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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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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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병자호란 - 임용한, 조현영 평점10점 | g*******7 | 2023.10.22 리뷰제목
2017년에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주화파 최명길(이병헌 연기)과 척화파 김상헌(김윤식 연기)의 대립과 고뇌를 통하여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도모자하는 주화파와 대의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항전을 해야 한다는 척화파. 예전에는 비분강개한 척화파에 공감을 많이 했지만, 그 치욕의 순간에
리뷰제목

 2017년에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주화파 최명길(이병헌 연기)과 척화파 김상헌(김윤식 연기)의 대립과 고뇌를 통하여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도모자하는 주화파대의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항전을 해야 한다는 척화파. 예전에는 비분강개한 척화파에 공감을 많이 했지만, 그 치욕의 순간에 다다르는 과정을 살펴본다면 척화파를 마냥 강직한 충신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이미 두 번의 왜란과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기 거의 10여년 전인 1626년에 정묘호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시기의 집권 세력의 무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야 산성에서 핏대를 세워 자신들이 맞다고 떠드는 동안 실질적인 피해는 백성들에게 돌아갔기에 영화가 아닌 역사로서 그 문제점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약 7년 동안 벌어졌던 '임진왜란'에 비하여 순식간에 종결된 전쟁이라서 그런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과정은 우리에게 생소한 편이다. 하지만 '병자호란'은 이미 두 번의 왜란과 호란 이후에 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빨리 조선이 항복한 전쟁이었기에 오히려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한 번의 실수 또는 실패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고쳐지지 않고 반복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병자호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드리버에서 출간한 [병자호란]은 병자호란의 전후 사정을 자세히 다루고 있어서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1586년 누르하치가 건주 여진을 통일하면서 점점 세력을 키우는 시점부터 1637년 '삼전도의 굴욕'까지 다루는 이 책은 당시 전쟁 준비에 대한 조선의 무능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상에 군대 없는 나라는 없다. 군대 없이 유지되는 나라도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런 기적적인 나라가 하나 있다. 조선이다. 변변한 군대도 없이 전쟁으로 단련된 왜군의 침략을 이겨냈다.

 

  장수들은 시간만 때우며, 보직 이동만 기다린다. 군인명부의 반은 비었고, 군사는 훈련하지 않는다. 성곽은 무너지고 해자는 메워졌다. 조정에서 다른 관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에겐 명이 있다."라고 하거나 "우리는 성리학의 도를 지키는 나라이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 허균의 [서변비로고] 中에서 -


 잘 알려지지 않은 허균의 [서변비로고]의 내용을 읽어보면 '임진왜란'을 겪었음에도 조선의 국방과 전쟁에 대한 방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교과서에서는 전쟁 이후 비변사를 설치하고 속오군과 같은 군 체제를 정비하였다고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조정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허균의 입에서 이런 탄식이 나올 정도면 조선은 '임진왜란'이 주는 교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누르하치의 성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6년 누르하치는 건주 여진을 통일하면서 점차 두각을 나타낸다. 물론 이 시기에도 여전히 누르하치는 발톱을 감추고 명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임진왜란'의 발발로 인하여 누르하치를 감시하고 견제하던 명의 요동병이 조선에 파견됨에 따라 누르하치는 아예 여진족을 통일하고 나아가서 몽골을 압박하여 1616년 칸으로 등극하며 후금을 건국한다. 이런 상황을 조선이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누르하치는 조선을 도와 파병을 제의하기도 하였고, 1595년에는 조선으로 월경한 여진족을 조선이 토벌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긴장감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원래 조선은 건국 시점부터 명과 조선 사이의 여진을 견제하고 감시하고 있었으니 누르하치의 성장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명과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위험성을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명나라가 1618년 무순이 청에 의하여 함락되고 이후 조선군까지 동원하여 후금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각개 격파당하면서 이후 명은 후금에 대하여 더이상 공세적인 입장을 취할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은 그나마 임진왜란 이후에 양성한 병력을 상실하게 된다.(강홍립이 이 전투에 참전했다가 결국 후금에게 항복하게 된다.) 후금의 힘을 확실하게 느낀 조선이지만, 이후 조선은 어수선한 내부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혼란을 겪게 된다. 1623년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게 되는데, 곧바로 이괄이 반란(1624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인조가 충청도의 공주까지 피난하고 한양이 이괄에게 함락되었다가 곧바로 진압되었지만, 이 반란으로 인하여 서북지방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명에 대한 의리를 천명하면서 후금을 적대시하는 정책이 유지된다. 

 

 이런 상황을 살펴보면 1598년 왜란이 종결된 이후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기까지 약 30년의 시간이 있었기에 비록 왜란에 의한 피해가 막대했지만, 그것을 복구하고 다가오는 전쟁의 위험에 대하여 대비할 수 있었음에도 정치적인 혼란이 발생하고 실질적인 대책이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금이 거대한 명을 앞에 두고 굳이 배후에 있는 조선과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1626년 영원성 공략에 실패한 이후에 사망하자 조선에 대한 후금의 정책이 변경된다. 조선에 대한 온간파였던 다이샨이 아닌 강경파였던 홍타이지가 등극하였기 때문이다. 홍타이지는 명이 만리장성 주변에 대한 보강 작업을 하면서 명과 당분간 전쟁이 없을라는 판단하에 배후를 탄탄하게 만들고자 조선 침공을 결정한다. 1622년 모문룡이 가도에 입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고, 조선 역시 명에 대한 의리만을 주장하고 있었기에 이 기회에 배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1627년 조선을 침공한다. 채 한달도 되지 않아 청은 황해도까지 이르게 되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고 세자는 전주로 가서 분조 활동을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전쟁은 애초에 전면전 보다는 조선에 대한 경고의 차원이 주요 목적이었고, 명이 청에 대하여 전쟁을 다시 시작하려는 움직임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곧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정묘호란'을 겪었으니 조선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후 다시 청의 공격에 대한 대비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정묘호란'부터 '병자호란'까지 약 10년의 기간 동안 조선도 내부적으로 전쟁 준비에 대한 방안 마련에 돌입하게 된다. 청나라 기병의 신속함을 경험한 이상 조선 역시 황해도에는 '정방산성'을, 한양 아래에는 '남한산성'을 개축하였고, 속오군 체제를 강화하였으며, 유사시 각 지방에서도 병력을 동원하는 체제도 구축한다. 또한 관찰사와 군수가 대부분 문관이기에 실질적인 병력을 다스리는 무관을 함께 임명하였고, 명으로부터 화약 제조 도입을 통하여 대규모 화약 제조 능력까지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조정이 완전히 무능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그 실체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정책이 대부분 논의로만 끝나로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방산성' 개축을 중심으로 북방 지역의 방어선을 어떻게 형성할지 확정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모든 준비에 필요한 재정이 바닥났기에 제대로 수행되는 것이 없었다. 성은 있지만 성을 채울 수 있는 백성과 군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고, 병사들의 질도 형편없었다. 

 

 1636년 12월 청의 침입이 이루어졌고, 이들은 우선 기병으로 별동대를 먼저 출전시켜 신속하게 조선의 방어 라인을 회피하여 순식간에 한양으로 향하게 된다. 이들의 주요 목표는 조정이 강화도로 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전광석화와 같은 이들의 질주에 조선이 그간 준비한 대책은 제대로 된 것도 없었지만, 준비가 되었어도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인조는 위험성을 안고 강화도로 향하느니 안전하게 우선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택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만약 조선이 마련한 대책들이 제대로 가동되었다면 그래도 '삼전도의 굴욕'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개축된 '남한산성'은 청이 단기간에 점령할 수 없었으며, 인조와 함께 들어온 병력은 조선의 중앙군에 해당하는 나름 정예병이기에 그나마 병사들의 질이 좋았다. 이렇게 농성을 하는 과정에서 충청과 전라, 경상, 강원의 근왕병이 제때 도착하여 협공을 가했다면 청을 몰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선 각 지방마다 7천의 병력들이 동원되었다. 충청과 전라, 경상의 병력이 모두 집결한다면 2만이 넘고 여기에 강원과 '정방산성'에 주둔했던 북방의 병력까지 출진한다면 결코 조선이 밀릴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병력 동원과 이동은 이루어졌지만, 각 군대마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청나라에게 각개 격파되면서 조선이 준비한 시스템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앞서 명나라가 대군을 동원하였음에도 4개로 부대를 나누어서 다른 방향으로 청나라를 공격하였지만, 청나라 기병의 신속한 이동 속도에 의하여 각개 격파되는 것을 보았지만, 조선 역시 제대로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청나라에게 속수무책으로 각개 격파되었기에 남한산성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당시 주화파와 척화파의 논쟁은 대책없는 위정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비분강개와 충(忠), 대의명분으로 포장되고 있지만, 결국 모든 고통은 백성들이 짊어지는 상황 속에서 위정자들은 그저 자기들끼리 입씨름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에 젖어 모르고 당했던 왜란과는 달리 청의 침입을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그들이 나중에 입으로만 명분과 실리를 외치며 치열하게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초반에 언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윤식이 뱃사공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청나라의 길잡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뱃사공을 베어버린 것인데 자신은 이것을 대의(大義)로 생각한다. 본인은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해야 하니 자신이 강을 건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뱃사공을 단칼에 베어버린 이 장면은 영화이긴 하지만 소름이 돋았다. '대(大) 또는 정의를 위한 소(小)의 희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희생을 강요할 뿐 정작 자신들은 희생하지 않는다. 전쟁이 나면 조선의 왕들은 가장 먼저 의주로, 강화도로 피난을 가서 목숨을 부지하면서 백성들에게는 희생을 강요한다. 국난이 상황 속에서 희생과 고통이 뒤따르지만, 대부분 백성들이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 

 

 이러한 위정자의 행태는 역사에서 무수히 반복된다. 심지어 왕조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일이 똑같이 벌어졌고 또 벌어지고 있다. 6.25 전쟁 전에 북진을 외쳤던 그들이 전쟁이 나자 서울을 지키겠다고 방송을 틀고 본인들은 가장 먼저 줄행랑을 쳤다. 심지어 일본으로 도주하려던 것을 미국이 만류했다고 한다. 수백년 전의 '병자호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질적인 정책에 기반하지 않고 무책임한 발언을 내뱉는 관료, 정치인들을 우리는 보아왔고 또 보고 있다. 그들은 위험과 위기를 부정하고, 설령 위기가 오면 시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한다. 아니 '분담'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이 오면 그들은 발을 빼고 오직 시민들만이 고통을 짊어지게 된다. 그래서인지 [병자호란]의 내용이 꼭 과거에만 한정되지 않음이 느껴졌다. 이 책을 읽고나서 약 400년 전의 치욕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면 지나친 기우(杞憂)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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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병자호란, 질 수 밖에 없던 전쟁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n*****m | 2022.05.28 리뷰제목
“이게 전란을 두 번이나 겪고, 수십 년간 ‘전쟁준비’를 한 나라인가? 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 같은 군영 설치, 직업군인 양성, 화기와 화약 개발, 남한산성 축조, 속오군, 영장제... 단어만 나열하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막상 열어보니 속 빈 강정이었다.” (196쪽)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겨우 30여 년 후 전란에 휩싸인다. 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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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전란을 두 번이나 겪고, 수십 년간 전쟁준비를 한 나라인가? 훈련도감, 어영청, 수어청 같은 군영 설치, 직업군인 양성, 화기와 화약 개발, 남한산성 축조, 속오군, 영장제... 단어만 나열하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제도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막상 열어보니 속 빈 강정이었다.” (196)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겨우 30여 년 후 전란에 휩싸인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 불리는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의 호된 경험은 아무런 소용도 없이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누르하치의 발흥과 후금()과 명의 세력 관계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허약하고 허술한 방어 능력으로 그들을 맞았을까?

전쟁사 전문의 역사학자 임용한은 어떻게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시점 시점마다 청(후금)의 상황과 조선의 대응을 점검하며, 병자호란을 질 수 밖에 없었던 전쟁으로 결론짓고 있다.

 


 

 

사실 병자호란에 관해서 주로 알고 있는 부분은 청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격하자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이후, 그 혼란스럽고 안타까운 처지와 이후 삼전도의 치욕이라 불리는 항복에 이르는 상황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전쟁의 결과이다. 결과가 그렇게 된 데에는 거기까지 이르게 된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임용한의 병자호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깊이 다루고 있다.

 

몇 가지 상황이 병자호란의 패배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건진여진족의 추장에 불과했던 누르하치의 야망과 발흥에서 시작한다. 여진족의 성장은 임진왜란의 혼란스런 상황과 명의 약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누르하치는 때로는 자신의 야망을 숨기고, 때로는 과감한 작전을 통해 세력을 넓히고 후금이라는 국가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조선은 어떠했나? 누르하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중구난방이었었다. 말은 많았으나, 아니 말만 많았기에 집중하지 못했고, 누르하치라는 인물에 대한 파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명의 실력에 대한 믿음도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산성 하나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고, 제대로 된 군대도 양성하지 못했다. 지휘 체계도 단일화되지 못했다. 모문룡이라는 사기꾼에게 휘둘리며 국력은 소모되었다.

 

병자호란 전에 정묘호란이 있었다. 연전연패라고 할 수 밖에 없었지만 겨우 화친을 맺고 한숨을 돌렸다. 후금은 아직 조선보다는 명과의 대결이 더 급했고, 조선이 후방을 치지 않지 않도록 단도리하는 게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쉬이 화친을 맺고 간 것이었지만 조선은 상황을 오판한다. 정세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대비를 해야 했음에도 역시 말만 많았고 대응은 형식에 그치지 않았다.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조선을 침략한다. 병자호란이었다. 조선은 그들이 침략한 의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병력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끝까지 그랬다), 그들의 실력도 과소평가했다. 정묘호란 이후 가까스로 구축해놓은 방어를 위한 성이 있었으나 청은 그 성들을 우회하고 직접 한양으로 진격했다. 당황한 조정은 일부만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금새 강화로 가는 길을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남한산성에 웅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의 상황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각지의 군사들이 그래도 임금을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몰려들지만 체계적인 작전도 없었다. 그래서 각개 격파되었고, 안심하고 있던 강화도마저 함락되어 인조는 항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이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의 임금 인조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인조는 자신이 직접 반정을 이끌었을 만큼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신하들을 다루는 데 능수능란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조였지만, 그런 능수능란함은 전쟁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조는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 명확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화와 척화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곤란한 상황이 오면 신하들 보고 논의를 통해 결정을 내리고 보고하라고 한다. 이미 둘로 쪼개져 대립하고 있는 신하들이, 게다가 대부분 탁상공론에만 머물러 있던 신하들이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임용한은 이 상황을 누구도 책임지지 싫고, 왕은 누구에게도 권한을 주고 싶지 않고, 강력한 명분론에 단어 하나마다 시비가 걸리니라고 쓰고 있다.

 

임용한의 화살은 주로 주전론을 주장한 척화파를 향하고 있다. 그들은 대책도 없이 명에 대한 사대에 몰입했고,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을 내세웠고, 주화파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하여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항복에 이르게 된 것을 비록 질 지언정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책임은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파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전쟁 중에 화살 하나도 쏘지 않았고, 돌 한 덩이도 청의 군대를 향해 던지지 않았다(양반이라고 말도 없이 움직일 수 없고, 말이 있어도 말잡이 없이 말을 탈 수 없고, 배낭도 멜 수 없어 성 밖으로 나가 상황을 전할 수 없다는 말에는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그들은 애국자, 영웅이 되었다. 역사에서 원칙론자, 근본주의자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개 그렇다.

 

이랬으면, 저랬으면 병자호란의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란 상황과 시점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상황에서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내려진 결정, 혹은 내려지지 않은 결정은 모두 현실이 되었고, 한 궤에 꿰어 있는 것이었다. 전쟁은 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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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병자호란 -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이달의 사락 g********r | 2022.03.09 리뷰제목
인조는 광해의 실패를 통해 왕이 한 집단에 너무 의존해도 안 되고 일방적으로 서운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적당한 배분이 중요했다. 정책이나 결재만으로 배분이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가치와 마음을 공유해야 한다. 진심으로 같은 편이 되어 주는 것이다. (P.199)   “후금이 성장하며 조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왔고 이로 인해 조선에는 척화파가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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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광해의 실패를 통해 왕이 한 집단에 너무 의존해도 안 되고 일방적으로 서운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적당한 배분이 중요했다. 정책이나 결재만으로 배분이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가치와 마음을 공유해야 한다. 진심으로 같은 편이 되어 주는 것이다. (P.199)

 

“후금이 성장하며 조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왔고 이로 인해 조선에는 척화파가 생겨났다. 후금이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달아나던 중 평안도관찰사의 유문을 손에 넣는 바람에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악화한다. 인조 14년, 청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삼전도로 나가 항복을 한 전쟁” 이것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병자호란일 것이다. 그러나 내게 강하게 남은 병자호란은 배우 이덕화 님이 이마에 피를 줄줄 흘리며 삼전도에서 절을 하는, 삼전도 굴욕의 모습이다. 이게 나에게만 강한 인상은 아니었던지, 삼전도 굴욕은 조선 최고의 굴욕, 인조는 최악의 군주라 불린다. 늘 인조는 정말 최악의 군주인가, 다른 왕이었다고 한들 병자호란을 피할 수 있나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부분을 제대로 짚어주는 책을 만나지 못했었다. 

 

그러다 내 속을 시원히 풀어준 책이 한 권 등장했으니, 바로 임용한 소장님의 “병자호란”이다. 심지어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라니. 나는 역사를 잘 모르지만, 알고 싶어 좋아하는 역덕으로서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임용한 소장님의 토크멘터리 전쟁사가 얼마나 재미있던가. 원래도 불구경, 싸움 구경이 재미있다지만 전쟁 구경에 비할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프로그램 아니었나. 그런 사람의 “시간순삭전쟁사”라니. 

 

세종이었다면 일단 밤새도록 고민하면서 대신들을 불러모으고 해결책이 안 나오면 전체 관료회의라도 열어 답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조는 아무 말 없이 바로 비변사에 안건을 넘겼다. 그래도 노련한 비변사 대신들은 묘수를 찾아냈다. 묘수라기보다는 꼼수였다. “성문과 몇 군데를 수리하는 척합시다.” (P.95)

 

그 순간 인조는 본성을 드러내고 만다. “내 할 일은 이미 다했다. 이제부터는 경들의 몫이다.” (P.204) 

 

개인적으로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가 “열린 눈과 귀”라는 생각을 해본다. 모두가 완벽할 수 없으므로 적재적소에 알맞은 인재를 두기 위해 열린 눈으로 보고, 올바른 말을 듣는 열린 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조 본인도 장님에 귀머거리였고, 대신들은 그런 인조에게 선글라스와 이어폰을 끼워주는 이들이 아니었나 싶다. 저자가 책을 너무 재미있게 쓴 탓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책을 읽다가 여러 번 책장을 덮어야 했다. 분통이 터져서였다. 배낭도 메지 못할 양반님들에게 둘러싸여 그저 “나는 몰라”는 식의 정치를 했다. 요즈음처럼 총칼이 아닌 지식과 경제로 전쟁을 하는 시대에 인조처럼 정치한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모든 것을 빼앗긴 빈껍데기가 될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총칼을 든 적에게도 대응하지 않는 리더가 보이지도 않는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을까. 인조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열린 눈으로 위기를 바라보고, 그 위기에 대한 바른 조언을 듣는 귀를 가진 리더만이 여러 위기에 노출된 지금 시기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가장 많은 책임을 져야 했을 인조는 자신의 왕위를 유지했고, 싸움을 회피하여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잃게 한 김자점은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니 이어진 조선의 치욕과 멸망은 당연한 순서는 아니었나. 

 

군대가 있어도 적을 막을 수 없다면 그것은 군대가 아니라는 저자의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선명했다. 학창시절부터 품어온 궁금증도 다 풀었고,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궁금했던 거의 모든 것을 다 해결했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이 얻었다. 그런데 사실은 잘 몰랐을 때보다 마음이 더 착잡하다. 아마 그것은 우민이 아주 조금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간다는 뜻이겠지. 

 

이 책을 한 번 더 읽을 예정이다. 한 번만 읽고 덮어버리기에는 이 책이 품은 이야기가 너무 크다. 그러나 이 품은 이야기들을 더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제 바닥을 딛고 다시 올라야 할 우리의 내일이 담겨있으니 말이다.

 

 

 

 

 

*본 도서는 레드리버출판사에서 지원 받았으며, 리뷰는 전적으로 제 생각을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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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어떤 내용은 방송보다 자세하게 어떤 내용은 방송보다 생략 평점10점 | YES마니아 : 골드 g****k | 2022.03.09 리뷰제목
원래 임용한 박사님과 토크멘터리 전쟁사 팬이라서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책을 받아보니 첫 느낌은 책의 사이즈가 의외로 작아서 가지고 다니기가 편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카페에서 책을 읽기에 엄청 편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을 이야기 하자면 어떤 내용은 방송과 그대로, 방송보다 더 자세하게 나왔지만 어떤 내용은 방송보다 생략을 하거나 간소하게 쓴 내용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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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임용한 박사님과 토크멘터리 전쟁사 팬이라서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책을 받아보니 첫 느낌은 책의 사이즈가 의외로 작아서 가지고 다니기가 편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카페에서 책을 읽기에 엄청 편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을 이야기 하자면 어떤 내용은 방송과 그대로, 방송보다 더 자세하게 나왔지만 어떤 내용은 방송보다 생략을 하거나 간소하게 쓴 내용이 있다. 먼저 사르후 전투 전에 명의 파병요청에 대한 이유를 방송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었지만, 책에서는 그냥 파병요청을 받아들였다라고 간단하게 작성 되었다. 두번째로 청이 조선을 노리는 이유를 방송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었지만, 이 책에서는 누르하치의 세번째 전략은 남쪽의 조선을 견제하는거다라고 간결하게 작성 되었다.

 방송보다 더 자세하게 다룬 내용도 있었는데, 바로 협수사와 독전어사를 처음 책에서 보았고 의주성과 백마산성이야기를 책에서 처음 보았다. 남한산성과 쌍령전투는 책이 방송보다 더 자세하게 다루었다. 

이 책이 만족스러운건 현대인들이 오해하는 명,청교체기 때 일어난 사건들을 풀어주었다는게 의미가 크다. 특히 강홍립 밀지설과 쌍령전투 병력수설이다.(결론부터 말하자면 허무맹랑한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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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로 만나는 병자호란의 모든 것 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l****5 | 2022.03.03 리뷰제목
국방TV에서 핫했던 토크멘터리 전쟁사(토전사)로 유명한 역사학자 임용한 저자. 이제는 시간순삭 전쟁사 시리즈로 책으로 만나봅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도 병자호란을 다뤘지만 방송시간상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들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입에 차마 담기 힘든 치욕의 전쟁 병자호란. 영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의 혀로 싸우는 대립 장면이 무척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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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TV에서 핫했던 토크멘터리 전쟁사(토전사)로 유명한 역사학자 임용한 저자. 이제는 시간순삭 전쟁사 시리즈로 책으로 만나봅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도 병자호란을 다뤘지만 방송시간상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들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입에 차마 담기 힘든 치욕의 전쟁 병자호란. 영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의 혀로 싸우는 대립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는데요, 그 장면을 조선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역사적 현장에 직접 있는듯한 생동감 넘치는 스토리텔링으로 접하니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를 읽으면 병자호란과 관련해서는 초보 수준을 벗어날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외교 전쟁 시대인 오늘날에도 일상에 스며든 은근한 전쟁은 이어집니다.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짚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그 큰 고통을 받았음에도 조선은 무참히 패망하는 전쟁에 휩싸입니다. 치욕의 역사이자 우리 역사상 가장 교훈이 풍부한 사례가 된 병자호란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동안 북쪽에서도 치열한 전장이 펼쳐집니다. 여러 여진족 중 추장이었던 누르하치는 나머지 부족들을 격파, 합병하며 세력을 확장합니다. 중국통 허균은 일찌감치 누르하치의 침공을 경고하지만, 오랑캐일 뿐이라며 안이한 태도를 일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강한 군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진과 몽골의 기병에는 속수무책인 조선의 현실임에도 임진왜란을 겪고도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조선입니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가짜뉴스가 등장합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의 전쟁에 조선군을 파병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는데, 패전한 전투를 두고 광해군에게 책임을 돌린 사건이 벌어집니다. 일부러 패하게 했다는 밀지론은 70~80년대까지 학계 정설로 여겨질 정도로 음모론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에게는 명과의 전쟁에서 이겨 중원으로 뜻을 펼치는 게 더 중요했지 조선은 당장 시급한 문제가 아닐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후계자가 된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주장한 인물입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조선의 정권이 바뀐 시대. 인조는 대놓고 친명정책을 펼쳤고, 결국 후금의 침공이 시작됩니다. 정묘호란입니다. 믿었던 의주에서부터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후금에게 조선은 고개를 숙입니다.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된다는 동맹의식이 거행됩니다.

 

정묘호란으로 드러난 조선의 문제점들은 어떻게 개선되었을까요. 허물어진 성은 수 년 간 방치되었고 북쪽을 실질적으로 포기하는 형상을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노선을 든든히 세운 것도 아닙니다. 그 사이에 후금은 착착 준비를 합니다.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홍타이지는 황제가 됩니다. 본격적인 조선 침공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폭풍전야인데도 조선은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청군이 침공했다는 임경업의 전갈은 3일이나 지난 후 창경궁에 도착했고, 청군 기병의 속도는 파죽지세입니다. 청은 북쪽에서부터 차근차근 부수며 내려오지 않고, 선봉대가 한성으로 무조건 직진하는 전략을 펼쳐 보인 겁니다.

 

부랴부랴 피란을 가려 하지만 오전 일찍 강화로 길을 나선 세자와 왕실, 대신들을 제외하고 인조는 오후가 되어서야 궁을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청군 선봉대는 강화로 가는 도로를 차단한 상태가 되어버리니 인조 일행은 결국 남한산성으로 가게 됩니다. 청군의 침공 의도조차 사실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전란을 두 번이나 겪고도, 수십 년간 전쟁 준비를 말로만 해온 조선의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남한산성에서 이어지는 탁상공론은 더 기가 찹니다. 반정공신들로 이뤄진 신하 앞에서 인조는 리더임에도 책임을 회피하는 데만 치중합니다. 척화파와 주화파 모두 만족시키려 했고, 그러다 보니 중증 결정장애 모습만 번번이 보입니다. <병자호란 :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는 광해군과 인조를 통해 리더의 덕목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정묘호란에서부터 병자호란까지 조선은 과거에서 배운 게 분명 있었을 텐데도 실행한 게 없어 속빈 강정과 같았습니다. 전 과정에서 기막힌 참사가 속출합니다. 양반이라 옷 한 벌 든 배낭 못 멘다며, 말고삐를 잡아줄 하인이 없다며 길을 나서지 못해 발이 묶이질 않나. 긴박하게 이뤄져야 할 실질적인 전략은 도통 이끌어내지 못한 채 아마추어 제갈량들만 수두룩할 뿐. 군사작전에 정치 개입은 가뿐하게 기본 옵션인 그들의 행태가 못 봐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더 씁쓸한 병자호란입니다. 그 와중에도 조선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채 끝까지 애쓴 이들이 있었으니까요.

 

한국사 교과서와 영화에서 단 몇 줄, 일부 장면만으로 단편적으로만 알았던 인조반정,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소현세자와 인조의 관계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들. 역사적 배경과 사건의 진상, 시사점을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병자호란> 편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밀리터리 전문 출판사 레드리버의 책인 만큼 전쟁사 인포그래픽 자료가 빠질 수 없습니다.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세력 관계, 병력 및 물자 수치를 나타낸 자료, 병자호란 주차별 지도 등 한눈에 정리된 인포그래픽이 만족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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