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케다 기요히코’의 이 책 ‘다수결은 위험하다’는 사회과학 책으로 분류한다. 그렇지만 필자 생각에 이 책은 에세이다. 그냥 자기 정치적 주장이 들어간 책. 사람들 여론이나 꾀어낼 작정으로 만든 책이다.
자극적으로 서평을 시작해 독서에 끌어들이려는 것 아닐까 독자들이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독자의 관심은 끌고 싶다. 그런데 이 책에 말고, 이 서평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책은 읽지 말기를 강력히 권한다.
어째서 필자는 이 책을 싫어하는가. 언뜻 보면 제목도 다수결, 민주주의 문제를 날카롭게 해석해 놨을 것 같다. 저자도 교수이니 믿을만할지도 모른다. 필자도 그랬다. 책을 여는 순간까지는. 그 뒤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모르지 않는가. 설마 이런 품질로 끝까지 가겠어. 그리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읽었다. 난 순진했다. 그냥 책을 읽지 말걸 그랬다.
그런데 왜 이 책의 서평을 쓰는가?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이 책은 근거 빈약, 사례 빈약, 논점(물론 저자가 다수결이나 민주주의를 주제로 정했다는 가정 하에) 일탈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책은 제목과 내용이 잘 맞지 않다. 제목과 달리 실제 내용은 동조 압력에 휘둘리는 일본 국민, 아베 신조 전 총리와 휘하 자민당 정권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제목대로 민주주의, 다수결에 대한 사회과학 글을 쓸 생각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어쨌든 ‘다수결’에 대한 제목이기에 앞에 관련 내용이 조금 들어가기는 한다. 하지만 뻔한 내용뿐이다. 다수결은 창의적이고 능력 있는 소수를 억압해 사회 발전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다수결과 관련해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뿐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드는 그 주장의 근거들은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 주장의 근거 또한 질적으로 떨어진다. 수치로 나타나는 근거가 없는 건 대중서니 그렇다고 쳐 주자. 출처도 없이 실제 일어난 사건을 적어 놓는 것도 일단 그렇다고 치고. 그런데 저자 스스로 상상하고 결론을 내버리는 예시들은 그냥 저자의 자기 상상일 뿐이다. 근거도 뭣도 되기 어렵다. 다 읽은 뒤 익숙한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자기계발서와 비슷했다. 출처 없는 사실 나열도, 수치 없는 근거들도, 그리고 저자 자신이 상상한 근거들을 내뱉는 것까지 죄다 말이다.
정리하자면 저자는 제목과 다른 주장으로 독자를 기망했으며, 그렇게 꺼낸 주장의 근거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딱 잘라 말하면 이 책은 ‘정치 주장 + 자기계발서’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는 저자가 자유민주당(현 일본 여당)을 비판한다는 것 때문에 그를 호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그다지 공감할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현실주의자이며 자국 중심적인 집단 이기주의를 갖고 있다. 이는 책을 보면 느낄 수 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왜 큰 소득이 없는데도 영토 분쟁을 일삼는 것일까? 그냥 가만히 놔둬도 될 일을 일부러 들쑤셔 문제를 만들고 있는 이유가 뭘까?’ - 책 89% 중
저자는 일본 정부의 독도 등 영토에 대한 대응을 비판한다. 이것만 보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음 인용문에서 그의 사상이 드러난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은 이겨도 저도 득이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표면적으로 다른 주장을 하더라도 가능하다면 상대국의 국민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면서 유연하게 넘어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웃나라들과 옳고 그름을 가리는 흑백논쟁은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다시 강조하고 싶다.’ - 책 89% 중
다시 말하면 이렇다. ‘딱히 이득이 없으니 건들지 말자,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지만 이익을 위해 참자.’ 이는 시시비비를 따지면 독도가 일본 것이 맞는데, 일본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말을 그냥 들어나 주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독도 관련하여 어떤 손익계산을 하고 놔두자고 주장하는 걸까. 다음을 보자.
‘특히 한국은 독도에 초소까지 건설해 매년 막대한 비용을 쏟고 있는데, 독도를 놓고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르지 않을 바에야 내버려두는 것이 손해를 보지 않는 선택이다.’ - 책 89% 중
저자는 우리나라의 방어 상태를 말하고 독도를 차지하려면 전쟁 외의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전쟁이 일본에 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는 저자의 전쟁에 대한 현실주의를 보여준다. 결국 저자는 현안에 대한 옳고 그름보다는 어떻게 일본에 이득이 될지를 따지고 있을 뿐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독도가 그저 당분간 비용이 크게 들 문제이니 건들지 말자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저자의 일본 중심의 집단 이기주의를 느꼈다.
한편 센카쿠 열도에 대한 의견도 비슷하다. 저자는 ‘분쟁은 이득이 없다. 문제를 덮어두면 될 것인데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라고 한다. 이는 저자가 일본 정부가 센카쿠 열도를 국유화하고, 중일 갈등이 첨예해졌다는 데 불만인 것이다. 즉 이득이 없으니까 덮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궁금해진다. 가령 만약 일본이 독도를 집어삼키는 것이 이해득실을 따질 때 일본에 이득이라면? 그러면 필자는 어떻게 대답할까?
결국 저자는 철저한 이해득실을 따지는 현실주의와 자국 중심주의, 일본인 중심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위에서 지적한 자신의 사상을 위해 도덕 잣대를 멋대로 이용하고 있다. 예컨대 ‘만능세포 연구논문 조작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학자 ‘오보카타 하루코’ 연구팀이 약산성 액체에 몇 번 담그는 것으로 세포를 만능 줄기세포로 만들 수 있다는 연구 발표에서 시작된다. 이 방식은 다른 방식과는 다르게 줄기세포 연구의 골칫덩어리였던 암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세계 각국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몇 달 뒤 논문은 사기로 밝혀졌다. 일본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여러 나라의 논문 검증팀도 오보카타 하루코의 연구 결과를 재현할 수 없었다. 당연히 연구를 총괄한 오보카타 하루코와 그녀가 소속된 기관, 기관장, 그리고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실은 학자들은 연구 논문을 조작한 죄로 큰 책임을 졌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런 일에 가담했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살하기까지 했다. 자살했다는 그 학자는 일본에서 관련 분야로 촉망받는 학자였다.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어떤 벌을 주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규칙을 어긴 개인이 받아야 할 문제다. 그럼에도 책임을 광범위하게 확대시키면 오히려 책임 소재가 애매해지게 된다. 흔히들 유럽은 개인주의가 만연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책임의 소재를 개인에게 한정하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즉, 책임질 사람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다.’ - 책 53% 중
필자는 저자의 이 말만은 동감한다. 합당한 비판과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당시 일본 사회의 비난은 도를 넘었다. 자살한 학자도 비난을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이 자살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그러나 설령 비난이 과도하다고 하여 동정심을 느낄 사안은 아니다. 논문 조작에 관련한 사람들은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은 필자와 조금 다르다.
‘이들은 하나같이 생명공학 분야의 권위자들로, 가짜 논문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한 통속이라 매도되어 학계에서 퇴출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재들이다. 물론 속은 사람들에게도 잘못은 있어 책임을 피할 길은 없겠지만 오보카타와 동일 선상에 올려놓고 비난을 퍼붓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 책 52% 중
위의 인용문은 다시 말하면 주동자 한 명 책임지게 하고 나머지는 사실상 봐주자는 것이다. 저자는 주동자인 오보카타를 제외한 나머지 학자들을 ‘속은’ 사람으로 표현하며 동정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들이 그냥 속아 넘어간 불쌍한 사람일까.
이들이 소속된 연구소는 일본을 넘어 세계 굴지의 연구소 중 하나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이 종종 배출된다. 그런 연구소 구성원이 자기 이름을 집어넣는 논문이 조작되었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그걸 믿을 수 있을까? 애초에 이 논문 조작 사건이 몇 달 만에 밝혀진 것은 연구에 석연치 않은 게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약산성 약품에 세포를 몇 번 담그면, 짜잔! 인간 생체 기관 어디든 배양할 수 있는 만능 줄기세포 완성!’이라는 것을 학자들은 도통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사기당하는데 학력이나 능력이 무슨 상관이랴. 그렇지만 속은 학자들도 책임은 있다. 고작 몇 달 만에 들켜버릴 조작 논문을 검증하지 않은 채, 다 된 밥에 숟가락 올리듯 제 이름을 논문에 올려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구 윤리를 가진 학자를 봐주자는 건 문제 발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저자는 극단적인 이익 중심, 현실 중심 사고를 갖고 있으며 그런 이익과 현실의 중심은 국가에 맞춰져 있다. 이러한 윤리적 문제를 저자가 봐주자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차별을 없애자는 문제를 간단히 생각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심리적인 차별은 해도 좋지만, 되도록 제도적인 차별은 하지 말자고 하면 된다. 단지 그뿐이다. 내가 쓴 차별에 대한 글들은 제도적인 차별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속으로 차별하는 것은 나의 자유인 것이다.’ -책 26% 중
저자의 문제는 하나 더 있다. 애초에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위의 인용문은 필자 입장에서는 ‘속으로 차별하고 멸시해도 상관없다, 겉 부분만 좋게 포장하면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필자는 이 순간 일본 문화 중 하나인 ‘다테마에’ 다. 이는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도록 의례적인 언행을 실천하는 자세다. 당연히 겉과 속은 다르다.
‘다테마에’ 문화를 생각하면 저자의 발언이 이해된다. 결국 저자는 겉모습에 신경을 써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는 것을 문제의 해법이라 여긴다. 이는 자유주의는커녕 민주주의도 아니다.
지금까지 책 ‘다수결은 위험하다’에 대한 필자의 잡설을 써보았다. 독자 중 정반대의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마지막 잡설을 해보자. 우선 책을 정리하면 이렇다. 책은 ‘다수결은 위험하다’라는 제목이다. 하지만 다수결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지 않는다. 저자 ‘이케다 기요히코’가 글을 쓴 목적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자민당 정권과 그들의 정책에 불만이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도 일본 국민은 움직이지 않는다. 중차대한 문제에 왜 침묵하는지 불만스럽다. 저자는 동조 압력 때문에 국민들이 정부에 순응한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저자가 생각한 것이 ‘다수결은 위험하다.’라는 구호다. 세상은 소수의 현명한 사람에 의해 변한다고 하는 그. 그렇기에 그는 현명한 소수를 다수가 짓밟는 일본 사회에 개탄한다. 그가 내놓은 대안은 자민당이라는 현재의 썩은 보수를 치우고 새로운 보수정당을 세우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일본의 온건 우익이다. 이해득실을 따져 정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자는 자유주의를 옹호한다. 필자가 보기에 그 자유는 현 일본 정부에 순응하는 사람에 대한 분풀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자의 말처럼 정말 자유가 없어서 정권에 반대하지 않을까? 동조 압력이 너무 세서 어쩔 수 없는가? 필자가 보기에 일본 국민은 자국의 현 정권에 정말로 만족한 것이다. 동조 압력이니 자유 부족이니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필자가 생각할 때 저자가 생각하는 현명한 소수, 철인(현인) 따위는 없다. 한편 대중이 우매하다는 것도 거짓이다. 대중은 생각 이상으로 똑똑하고 힘이 세다. 저자는 이걸 부정하고 어디에도 없는 현명한 소수를 찾아다니는 모양이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소수가 민주주의를 세운 적은 없었다. 옆 나라 한국을 보고도 모르나.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가? 결국 다수가 함께 연대하는 것이 저자가 원한다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을 저자에게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