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감정이라는 게 서서히 무뎌질 줄 알았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 또 싫어하는 마음이라든가 어떤 일에 쏟는 열정이라든가 지나간 일을 돌아보는 회한이라든가 등등. 그래서 삶이 한결 느긋해지고 자신과 남에 대해 더 너그러워지고 안달복달하거나 조바심을 내는 일 따위는 없어질 것이라 기대했는데. 아직 내가 이만큼의 나이에 이르지 못한 것인지, 시간이 더 많이 흐르면 이런 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예측을 못하겠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은 나의 이런 기대를 미리부터 무너뜨려 주는 것 같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이를 더 먹는다고 아주 많이 먹는다고 해서 감정이 무뎌지는 그런 때는 오지 않는다고, 지금 가진 감정 그대로 어떤 경우에는 젊었을 때보다 더 짙게 품고 살 것이라고 말해 주는 듯하다. 감정이 신체의 나이에 따라 함께 늙어 가는 게 아님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된 것 같기 때문이다. 이건 좋은 걸까, 아닌 걸까.
이 작가의 장편소설도 좋았는데 단편소설도 좋다. 한 편 한 편을 장편으로 바꿔도 또 그것대로 좋을 것 같다. 읽는 마음이 더러 고단한 대목이 있지만, 나쁜 사람이 나오지 않아서 나쁜 상황이 펼쳐지지 않아서, 특히 내가 몹시도 싫어하는 학대받는 누군가(사람이든 동물이든)의 처지가 보이지 않아서 좋다. 어렵고 곤란한 지경에 빠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없다는 게 아니다. 너무 끔찍해서 못 본 척하고 싶은 장면이 없다는 것, 이런 정도의 일이라면 가까이에서 흔히 볼 수 있을 정도의 고난에 해당할 것 같다는 것, 그래서 나에게 내 가족에게 내 가까운 이들에게도 일어날 평범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게 소설을 아주 친숙한 마음으로 여기게 한다. 흔한 소재 흔한 배경 흔한 인물들로 이렇게 매력적인 소설을 쓰기도 쉽지 않을 텐데.
책의 제목에 해당하는 소설(그의 옛 연인)이 내 마음을 가장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감정이 늙어 해지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알겠다. 비록 몸은 느려지고 둔해지더라도, 그러다가 한 쪽씩 더 못 쓰게 되는 때가 되더라도, 감정은, 자신을 향하고 남을 대하고 상황에 대응하는 감정만큼은 지금의 내 것들과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작품 속 인물들 한 명 한 명이 내게 이걸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무언가 포기했던 것을 되찾은 느낌이 든다. 좋은 소설은 이래서 더 좋다.
『개가 익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리코 녀석은 총명해서,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는 갈팡질팡하지 않았다. 개는 꼼짝하지 않았고 늘 그랬듯 말을 잘 들었다. 제리코는 물에 띄워진 라일로를 타고 가는 제 역할에 충실했다. 샛노란 바탕에 선명하게 찍힌 짙은 검은색 점이 되어. 두 소년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도 호스 무지개가 만들어내는 색깔을 바라보았을 때처럼, 더밸리 양이 춤추는 고양이의 휘청거리는 발짓을 바라보았다고 한 것처럼. 이미 저 멀리 밀려간 라일로의 노란색이 물 위의 흐릿한 점이 되었고, 그러다 사라졌고, 다시 나타났다가 또다시 사라졌다. 개 짖는 소리가 시작되었다가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그때도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자갈밭과 바위를 타고 오를 때나 지름길로 올라서서 가시금작화가 핀 들판을 질러갈 때도. 절벽에서 그들은 다시, 마지막으로,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잠잠했고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래, 오늘 아침엔 너희들 뭐하고 놀았니? 더밸리 양이 물었다. 다음 날, 다른 어딘가로, 개가 파도에 떠밀려 왔다.』 (pp.292~293, <감응성 광기> 중)
책에 실린 마지막 단편 소설 <감응성 광기>의 한 부분이다. 이제 중년이 된 윌비는 프랑스에 갔다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앤서니를 발견한다. 앤서니는 청소년기를 지난 이후 사라졌고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윌비도 그렇게 여기고 살았다.
그러다 문득 앤서니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인가 문득 위와 같은 문단이 등장한다. 윌비와 앤서니가 공유하고 있는,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감응하였을 어떤 기억이 아무런 경고 없이 독자들 앞에 툭 떨궈진다.
『캐서린은 커피를 다 마시고 플로렌틴 부스러기를 응시하며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우린 감수하며 살고 있어요.” 그녀는 남자와
함께 파티장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는 사이가 안 좋은 아내에게로, 그녀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끝난 외도를 저지른 남편에게로. 그 부부가 감수하는
일에 매료된 그녀의 오후 연인은, 한 시간 전에 그의 임시 거처인 그 방 안에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지하철에서도 그녀는 계속
그 방을 떠올렸다. 코끼리 그림, 여행 가방, 바닥에 늘어진 전선, 문 안쪽 면에 걸린 옷가지들. 방 안을 울리는 그들의 목소리, 그의 호기심,
회피하다가도 결국 조금 더 이야기하는 그녀, 왜냐하면 어쨌거나 그에게 무엇으로든 갚아줘야 하니까...』 (pp.41~42, <방>
중)
어쩌면, 그러니까 멋을 부리고자 했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오후의 연인’ 같은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윌리엄 트레버에게
그런 건 필요 없다. ‘방’으로 충분하다. 외도를 저지른 것이 확실한 남편의 행적을 경찰에게 거짓으로 고한 그녀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녀가 오후에 만난 외도의 대상인 그가 아니라, 그와 그녀가 그렇게 머물러야 했던 어떤 ‘방’이어야만 한다.
“프로스퍼는 그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줄 수 있는 만큼을 그에게 돌려주었으며, 그는
그 사실을 몰랐던 적이 없었다. 아직도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목소리에서 노곤함이 묻어났을 때, 이제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녀와 함께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녀 자신이 찾았다가 잃어버렸던 용기를. 그것은 이제 정리되어야만 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말해져야만 하는 것들을 말할 그의 용기였다. 어리석은 짓은 없었다. 실수는 없었다.” (pp.196~197, <완벽한
관계> 중)
두 사람이, 프로스퍼와 클로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클로이가 어째서 프로스퍼를 떠난 것인지, 아무런
기색도 없이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클로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부질없다. 프로스퍼는 클로이를 찾아다녔고, 클로이는 어느 순간
다시 돌아왔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들은 시작보다는 끄트머리에 훨씬 공이 들어가 있다.
“오후에 소젖을 짜고 있을 때 애가 와서 옆에 서 있는데, 아무말 하지 않는데도 애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애가
뭔가에 홀린 것 같아요. 그러고도 나중에 우리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얘기를 했죠 애가 식탁을 차리고 내가 송어를 튀겨서 둘이 함께
먹었어요. 설거지도 함께 해치웠고. 내 소중한 테리사, 그 애의 남은 어린 시절을 망가뜨릴 수는 없어요.” (p.224, <아이들>
중)
코니는 엄마를 잃었고, 로버트는 아내를 잃었다. 엄마가 없고 아내가 없는 곳에서 코니와 로버트는 일년 여의 시간을 보냈다.
로버트는 코니와 친하게 지내던 멜리사의 엄마인 테리사와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코니는 이러한 사실을 통보받았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아무말 하지 않는데도 애원하는 소리’를 독자인 우리도 들을 수밖에 없게 된다.
소설집에는 <재봉사의 아이>, <방>, <아일랜드의 남자들>, <속임수 커내스터>,
<객기>, <오후>, <올리브힐에서>, <완벽한 관계>, <아이들>, <그의 옛
연인>, <신앙>, <감응성 광기> 열두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해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소설 속 인물을 떠올리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떠올리느라 그랬다. 떠올리고 난 다음에는 다시 소설 속으로 그들을 밀어 넣느라, 나는 계속해서
톡톡,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고 있었다.
윌리엄 트레버 William Trevor / 민은영 역 / 그의 옛 연인
(Cheating at Cansta) / 한겨레출판 / 310쪽 / 2018 (2007)
윌리엄 트레버의 12개의 단편 소설이 수록된 소설집입니다.
12개의 단편소설은 두 번, 세 번 읽을수록 마음에 새로운 무늬를 남기며 켜켜이 쌓입니다.
처음 읽을 때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읽느라 바빴다면, 반복해서 읽을 때는 문장 속에서 생략되어 있는 단어들이 무엇인지, 가리키는 대상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는 대명사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읽다보면 인물들의 마음에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은 잔잔하고 평온한 듯 보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그저 평범할 수도 있고요. 그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격정적인 변화는 주인공들의 삶을 살짝 비켜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세상과 단절되어 숲 속에서 사는 재단사의 아이를 차로 치어 죽게 한 카할에게 경찰의 수사망은 비켜갑니다.(<재단사의 아이>) 또 남편의 외도 상대자인 여인의 죽음으로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캐서린은 남편이 상대 여인을 죽였을지도 모르지만 남편의 알리바이를 거짓으로 증명하여 남편의 삶도, 자신의 일상도 지켜내지요.(<방>) 나이트 클럽에서 밤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가던 새벽, 젊은 패거리 중의 하나인 애슬링은 남자 친구 메닝이 길에서 어떤 청년을 가격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다음 날 뉴스를 통해 그 청년의 사망기사를 접하게 되고 메닝은 11년 형을 언도받지만, 그녀에게는 경찰의 혹독한 수사도, 가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직접적인 비난도 비켜갑니다.(<객기>) 전화 대화 서비스로 만나게 된 남자와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 재스민. 그가 건넨 술을 마시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집 앞까지 가지만 우연히 그의 이모를 만나며 그가 법원의 보호관찰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모를 만나지 않고 그를 따라 들어갔더라면 겪게 되었을지 모를 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오후>)
하지만 그들의 마음도 그 ‘사건’들을 비켜가지는 못합니다. 감옥에 가거나, 결혼 생활이 파탄 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 ‘사건’을 전적으로 ‘감수’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재단사의 아이>의 카할은 ‘사건’이 있은 후 아이의 엄마인 재단사가 항상 자신의 주변에 있음을 느낍니다.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튀어나오곤 했던 아이는 어쩌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고 자기 위안을 삼아보지만, 그래도 카할의 머릿속에는 그 순간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그날로 돌아가 자신의 행동을, 거기까지 차를 몰고 간 자신의 욕심을, 거짓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끝은 없었다. 시내에서, 비록 밤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항상 주변에 있었다. 카할은 그것이 망상임을, 실제로는 그녀가 항상 주변에 있지 않은데도 나타날 때마다 매번 그 존재가 너무 의미심장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뿐임을 알았다.(p32)
<방>의 캐서린에게도 남편의 외도(혹은 남편의 살인)와 자신의 거짓 증언은 결혼 생활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이미 손상시켜 그 ‘사건’이 있은 뒤 9년 내내 그녀는 ‘황무지’를 걷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걸어가는 길이 황무지 같았다.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의 기분 때문에 황무지가 된 곳, 아무런 연고 없는 이곳에서 그녀는 익명성을, 고독을 느꼈다. 그와 함께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어떤 것이 찾아왔다. 아, 하지만 다 끝난 일이잖아, 그녀는 방금 느낀 가벼운 당혹감에 대한 반응처럼,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당혹감은 더욱 커져갔고, 그녀는 얼핏 알 것 같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자문했다. 생각은 쓸모가 없다. 이 모든 것은 감정이다. 그래서 그녀는 줄곧 걷는 동안, 생각을 하지 않았다. (p57)
<객기>의 애슬링 또한 10대에 겪었던 사건을 마음에 품고 긴 시간이 흘러도 죽은 청년에게 용서를 빌며 그의 무덤을 찾습니다.
애슬링에게, 흐르는 시간은 전에 알던 낮과 밤보다 생소하게 느껴졌다.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115)
음산한 묘지에서 애슬링은 받아들이기에 너무 추한 진실 앞에서 허위를 끌어안은 자신에 대해 죽은 이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 전의 다른 행위들이 그랬듯이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에게 사랑받을 자격을 얻으려고 저지른 행위를 그녀는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리고 지켜보는 순간에는 쾌락도 있었다. 잠시뿐이었다 해도, 있기는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떠나게 될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할 때도 많았다. 평온을 주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한때의 객기가 드리운 그림자를 떨쳐내기 위해,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 남았다. 자신 또한 새사람이 되어, 그 일이 일어난 곳에 속한 채로. (p117)
저 역시 과거에서 벗어나기 힘든, 그런 유형의 인간인지라 때때로 부끄러움에, 죄책감에, 또는 수많은 과거의 감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어느 날은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혼자 삭혀내기도 합니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은, 이젠 내가 어떻게 돌이킬 수도 없을 만큼 저 먼 너머로 지나가버렸지만 그래도 잊히지 않는 몇 가지 잘못, 상처, 죄책감들은 지금의 나의 삶을 ‘손상’시킵니다. 물론 과거의 그 일들이 가져온 “손상은 파괴가 아니며 파괴를 의도한 결과도 아니(p56)”었지만....
저마다의 어떤 죄책감을 갖고 사는 우리에게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은 절대로 “괜찮아.”라고 다독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절대로 괜찮을 수 없는 것임을 일깨웁니다.
“우린 감수하며 살고 있어요.”(p41)
캐서린이 말한 것처럼.
“우린 감수하며 살아야 해.”(p115)
애슬링 아버지의 말처럼.
그 죄책감을, 과거로부터 이어진 그 감정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그래야 하는 것.
그래서 이후의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표면적인 사과나 깊이 없는 회개와 후회만으로는 결코 이전의 감정으로, 혹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결국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된 셈이지만, 왜인지 그것은 “괜찮아.”라는 말보다 삶의 진실됨에 더욱 다가가게 해줍니다.
환상적이지 않다, 질식할것 같지도 않다. 평범한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매혹적이다. 인생의 과정중에 때로는 짧은 순간을,어떤때는 사건들이 모여서 긴 시간을 거쳐 하나의 이야기를 되는 과정을 일관성을 갖고 풀어낸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한밤의 사건'과 살짝 비교해 보았다. '한밤의 사건'이 삶의 단편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간을 거슬러서 따라가는 과정이 조금은 환성적으로 풀어내지는 반면에, 트레버의 글들은 좀더 현실적이다. 주인공들의 사연은 나름 이해가능하다. 멱살을 잡고 글속으로 몰아가지도 않는다. 그냥 툭 던져지는 이야기들이 아일랜드, 종교, 각자의 직업과 관계없이 대한민국에 사는 지금의 나에게도 동감을 주는것 같다. 이 책 제목을 '그의 옛 연인' 으로 한것은 아마 마케팅적인 목적이 강한것 같다. 사실 첫번째로 실려있는 '재봉사의 아이' 를 읽으면서 이미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끝난것 같다.
윌리엄 트레버는 왜 이렇게 쓸쓸한 글들만 쓴 걸까.
얼마전 읽었던 #루버니의 #오래전멀리사라져버린 에서도
죄책감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 였는데
이 책에 실려있는 12편의 단편들도 각자의 사건 속에서
서로 다른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뭔가 가슴속에 묵직한 울림이 있고
읽고 난 뒤에도 여운이 남아 먹먹했는데
막상 글로 쓰려니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한번쯤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고 싶은 책.
그리고 한번만 읽지말라고 말해주고 싶은 책.
나 또한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잊을 만 하면
한번씩 계속 들춰보면서 읽어볼 생각..
깔끔한 문체로 깊은 감정을 군더더기 없이
정말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 수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