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가면 작은 공원에 세워진 동상이라도 누구의 것인지 살펴보게 된다. 이 나라, 이 도시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기리고 있는지를 아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 주변에 있는 동상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학교 건물 앞의 이순신 동상이나 세종문화회관 앞의 세종대왕 동상 정도나 관심을 가졌을까
역사 교사 유정호의 『우리 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는 바로 그런,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동상의 주인공 중에서도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아이디어가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참 무심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독립운동이라는 처절하고도, 숭고하여 쉽게 접근하지 못할 것 같은 이야기를 우리 주변에 있으면서도 별 관심을 갖지 못하고 지나치던 동상을 통해서 인물을 찾고, 그 인물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어 독립운동의 가치가 먼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 하다.
사실 저자가 들려주는 독립운동가의 삶은 생소하지 않다. 많은 역사책에서 다루었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생소하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진부하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하게 하는 얘기들이 적지 않다. 모두 비슷비슷한 삶을 살았으며, 이러저러한 활동 끝에 죽어간 이야기들. 그들의 삶을 하나의 덩어리로만 받아들여 한 개인의 고뇌와 결심, 의지 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게 아닌가.
반면 이 책은 그런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개별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은 독립운동의 상황이 그렇게 복잡했으며 간단치 않았음을 이야기하지만, 그리고 독립운동이 한 개인의 결심과 의지만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개별적으로 서 있는 동상은 독립운동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가 존경하고 기려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거대한 흐름 속에 기꺼이 한 몸을 던졌던 한 개인으로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소환하고, 그들의 삶을 숭고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이 책의 말미에는 친일행위자들도 소개하고 있다. 김성수, 김동인, 안익태, 민영휘가 그들이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인상 깊다. 친일 행위가 분명한 이들의 동상 역시 우리 곁에 있다. 누군가는 그들의 삶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기려야 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삶의 전반기의 독립운동과 우리 문학을 풍성하게 만들었던 유려한 문장, 애국가의 작곡가, 학교의 창립자로서 그들은 그것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함께 그들의 과(過) 역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 그들의 동상은 철거의 대상이 아니라 아직 완전하지 않은 미완의 동상인 셈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는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동상의 모델이 되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부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다'에는 강우규, 안중근, 전명운, 김상옥, 나석주, 이봉창, 윤봉길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중 '조선 총독을 노린 65세 노인의 폭탄 강우규' 편을 이야기해볼게요. 강우규님은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실제인물로 나오는데요, 찾아보니 토지 7권에 나옵니다요. 토지 책에서 배탈난 주갑이를 고쳐준 한의사 강의원이 바로 그 강우규님입니다. 실제로 강우규님은 한의약을 배워 한약방을 열어 큰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잡화상을 열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의 돈을 쓰지 않고 민족의 힘을 키우는 일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총독이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왔을 때 강우규님이 폭탄을 던졌지만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강우규 의거는 3.1운동 이후 최초로 시도된 의열투쟁으로, 이후의 의거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어요. 이 책은 각 독립운동가의 일생을 짧게 요약해주며 뒷부분엔 '우리동네 인물 탐구'편에서 연보와 동상 위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강우규님의 동상은 서울역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행가기 전에 이 책을 보고 동상의 위치, 독립운동가의 일생을 살펴보고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처럼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실 수 있을 거에요. ^^
'2부 독립운동에 모든 걸 걸다'에서는 이종일, 이준, 민영환, 양기탁, 조만식, 송진우, 심훈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최초로 낭독하다 이종일'편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2부에 나온 분의 이름, 단체가 3부, 4부에도 나오기도 합니다. 함께 독립운동을하는 분들이니 당연히 연결고리가 있는 것인데요, 앞에 나온 이름, 단체가 뒤에 또 나오면 반갑더라구요. 이종일님 역시 뒷부분 김마리아 여사님 편에서 언급되고, 강우규편에서 나오는 대한민국노인동맹단은 뒷부분 박은식편에도 나오기도 합니다. 이종일님은 삼엄한 감시 속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부, 낭독한 분이며, 이종일님의 동상은 종로구 수송공원, 태안 이종일선생생가지에 있습니다.
'3부 독립운동을 이끌다'에서는 이상재, 손병희, 서재필, 이시영, 김구, 안창호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상의 업적 이시영'편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시영님은 이회영님의 동생인데요, 이시영님은 이회영님과 함께 간도로 가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에는 초대 법무총장, 재무총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1945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이시영님은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전쟁 발발 후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 피신하는 모습, 국민을 공산당으로 몰아 학살하는 모습 등에 충격을 받아 1951년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의 잘못을 규탕하는 성명서 '국민에게 고한다'를 국회에 전달하고 부통령직을 사임, 1953년 4월 17일 부산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이시영님의 동상은 백범광장 공원에 있습니다.
'4부 독립운동에 제약은 없다'에서는 전봉준, 이상룡, 박은식, 베델,김마리아, 최현배, 방정환, 유관순, 손기정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중 '국혼이 살아 있으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박은식'편이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한국사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 박은식님을 더 기억하고 싶지 말입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나이들수록 역사를 제대로, 올바르게 알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더더욱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분들이 소중해집니다요. 박은식님의 동상은 청주시 청남대와 관악구 서울대학교에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5부는 '친일파도 잊지말자'입니다. 이 책에서는 김성수, 김동인, 안익태, 민영휘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 네 명의 동상도 여기저기에 있다니 분노가 차오릅니다. 그 중 김성수의 동상은 무려 세 군데에 있더라구요. 흐음. 특히 학교 내에 있는 친일파 동상은 더욱더 화가 납니다. 사실 대공원 앞에 있는 동상도 너무 화가 납니다.
우리가 애국가로 부르고 있는 그 노래를 작곡한 안익태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예전에 EBS 에서 안익태가 친일파일 뿐만 아니라 친나치주의자라고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답니다. (EBS 화이팅!) 이 책 역시 안익태의 친일행적, 친나치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 1942년 9월 18일 베를린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축하하는 교향환상곡 <만주국>을 작곡해 지휘했고, 이 공연을 기록한 영상물의 6분 25초에는 일장기와 만주국기를 설치한 무대 앞에서 안익태가 열심히 지휘하는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하아. 저 후기 쓰면서 너무 열받습니다. 친일파가 만든 노래를 애국가로 부르는 것은 재고를 해봐야하지 않나 싶지 말입니다. 안익태의 동상은 송파구 올림픽공원과 동작구 숭실대학교에 있습니다. 숭실대학교에 있는 안익태 기념관에는 그의 친일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업적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분들을 소개해주고 있는 유익한 책입니다.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읽어도 좋고, 관심있는 부분만 먼저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이 책을 읽고나면 곳곳에 세워져있는 동상들을 무심코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지 말입니다. ^^
우리집 책장에는 한국근현대사와 관련된 역사책이 꽤나 많다. 그중 6할이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다(나머지 4할은 일제잔재, 친일파, 일제강점 당대이야기 등). 해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꽤나 많이 읽었고, 심지어 여행다닐때도 독립운동 또는 독립운동가에 관련된 사적지도 자주 찾아다니고 그랬다. 유독 다른 시대의 역사보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다. 기억하기 위해서.
그어떤 역사든 왜곡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우리 근대사, 특히나 독립운동 관련해서는 왜곡과 침묵이 너무나 많다. 제일 큰 이유는 해방 후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부와 권력을 유지했기 때문이고, 그 다음 이유는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사상이라는 무거운 문제로 대립하게 되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두가지 이유는 서로 뗄레야 뗄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해방후 친일매국노들은 사상을 방패삼아, 반공을 외치며 우파 독립운동가 뒤에 숨어들어갔고, 사회주의사상 또는 중도 독립운동가들을 척살해나간다. 그들은 그렇게 부와 권력을 유지했고, 그 친일매국노의 후손들은 지금도 잘먹고 잘산다).
오늘 읽은 이 책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는, 내가 이 책에 나온 수 많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를 몰라서 읽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에 실려있는 독립운동가들 대다수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이 책이 집필된 이유다. 바로 우리 동네에 세워진,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동상’이다. 수 많은 사람들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 동상은 단박에 안다. 동상의 안내판을 보지 않아도 말이다. 반면에 독립운동가 동상은 ‘아, 동상인가보다’ 하고 외면한다. 익숙한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나 도마 안중근의 동상 정도는 되야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다. 물론..... 나도 그런 수 많은 사람들 중 하나다. 아무리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알고, 독립운동사를 알고 있을지언정, 그들의 얼굴은 생소하고,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 그들을 기리고 동상까지 세웠는지 모른다. 실제로 이 책에 나온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동상’들 위치를 보면,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지역이 꽤나 많이 있었다. 분명 당시에도 나는 역사덕후였고, 꽤 많은 독립운동 책을 읽었는데도 말이다.
아직은 응애밖에 못하는, 사랑스런 내 딸이 생긴 지금. 내 딸과 손잡고 여행을 다니다가 독립운동가 동상과 마주한다면, 그 때는 과거처럼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관심을 갖고 보면서 동상으로 세워진 이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였기에 이렇게 동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
▶1천대 1로 싸운 조선의 총잡이, #김상옥
독립운동가 김상옥, 지금보다 몇십년전 과거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가 몸 담았던 독립운동단체가 #의열단 이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했던, #항일독립운동단체 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김원봉 역시도 몇십년전 과거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며, 조금 달라졌다.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했던 독립운동가들 이름이 하나둘 대중매체(특히 영화)에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이나, 이 챕터의 주인공인 김상옥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나 총잡이 김상옥은 SBS 프로그램인 꼬꼬무에서도 한번 다뤘기에, 꼬꼬무 시청자들에게는 조금 친숙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젊은이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우리나라 대표 문화의 거리다. 온갖 공연으로 볼거리가 가득한 이 곳 한 모퉁이에 동상이 하나 있다.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모델로 삼았던 김상옥이 동상의 주인공이다. 두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김상옥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한편으론 일본 경찰 1천여 명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면서 수십여 명을 사살한 게 사실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그러나 두말할 것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p 056
김상옥의 동지인 전우진을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가한 끝에 김상옥이 이혜수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경찰은, 1월 22일 새벽 다섯 시 중무장한 헌병대 1천여 명을 대동해 이혜수의 집을 포위했다. 깊은 숨을 내뱉은 김상옥은 마음의 정리를 끝내고 양손에 총 두 자루를 강하게 움켜쥔 채 일본 경찰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지붕에 올라가 김상옥의 동태를 살피던 일본 경찰이 마당으로 뛰어내리며 총을 발사하니 긴장된 정적이 깨졌다. p 062
마지막 총성이 울리고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일본 경찰은 김상옥이 죽었으리라 짐작했지만, 두려움에 누구도 섣불리 걸음을 옮겨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은 김상옥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그의 어머니를 총알받이로 내세워 조심히 변소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순국한 김상옥이 있었다. 세 시간이 넘는 교전 끝에 열여섯명의 일본 경찰을 사살한 김상옥의 마지막은 장렬했다. 김상옥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일본경찰들은 김상옥 곁으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김상옥의 죽음이 확실해졌다고 생각하곤 김상옥의 시신을 옮겼는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상옥의 몸에는 무려 열한 발의 총상이 있었던 것이다. p 063
나에게도 김상옥은 익숙한 인물이다. 각종 다큐, 책으로도 꽤 자주 접했던 인물이기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챕터를 읽으면서 당황했던 사실은... 그의 동상이 내가 자주 들락거리던 대학로에 있었단 사실이다. 난 역사덕후이기도 하지만, 연뮤덕후이기도 하다. 연뮤덕의 특징 중 하나가 회전문인데(^^..) 그 덕분에 대학로를 아주 제집 드나들듯 다녔는데, 그 앞에 있던 동상이 독립운동가 김상옥의 동상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애초에 누구의 동상인지 관심을 갖지도 않았었고 말이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나중에 대학로를 가게된다면, 김상옥 열사를 다시금 떠올려야지.
▶을사늑약에 개탄하며 죽음으로 사죄하다, #민영환
구한말, 우국충절의 대명사인 민영환. 그는 민씨 척족임에도 불구하고 부정부패가 아닌,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하다가 끝내 자결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의 절개는 백성들로 하여금 눈물을 짓게 하였고, 우국충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분명 다른 민씨와는 달리,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마음은 높이살만하지만,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생각한 끝이 자결이라는게 좀 안타깝다. 후술하겠지만, 민영환처럼 태어나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했던, 지체높은 양반가 석주 이상룡 집안이나, 민영환처럼 높은 관직을 역임했던 이회영 집안은 ‘살아서’ #항일무장투쟁 이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선조들의 역사만봐도 민영환의 선택이 얼마나 씁쓸한지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발발전, 일본을 찾아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이야기는 꽤나 유명하다. 황윤길은 (일본과)전쟁이 일어날거라고 했지만,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7년간의 길고긴 임진/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났을때, 전쟁은 없을거라던 김성일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김성일이 민영환 같은 관료였다면, 자결하여 순국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성일의 선택은 달랐다. 김성일은 앞장서서 왜놈들과 싸웠다. 약 이백여년 뒤 이상룡이 그러했고, 이회영 6형제가 그러했다. 그렇기에.... 민영환의 순국은 그저 죽음으로 도망친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씁쓸하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당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민씨 척족으로 많은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민씨 척족 중 상당수가 부당하게 얻은 권력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달리 민영환은 쓰러져가는 나라의 국운을 걱정하며 자결했다. p 129
민영환은 여러 나라를 거치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마주했지만,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조선의 풍습과 사고방식에 젖은 모습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았다. (생략) 민영환은 2년 동안 제국과 식민지로 전락한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조선의 현실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봤다.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았다. 그런 시점에서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설립해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부르짖었다. 서재필의 뜻에 동감한 민영환은 군부대신 겸 내부대신으로서 독립협회에 참가해 활동을 지지했다. p 132~133
민영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크게 변화되지 못했다. 대내적으로는 고정의 무능력과 친일파 득세가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지지했다. 결국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p 135
민영환은 일본 헌병이 조병세를 체포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며 본인이 소두가 되어 상소문을 재차 올렸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이번에는 민영환을 평리원에 구속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상소문의 참뜻이 전달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민영환은 목숨으로 뜻을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2일이 되던 날인 1905년 11월 3일 민영환은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칼로 자신의 몸을 찔러 순국했다. 민영환의 나이 45세였다. p 135
공개된 그의 유언서가 많은 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라를 운영한 관료로서 국운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막아내지 못한 자신의 죄를 성토하면서, 이 나라를 포기하지 말고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는 당부에 많은 이가 눈물을 흘렸다. 조병세, 송병선, 홍만식 등 전,현직 관료들이 민영환을 뒤따라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했다. p 136
관료로써 민영환이 참가한 독립협회. 여기에 대해서도 난 할말이 많다. 분명 독립협회 초반에는 고종의 지지가 있었고, 그렇기에 관료였던 민영환도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립협회에서 입헌군주제라는 안건을 이야기하자, 고종은 많은 돈과 인력을 들여서 강제해산시켰다. 고종이 직접 말이다. 입헌군제자라함은, 전제왕권이 아닌 체제이기에, 왕권강화를 원했던 고종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고로 고종이 원한 자주독립은 전제왕권을 기반으로한 자주독립이었다는 말이다. 이는 대한제국 헌법에도 명확히 명시되어있기도 하고.
거기다 독립협회 2대 회장은 친일매국노이자, 을사오적으로 유명한 이완용이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상의 업적, #이시영
부와 권력을 쥔 명문가에서 태어난 이시영, 그에게는 형제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이회영 6형제라 부른다. 대부분은 넷째였던 우당 이회영을 기억하지, 이시영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잘 언급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한민국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시영은 해방 후, 6형제 중 유일한 생존자였으며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이었기에, 이름이나마 알고 있을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시영이라는 이름자체를 모르는게 부지기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말할 때 보통 김구만 떠올린다. 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6형제와 함께 오늘날로 환산해 600억이 넘는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쏟아부은 이회영은 기억하지만, 동생 이시영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잘 알지만, 부통령 이시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듯 이시영은 드러나지 않는 2인자였지만 평생 확고한 가치관과 의지로 나라를 위해 살았다. p 231
이시영은 간도로 떠나는 자리에서 “내가 이 문으로 다시 들어올 날이 없다면 자자손손이라도 들어올 날은 있으리라. 그리고 내가 이 문을 나설 이 시간으로부터는 별별 고초와 역경을 당하더라도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맹세했다. 굳은 결심으로 (간도)삼원보에 도착한 이시영은 교육과 상공업을 발전시켜 독립 기반을 마련하는 경학사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강습소를 세우는데 매진했다. 필요한 경비의 대부분을 제공했음에도 이시영은 직책에 연연해하지 않았고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재에게 직책을 양보했다.p 234
>경학사 초대사장 이상룡, 신흥강습소 초대교장 이동녕
(3.1운동 이후, 임정 수립)초대 법무총장으로 참여한 그는 곧 재무총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았다. 그리고 독립하는 날까지 임시정부와 함께했다.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 임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독립운동 방향을 두고 분열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임시정부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시영은 묵묵히 임시정부를 지켰다. 국민의 염원과 희망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를 버린다는 건 이시영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p 235
나라를 되찾고자 인생을 바친 이시영은 1945년 77세 때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중 유일하게 한국 땅을 밟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따. 그러나 이시영은 굴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임시정부 시절 사용하던 예전 직함을 그대로 사용했다. p 237
이시영으로 하여금 모든 일에서 손을 놓게 만든 일이 1946년에 발생했다. 여운형이 피습당하는 사건을 두고 좌익단체 민주주의민족전(민전)이 이시영이 위원장으로 있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부위원장 신익희가 이시영의 동의없이 민전을 명예훼손과 무고죄로 검찰에 고발하자, 이시영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과거의 동지들이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정치이념을 가졌음에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모습에 크게 실망한 것이었다. p 238
이 챕터의 주인공은 분명 이시영이지만, 난 이시영을 포함한 그의 형제들을 모두 이야기 하고 싶다. 이씨집안의 6형제는 모두 본인과 가족들, 재산 모두를 바쳐서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니까.
→ 첫 째 이건영은 형제들과 함께 1910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1926년 선산이 있는 경기도 장단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감시 속에 살았다. 1930년 78세 일기로 장단에서 숨을 거뒀다.
→ 둘 째 이석영은 가장 많은 돈을 독립전쟁 자금으로 지원했다. 80세 된 1934년 끼니를 이을 돈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
→ 셋 째 이철영은 경학사 사장과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소 교장을 역임했다. 신흥무관학교 폐교 뒤 상해, 천진 등지를 떠돌다가 1925년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 넷 째 이회영은 동북항일의용군 창시자로 나선다. 이후 여순감옥에서 모진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딸 이규숙이 시체실에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순국한 이회영을 확인한다. 하지만 일제는 이회영이 삼노끈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삼노끈이 어디서 낫는지 밝히지 못했다.
→ 다섯 째 이시영은 독립전쟁 뒤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키자 시민들과 함께 서울에 남아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대한민국 부통령이 북한군 포로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피난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이 한강교를 폭파하고, 심지어 양민까지 학살한하고, 거기다 국민방위군 사건까지 겹치면서, 이승만 정부에 실망할 대로 실망한 그는 그 길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1953년 4월 17일 부산 동래에서 숨졌다.
→ 여섯 째 이호영은 다물단원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밀정을 색출하고 일제 잔당을 처단했다. 일가족 모두 일제에 몰살당했다.
재작년 (1945) 해방이 되었다고 할 때
38년 전 여러 형제와 오십여 식구를 데리고 국경을 벗어져 나갈 때와
충칭에서 만리장공의 몸이 되었을 적에
많은 동지의 가족을 이토에 묻고 오는 마음은 처량하더라..
-민중일보에 실린 이시영의 소회
▶조상의 위패를 뒤로하고 총을 든 성리학자, #이상룡
경북 안동, 유서갚은 유림 가문에서 태어난 석주 이상룡. 그는 나라가 위태롭자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를 태우고 일가족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유학자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었다는 건, 자신은 유학자이기 전에 한 나라의 국민이기에 위태로운 나의 나라를 찾고자 함이다. 뼛속깊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노비문서를 태웠다는 것도, 조선을 망국으로 가게 한 구체제가 내 나라를 찾는데 하등 도움될 게 없다고 생각했으며, 내 나라를 찾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석주 이상룡
역사를 통해 자신을 지킬 힘도 없는 나라는 결국 무너진다는 걸 잘 아는 이상룡은 다른 학문을 경시하고 성리학만을 고집하는 유생들과는 달랐다. 무(武)를 천대한 유림과 달리 이상룡은 여러 개의 화살을 발사하는 연노를 개량해 훗날을 대비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p 285
일본에 모든 면에서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처절히 느낀 이상룡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활용의 차이였다. 일본이 서구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여 기존 사회의 문제점을 바로잡았던 것에 비해 조선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전통과 관습만 고수하며 변화를 거부했기에 뒤쳐졌다고 분석했다. 지금껏 서구 문물에 반감을 가졌던 이상룡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십살 나이에 사고의 틀을 바꾼다는게 매우 힘든 일임에도 이상룡은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고 칸트, 홉스, 루소 등 서구 사상가들의 책을 읽으며 서구 문물을 우리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고 응용할 부분을 찾았다. p 286
독립군 기지 건설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토지 및 가옥 등 부동산을 정리한 뒤, 노비문서를 불태워 가노들이 모두 자유민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인근 유생들에게 학업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고는 1911년 1월 일가를 데리고 (간도)삼원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이회영 일가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독립기지를 건설하는 데 애쓰고 있었지만, 참여할 독립운동가와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때 북쪽의 매서운 찬 바람을 뚫고 도착한 이상룡 일가 150명은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이상룡과 함께 삼원보로 망명한 김대락은 신흥강습소를 세우다가 1924년 순국했고, 김동삼은 청산리대첩의 주축이었던 서로군정서를 운영하다가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p 287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는 이상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바꾸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으로 확대, 개편했다. 신흥학교도 무관학교로 개편해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는데, 1920년 8월에 2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며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p 289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최고책임자인 국무령으로 취임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일을 계기로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폭발하면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원할 새 대통령으로 박은식이 선출된 상황이었다. 박은식은 문제가 많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 중심의 내각제로 체제를 바꾼 뒤, 초대 국무령으로 이상룡을 추천했다. 유연한 사고로 모두를 포용해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인물로 이상룡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p 291
역시나 TMI일지 모르지만, 석주 이상룡을 필두로 그의 부인 김우락,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손자 며느리 허은 까지 모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한마디로 그의 집안은 모두가 나라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또 씁쓸한 이야기가 있다면, 석주 이상룡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꽤 많아졌으나, 독립운동에 매진한 이상룡의 가족들 이름은 사람들에겐 생소하다면 생소하다는 것. 이회영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의 이름이 덜 알려진 것 상황과 매우 비슷하달까.
그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도 이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역사쌤이 들려주는 난생처음 35년 한국독립사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
저: 유정호
출판사: 믹스커피 출판일: 2022년 8월15일
우리에게는 근대가 존재하는가? 나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해보고는 한다. 근대가 없이 어떻게 현재로 넘어올 수 있냐고 누군가는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맞다. 물리적으로 근대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 근대화를 우리 스스로 주도하지는 못했다. 노쇠한 왕조는 제국을 선포하며 자신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고 했지만 끝내 사라져버렸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유쾌하지 않은 기억은 우리 공통의 서사에 각인되어 버렸다.
그 시대의 끝도 결국 우리 손으로는 이루지 못했다.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주체성을 잃고 표류한 듯 보였다. 스스로가 결정하고 책임지지 못하는, 자아의 상실이다. 거의 대부분의 왕족과 기득권은 하나의 지배층으로 자신을 자리매기고 매국을 했다. 왕족에 대한 막대한 지원금과 기득권에 대한 은사금은 달콤한 대가였다. 어느 책인가에서 이완용이 고종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래도 왕실을 지켰다는 스스로 위안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시대가 끝나고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그 시대를 그다지 회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것은 참기 힘든 모욕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우리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는 힘을 나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왠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그 시대를 그대로 아예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싫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기력한 존재들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시대에 순응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였으니까.
그 흔적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 이 책의 저자가 주목한 것은 동상이었고, 거기서 우리가 관심을 주지 않았던 그들을 소환한다. 이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믿었던 사람이다. 그들이 어떤 정치적 신념을 가졌던지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진영논리와 결과론에서 도출된 피아 구분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지 않는가? 중요했던 것은 그 근대라는 시대를 앞서 이야기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순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지 않는가?
그들은 폭탄을 던지기도 했고, 저격을 하기도 했다. 성공한 적도 있고 실패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고한 사람들이었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고 죽었다. 죽음을 앞두고서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은 그들의 모습을 회상해본다면 그들에게 중요했던 가치란 어떤 것이고 그것을 지키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면면을 하나씩 읽어간다면 우리가 그 시대를 잊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일깨운다.
하지만 심심찮게 우리는 친일행각을 자행한 사람들의 동상도 마주한다. 어쩌면 이 책에서 다루기 껄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도 함께 소개하며 우리가 그 시대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 그 시대가 여전히 우리에게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비록 자신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끌 수는 없었지만 그 시대에 우리가 무기력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수많은 흔적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 이 책을 한번쯤 읽어봐야 할 이유다.
유동호 저의『무심코 지나쳤던 우리 동네 독립운동 이야기』을 읽고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한때 가장 선망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만큼 인기직업이었던 선생님이라는 역할이 현재 시점에서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는 한 번 돌이켜 보아야 할 여지가 없지 않은 지 교사 당사자는 물론이지만 학생들과 학부모 포한 교육정책 당국에서도 한 번쯤 냉철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결코 쉽지 않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묵묵히 학생들과 함께 열심히 임하고 있는 대한민국 모든 선생님들께 힘차게 성원을 보낸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미래 역사의 주역이 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장 중차대한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 같이 역사 쌤이 가르치는 역사 교과는 더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가 자세히 들려주는 난생처음 한국독립사 이야기들은 마치 학생들에게 해주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아주 친절하게 그대로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온다.
솔직히 그 동안 알고 있는 것들은 겉으로만 아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이름하고 대표적인 업적 한두 가지만 아는 식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겉치레 지식인가?
솔직히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아니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그렇게 헌신적으로 몸을 바치신 분이고 이렇게 버젓이 우리 동네에 동상으로 기념까지 하고 있는데...”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지난 역사를 돌이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지난 일을 되새기고, 공부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당연시 이런 우리 독립운동사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일제강점기 35년(1910~1945)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한국독립운동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우리 역사에서 통째로 비어버린 35년을 수습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이 책에는 현직 역사 교사가 들려주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와 파렴치한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들을 오롯이 기억하는 건 올바른 역사 정립에 꼭 필요하다.
저자는 이 35년의 한국독립운동사를 ‘동상’으로 들여다보는 게 이 책만의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상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동상의 모델이 누구인지 또 동상이 세워진 곳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대개 잘 모른다.
그런가 하면, 동상이 세워져야 하는데 세워지지 않은 경우도 있고 동상이 세워지면 안 되는데 세워진 경우도 있다.
알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우리가 일정한 장소를 가게 되면 반드시 확인하는 게 그 지역의 특징물들이다.
문화유적, 출신인물이나 동상, 특산물 등이다.
동상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기리게 된다.
저자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탑골공원에 가면 손병희 선생의 동상을 통해, 서울역에 가면 강우규 의사의 동상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연계시켜 생각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에는 김구부터 베델까지 동상으로 다시 읽는 조선의 레지스탕스 이야기가 흥미롭게 담겨져 있다.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5부에 친일파에 대해 다루고 있어 이채롭다.
잊지 말아야 유산이라면서 김성수, 김동인, 안익태, 민영휘의 동상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 힘든 한편 잊지 말아야 할 대상의 물질적 대상화로 적절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주변의 독립운동가 동상으로 순국선열을 떠올리며 감사함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한 번 시도해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