사탕 발린, 듣기 좋은, 달콤한 말들을 하는 자들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역설적으로 우신이 강조하는 이 어리석음이야말로 '인생을 즐겁게 만들고 인간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좋은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때로는 하기 싫은 말도 정성스레 포장해 좋은 말로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잠깐만 엄격하고 정교한 눈을 가림으로써 친한 이들과 더 오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에서 벗어났다고 감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인가 봅니다. 온갖 일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는 절대로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

"내게 100개의 혀와 100개의 입과 강철 같은 목소리가 있다고 해도, 온갖 형태의 어리석음을 다 열거할 수 없고, 그 명칭들을 빠르게 읊는 일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인들의 삶 전체가 이런 종류의 어리석음과 광기로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그런 일들이 쏠쏠한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음을 기꺼이 허용하고 조장합니다.

 

헌금과 함께 기도를 통해 감사한 것들을 떠올리거나 옳지 못한 행동을 참회하면 앞날에 복이 있으리라고 세뇌시키는 종교인들을 비판하는 우신의 모습이다. 우신에 의하면, 기도만 하면 되는 줄 아는 사람들이야 말로 어리석다고 한다. 악행을 저질러도 기도만 하면 다시 악행을 저지르기 전의 원점으로 돌아간 줄 알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우신에게는 너무나도 우스워 보이는 것이다. 기도만으로 다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 기도하는 행위와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버튼을 누르는 행위를 동일선상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의 진정한 효과는 입을 통한, 말로서의, 언어로서의 기도문이 아닌, 진심 어린 반성과 자기 성찰, 참회를 통해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야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 우신을 섬기는 사제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나는 나의 신상을 돌로 만들어 색칠해서 세워놓고 경배하라고 요구할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어리석고 우둔한 자들이나 신 자체가 아니라 신상을 경배하지요. 결국 신이 신상에게 밀려나면서 사람들이 신들을 예배하는 데 신상이 도리어 방해가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사실 나의 신상은 세상 곳곳에 항상 무수히 세워져 있습니다. 우신인 내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아말로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살아 있는 나의 형상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신들이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서 정해진 날에만 숭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나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훨신 더 귀한 제물을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신과 신상이 주객전도되는 일을 비판하고 있는 우신. 그녀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신들이 전혀 부럽지 않다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인간들은 '살아 있는 우신의 형상'이기에 그녀는 자신을 위한 신상이 없는 것도, 자신을 숭배하는 날이 따로 있지 않은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한다.

 

 

그들은 공권력과 거리가 멀고 특히 구걸해서 먹고살기는 해도, 이른바 고해 성사를 통해 모든 사람의 온갖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깔보지 못합니다. 물론 이런 비밀들을 발설하면 불경죄에 해당하므로 평소에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흥을 돋우기 위해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추측에 맡긴 채 비밀을 풀어놓곤 합니다.

...

그들이 설교할 때 대중연설가들을 흉내 내며 그대로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희극배우나 떠돌이 약장수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재미있습니다.

...

주제의 본질과 동떨어진 서두는 잘못된 일이고, 자연에서만 배운 돼지치기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서론'이라고 부르는 연설 첫머리에서,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제시하는 자가 가장 훌륭한 연설가라고 생각해 그런 식으로 연설을 시작합니다.

 

 

우신은 가톨릭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비밀을 고백하는 고해성사에서 사제들의 문제점이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신자들의 비밀을 들어주고 용서하는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하므로 더욱 경건하고 진정성 있는 자세를 갖춰야 함에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신자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마치 권력으로, 도구로, 장난감으로 삼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이 대중 앞에서 설교할 때 일부러 서론에 설교 내용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 자신들만의 우월감을 느끼고, 이에 남들과의 차별성을 부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우신.

 

이제 궁정 귀족들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더할 나위 없이 비굴하고 우둔하며 천박합니다. 그런데도 모든 면에서 가장 앞서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에서는 최고의 양보심을 발휘하지요. 그들은 자신이 군주를 주군이라 부를 수 있고, 군주에게 몇 마디 인사말을 건넬 수 있으며, '각하'니 '주군'이니 '폐하'니 하는 궁중 호칭을 남발하는 데서 말할 수 없이 큰 행복을 느낍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런 일을 천연덕스럽게 해내고 기쁜 마음으로 아부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궁정 귀족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전문 기술이지요.

 

군주부터 그를 따르는 궁정 귀족들까지 모조리 비판하고 있는 우신. 공적인 이익에만 몰두해야 할 군주가 속으로는 우신의 말로 '끊임없이 사냥하고, 명마를 기르고, 행정과 군대의 요직을 팔아 이익을 얻고, 신민들의 재산을 털어 자신의 금고를 채울 새로운 방법을 날마다 생각해내느라' 바쁘다는 것이다. 비록 우신의 입을 통해서지만, 절대권력에 대한 솔직하고 공개적인 비판이 지금보다 어려웠던 에라스무스가 활동하던 당대를 생각하면 그가 매우 용감했음이 실감난다.

 

신학자들이 정말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더 상처를 입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학자들은 영민해서 우신이 악인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기 때문입니까? 왕이나 귀족, 고관, 주교, 추기경, 교황은 물론이고 상인이나 남편, 아내, 변호사, 시인 등 온갖 부류의 사람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두루 풍자했는데, 이들은 신학자들만큼 영민하지 못해 같은 내용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무슨 이유인지 내게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인문주의 신학자이자 루뱅 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마르턴 판 도르프가 에라스무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그가 답장을 한 내용이 부록에 담겨있다. 도르프는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이 신학계 전체를 향한 공격으로 공공연히 간주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항변이 부록, 즉 도르프에게 보내는 답장 편지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은 성별, 국적, 직업 모두를 아우르는 모든 인간군상에 대한 글을 재미있게 작성했을 뿐, 특정인을, 특정 조직만을 골라 비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우신예찬> 속에 나오는 부패하고 위선적인 성직자들에 대한 비판이 눈에 띄기는 했으나 에라스무스의 주장대로 <우신예찬>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군상을 총집합해 이들의 비논리적인, 비합리적인 행태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그는 분야를 막론하고 그동안 그 유명한 학자들끼리 서로의 글에서 서로를 언급하며 비방했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에라스무스 자신은 특정인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기에 자신의 저서 <우신예찬>이 '신학계를 향한 일방적인 비난'이라고만 간주될 수 없다고 항변한다.

 


지금껏 우리의 상식에 전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을 서슴치 않는 우신. <우신예찬>의 소개글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어리석음의 신' 우신의 설득에, 그녀의 주장에 쉽게 넘어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신이 하는 말들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 일부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처음의 다짐은 <우신예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 흔적이 사라져갔다. 그렇기에 씁쓸함과 아쉬움을 느끼곤 하지만 지금까지 인정받는 네덜란드의 지성인 에라스무스가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 추론해보고 스스로를 성찰해보며 많은 것을 깨우치고, 또 배우고 있기에 읽는 매 순간이 값지게 느껴진다.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학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생소한, 낯선 용어와 지식들로 인해 결코 읽기 쉬운 책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네덜란드를 넘어, 전세계의 지성으로 기억되는 에라스무스의 대표작 중 한 권을 제대로 읽어볼 수 있어 참 유익한 시간이었다.

 

#우신예찬 #에라스무스 #현대지성 #현대지성클래식45 #1일1쪽현대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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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우신예찬, 에라스무스의 의도만 파악해도 성공?! 평점10점 | h***e | 2022.11.18 리뷰제목
우신예찬?! 에리스무스라의 <우신예찬> 처음 들어봤어요. 그리고 더더욱 '우신'이라는 단어가 생소했어요. 이게 무슨 책인지 읽으면서도 어렵더라구요. ㅎ 우신은 어리석음의 신이에요. 어리석음을 예찬한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신이 떠드는 말이 통쾌할 때도 있고 재밌더라구요. 이해 100% 다 했다는건 거짓말이고 빙산의 일각만 이해가 되더라구요. '
리뷰제목


 

 

우신예찬?!

에리스무스라의 <우신예찬> 처음 들어봤어요.

그리고 더더욱 '우신'이라는 단어가 생소했어요. 이게 무슨 책인지 읽으면서도 어렵더라구요. ㅎ

우신은 어리석음의 신이에요.

어리석음을 예찬한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신이 떠드는 말이 통쾌할 때도 있고 재밌더라구요.

이해 100% 다 했다는건 거짓말이고 빙산의 일각만 이해가 되더라구요.

'부록 - 에라스무스가 마르턴 판 도르프에게 보낸 편지'과 '해제'까지 읽고나니 에라스무스에 대해서, 에라스무스의 '우신'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네요.

어렵지만 <우신예찬>만의 매력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한번 읽나니 두번 읽고싶고 ... 두번 읽고나면 더 이해가 잘될꺼 같고, 에라스무스의 '우신'을 더 알아보고 싶은 욕심이 나더라구요. ㅎ

서평이라기보다는 초독인 나의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읽은 느낌을 끄적끄적인 정도라 부끄럽지만

오늘의 나의 느낌이기에 기록하는게 의의를 두고 적어볼까 해요. ^^

우신예찬

이 책은 다른 사람이 우신을 예찬하는 내용이 아니라 우신이 연단에 올라가 직접 자신을 예찬하는 연설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어리식음을 예찬한 동기와 이유가 무엇인지, 어리석음을 예찬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서문 - 에라스무스가 친구 토머스 모어에게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에라스무스가 왜, 어떤 마음으로 <우신예찬>이라는 글을 쓰게 되었는지 먼저 알아야 할꺼 같아요.

- 맹세하건대 내 생애에서 당신과 함께한 때보다 더 달콤한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얘기했던 것과 관련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 여건으로 진지한 글을 쓰기가 그리 마땅치 않아 해학을 담아 '어리석음'을 예찬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서문 中)

해제


 

해제에서는 이것과 관련해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요.

- 33세인 1499년, 에라스무스는 영국 여행에서 헨리 8세 시대에 영국 사상계를 주도하는 인물들을 만났고, 일생 그들과 교제와 우성을 나누었다. 그는 영국 여행에 동행했을 때 사귄 토머스 모어를 비롯해 영국의 인문주의자들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지병인 신장병의 고통을 잊고 무료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우신예찬>을 일주일 만에 써내려갔다. 그리고 이 원고를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는데, 친구들이 자신의 허럭도 받지 않고 1511년에 이를 출간해버렸다고 한다. 에라스무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쓴 것과 달리 이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르네상스 시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 중 하나로 개신교 종교개혁의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해제 中)

에라스무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쓴 것과 달리 이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르네상스 시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 중 하나로 개신교 종교개혁의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이유였을까요?

<우신예찬>이 굉장한 이슈가 되고, 도마 위에 오르게 되네요.

어떤 이유에서 비판을 하는지, 누가 비판을 했는지 ...

그 비판을 에라스무스는 또 어떻게 생각하는지 ...

'부록 - 에라스무스가 마르턴 판 도르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라스무스가 이야기하고 있어요.

내가 신학자들이 어리석거나 사악해서 이름값 하지 못함을 내가 지적한 것이 신하계 전체를 향한 공격이라고 당신을 생각합니까?

<우신예찬>에서 고관대작들을 많이 풍자하고 꼬집었는데도, 그 중 한분은 나와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극히 선량하고 지혜로운지라 사악하고 어리석은 고관대작들에 대해 내가 쓴 글이 자신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산예찬>에서 사악하고 저속한 주교들을 얼마나 많이 풍자혀며 꼬집었습니까? 그런데도 내가 아는 대주교는 그런 풍자에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덕을 완벽하게 갖춘지라 그런 풍자 중 어떤 내용도 자신에게 해당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한계 전체가 내 책 때문에 화가 났다는 말에 나는 수긍할 수 없고, 그래서 그렇게 믿지도 않을 것입니다.

유독 <우신예찬>에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신예찬>은 비난은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오직 신한자들이 쓸데없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만 풍자했을 뿐입니다.

내가 <우신예찬>을 쓴 목적은 밤을 지새우며 쓴 나의 다른 저작들의 목적과 동일하고 단지 방법만 다릅니다. 나는 <기독교인 병사의 편람>에서는 기독교인의 삶을 직설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기독교인 군주의 교육>이라는 소책자에서는 기독교인 군주가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분명한 조언을 제시했습니다. <필립 대공 송덕문>도 찬양형식을 빌려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 내용은 다른 글에서 직설적으로 말했던 것과 동일합니다. <우신예찬>에서는 해학과 풍자를 사용했지만, 그 내용은 <기독교인 병사의 편람>에서 다루었던 것과 동일합니다. 나의 의도는 비방이 아니라 깨우침과 설득이었습니다. 해치려는 게 아니라 도우려는 것이었으며, 인류가 가는 길을 훼방하려는 게 아니라 조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친애하는 도르프 씨, 당신이 <우신예찬>을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거기에 담긴 내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면, ......

아마 에라스무스는 친해하는 도르프 씨 외에도 많은 사람들, 자기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어요.

<우신예찬>을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거기에 담긴 내 마음을 읽어내라!

일주일 넘게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엔 '우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 답답했어요.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네요.

'가끔은 책 속에서 말하고 있는 현자보다는 어리석은자가 되고 싶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제 빙산의 일각 정도만 이해한 <우신예찬>이라 감히 우신이 어떻다저떻다 이야기하진 않을께요. ㅎ

일단 현대지성<우신예찬>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중세와 근대를 지나며 형성된 장 구분을 사용했어요. 각각의 장에 적절한 제목을 붙혔어요. 각 장의 제목만 읽어봐도 <우신예찬>의 전체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네요.

원래 <우신예찬>은 하나의 긴 연설문으로 원래 장이나 단락 구분이 없다고 해요.

읽을때 저는 살짝쿵 아쉬웠어요. 각 장이 너무 짧아서요... 장 구분이 아닌 조금 내용을 합쳐서 1부, 2부, ... 이런식으로 나눠졌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더라구요. ㅎ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속 에라스무스의 진심어린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성공했다고 생각하네요.

아직 모자라지만 에라스무스의 의도를 안 것으로 초독을 마무리해보려구요.

나의 의도는 비방이 아니라 깨우침과 설득이었습니다. 해치려는 게 아니라 도우려는 것이었으며, 인류가 가는 길을 훼방하려는 게 아니라 조언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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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우신예찬 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s******1 | 2022.11.17 리뷰제목
제목에 대놓고 우신(어리석은 신)을 예찬한다는 이름이 쓰여서 반신반의했다. 대놓고 어리석은 신을 찬양한다니~이 무슨 황당한 상황일까? 싶어서다. 이 책의 저자 이름이 낯설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일 테지만, 저자가 쓴 서문에 등장하는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의 이름을 보고 반가웠다. 지식이 미천한 터라,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에라스무스)가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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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대놓고 우신(어리석은 신)을 예찬한다는 이름이 쓰여서 반신반의했다. 대놓고 어리석은 신을 찬양한다니~이 무슨 황당한 상황일까? 싶어서다. 이 책의 저자 이름이 낯설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일 테지만, 저자가 쓴 서문에 등장하는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의 이름을 보고 반가웠다. 지식이 미천한 터라,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에라스무스)가 인문학자이자 신학자라는 사실과 함께 상당한 지성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에 알아보지 못해서 민망스러웠다.

15~16세기 사람이니, 그 시기라면 중세이자 르네상스시대와 궤를 같이 한다. 아무리 르네상스시대가 열렸다 하더라도 신학자가 대놓고 "신"을 풍자하는 책을 썼다는 사실에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신예찬은 무슨 내용일까? 제목에 등장한 "우신"이 누구일까 궁금했다. 배경지식을 살짝 얹고 나니 우신의 진정한 의미가 내심 궁금했다.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신의 이야기인 걸까, 아님 반어법 적인 표현인 걸까? 내가 이해하기로는 오히려 반어법 적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신이라 하지만, 그리 어리석어 보이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그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 종종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틴어 원전 완역본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현대지성 클래식의 강점인 어마어마한 각주와 해제가 눈을 사로잡는다. 아마 각주가 없었다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지나갔을법한 내용들(우신이기에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수 등장한다.)이 상당하다. 초반에는 우신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소위 스스로 자신의 훌륭함을 이야기한다. 요즘이야 자기 PR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시대지만(그럼에도 스스로 자랑하는 건 좀 재SU가 없어 보이긴 하다.), 무려 16세기에는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았을까 싶다. 우신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극적이다. 자신의 부모와 유모, 친구의 이름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웃음이 튀어나온다. 꽤 적절한 이야기 같아 보이니 말이다. 가령 자신의 유모인 요정들은 만취와 무지이고, 시종들은 자아도취, 아부, 망각, 태만 등이다. 우신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이 정도니, 그들의 영향을 받았을 우신이 어리석은 신이라 보일만하다. 자신의 배경과 함께 인간사의 관계들(우정, 결혼, 이혼 등)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면 현자나, 지식층으로 일컬어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풍자가 등장한다. 역시나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수긍이 간다. 겉멋에 보이기만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종교에 대한 이야기였다. 종교지도자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상당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에라스무스도 한몫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소위 뼈 때리는 이야기가 상당히 등장하기에, 가볍게 웃고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우신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현실에서는 감히(?) 대적하고 공격할 수 없는 존재들을 향해 돌직구를 날릴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위치가 자리를 대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었을 500년 전 독자들은 사이다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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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우신예찬 평점10점 | l****e | 2022.11.16 리뷰제목
<우신예찬>은 ‘어리석음의 신’, 즉 우신[愚神] 스스로 자기를 예찬하는 글이다. 자화자찬인 셈이다. 연설문 형식으로 쓰인 긴 글을 독자 편의를 위해서 장을 구분하여 소제목들을 달았다고 한다. 읽는 도중에 무수히 많은 각주를 읽어야 했다. 많은 각주를 읽어가면서 본문을 읽다 보니, 가끔 각주를 읽다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가기도 했다. 수많은 그리스·로마 신들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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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은 ‘어리석음의 신’, 즉 우신[愚神] 스스로 자기를 예찬하는 글이다. 자화자찬인 셈이다. 연설문 형식으로 쓰인 긴 글을 독자 편의를 위해서 장을 구분하여 소제목들을 달았다고 한다.

읽는 도중에 무수히 많은 각주를 읽어야 했다. 많은 각주를 읽어가면서 본문을 읽다 보니, 가끔 각주를 읽다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가기도 했다. 수많은 그리스·로마 신들의 이야기를 만나고, 철학 고전, 고전문학의 해석과 그 저자들의 이야기를 만나고, 스콜라학파와 중세 시대 문화, 역사 등을 만날 수 있는 각주를 읽으면서 16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사고 체계가 어떠했는지 그 일부를 읽어 내는 느낌도 들었다.

 

연설을 시작하면서 우신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 꼭 필요한 것은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자 한다.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언뜻언뜻 어느 문장은 촌철살인과도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여 서늘케도 만든다.

“엄청난 힘을 지닌 괴물 같은 백성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이런 종류의 하찮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에서 나왔습니다.”(84쪽)

현대사회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말이지 않은가.

중간 부분을 넘어서면서 비판이 더욱 가미된 풍자로 이어지는데, 그 대상이 선생, 시인, 수학자, 저술가, 법률가, 변증가, 철학자, 신학자, 수도사, 군주, 궁정 귀족, 주교, 추기경, 교황, 사제 들이다. 해학과 풍자와 역설로까지 자유자재로 써 내려간 이 글이 일주일 만에 완성된 글이라고 하니 놀랍다.

 

<우신예찬>(1511년)이 출간되었을 때 대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대다수 사람들이 느낄 만큼 당시 카톨릭의 부패는 만연했다. 재미있는 것은 <우신예찬>은 에라스무스의 허락도 없이 친구들이 출간해버린 저작물이라는 사실이다. 에라스무스 본인은 황당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일곱 번째 개정판을 낼 만큼 당시의 시대상황을 풍자하고 역설적으로 표현한 그의 글이 종교개혁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 성경 사본들과 여러 판본의 라틴어 성경을 비교 대조한 후에 내놓은 <신약 성경의 모든 것>(개정판, 1519)은 성직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도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만든 계기로 작동하였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 개정판을 원문으로 삼아서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했기 때문이다. 독일어나 그리스어를 자국어로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이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도 이제 성경을 읽게 되었던 것인데, 이는 성경적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미신적이고 부패가 만연했던 로마카톨릭의 진상이 드러나며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1517년)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의 영향이 더욱더 커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에라스무스’하면 연상되는 것이 <우신예찬>과 종교개혁이라 하겠다.

덧붙여, 표지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회를 떠받치는 사람들>(게오르게 그로스, 1926년)이란 작품으로 표지 그림 설명글이 있어서 읽고 보니, 그림 표현도, 의미도 이 글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출판사에서 클래식 표지로 명화를 많이 선정하는 듯한데, 이 표지는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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