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도 이름도 모르는 소녀가 있다. 사람들은 그 소녀를 ‘이년’, ‘저년’, ‘언나’, ‘간나’, ‘꼬마’ 등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부른다. 아빠의 폭력과 엄마의 가출에 시달리던 소녀는 어느 날 자신을 학대하던 부모가 진짜 부모가 아닌 가짜라고 확신하며 진짜 부모를 찾기 위해 집을 나온다. 세상은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소녀가 갈 수 있는 곳이 밝은 세상은 아니었다. 가짜 부모를 피해, 자신을 다시 가짜 부모에게 넘겨줄 사람들을 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황금다방 장미언니는 가짜 부모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믿음이란 것을 주기도 했지만 소녀는 가짜라고 생각한다. 장미언니가 자신을 두고 욕을 했다는 건 제쳐두고라도 백곰에게 맞고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를 가짜 엄마라고 생각한 이유도 아빠한테 맞고만 있었으므로. 소녀는 마음속으로 가짜 아빠, 가짜 엄마, 장미언니, 백곰 모두를 불태우고 황금다방을 떠난다. 이후 소녀는 태백식당 할머니, 폐가의 남자, 각설이패, 그리고 자신과 같이 버려진 아이들인 유미와 나리를 차례로 만난다. 그 만남에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끝은 버려지거나 도망치게 된다. 누군가의 행복은 또 다른 누군가의 불행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생각대로 진짜 엄마를 찾아 세상을 떠돌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소녀는 나리의 죽음을 계기로 마침내 가짜를 태워버리기로 어떤 결심을 한다.
이 책은 작가인 최진영의 첫 장편소설이자 제15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이다. 2010년에 처음 출간되어 올해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그것도 모르고 올해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인 줄 알고 올 초에 구매해두었다가 해를 넘기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읽게 된 책이기도 하다. 작품 속 소녀는 진짜 엄마를 찾기 위해 세상을 떠돌지만 그 이유는 진짜 엄마가 그리워서도 또 필요해서도 아니다. 가짜를 가짜라고 확신하기 위해서였다. 진짜를 찾아내서 진짜인 척하는 가짜들을 진짜 가짜로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소녀는 가짜를 하나하나 수집하는지도 모른다. 가짜를 찾아 모두 불태워버리면 나중엔 진짜만 남을테니까. 소녀가 가는 곳, 만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 눈에 하나같이 실패하고 못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곁에서 소녀는 행복하기도 했고, 진짜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남들 눈에는 실패하고 못난 가짜 인생으로 보이지만 소녀의 눈에는 진짜인 척하는 가짜들보다 더 진짜같이 보인다. 때로는 진짜 엄마의 조건에 나처럼 반드시 불행해야 한다고 조건을 달고, 또 때로는 언제나 배고프고 추운 사람이라는 조건을 새로 붙이면서도 늘 불행하지만은 않다고 조건 하나를 고치기도 한다.
작가는 떠도는 소녀의 마음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습과 우리가 각기 내면에 안고 있는 슬픔을 직시하게 해준다.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가기에 바빠 내 옆을 스쳐가는 소녀의 이름 따위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쩌면 소녀의 고통과 감정은 바로 나의 고통과 감정이지만 우리는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란 진짜를 찾지 못하고 애써 진짜인 척하는 가짜가 아니냐고 작가는 반문하는 것 같다.
어떤 내용인지 보려고 책을 펼쳤다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흡인력이 대단하고, 2010년 한겨레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어째서 이 소설을 그 해의 수상작으로 뽑았는지(그것도 만장일치로) 단번에 이해됨...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녀'다. 허구한 날 때리는 아버지와 걸핏하면 밥을 굶기는 어머니를 둔 소녀는 이들이 진짜 부모라면 이렇게 나를 괴롭힐 리 없다고 생각하며 어딘가에 있을 '진짜 엄마'를 찾아 떠난다. 소녀는 황금다방 장미언니, 태백식당 할머니, 교회 청년, 폐가의 남자, 각설이패 삼촌들, 유미와 나리 등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의지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에게 버림받거나 그들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설정과 줄거리만 보면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소녀가 어린 나이에 가출해 험한 세상을 경험하는 모험기 같은데(맞다), 같은 경험은커녕 유사한 경험조차 없는 내가 이 소설에 크게 감정이입한 이유는 뭘까. 내 생각에 이 소설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감각 혹은 감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 어디에도 내가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없는 것 같다는 불안. 나에게 주어진 삶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체화하는 성숙이라는 이름의 체념. 운 좋게 신뢰할 수 있고 애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에게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을 수 없고 나 또한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는 걸 체감할 때의 비애 또는 무력감.
잠깐이라도 나를 받아주었던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다만 '그것'뿐이라서, 그것을 하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소녀의 마지막 선택은 그래서 더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야 자신의 이름을 겨우 알게 되고, 살면서 마음을 준 친구는 몇 명인가 있었지만 최후에는 곁에 아무도 없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언젠가 이다혜 기자님의 인스타그램에서 본 에밀리 메리 오스본의 그림 <Nameless and friendless>이 떠오르기도 했고... (결국 '소녀'의 삶은 모든 여성들의 삶, '소녀'의 죽음은 모든 여성들의 죽음일까)
이 소설을 읽고, 조숙하지만 미숙하기도 한 소녀의 시점에서 소설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떠오르기도 했다.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끝내 불행한 방식으로 삶을 마감하는 어린 아이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체공녀 강주룡>, <코리안 티처> 등을 읽었을 때 느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신뢰를 다시 한 번 굳힌 작품이기도 하다.
2024 .02월의 네 번째
최진영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이름은 내가 누군가와 구분되어 존재한다는 것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나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으로 내가 불리워지고 다른 이들에게 각인되는 것이기에 그 의미가 중요한 것이리라.
이름 지어지지 않은 한 소녀,
'이년' '저년' '언나' '간나'.... 불리기 좋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리던 한 소녀가 있다.
부모로 부터 갖은 폭력에 시달리고 누구 하나 따뜻하게 보호해 주지 않아, 분명 내 진짜 엄마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 믿고 있는 소녀.
그 소녀는 진짜 엄마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분명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황금다방의 장미언니, 태백식당의 할머니, 폐가의 아저씨, 각설이패 그리고 길에서 만난 유리와 나리.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던 이들이 진짜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들도 결국에는 소녀가 생각하는 진짜는 아니었다.
그렇게 가짜를 하나하나씩 태워버린다. 그러다 보면 결국 진짜만 남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읽는 내내 미간의 주름을 펼 수가 없었다. 손에 힘을 뺄 수 없었다. 소녀에 대한 연민과 함께 소녀를 둘러싼 안개속 같은 현실이, 그 현실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같은 존재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임을 인정해야하는 것에 대한 긴장과 화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나마 소녀에게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는 숨구멍을 뚫어 준 진짜같은 가짜들이라도 있었음을 위안삼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소녀에게는 낯설고 희미한 안개 속같은 세상. 그 세상속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진짜 ('평화'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이름, 뱃속에 있을 때 '아가야'하고 불러주던 엄마의 음성...)를 향해 직진하는 소녀의 모습.
더 이상 현실이 아닌 소설속의 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을 지도 모를 그 소녀의 이름을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평화야"라고 다정하게 불러주고 싶다.
'나는 진짜를 찾기 위해 가짜를 하나하나 수집하는 중이다. 세상의 가짜를 다 모아서 태워버리면 결국 진짜만 남을 것이다. 시간은 좀 오래 걸리겠지만,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다.(p. 58)'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세상에 진짜란게 하나도 없다면, 그러니까 온통 가짜뿐이라면 어쩌지? 그럼 세상에 진짜는 오직 나뿐인가? 정말 그럴 수도 있을까? 나는 진짜가 맞나? 내가 진짜임은 누가 확인해주지? 내가 진짜를 찾아 헤매듯, 세상의 어떤 진짜는 나를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 니까 나는 꼭 진짜를 찾아야 한다. 내가 진짜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p. 118)'
'해 에겐 해라는 이름이 있고 달에겐 달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반짝이는 저 많은 별들은 다 그냥 별이니, 어쩜 나와 비슷하다. 저마다 이름이 있고 나이가 있는데 내겐 그런 것이 없으니 나는 반짝 이는 별들 중 가장 밝은 별 하나를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서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봤지만 딱히 맘에 드는 게 없었다. 그냥 별이라는 이름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 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저 별은 그냥 별로 두고, 다른 별에게 모조리 이름을 붙여주기로. 그럼 저 별만 특별해질 거다. 세상 사람에겐 모두 이름이 있는데 내게만 이름이 없는 것 처럼. 나는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거다. (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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