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거칠고 황량한 세태 속 고뇌와 꿈존재론적 구원의 의지로 승화시켜이태수 시인의 열여덟 번째 시집등단 48년을 맞은 이태수 시인의 열여덟 번째 시집 『담박하게 정갈하게』가 출간됐다. 『거울이 나를 본다』, 『내가 나에게』, 『유리창 이쪽』, 『꿈꾸는 나라로』에 이어 역시 1년 만에 펴낸 이 시집에는 「나의 카르마」, 「길과 나 3」, 「다시 코로나에게」, 「입 막고 코 막고―코로나 블루 1」, 「연꽃 갈피」, 「목련나무, 산딸나무」, 「어떤 여운」 등 72편이 실렸다. 거친 세태 속에서 ‘실존·현실·초월’을 화두로 ‘길-흐름-비움’, ‘상처-자연-꿈’, ‘지상적 그리움-영적 그리움-구원’이라는 의미망을 떠올리며 담박하고 정갈하게 존재론적 구원 의지로 승화시킨다. 특히 황량한 세계에 던져진 실존의 처지와 그 고뇌를 형상화하면서 한결같이 꿈을 통한 존재 초월을 추구한다. 이 지향은 이성에서 영성으로, 지상적 삶에서 천상적 가치로 자아를 투영하며, 존재의 부름에 대한 영혼의 응답으로 진전되고 있다. 더보기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실존·현실·초월’ 화두의 자아성찰 존재의 부름에 대한 영혼의 응답 이태수 시집 『담박하게 정갈하게』 시력 48년을 맞은 이태수 시인의 이 열여덟 번째 시집에는 시대와 세인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삶의 철학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실존·현실·초월’이라는 삼각 범주가 축으로 작용하지만, 지난해 낸 시집 『꿈꾸는 나라로』와는 다르게 마치 프랙탈 구조처럼 더욱 다채로운 의미의 문양들이 펼쳐진다. 특히 그의 실존적 고뇌와 아픔들이 꿈을 매개로 한 초월 의지를 넘어서서 존재론적 구원 의지로 승화시킨다. 이 같은 시적 변모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사유와 영혼의 본향을 갈망하는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근년 들어 해마다 시집을 내는 열정으로 필력을 보여 주는 이 시집에는 ‘길’을 모티프로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자아의 근원에 천착하며 영혼의 목소리를 듣거나 내적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존재론적 몸짓이 두드러져 있다. 길을 가다가 왜 이 길로 가고 있지, 라고 스스로 묻게 될 때가 있다 멈춰서서는 가지 않으면 어쩔 테지, 라고 다시 되묻게 될 때도 있다 가려고 하는 곳이 분명히 있더라도 가다가 안 가고 싶을 때가 있다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는데 불현듯 나도 몰래 가고 있을 때도 있다 내가 가는 길은 내 것이 아니라 길의 것일 따름이어서 그런 것일까 가고 싶거나 가고 싶지 않아도 길이 부르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지, 아무리 가고 싶은 곳이라 해도, 아무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일지라도 길이 나를 부르면 가야 하지만 불러 주지 않으면 못 가는 것일까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 해도, 안 가고 싶은 곳으로 안 가려 해도, 길은 나를 부르다가 말고 그러다가 다시 부르고 있는 것만 같다 ―「길과 나 1」 전문 낯선 세계에 방기된 실존의 처소에 대한 이 물음은 실존이 던져진 이 길 위에서 깊은 상처 대해 “괴질보다 사람이 더 무서워서 / 사람들 속에서 사람이 그리워도 / 사람을 만날까 저어하며 걷습니다”(「길과 나 2」)라고 토로하는 데로도 나아간다. 아픔과 불안, 방황과 좌절이 공존하는 이 실존적 상황에서 시인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통해 느끼는 존재의 모순과 부조리는 “가려고 하는 곳이 분명히 있더라도 / 가다가 안 가고 싶을 때가 있”고,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는데 불현듯 / 나도 몰래 가고 있을 때도 있다”고 피력한다. 시인은 “길이 나를 부르면 가야 하지만 / 불러 주지 않으면 못 가는 것일까”라고 되뇌면서 ‘나’와 세계 사이에서 길의 부름에 응답한다. 이 부름은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심혼의 목소리이기도 하며, 본연의 자아로 회귀하려는 실존적 기투 행위에 다름 아니다. 길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흘러가는 통로이다. “물 위에 떠서 떠내려갑니다 / 아래로, 아래로 가는 물길을 따라”(「세월」), “땅거미가 내린다 / 밖에 나서니 모두가 가고 있다”(「나도 간다 1」), “내 마음도 저 배에 실려서 / 자꾸만 아래로 떠내려간다”(「나도 간다 2」), “집을 나서면서 생각해 보면 / 저 뜬구름 같고 까치밥 같기도 하다”(「늦가을 적막」) 등에서도 그 흐름이 확연히 드러나며, 제행무상과 무소주 정신을 상기시킨다. 꽁지가 빠지도록 힘겹게 지은 집을 한 해만 살다 버리는 까치를 생각하다가 제 침 뱉어 만든 진흙으로 지은 집을 반년만 살다 떠나는 제비를 생각하다가 제 창자에서 뽑아낸 실로 지은 집에 고작 열흘만 살 뿐인 누에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들은 집 마련하려 이전투구泥田鬪狗하지만 한 지기 생각을 해 보면 허망합니다 평생 처음 마련한 집에 겨우 몇 해 살다 세상 떠날 땐 빈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미련없이 버리고 가야 할 집은 한동안 머물다 비우는 곳일 테지요 누에고치와 제비집과 까치집을 떠올려 보다가 내가 사는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빈 손바닥을 한참이나 들여다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이 저 미물들보다도 어리석지 않을까요 ―「집」 전문길 위에서 흘러가는 존재인 인간은 그 길 위에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 비움, 또는 무소유는 만물에 내재된 본성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까치’, ‘제비’, ‘누에’라는 대상을 통해 “집 마련하려 이전투구”하는 사람들과 미물들을 대비해 무소유의 정신을 일깨우며, ‘길·흐름·비움’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시세계를 더욱 의미심장하게 떠받쳐 준다.그의 시편들에는 세상과 타자로부터 유발된 상처와 고통의 시학이 도처에서 묻어나온다. ‘나’의 양심과 현실의 불합리가 서로 부딪쳐 일그러질 때마다 괴로워하면서 그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존재의 비약을 꿈꾼다. 이런 상처는 타나토스의 공격성과 파괴 욕구, 페르소나의 이중적 인격을 마음속에 감춘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진다. 이런 ‘상흔’이 일상인들뿐만 아니라 사무사 표방하는 문사들 사이에서까지 목도된다는 점이 시인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①집 나서면 코 막고 입을 막고 전전긍긍할 따름입니다 사람을 멀리 하면서 그 거리만큼 거꾸로 가까워지고 싶다면 잘못일는지요 소리도 냄새도 없는 당신은 언제 마음 돌리려 하나요 (실은 가까웠던 사람이 등져서 더 무섭습니다) 안 보이게 쳐들어온 당신은 입을 막고 코도 틀어막으면서 어디를 가든 옥죄기만 하네요 공포의 수렁에 빠뜨리네요 ―「다시 코로나에게」 부분②한겨울 깊은 밤중에 찬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창틀 흔드는 바람소리에 귀를 모은다 희미한 소금등 불빛, 불빛에 술렁거리는 악몽 부스러기들 하지만 애써 잠을 다시 부르지 않고 뜨거운 불잉걸 하나 가슴 속에 끌어들여 밤을 지새고 싶다 잉걸불로 타오르는 비애마저도 깊이 그러안고 싶다 ―「한겨울밤」 전문인간 소외와 단절감이 만연해 있는 현대 사회에서의 역병 창궐은 인간관계를 차단하고 불신감을 팽배하게 하는 분위기를 조장한다. “집 나서면 코 막고 / 입을 막고 전전긍긍할 따름”이며, 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세인들의 인심이 겹쳐져 중층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소리도 냄새도 없는 / 당신은 언제 마음 돌리려 하나요”라고 표면적으로는 바이러스의 공포를 말하고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실은 가까웠던 사람이 / 등져서 더 무섭습니다”라고 염량세태의 불신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역병과 인간의 믿을 수 없는 가변성이 오버랩된 이런 정황은 “사람과 사람은 이제 / 서로 못 믿어 멀어지는 사이입니다”(「입 막고 코 막고―코로나 블루 1」), “보이지 않는 공포에 시달리다 지쳐 / 분노의 무기로 바뀐 이들도 있습니다”(「코로나 레드」) 등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 정신적 고통은 “뜨거운 불잉걸”과 같아 가슴을 태우지만 이런 악몽 속에서도 “잉걸불로 타오르는 비애마저도 / 깊이 그러안고 싶”은 포용력과 정신적 성숙성을 내비친다. 상처에 대한 이러한 그러안음은 특히 ‘자연’을 통해 치유하려 한다. 깊은 산골짜기, 솔숲에 든다 마을에 두고 온 마음의 그늘들도 따라오거나 슬며시 먼저 온 건지 소나무 아래서 웅크리고 있다 아무도 안 만나고 싶어 칩거하던 사람 기피증이 안 풀려서 그럴까 민망스럽고 딱하기 그지없다 멧새들이 다정하게 속삭이고 지나는 바람이 타이르는 듯한데 아직도 마음이 되돌려지지 않아 소나무 그늘에 주저앉을 뿐 상처가 깊은 마음을 추스르면서 한참 나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소나무 그늘이 나를 품는다 ―「소나무 그늘」 전문자연은 언제나 세파에 찌든 사람들을 포근히 안아 준다. 그윽한 풍경화처럼 묘사되고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은 “깊은 산골짜기, 솔숲”에 들어 세상에서 짙게 드리운 “마음의 그늘들”을 씻어내며 위로를 받는다. 그 마음의 그늘은 다름 아닌 “아무도 안 만나고 싶어 칩거하던 / 사람 기피증”이다. 그가 솔숲길을 혼자 걷고 있는 동안 “멧새들이 다정하게 속삭이고 / 지나는 바람이 타이르는 듯”하면서 시인의 우울한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 자연은 “나를 부드럽게 감싸주던 / 바로 그 비단 자락”(「은사시나무와 안개」)과도 같이, 또는 “아픈 마음 달래고 추스르던 / 곧고 정한 갈매나무에 마음 포갠다”(「갈매나무」)는 생각처럼, 일상의 늪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원형적 모성애로 따뜻이 품어 안아 준다. 자연을 통한 이 같은 위안은 오늘 내리는 눈은 포근하고 다정하다 바람이 잠자는 동안 나직하게 속삭이듯 조신한 자태로 내려온다 잊힐 듯하다 살아나는 기억과 같이 떠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듯 마음의 빈터에 따스한 불을 지핀다 창밖의 나무들이 무명옷을 입는다 날아온 작은 멧새 서너 마리는 창가에 순은의 노래들을 끼얹고 있다 ―「첫눈」 전문고 그려지듯이 고요히 내리는 ‘첫눈’을 통해 “포근하고 다정”한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며, “마음의 빈터에 따스한 불을 지”피기도 한다. 첫눈, 멧새, 시’의 영혼이 서로 어우러져 연출하는 이 평화로운 정경은 한 폭의 명화 같다. 한편, 세상과 타자로부터 받은 상처를 시인은 ‘꿈’을 통해 초극하려는 의지를 떠올린다. 이 시집의 많은 시편들에서도 ‘꿈’은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하며, 이 꿈을 매개로 삶의 희망과 위안, 존재 초월을 실현하려 한다. 밤에는 꿈을 꿀까 두렵지만 낮엔 안간힘으로 꿈을 불러들입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꿈꾸기와 가위누르는 꿈이 밤낮으로 길항합니다 이 길항은 어제오늘뿐 아니라 오랜 세월의 트라우마이기도 합니다 그 그늘에서 말들이 빚어지고 가혹하게 지워지고 밀려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그늘에서 언제나 더 나은 세계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이젠 밤낮없이 꿈을 꿉니다 -「나의 카르마」 전문 꿈은 시인에게 밤의 악몽과 낮의 길몽이라는 이율배반의 의미를 가지므로 “더 나은 삶을 향한 꿈꾸기와 / 가위누르는 꿈이 밤낮으로 길항”하지만, 이 길항은 곧 반전된다. 그 상처의 ‘그늘’에서 세상의 말들이 빚어지고 / 가혹하게 지워지고 밀려나기”를 거듭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열망하”게 되며, 마침내 “이젠 밤낮없이 꿈을 꿉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새 희망의 세계를 지향하는 꿈을 꾼다. 그러므로 이태수 시인에게는 꿈이 단순한 몽상이나 신기루 현상이 아니라, 자아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존재론적 탐색 활동이다. 이 같은 꿈꾸기는 어두운 세상에서 훼손된 자아를 빛의 바늘로 봉합하고 존재의 상승을 갈망하는 날갯짓으로 새롭게 읽힌다. 이따금 날아오르는 꿈을 꿉니다 꿈을 깨고 나면 사방이 벽인데 여전히 벽 속에 갇혀서도 꿈속에선 하늘 멀리 날아올랐습니다 몽매에도 그리던 천사를 잠시나마 가까이 만나기도 하고 안 보이던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밤이 오면 다시 잠속에서 옥빛 하늘로 날아가고 싶지만 그런 꿈을 꾸게 될는지 이 풍진세상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 새들처럼 날면서 새 길을 여는 꿈을 이 한낮에도 꾸고 싶습니다 ―「날아오르는 꿈」 전문 시인은 “꿈을 깨고 나면 사방이 벽인데 / 여전히 벽 속에 갇혀서도”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방이 벽’이라는 처지가 암시하듯이 시인이 처한 현실은 생명이 없는 콘크리트 같은 인심이 지배하는 황량한 세계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꿈꾸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꿈속에서나마 “옥빛 하늘” 멀리 날아가 “몽매에도 그리던 천사를 / 잠시나마 가까이 만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받아야 한다. 이런 날갯짓은 “오래 갇힌 채 가라앉아만 있었는데 / 새처럼 날고 싶은 꿈을 꾸면서”(「희망고문」), “꿈속에서는 나도 나비 등에 타고 / 수미산을 하염없이 오르고 있었다”(「낮꿈」) 등에서처럼 환상에 젖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끝없이 비상의 날갯짓을 하면서 “새 길을 여는 / 꿈을 이 한낮에도 꾸고 싶”다는 열망할 것이다. 이처럼 시인에게 있어서 꿈꾸기는 존재의 비약과 상승 의지의 표현이며, 삶의 새로운 길 트기를 위한 몸짓이다. 이렇듯이 시인의 내적 상처는 ‘자연’ 또는 ‘꿈’과 어우러져 하나의 의미망을 이루면서 치유를 지향한다. 시인은 고향과 혈육에 대한 ‘그리움’의 정조를 여러 편의 시에서 그려 보인다. 고향이 시인에게는 가장 순수한 존재의 원적지이자 자아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곳, 아폴론의 리라 연주에 맞추어 무사이들이 시를 노래하며 살던 헬리콘 산처럼 끊임없이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영천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는지 알 수 없다. 옛집에 대한 시인의 지상적 그리움은 궁극적으로 종교적 신앙인으로서의 ‘영적 그리움’으로 귀결된다. 오랜 세월 가톨릭 신앙인으로 살아온 시인은 천주교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의 선종에 즈음해 큰 슬픔에 사로잡힌다. 그의 아가페적 사랑에 대해 시인은 “길 위에서 헤매는 우리를 / 따뜻하게 끌어 주시고 밀어 주셨”(「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던 손길을 통해 떠올리고 있다. 이 같은 추모의 정과 영적 그리움은 “그는 별이 되려고 떠나간 것일까 / 새로 뜬 푸른 별 하나, / 그의 뒷모습도 얼비치고 있다”(「푸른 별 하나」), “그분은 가까이 존경하는 스승이었지만 / 따라갈 수도 없었던 분, / 떠나가도 떠나지 않으시고 / 언제나 가슴 깊이 머무시는 분”(「그분 생각」) 등에서도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시인은 이 시집 후반부에 신앙시들을 다수 배치함으로써 시인은 자신의 삶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온갖 희로애락을 껴안고 흘러가는 인간의 삶도 결국은 이성적 가치에서 영성적 가치로 승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깨달음으로 읽힌다. 그 깨우침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잡고 있다. 시인은 「낮은 기도」에서 그리고 있듯이 이 스산하고 고단한 세상에서 오직 ‘당신’(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려 한다. 참사랑이 이끄는 길로 걸어가려 하는 도정에서 그는 “어떤 유혹에도 삿된 일은 하지 않으며 / 가지 말아야 할 길은 가지 않고 / 묵묵히 주어진 길로 / 물 흐르듯이 가려고”도 다짐한다. 이 시집의 해설을 통해 이진엽 시인은 “그의 투망에 낚인 시들은 흐름과 비움, 상처와 치유, 꿈과 구원 등이 상응하는 진면목을 드러내며, 그 도정의 아픈 상흔 속에서도 영혼의 빛에 달궈진 돋을새김처럼 따뜻하게 떠오른다.”면서 “황량한 세계에 던져진 실존의 처지와 그 고뇌를 형상화하는 그의 시들은 한결같이 꿈을 통한 존재 초월로 나아간다.”고 풀이했다. 또한 “이 낮지만 그윽한 울림들은 시인이 이성에서 영성으로, 지상적 삶에서 천상적 가치로 자아를 투영하면서 존재의 부름에 대한 영혼의 응답을 진실하게 빚어 보이려” 한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