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4강에 든 것을 계기로 국민스포츠로 올라섰던 여자배구는 IBK기업은행의 선수 항명파동으로 한순간에 싸잡아 비난을 받는 위치로 전락해버렸다. 다행히 컴퓨터 세터로 이름 높은 백전노장이 감독으로 부임해 미운털 박힌 팀을 단시간에 기대할만한 팀으로 바꾸어놓았고, 그로서 여자배구의 인기가 오히려 상승세를 타고 있지 싶다. 저자의 페이스북 글을 통해 여자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나는 올림픽 여자배구의 묘미를 세세하게 짚어낸 저자의 설명에 힘입어 팬이 되었고, 요즘은 시즌 끝나기 전에 한 번은 IBK기업은행 경기를 보러 가리라 마음먹기까지 이르렀다.
생전 보지도 않던 여자배구에 빠져있는 모습에 의아해하는 아내에게 그 이유를 설명을 하기는 했는데, 설명이 장황해지다 보니 그만 말이 꼬여 결과적으로 훤칠한 젊은 여성들이 들고 뛰는 모습을 훔쳐본 치한이 되어버렸다. 그렇기는 해도 볼수록 여자배구는 참 매력적이다.
파워로 보면 여자배구가 어떻게 남자배구를 따라가겠는가마는, 저자가 설명한 대로 남자배구의 넘치는 파워가 오히려 재미를 반감시킨다. 물론 상체가 네트 위로 솟구쳐서 내리꽂는 통쾌함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기는 해도 눈 깜박할 사이에 공격이 끝나버리는 남자배구보다는 파워는 그에 미치지 못해도, 아니 그에 미치지 못해서 랠리가 아기자기하게 이어지는 여자배구가 재미로 보면 오히려 한 수 위가 아닐까 싶다. 저자는 시간제한이 없어 점수가 크게 벌어져도 얼마든지 역전이 가능한 것을 배구의 매력으로 꼽는데, 그런 면에서는 워낙 공격이 강해서 역전이 쉽지 않은 남자배구보다 금세 따라잡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여자배구야말로 배구가 주는 재미의 본질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종목을 막론하고 한일전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객관적으로 국가의 위상이나 실력 모두 뒤져 있는데도,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게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실제로 승률도 우리가 높지 않을까 싶다.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선택적 기억력의 결과일 수도 있고.) 도쿄올림픽의 여자배구 한일전은 8강 진출을 결정하는 중요한 경기였지만 우리에겐 그저 여느 경기와 다름없는 한일전이었다. 8강 진출 여부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무조건, 그리고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그래서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고 결국 승리해서 코로나로 지쳐있는 많은 국민들이 위로를 받았다.
아마 저자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아니었더라면 그저 막연히 선수들이 최선을 다했겠거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미분하듯 프레임 단위로 읽어낸 상황을 전해 들으며 비로소 선수들이 극한의 투혼을 불살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한일전 5세트 14:13으로 뒤진 상황에서 14:14 동점을 만들어낸 순간의 스냅 샷에 대한 저자의 서술은 이 책의 백미요 압권이 아닐 수 없다. (내 짧은 표현력으로는 도저히 그 느낌을 살려낼 수 없으니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시라.)
저자는 이 책의 첫 장에서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그 중 한일전으로 독자를 인도해간다. 그리고 한일전의 문을 열기 전에 선수들이 도달했던 극한의 상태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가장 우선적인 지상명령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의 유전자와 두뇌의 사고구조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어떤 시그널에도 빠르게 대응하고 회피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게 당연하다. 신체 능력과 관련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신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치의 한계 지점은 상당히 남아있지만 그 경계선에 가는 것 자체가 위험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능력을 봉인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이 자동차에 깔려서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부모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자동차를 들어 올렸다는 식이 이야기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화는 인간이 자신의 생사를 도외시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한계치를 개방해버려서 낼 수 있는 힘의 최대치를 낸다는 것이지, 그 부모가 슈퍼맨처럼 원래 가지고 있지도 않고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힘을 갑자기 발휘한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통상 자신의 능력 한계치에서 20% 수준으로 제한을 건다고 한다. (마약은 이런 안전장치를 꺼버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여분의 마지막까지 밀어붙여 초인적인 힘을 끌어내는 물질이다.) 이런 ‘생명의 안전장치’를 꺼버리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몸이 고장 나는 게 당연하다.”
몸이 재산인 프로선수들이 몸이 고장 나는 게 당연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극한적인 투혼을 불살랐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라바리니 감독과 김연경이 있었다고 말을 잇는다.
“올림픽 여자배구팀의 라바리니 감독이 불꽃을 일으키는 부싯돌의 역할이었다면 김연경 선수는 그 반짝임을 거대한 불길로 이어나갈 최고의 불쏘시개였다.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가장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은 어느 장작 하나가 나머지 장작들이 다 바짝 말라 마침내 불이 붙을 때까지 무작정 타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김연경이 그 무지막지하고 확실한 단 하나의 장작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여자배구팀은 세계랭킹 14위에 불과해 객관적으로는 정상전력을 가지고도 세계랭킹 4위인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올림픽 당시에는 학교폭력 사태로 이재영ㆍ이다영 자매가 빠지고 베테랑 김해란 리베로마저 은퇴해버려 저자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폐허’와 같은 상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여자배구팀은 8강 진출 이상의 목표를 세울 수 없었다. 8강 진출을 목표로 했다는 것은 조별통과가 최대한 목표였다는 뜻이고, 현실적으로 조 예선 통과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사실 올림픽 출전을 가리는 2019 대륙 간 예선전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는데, 이때는 이재영, 이다영, 김해란 모두 대표팀에 있었다. 그런 배경을 감안한다면 대표팀이 거둔 성과를 저자처럼 평가하는 게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상하좌우로 칼날이 난무하는 좁은 미로에서 말도 안 되는 계산을 통해 유일무이한 좁은 틈을 발견하고, 그 사이를 목숨을 걸고 박박 기어나간 끝에 마침내 출구에 도달한 뒤 밝은 빛을 맞이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저자가 한일전을 중심으로 한 올림픽 배구에 대한 글로 책을 시작했지만 책 전체를 특정 경기 중심으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 책 제목처럼 독자들이 <배구,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맞을 수 있도록 안내하기 위해 배구가 태어난 이야기에서 시작해 배구의 규칙, 포지션과 로테이션 시스템, 공격과 수비 전략, 그리고 작전타임 때 마치 암호처럼 쏟아내는 감독의 지시사항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계방송을 보다 보면 선수교체는 한 세트 당 여섯 번으로 제한했다는데 왜 그렇게 자주 선수가 들락날락거리는지, 리베로는 공격을 할 수 없다는데 리베로가 상대방으로 공을 넘기는 건 왜 허용하는 건지, 어디까지가 토스이고 어디까지가 이단연결인지, 왜 선수가 뱅글뱅글 돌아야 하는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 저자는 이유 뿐 아니라 그런 규칙이 생기게 된 배경까지 설명해 가며 독자들을 이해시킨다.
그 중 몇 가지만 추려보자. 리베로는 공격할 수 없는데, 이때 공격이란 “점프한 뒤 네트 ‘위에서’ 공을 때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스파이크만 아니라면 얼마든 상대 코트로 넘길 수 있다. 리베로는 후위 어느 선수와도 자유롭게 교체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어 한 세트 당 여섯 번으로 제한된 선수교체 회수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선수가 뱅글뱅글 도는 로테이션 시스템은 경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기 위한 협회와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작전을 만들어내는 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방의 결과이다.
저자는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스포츠는 성립하지 않으며, 그래서 모든 스포츠는 완벽하게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규칙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너무 강한 팀이 있어도 마찬가지인데, 그 팀의 팬은 좋을지 모르지만 리그 전체의 흥미는 크게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협회는 규칙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팬의 관심을 붙들어두려고 애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양궁과 쇼트트랙은 규칙은 물론 경기방식까지 바뀌지 않았나.
이렇게 친절하고 세세하게 배구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고는 있지만, 저자는 내심 독자들에게 배구의, 어디 배구뿐일까 모든 스포츠가 그렇지 않겠나마는,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다. 가장 맛있는 건 아껴두었다 나중에 먹듯이, 저자는 마지막 장에 배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두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사연은 독자의 감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직접 읽으면서 느껴봐야 할 일이다. 맛보기로 그중 김세진 감독의 일화를 전했던 한 부분을 인용한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신묘막측한 작전을 짜내거나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전문가가 데이터나 집단지성을 통해 만들어내야 할 일이다. 리더가 해야 할 진짜 역할은 그 대안 가운데 선택한 ‘결정’에 대해 자신이 최종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을 분명히 해 팀원들이 자기 역할에만 집중하도록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다. 결정에 대해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리더의 역할이다.”
이것은 스포츠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이고, 처세와 경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런 글이 하나둘이 아니다. 말난 김에 하나 더. 배구 경기장에 가면 선수는 물론 누구라 할 것 없이 관객에게 친절하기로 정평이 나있는데, 그것인 모든 배구인들이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애환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배구인들에게는 마음 깊이 자리 잡은 두려움이 있다. 지금은 겨울스포츠로 단연 최고의 인기종목이 되었고 나아가 프로야구와 견줄 정도가 되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배구는 비인기 종목으로 외면을 받았다. 그들은 관중석은 텅 비어있고 일반관중은 무료 표를 뿌려도 찾아오지 않던 시절에 느꼈던 좌절과 암담함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후배들에게 사인을 요청하면 무조건 응하고, 팬이 즐거워할 일이라면 망가지는 일도 가리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이야기한다. GS칼텍스 차상현 감독은 입버릇처럼 ‘팬이 없으면 너희들이 하는 건 그저 공놀이에 불과한 것이며, 선수들이 서 있는 코트는 팬이 있어서 가능하다는 걸 절대로 잊지 말라’고 말한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좌절과 암담함을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 배구는 상황에 따라 부침은 있을망정 그럴 때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의 인기를 이어가리라 믿는다. 그것이 어디 배구, 아니 스포츠뿐이겠는가. 개인의 일생이 그렇고, 기업이 그렇고, 정치라고 다르겠는가.
이와 같이 저자는 배구 이야기를 하면서 농구와 축구와 테니스를, 인생과 경영과 정치를 종횡으로 누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배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관심이 그저 승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전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작전을 예측하기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중계방송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들릴 것이고, 어쩌면 발길을 경기장으로 향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왜 스포츠와 인생이 불가분의 관계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