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기
4월1일
오전엔 글밭, 오후엔 텃밭.
마음을 뒤집듯 흙을 뒤집는다.

『섬진강 일기』는 김탁환 작가가 서울에서 곡성으로 집필실을 옮겨서 쓴 글들이다. 작가는 곡성에서 초보 농사꾼이자 초보 마을소설가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글을 쓰고 농사를 짓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글을 가르친다. 장편소설을 집필하면서 각 계절에 맞는 마음을 새기고 ‘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록했다.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기 어려운, 엇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틀에 갇힌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고
나이는 차곡차곡 쌓여서 어떤 고비마다 체기를 불러온다.
틀은 안전하고 틀은 성실하고, 관성을 부여하고 단단해져
그 속에서 희미해지고 낮아지는 자신을 응시한다.
열린 창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과 어둑해지는 하늘로 번져가는 저녁노을
하루의 무게만큼 가라앉은 밤과 차가운 공기 속에서 푸릇하게 일어서던 새벽
비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 젖은 흙냄새와 초록으로 환한 처마 아래로 떨어지던
봄볕에 내리쬐는 툇마루에 누워서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면
환한 빛 대신 까만 점들이 가득 들어찬 눈을 감았던 날
계절이 몸과 마음으로 스며들어 기록하기도 했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감을 잊고 싶지 않아서.
몇 년 전, 김탁환 작가님의 『읽어가겠다』 북토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장소는 합정 근처의 카페. 작가님의 이야기가 지나고 독자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에 나는 ‘독서를 할 때 집중이 잘 되는 공간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작가님은 그때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서를 한 후가 중요하다고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독후 활동을 남기라고도 했다. 지금도 이 말이 기억나는 이유는 향긋한 커피 향과 잔잔한 노래, 책은 덮고 난 다음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이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사이 나는 ‘독후의 감’을 잘 새겼었던가.
틀에 갇혀 살아가면서 ‘감’을 잃어갔다. 계절과 독서와 마음. 그것들을 새기지 않아서 희미해져갔다. 먹고사는데 그런 감들이 무슨 필요일까 싶었지만, 그런 것들이 전부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섬진강 일기』는 계절의 기록이다. 몸과 마음에 새기는 그 기록들은 계절과 독서와 마음의 감을 되살리는 일들이다.
1월 가만히 견디며 낮게 숨 쉬는 달
2월 겉을 뒤집고 속을 뒤집는 달
3월 마음껏 나물을 먹는 달
4월 흙과 사귀고 싹을 틔우는 달
5월 못줄 따라 내일을 심는 달
6월 뽑을수록 허리가 아픈 달
7월 큰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달
8월 멱감고 그림자를 키우는 달
9월 벼꽃 닮은 사람을 만나는 달
10월 해도 보고 땅보 보는 달
11월 뿌린 것보다 더 거두는 달
12월 반복을 사랑하는 달
각 달의 이름(의미)를 기록한 점이 참 좋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작가다운 명명이다.
나는 도시에 있지만 각 달에 이름을 부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5월. 내가 있는 ‘소멸하고 있는 서울’ 이곳은 ‘햇볕은 따갑고 그늘은 시원한 달’이다.
작가가 곡성으로 내려갔다고 했을 때는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생활을 떠올렸는데, 각 계절마다 작가는 무척 바쁘다. 글을 쓰는 것은 매일이고 농사이고 매일이다. 책을 읽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작가들을 만나고 행사에 참여하는 일들도 더해진다. 곡성이 무척 바쁜 곳이라서 그럴 리는 없다. 살아가는 틀에 따라 자신이 있는 곳은 달라질 것이다. 틀의 모양을 바꾸고 테두리를 넓히면 곡성의 삶도 분주하다.
틀에 갇힌 기분이 들면 이곳에서라도 섬진강의 계절을 떠올리며 이름을 짓고 ‘감’을 기억하려는 마음으로 기록해야지. 천천히 다시 펼쳐서 읽으면서 사람과 마음과 사람 이외의 모든 생물들을 기억하고 나의 틀이 굳어지지 않도록 제철마음을 먹어야지.
물줄기가 갈릴 때, 돌에 부딪혀 소리를 낼 때, 모래나 흙을 긁어대며 빠르게 돌 때, 불룩한 윗배처럼 유유히 흐를 때, 각각 다르나 이야기들의 방문이 좋았다. 행복했던 날이 훨씬 많다. 하지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날엔 서둘러 흐르는 물 곁을 떠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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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이 생명을 다한 것은 지난여름이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수재민과 가축과 농작물은 돌아보며 걱정하고 대책을 세웠다. 하지만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나무들을 구하고 돌본 이는 없었다. 나부터 막연히, 나무들은 그래도 쏟아지는 강물을 견뎠으리라 믿었다.
이곳 섬진강 들녘은 사람이 매우 적은 대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생물들이 아주 많다. 소멸하고 있는 곳은 사람만 득실대는 서울이다. 만인에서 만물로 시선을 돌리면, 곡성을 비롯한 소위 소멸예정지역들이 달리 보인다.
11월의 메타세쿼이아가 내게 묻는 듯하다. 마음의 빛깔이 달라졌냐고. 제철 채소, 제철 과일처럼 제철 마음을 먹을 것.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