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면, 분명 영화평론이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표지의 위쪽을 보면, “정희진의 글쓰기 4”라고 되어 있다. 글쓰기 시리즈의 네 번째 책인데, 나머지 책들은 모두 “~~~ 쓴다”인데, 이것만 아니다. 다른 책들은 어떻게,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한 얘기일 듯한데(물론 그렇게 간단한 얘기만은 아닐 거란 건 정희진이라는 작가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거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어떻게, 왜’가 아니라, ‘무엇을 통해’ 글을 쓰고 있다. 그 ‘무엇’이 바로 영화다.
그렇다고 ‘영화’에 대해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소재이며, 도구다. 당연히 영화의 제목이 나오고, 감독이 누구며, 어떤 배우가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했다느니 하는 얘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한 방도 같아 보인다. 아니 그것 자체도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방식으로 영화를 ‘읽고’ 있으며, 모두가 생각하고 평가하는 방식대로 영화를 평가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이들의 생각과 공유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모든 게 그렇다면 이건 완전히 이해 불능의 책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정희진은 영화도, 책도, 사회 현상도 자신을 거쳐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다. 내 생각엔 보다 정확하게 다듬는다면 ‘몸’이 아니라 ‘사고’나 ‘생각’이 더 맞는 말이고, 거기서 조금 내려와 ‘머리’, 혹은 ‘심장’이 맞을 것도 같지만, 그렇게 제목을 지을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또 여기서 ‘몸’이란 그저 물질적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게 확실하다. 몸은 ‘나’를 체현하는 총체적 실체일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의 글은 ‘내’가 영화를 통해 ‘나’를 총체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사회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식’인 셈이다. 굳이 ‘방식’이라고 한 이유는, 이 책이 결국은 글쓰기 책이라고 하고 있고, 또 저자 자신이 글 쓰는 데 대한 자의식을 수차례 토로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글쓰기는 목표가 아니라 방식이다.
본 영화도 있고, 보지 않은 영화도 있다.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지만, 본 영화에 대해서 나와 아주 달리 본 영화도 많고, 비슷하게 본 영화도 있다. 그런데 나와 비슷하게 봤다, 혹은 달리 봤다, 달리 봤으면 어떻게 달리 봤는지, 그런 게 중요하지는 않다. 그가 영화를 보는 방식 자체가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에게 영화는 ‘즐기는’ 매체가 아니다. 물론 즐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즐긴다’의 의미가 나를 비롯한 많은 영화관람객과는 다를 듯하고, 여기의 글에서는 그런 ‘즐기는’ 얘기는 없으니 말이다. 그저 심각하게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영화에서 깊게 생각하고, 탐구할 거리를 찾아낸다는 얘기다. 쉬운 일은 아니다. <암수살인>이란 영화에서 고통, 가시성, 윤리를 생각하고, <그래비티>에서 우울증에 대해 더 많이 떠올린다. 그것도 중력과 관련지어. <작전명 발킬리>을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관련시키며 ‘국가주의’에 대해 비판하거나 인정한다(그 국가가 장애인의 몸으로 표상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청연>이라는 영화를 이야기하면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에 대해 옹호한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뭐라고 하지 말라고 한다.
그가 발 딛고 있는 기본적인, 학문적, 사상적 배경은 확실하다. 물론 그것 자체가 자신이 아니며, 무엇이든 맥락적 사고가 중요하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분명한 입장이다(‘주의’라고 쓰고 싶지만, 그가 분명하게 자신은 무슨 ‘주의자’가 아니라고 했기에). 그런 그의 입장에 대해 반대할 수도 있고, 옹호할 수도 있고, 박수를 보내고 따를 수도 있다. 그런데 가장 인상 깊게 박힌 부분이 있다. ‘공부’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하는 것은, 특히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폭력이다. 마치 자신을 비판하고 싶다면 제대로 공부를 하고 비판해달라는, 그래서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지 않겠냐는 호소 같아 보인다.
영화를 보고, 읽는 신선한 시각을 알게 되었다가 아니라, 많은 영화가, 특히 좋은 영화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