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정유정 시인은 형이상적인 사유를 젖은 감성과 서정적인 언어에 녹여 부드럽고 아름답게 착색한다. 그 정서의 결과 무늬들은 환상을 떠받들고 있으며, 안팎으로 번지고 스미는 ‘꿈의 세계’를 가까이 끌어당기거나 그 이상향으로 비상하려는 마음에 날개를 단다. 시인은 산중의 집 투명한 유리벽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거나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서 현실 너머의 신비와 비의의 세계를 찾아 나서며 끊임없이 꿈을 꾼다. 그 꿈은 지난날과 지금, 앞날에까지 분방하게 길항하지만, 어둠과 밝음을 넘나들면서 궁극적으로는 초월을 향한 길트기, 무상과 포용의 길 걷기로 귀결되는 심상 풍경에 주어진다. 더보기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정유정 시인의 이 서정적 환상은 푸른빛을 띠거나 무채색을 동반하기도 하고, 끝내 비어버리고 말지라도 바라는 바의 이데아를 향해 열리고 있으며, 상실喪失과 박탈감을 넘어서는 따뜻한 사랑의 회복과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소망을 깊숙이 끌어안는 양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시인의 일상은 거의 산중에서의 삶에 무게가 실리며, 낮보다는 밤이 안겨주는 정서들로 채워진다. 이 때문에 그의 시편들은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 천착하는 경우가 드물고, 낮이든 밤이든 주로 집에 머무는 동안으로 제한되는 세계와 그 공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현실보다는 자연과의 친화親和나 그 속에서의 꿈꾸기와 자기 성찰自己省察에 무게 중심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시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산중을 심지어 “길모퉁이의 조그마한 집”(「시월의 집」)이라고 여기는가 하면, 산중의 자연을 내면으로 끌어들여 온갖 느낌과 생각들을 투영하고 투사投射한다. 이 같은 시선과 시각은 거대한 자연(산)도 그만큼 친밀하게 시인과 밀착돼 있다는 뉘앙스로 읽히게 하며, 그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서정적 자아自我가 내면화(세계의 자아화)하고 주관화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시인이 사는 산중은 “그 집에 울긋불긋 그 산이 산다 / 시월 그 집에 내가 산다”(같은 시)는 구절이 말해 주듯, 산이 산의 집이 되고 산이 ‘나’의 집이 되어 주는 ‘자연’과 ‘나’의 일치一致의 세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게다가 시월의 집(산)에 사는 산은 울긋불긋 단풍들고 ‘나’도 같은 처지이므로 하나로 어우러지는 일체감을 보여 주기도 한다.「창 1」에서와 같이 시인은 그 산중 집의 창 안에서 바깥으로 눈길을 주면서 “저 사각의 창밖으로 / 얼마나 많은 구름이 지나갔을까요? / 얼마나 많은 바람이 / 창을 흔들며 지나가고 눈은 또 / 얼마나 포근히 창가에 머물었을까요?”라고, 지나가는 세월의 무상無常과 허무虛無를 담담하게 떠올린다. 그 흐르는 세월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지나가는 구름과 화자 가까이 창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포근히 창가에 머물던 눈이 암시하듯이 다채로운 빛깔과 무늬들로 미만해 있다.또한 창 안으로는 “푸르스름한 새벽”이 오고, 햇살 가득한 한낮엔 “노란 졸음”이 밀려오며, 창에 달이 뜨고 별이 뜨는 밤이 오면 “두꺼운 커튼”을 드리우고 내면의 길로 깊숙이 들게도 된다. 이같이 시인은 바깥세상의 흐름을 다각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내면 성찰內面省察로 눈길을 돌려 시간의 흐름이 아름답든 그렇지 않든 창을 비우고 마음도 비게 하는 허무나 무상과 마주한다. 하지만 이 비움은 좌절과 좌초가 아니라 다시 채우고 일어서기 위한 예비동작이 아닐 수 없다.「창 2―바다로 가는 길」에 묘사되는 바와 같이, 때로는 바깥세상을 “벚나무를 거느린 아름다운 길”로 바라보고, “모든 길 끝에는 바다가 있다고요”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 길을 “열흘쯤 가다 보면 바다에 닿을“(같은 시)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산중 집의 방에서 창을 통해 바깥세상을 끌어들이고, 이상향理想鄕과도 같은 꿈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의지에 불을 지핀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창 안’(현실)에서 동경하는 ‘바다’(이상 세계)는 ‘몽환夢幻의 뜰’을 벗어나고 “또 무엇이 구름처럼 흘러와 / 창 안의 나를 불러 줄” 때라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어 그 동경과 현실의 괴리감을 시사示唆한다. 게다가 현실보다 비현실(환상)의 세계, 꿈의 세계에서는 동경의 대상이 여전히 멀고 소멸의 숙명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한결 아름답게 그려진다는 점을 흘려보지 말아야 한다.“한밤중 꿈결에 창밖을 본다 / 알 듯 알 듯 희미한 웃음 남기고 / 가을 달님이 간다”로 시작되는 「잠과 꿈」에서 시인은 창문 앞에 머뭇거리며 서 있는 늙은 솔(소나무)을 자신(화자)의 처지에 비춰보기도 하고 “하늘은 여전히 멀다”고 토로하면서 금빛 달님 아직도서쪽으로 간다서로 어여쁘다고 말하던 꽃들도깊은 잠에 들었다처연한 달빛만 방안에 소복한데환히 열린 꿈속 얼굴고쳐 벤 베갯머리에 선명하다―「잠과 꿈」 부분고, 기울고 있는 달의 모습을 신비와 비의의 대상으로 미화한다. ‘달’에 ‘금빛’이라는 관을 씌우고 ‘님’이라는 존대어를 쓰고 있을 뿐 아니라, 달이 소멸을 향해 흘러가는 모습을 ‘아직도’라고도 수식한다. 게다가 서로가 어여쁘다고 예찬禮讚하던 꽃(생명의 절정)들이 잠들었는데도 처연한 빛을 비추며 하염없이 하늘(허공)에 떠가는 달을 “환히 열린 꿈속 얼굴”로 신비화하고 “고쳐 벤 베갯머리에 선명하다”고 치키고 있다.‘반달’ 모습 역시 ‘금빛’으로 바라본다. 또한 반달을 ‘고르게 뛰는 심장’으로 인격人格을 부여해 격상시키는가 하면, 반달이 떠오른 그 ”덧없이 아름다운 시간”(「붉은 양귀비」)이 잠 못 이루게 하고, 시인(화자)의 심경心境을 한낮에 본 붉은 양귀비가 눈가에 어른거리게 한다고도 그린다. 더구나 반달이 촉발하는 시인의 간절한 심경이 양귀비꽃의 모습으로 전이轉移되고 비약된다.이제라도 사람 껍질 벗고꽃이 되어 볼까발갛게 달아오른 달빛으로양귀비꽃 덮어주고그 빛깔처럼무명천에 자리한 어여쁜 나의 꽃,곱게 감싸아주 먼 시간으로 보낸다―「붉은 양귀비」 부분시인은 심지어 사람 껍질을 벗고 양귀비꽃으로 변신하고 싶어지며, 달아오른 달빛으로 양귀비꽃을 덮어주고 곱게 감싸 안아 아주 먼 시간으로 보내게도 된다. 고르게 뛰는 심장인 반달은 이윽고 시인이 ‘나의 꽃’으로 명명하는 양귀비꽃과 짝이 되고 하나가 된다.하지만 이 시를 또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붉은 양귀비를 여성성의 상징象徵으로 읽을 수 있다. 여성이 치르는 생리 현상과 그 피의 빛깔을 ‘발갛게 달아오른 달빛’과 ‘양귀비 꽃빛’에 비유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무명천에 자리한 어여쁜 나의 꽃”이라고 시들지 않은 여성성을 기꺼워하면서도 그 생리 현상의 끝에 이르러 “곱게 감싸 / 아주 먼 시간으로 보낸다”고 아쉬워한다. 그의 시는 이같이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복합성과 애매성을 거느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지는 해를 배웅하고다시 올 아침 해를행복하게 기다릴 것이다투명한 목소리로 노래하며서로 머리카락을 땋아 주거나꽃그늘에 앉아 사진을 찍거나샘물에 발 담그고 가슴을 포개어심장이 뛰는 걸 느낄 것이다 새로운 이타카를 찾아 떠났지만앞선 사람들은 난폭한 고함소리를 남기고신기루처럼 사라졌다이상을 앞세워 그들을 따라 나서지 않았다면아직도 나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달빛도 그곳에만 머물러 밤은사뭇 꿈같을 것이다―「Lost Paradise」 부분이 시는 어떤 것이 낙원이며, 낙원을 잃어버린 비애가 어떤 것인지도 말해 준다. 인간이 추구하는 낙원은 이상향(이타카)이지만, 시인에게 그 이상향은 신기루 같아서 지금 여기서는 ‘아득한 옛꿈 같은 밤’이 곧 낙원과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밤보다 다시 오는 아침과 투명한 노래, 서로 머리카락을 땋아 주거나 함께 꽃그늘에 앉으며, 샘물에 발 담그고 서로 가슴 포개어 심장 뛰는 걸 느끼는 때가 ‘낙원의 시간’이다.시인은 잃어버린 낙원을 향해 산중의 집 사각의 창 안에서 그 너머의 세계를 부단히 꿈꾸고 있으며, 그 꿈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현실이 외롭고 삭막하고 비루鄙陋할수록 더욱 그럴는지도 모른다. 겸허하게 꿈꾸는 그 세계는 고요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의 공간이며, 그리운 사람들과 더불어 가슴 포개며 살고 싶은 세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