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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저/정지인 역
대체로 기괴하지만 한편으로는 코끝이 아릿해지고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사랑스러운 단편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잖아요.
괴담이라 불릴 만큼 말도 안 되는 일에도 사실은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 10p
이따금 상상한다. 나를 둘러싼 어떤 괴담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내 안에 어떤 악마 같은 것이 깃들어 좋은 것만 열심히 파먹고 파먹어서 남은 이 비루한 껍데기가 나인 건 아닐까. 달리고 달려 필사적으로 가 닿으려고 하면 또 다시 제자리로 와 있는 나는 끝없는 악몽의 굴레 속에 빠져버린 앨리스는 아닐까. 어쩌면 괴담이란 인간의 가장 연약한 틈을 비집고 들어와 가만가만 살점을 뜯어먹다 어느 새 커져 버린, 불안과 상처를 먹고 자라난 우리 안의 괴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나는 밤이 되면 나온다는 학교 귀신 따위보다, 고통과 불안에 오늘도 철저히 유린되고 마는 나의 지난한 삶이 더 무섭다.
그러고 보면 조예은의 『트로피컬 나이트』 역시 괴담의 실체를 우리 내부에서 엿보았던 게 분명하다. 존재감이 없고, 늘 놀림을 당하다 못해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어 스스로 유령이 되어버린 아이(「할로우 키즈」), 잡아먹힐지언정 홀로 외로이 죽지 않겠노라 필사적으로 괴물 같은 ‘그것’을 끌어안는 옥주(「고기와 석류」),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끔찍한 단절의 감각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연주(「릴리의 손」), 끊임없이 우등생인 사촌언니와 비교당하며 엄마가 원하는 방향대로 이끌리듯 살아온 유리(「새해엔 쿠스쿠스」), 급성 먼지바람이라는 재해에 아니 사람 때문에 2년 째 집밖을 나서지 않는 수안(「가장 작은 신」)과 같은 인물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삶이야말로 실체를 알 수 없는 괴담에 가깝다고 느꼈으리라.
“은주는 일주일 내내 같은 옷 입는대요! 빨지도 않나봐, 더럽고 냄새나!”
그 순간, 제 몸에서 정말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습니다. 엄청난 악취였어요. 귀찮다는 이유로 같은 옷을 여러 벌 산 엄마도, 소리 지르는 짝꿍도, 이상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반 아이들도, 어딘가 안쓰러운 빛을 띤 담임선생님의 눈빛도 전부 끔찍했어요.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 「할로우 키즈」 중에서 10p
재이의 부모님은 자주 늦었습니다. 9시, 심지어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애를 맡겨놓고는 했어요. 주로 정장을 입은 어머님이, 가끔은 술 냄새를 풍기는 아버님이 오셨습니다. 재이는 얌전하게 기다리고만 있었죠. 칭얼거리지도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게 익숙한 애였어요. 그런데 제가 일하면서 느낀 건데요, 어른도 짜증 날 정도의 상황에서 애가 가만히 있는다는 건 그리 좋은 게 아니에요. 그 지루한 시간을 재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견뎠을까요. / 「할로우 키즈」 중에서 13p
세상에는 참 병든 사람들이 많고, 죽음의 순간 또한 다양했다. 장례식장도 마찬가지였다. 사흘 내내 식장이 미어터지도록 조문 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상주조차 제대로 자리를 지키지 않는 이도 있었다. 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무연고자로 화장되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옥주는 상처를 치료받으며 자신의 최후에 대해 생각했다. 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모르게 고요히 가겠지. / 「고기와 석류」 중에서 34p
그 중에서도 외로움이란 감정을 가장 기괴한 공포의 형태로 그려낸 「고기와 석류」란 작품이 단연 인상적이다. 남편과 정육점을 운영하던 옥주의 마을은 옆 동네에 백화점이 생기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남편이 먼저 암으로 죽고 장례식장에서 일하며 종종 자신은 홀로 남아 외롭게 죽을 것을 상상하던 옥주는 어느 날, 퇴근길에 우연히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정체불명의 ‘그것’을 마주한다. 석류알처럼 붉은 눈을 한,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 같은 모습의 ‘그것’을 옥주는 집으로 데려온다.
옥주는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그것’을 먹히고 입히며 자신의 곁에 둔다. 설령 그것에게 자신이 잡아먹힌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는다. 아니, 기왕이면 석류가 아주 깨끗이 자신을 발라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석류의 양분이 되어 이해 불가능한 죽음으로 남을지언정 외롭게 죽지는 않겠노라고. 그것만이 남은 삶의 마지막 목표이자, 지금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라 믿으면서. 이는 다단계 직원으로, 자신을 등쳐먹으리라는 빤한 속셈으로 찾아오는 미주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수안(「가장 작은 신」) 역시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작가 조예은은 다수의 작품을 통해서 ‘홀로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매우 실감나게 보여준다.
옥주는 그것 앞으로 다가갔다. 문득 이 풍경이 아주 그립고 익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 공간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늘 누군가 자신을 맞아주고, 라디오 음악 소리가 들리던, 생기 넘치던 시절이. 집에 돌아와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는 게 이리도 두렵지 않은 일이었다니. 죽어가는 눈을 보지 않는 게, 살아 있는 눈을 보는 게 이렇게 심장 뛰는 일이었다니. 그것이 비록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 「고기와 석류」 중에서 37p
대부분 자신이 누구인지, 나이나 이름, 가족을 포함하여 살아온 흔적들을 모두 잊었다. 어차피 한번 틈을 넘어온 이상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었기에 잊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모든 걸 온전히 기억하는데 돌아갈 수 없다면, 그것대로 견디기 힘든 비극이니까. 그런 이방인들을 구조하고 이후의 삶을 지원하는 게 릴리와 연주의 일이었다. 하지만 잊는 게 낫다는 건,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 함부로 내뱉으면 안 되는 말이라고 릴리는 생각했다. 그건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 「릴리의 손」 중에서 69p
처음부터 밖에 나가지 말아야지 한 것은 아니었다. 경보음이 울리는 날에는 밖에 나가지 말아야지, 했을 뿐인데 경보음이 매일 울렸다. 일주일에 네 번 울리던 것이 하루에 네 번씩 울렸다.
공기 정화 특수 방독면이 개발되어 미세먼지 수치가 높은 날에도 야외 활동을 할 수 있게는 되었지만, 수안은 여전히 밖에 나가지 않았다. 혼자 지내는 날이 길어질수록 마음속에 벽이 생겨났다. 아주 작은 먼지들이, 온몸의 구멍을 파고들어 무수한 거절의 기억을 심어놓은 듯했다. 먼지보다 사람이 두려워졌다. / 「가장 작은 신」 중에서 156p
‘미주에게 수안이 수십, 수백 중의 1이라면 수안에게 미주는 그 자체로 꽉 찬 1이었다.’
우리는 늘 지독한 고통과 불안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변치 않고 반짝이는 내 안의 다정한 기억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서 꽉 차오르는 누군가가 있기에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국의 땅에서 쿠스쿠스를 함께 먹자고 사진을 보내오는 언니가 있고(「새해엔 쿠스쿠스」), 실적의 압박에 시달리며 친구를 이용해야 하는 미주에겐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미는 수안이 있다(「가장 작은 신」). 죽음이라는 운명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해야 하는 블루에게는 썸머와의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이건 확신이야. 내 애정이, 내 목소리가 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닿을 거라고 믿어.’ 「릴리의 손」에서 연주가 릴리에게 남긴 편지의 글귀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닿을 거라는 믿음, 바로 그것이 그 어떤 확신조차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게 아닐까. 덕분에 『트로피컬 나이트』에 수록된 단편들은 대체로 기괴하지만 한편으로는 코끝이 아릿해지고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사랑스러운 작품이 된다.
“어렸을 때는 그 사실이 엄청 힘들었는데 나이가 들고 생각해보니까, 그건 사실 당연한 거야. 어떻게 타인이 타인을 완전히 이해해?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는 이상.”
릴리는 연주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래도, 엄마가 말했었거든.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이해 못 하면 뭐 어때. 내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해 같은 거 없어도 힘이 된다는데. 결국 지금 누구랑 있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겠어?” / 「릴리의 손」 중에서 94p
도끼와 피와 질투와 후회와 괴로움에 잊고 살던 어떤 순간들이. 트리에 걸린 장식품처럼 반짝이며 존재하던 기억이. 맞아. 난 한 때 이런 기억들로 살았다. 나를 이루고 나를 움직이게 만들던 시간들이 있었지. 스스로를 되찾은 블루는 너무 오래 부르지 못해 입 안에 갇혀버린 이름을 비로소 떠올렸다. 블루는 마지막 남은 온 힘을 다해, 세월의 먼지를 털어낸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오랜만이야, 썸머.” /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중에서 307p
『트로피컬 나이트』는 한국 문단의 떠오르는 작가로 조예은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할 만한 인상적인 작품집이다. 다만 촘촘한 구성과 좀 더 독보적인 형식의 단편들을 기대한 점에 있어서는 얼마간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떨어지는 별똥별이 아니라 날아오르는 별똥별을 보는 듯한 감각’을 독자들에게 선물해줄 줄 아는 작가라는 점에서 계속 주목하게 될 것 같다.
지독히 외로운 상황에 있다면 불안한 존재를 집안으로 들일 수 있을까. 그렇다 혹은 아니다로 갈릴 법한데 나의 답은 들일 수 있다는 거다. 혼자라는 외로움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생의 마지막 순간, 혼자 외롭게 죽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죽었을 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하는 걸 고독사라 부른다. 그거야말로 가장 두려운 것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던 옥주는 쓰레기를 뒤지는 아이를 발견했다. 석류처럼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그는 소금 그릇을 챙겨 밖을 내다보았다. 썩은 쓰레기를 먹던 아이의 모습을 한 존재는 쓰레기통 옆에서 졸고 있었다. 안쓰러워 집안에 들여 석류를 권했으나 아이는 옥주의 팔을 물었다. 인간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아이를 집안으로 들인 것이다. 혼자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 아이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죽었으면 했다.
조예은의 소설은 『스노볼 드라이브』를 읽고 이번 작품이 두 번째인데 꽤 매력적인 작가다. 우리의 미래는 현실의 확장으로 디스토피아적이고 상상하지 못하는 존재들과 함께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며 인육을 먹어야만 하는 존재나 꿈을 꾸는 사람이 상상하는 무서운 거로 보이는 악몽의 존재나 서로 다른 세계를 잇는 틈이 벌어져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것은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보았던 내용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가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느낌이다. 현실에 안주하는 우리는 밖의 세상을 향한 목마름이 있다. 그 목마름을 채워주는 역할이 하는 게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상상하지 못하는 세계에 도달해 마음껏 즐기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는 것 같다.
『파란 수염』을 변주한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고양이가 사라진 도시에 새롭게 발견한 고양이의 존재를 알게 한 「유니버셜 캣숍의 비밀」 등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를 상상하게 한다. 상상의 세계만 다루는 게 아니다.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는 마치 우리의 거울 속을 보는 듯 불편하다.
「새해엔 쿠스쿠스」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힌 한 여성의 이야기다. 사촌 언니와 비교당했던 유리, 학교에서 전공과는 무관한 과목을 가르쳤던 유리는 학생부장의 괴롭힘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집 앞으로 엄마가 찾아오는 날이 이어지고, 유리는 알 수 없는 번호로 온 문자를 받는다. 모로코, 사막과 쿠스쿠스라는 단어를 보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부모들이 종종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가 타인과 비교하는 거다. 친구는 당연하고 형제나 친척들까지 끼는 경우가 있다. 비교당하는 자의 기분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복수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부모에게 복수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유리나 연우의 입장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스치듯 말한 부분에서 힌트를 얻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훌쩍 떠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누군가의 강력한 권유는 이처럼 변화가 필요할 때 더할 나위 없는 방법이 된다.
인간의 호흡기에 침투하는 바이러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극성을 부릴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요소 중 하나가 공기다. 우리의 미래는 먼지와의 전쟁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들이 그리는 미래의 모습에서 눈에 띄는 한 가지가 바로 미세먼지로 가득한 지구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옇게 가라앉은 지구. 마음껏 숨을 쉴 수 없어 보호구를 착용하고 다녀야 하는 지구를 그려보니 우울하다. 「가장 작은 신」의 수안은 취업 면접에서 떨어진 날, 급성 먼지바람이 불자 벤치 밑으로 들어가 방독 마스크를 사수하고 일주일 만에 깨어났다. 요양을 위해 자발적으로 집에 틀어박혔다. 생수 배달이 오는 날,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미주가 찾아오며 기묘한 만남이 시작된다. 다단계의 영구회원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 미주와 그런 미주의 사정을 알면서도 집에 찾아오는 게 싫지 않아 미주의 회사에서 파는 저품질의 제품을 사주고 있었다. 수안에게 영구회원 동의서를 내밀지 못했던 미주는 실적이 좋지 않은 직원들이 가는 야유회에 가야 한다. 미심쩍은 수안은 미주를 구하기 위해서는 집 밖으로 나가야 했다. 용기를 내어 집 밖으로 나섰던 수안의 모습은 투사와도 같다.
그러므로, 인간은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다. 인간이 잠들 때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악몽이 곰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벌어진 틈 사이로 빠져나와 기억을 잃은 릴리가 마지막까지 쥐었던 손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 서로 싫어했던 사촌 자매가 같은 것을 바라보고 그에 대한 꿈을 꾸는 것까지. 마음 한쪽이 차올랐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직 살 만하다고. 우리 곁에 누군가가 있어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소설이었다. 비록 다른 존재에게 먹힐지라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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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작가의 신작 『트로피컬 나이트』는 한여름 밤 젤리소다 맛 괴담집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끌린 책이다. 전작으로는 『칵테일, 러브, 좀비』,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스노볼 드라이브』가 있다. 작품의 제목만 익숙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조예은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았다. 단편 소설들의 모음집으로 각 단편마다 다른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할로우 키즈>는 유치원 핼러윈 파티 때 투명 인간처럼 갑자기 사라진 재이는 교사 은주의 어린 모습과 비슷해 안타까워한다. 원래도 존재감 없던 재이가 사라지고 나서 이 아이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사람들이 가족을 제외하고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고기와 석류>는 옥주는 집 앞 쓰레기봉투를 뒤져 상한 고기를 먹던 아이를 데리고 와 보살피며 석류라 이름을 붙여주는데 이 아이는 사람 고기를 먹어야 기운을 차린다. 언젠가 늙어 없어질 자기 살까지도 기꺼이 석류에 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기괴한 이야기가 또 이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릴리의 손>은 시공간이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틈이 갑자기 열리고 그렇게 릴리는 자신을 구하려던 연주의 의수와 함께 현실 세계로 와 기억이 모두 사라진 상태로 자신이 연수로 살아간다. 그렇게 현실에 적응해 나가는 릴리와 달리 미래 세상의 연주는 오래도록 릴리를 그리워한다. <새해엔 쿠스쿠스>는 고종 사촌 언니 연우와 어린 시절부터 비교 대상이 되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던 유리는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결혼식을 파투 내고 사라졌던 연우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우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마음먹는다. <가장 작은 신>은 어느 날 불어닥친 먼지바람으로 은둔생활을 선택한 수안에게 다단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미주가 찾아온다. 수안은 미주의 의도를 알면서도 외로움을 달랠 수 있으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고 위험에 처한 미주를 구출해준다. <나쁜 꿈과 함께>는 사람의 악몽을 먹는 몽마가 은성의 꿈속에서 곰 인형이 된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자 그 따스함에 마음이 흔들려 다시 자신을 안아주길 바란다. 몽마가 이렇게 정에 굶주렸을 줄이야. <유니버셜 캣숍의 비밀>는 어느 날부터 고양이들이 사라지고 은하가 키우던 고양이도 사라지는데 그렇게 사라진 고양이들은 자신들이 원래 살던 고양이 별로 돌아간다.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의 블루는 살인마 남편에게 목숨을 지키기 위해 미래와 과거를 넘나드는 문을 끊임없이 통과하며 계속해서 남편을 도끼로 살해해야 한다. 오랜 세월 후 그녀를 사랑하는 썸머와 결국 블루가 태어나던 시점에서 재회한다.
단편 소설을 이해하기가 난해하다는 내 편견을 깨우는 소설집들을 간혹 만나는데 그중 하나로 꼽을 만한 책이 바로 이 『트로피컬 나이트』이다. 괴담집이라고 하지만 말랑말랑하고 따뜻함을 품고 있으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제목처럼 ‘열대야’에 읽는 간담 서늘해지는 이야기의 결말은 누군가를 향한 사랑, 애정 그리고 그리움이었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는데 단편이 모두 장편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던 표지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었음 알게 되니 사랑스럽게 그지없다.
무서운 줄 알면서도 읽고 막상 무섭다 여겨지면 더 읽기가 머뭇거려진다. 어쩔 수 없다. 내 취향의 한계선이다. 읽을 수 있는 글이 있고 그러기에 부담스러운 글이 있다는 것. 꼭 읽어야 한다고, 꼭 읽었으면 한다고 해도 그럴 것까지야 하면서 뒤로 물러서게 되는 글. 이 작가의 작품 세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어쩌겠는가.
무엇이 무서운 것이냐고 누가 물어온다면? 글쎄, 잔혹한 묘사 부분? 아주 조금이라도 아주 약간이라도 나는 글을 통해 잔혹함을 체감하고 싶지 않다. 상상으로도. 모른 채로 살고 싶을 뿐이다. 어떤 감각은 사는 동안 전혀 발굴하지 않은 채로,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책에 실린 여덟 편의 글에서 모두 무섭다고 느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단 한 편에서라도 이 느낌을 받고 나면 남은 글도 대충 보게 되고 작가의 이름도 멀리하도록 기억하려 한다. '고기와 석류'는 너무 크고 강렬한 인상을 내게 던졌다. 읽는 내 기분을 몹시 불편하도록 만들어 버렸으니 오래 기억하게 될 듯하다.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은 좋았는데, 고양이의 비밀이 근사했는데, 우리 고양이가 더 신비하고 다정하게 보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한번 더 쓰다듬어 주었는데. 그러나 책은 무서움으로만 남았다.
환상에도 여러 층위가 있고 그 안의 내용도 여러 갈래로 갈라질 것이다. 공포나 괴기나 잔혹은 내가 재미를 느끼는 쪽이 아니다. 단지 그럴 뿐이다.
드디어 만나게 된 조예은 작가의 소설집. 장편을 좋아하지만, 그녀의 작품이라면 단편도 즐겁게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이번에 만난 책에는 모두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할로우 키즈’ 유치원에서 유령 역학을 맡은 아이가 사라진다. 하지만 아무도 아이가 사라진지 알지 못한다. 우리 곁에 있지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혹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한 것은 아닐까?
‘고기와 석류’ 남편은 죽고 아들은 떠나 버렸다. 친구도 이웃도 없는 곳에 살고있는 옥주는 어느 날 자신의 집 앞에서 쓰레기를 뒤지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한 괴물을 만난다. 옥주는 그 괴물을 석류라 부르며 곁에 두게 된다. 석류를 곁에 두고 있다면 그녀는 외롭게 죽지 않을까
‘릴리의 손’ 연주는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는다. 깨어난 순간 아는 건 연주라는 이름뿐.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녀는 사고가 일어난 장소를 찾아갔다, 기계 손을 줍게 되고 이것을 고치려 하는데..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틈. 그 틈이 있다면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을까?
‘새해엔 쿠스쿠스’ 자신의 직장 학교를 그만두고 집 안에 숨어 지내는 유리. 유리를 설득하기 위해 엄마는 매일 그녀를 찾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나는 모르코에 있어’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조금씩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고모의 딸 연우 언니.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았던 언니가 크게 사고를 친 것은 결혼식 당일 사라진 것은 아닐까? 부모의 말대로 산다면 평탄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진짜 자신의 삶일까?
‘가장 작은 신’ 원인을 알 수 없는 먼지 바람으로 집안에서만 지내는 수안. 어느 날 그녀에게 고등학교 동창 미주가 찾아온다. 다단계 회사에 다니는 미주의 속마음을 알고 있지만, 속는 척하며 미주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미주는 영구 회원 가입 동의서를 수안에게 건네지 못한 채 갈등하게 되는데..
‘나쁜 꿈과 함께’ 나는 몽마. 인간을 통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을 본다. 몽마는 은성의 몸에 올라가 가위에 눌리게 한다. 그때 나타나는 기억은 가장 무섭거나 피하고 싶은 건데 은성은 곰인형이다. 무시무시한 몽마인 나는 왜 곰인형의 모습이 된 것일까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 고양이들이 사라진다. 은하도 자신의 고양이 체다를 잃게 되었다. 고양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성의 젊은 영주가 머리에 도끼가 박힌 채 살해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영주의 부인 블루. 하지만 블루는 3년 전 죽었다. 과연 누가 젊은 영주를 죽인 것일까
8개의 단편 모두 매력 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고기와 석류’. 혹시 자신이 석류에게 먹힐지도 모르지만, 곁에 두고 싶었던 옥주. 죽음이란 무엇일까? 혼자서 죽는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옥주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내가 아직 젊어서일까? 어떤 책에서 읽었다. 이제는 고독사에 대해 의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그 사람의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어서, 외로워서, 고독사하는 건 아니라고. 이제 고독사가 일부 누군가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을 할 수 없고, 산 것을 먹어야 하는 그래서 결국은 자신도 먹힐지 모르지만, 석류를 곁에 두고 싶은 옥주의 마음. 모든 현대인의 마음 아닐까?
서늘한 듯 하지만, 그래도 내 주변을 생각하게 하는 책. 조예은 작가의 신작이, 장편으로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