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부분은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는 짓이 매사에 마음에 들지 않고 설사 그들이 정당한 일을 하더라도 삐딱한 생각이 든다. 우리의 시선이기는 하지만 한없이 옹졸하고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그들을 보면 도대체 일본인들의 생각은 왜 그럴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이 책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은 심리학의 눈으로 두 나라를 비교하고 있다. 자신을 토종 문화심리학자라고 소개하는 저자는 지금까지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2019년 일본의 무역제재를 별 어려움 없이 넘기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며 그 근저에 문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동안 일본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있었지만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하며 두 나라의 문화를 가지고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의 차이 및 문화적 성격, 한국인과 일본인의 민족심리와 본질적인 심층심리를 통하여 두 나라를 비교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말하는 비교가 두 나라 혹은 민족 사이의 장단점 비교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욕구에 대한 대처방식의 비교라고 말한다. 문화란 특정집단의 사람들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 온 것으로 사회의 유지와 존속을 위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좋다 나쁘다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크게 보편성, 상대성, 개별성의 세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보편성이란 인간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의 유사성을 말하고, 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성을 띠게 되는 것은 상대성이다. 또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것은 개별성 때문이다. 당연히 동일한 문화라 할지라도 개별성을 띠게 된다. 그렇게 볼 때 문화의 차이란 개인의 차이가 아닌 문화유형의 차이임을 생각하고 비교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먼저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먹방과 야동은 들고 있다. 일본의 성산업은 지리적 특성과 성비불균형 등으로 인해 잘 발달되어 있지만 그것이 일본인의 실제 성생활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고 한다. 2018년 한 기업이 조사한 성생활 만족도 조사에서 일본은 조사대상 18개국 중 꼴찌였고, 한국은 그 바로 앞 17위였다. 그럼에도 성산업이 일본에서 발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에서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교류하고 싶은 욕구가 성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내부와 외부, 자신과 타인,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기 좋아하는 그들은 타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엿보기 욕구가 야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인에게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는 중요한 상징은 밥이라고 한다. 즉 밥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고 또 느껴왔지만, 사회가 변화하면서 같이 밥 먹을 시간 자체가 없어지자 그 욕구를 대체한 것이 먹방이라는 것이다. 밥과 성은 모두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타인과 교류하고 싶다는 욕구가 경계를 긋기 좋아하는 일본인은 엿보기(야동)로, 사회가 변화하면서 관계에 목마름을 느낀 한국인은 실시간 댓글창이 달린 먹방의 시청으로 나타났다고 저자는 비교분석한다.
그런가하면 문화의 성격은 양면적이고 모순되는 측면이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각기 서로 다른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나름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기에 불필요하고 역기능적인 것도 많다. 문화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기능적인 문화가 존재하는 이유 역시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해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강조한다. 주류심리학인 비교문화심리학의 관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에는 차이가 존재하는데 자신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하는 관점이 그것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주체성 자기’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대상성 자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한국인은 적극적이고 감정표현이 많으며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으나, 일본인은 예의바르지만 조용하고 소극적이며 혼네(本音,본심)와 다테마에(建前,겉마음)로 표현하듯 경계에 뚜렷한 선을 긋는다. 한국인이 말하는 정(情)의 특성은 주관성으로 상대방에 대해 내가 갖는 감정이지만, 일본인의 아마에(甘え,응석/어리광)는 수동적 대상애로 상대방이 자신에게 주는 애정을 받으려는 감정이다. 그래서 오지랖과 메이와쿠(迷惑,민폐), 즉 한국인은 당연하게 선을 넘지만 일본인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사이에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저자는 밖으로 드러나는 현상들 너머 한 꺼풀 더 들어가야 하는 민족심리학 관점에서 한국과 일본을 비교한다. 대표적인 것이 귀신문화이다. 문화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과 두려움이 투사되어 있다. 귀신 역시 사람들의 욕망과 두려움이 투영된 결과이다. 한국의 귀신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나타나며 억울함이 해소되면 사라지지만, 일본 귀신은 원래부터 그곳에 있다고 한다. 자신의 영역이 있고 영역을 침범하면 공격의 대상이 되고 표적이 되면 큰 화를 입는다. 한국인은 현세의 삶에 관심을 갖지만 일본인은 죽은 다음의 안위에 관심을 갖고, 한국인은 내 마음이 편해야 좋지만 일본인은 정해진 외적기준을 따를 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또 한국인의 부끄러움은 남들이 아닌 대상 즉 하늘이나 부모, 조상, 후손에게 느끼는 것이고 혐오는 특정집단에 대한 차별과 멸시라기보다는 분노의 표출이라는 성격이 강하지만, 일본인은 온(恩,은혜)을 입고도 갚지 못하는 경우 하지(はじ,수치심)를 느끼며 자신이 속한 내적집단이 수치심을 느낄 때 다른 집단을 차별하고 혐오함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러한 차이를 저자는 한국인의 어울림과 일본인의 와(和)로 설명한다. 어울림이 개별성과 전체성이 공존하는 것이라면 와는 전체가 우선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한국인과 일본인, 두 나라 사람들의 본질적인 이야기인 심층심리를 살펴본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는 어떤 하나의 기준 즉 경계에서 갈라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와 남,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기준이 그것이다. 한류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북치고 춤추며 노래하는 사람들이란 한국문화와 한국인들이 가진 특성이 한몫 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 기저에 흐르는 것은 흥과 신명이며 이것은 힘들고 억울한 일 많은 민초들이 삶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끌어올리던 긍정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인들이 빈집에 돌아와서도 인사를 하는 것은 집이란 바깥과 안을 구분하는 내 경계 안쪽의 세계이기 때문이며 필살기에 집착하는 것 역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은 자기주관성이 강하지만 일본인은 나카마(なかま,동료/패)라는 말이 보여주듯 전체속의 한 개인이라는 의식이 두 나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아왔다. 그럼에도 아마 가장 먼 사이가 아닐까 싶다. 역사적인 사실을 부정하며 도발하는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상종할 수 없는 나라라고 못박는다. 반면에 그들은 과거에 형성된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더 이상 만만치 않은 우리를 보며 다급함과 불안한 속마음이 혐한으로 나타나는 것 일게다. 저자의 두 나라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럼에도 머리는 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들지만 가슴은 도무지 상종할 수 없는 나라/사람들이란 생각이 그대로이다. 언제쯤 생각이 바뀌려나..
자신들이 아는 범위 안에서 머무르는 한,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도 자아의 확장도 요원한 일일 겁니다. 벽 밖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그들은 무작정 나를 죽이려는 존재가 아니며 그들과 함께 얼마든지 어울려 지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찾게 되는 날이 있을까요. (p.345)
이 문단으로 리뷰를 시작함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보며 늘 단절, 철벽 등의 단어를 느껴왔는데 그것이 막연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 민족적, 문화적 등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문단을 읽은 후에야 '선을 긋는 일본인'이라는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작년, 한 책을 읽고 “우리 깊숙이 들어있는 공통의 감정 중, 반일 혹은 혐일 감정은 아마 그리 낯선 일이 아닐 것이다. -@책과함께 #한국과일본은왜 의 리뷰 참조-” 라고 썼다. 리뷰 끝에 “이 한 권으로 모두의 사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했듯, 지금도 한국과 일본은 평행선을 걷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과거에는 미움으로 등 돌린 평행선이었다면, 요즘은 너는 너, 나는 나. 같은 느낌이랄까. 일본의 참혹함을 겪은 세대들이 팔순이 되어 미움도 사그라든 것인지, 우리나라의 분골쇄신 덕분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과거의 미움보다는 새로운 무엇인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자리에 채워야 할 것은 묵은 감정이 아니라, 올바른 마침표와 선한 경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큰 의미가 있다. 지피지기를 제대로 실천한 책이다. 이 책에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가득 들어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교”가 아니라, “이해” 관점이다. 특히나 좋았던 점은, 단순한 현상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대중심리, 민족심리 등을 반영하여 그것이 끼치는 영향과 결과를 자세히 분석해냈다. 단순히 '먹방의 나라'와 '야동의 나라'를 비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심리에서, 어떤 욕구에서 기인했는지를 제대로 풀어냈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피드백하며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는 것.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사회적 교류의 방법입니다. 각자의 영역에 선을 긋고 그 안으로 침범하는 것을 꺼리는 일본인들과는 다른 방식이죠. (p.25)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상대방을 위한 또 다른 모습을 내세우는 일본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비교적)솔직하게 드러내는 한국인. 이러한 차이는 한국과 일본의 '나와 타인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p.107)
한국과 일본을 이야기하는 책 중,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가장 쉽다는 생각을 했다. 문화와 유행, 그 요소들이 일상적이어서였을까. 재미있게 작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가 정신을 차릴 때쯤 되면, 냉철한 어퍼컷 한 방에 얼얼해진다. 이런 사람들이 강의하면 일타강사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재미있는 주제를 미끼로 던지고, 핵심으로 낚아채는 기술이라니.
그야말로 백전백승의 문장력이다.
작가가 이 책이 무심히 보아온 문화적 요소들에 숨어 있는 두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회. (p.99)가 되기를 바랐듯,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이 꽤 감정적이었고, 그들을 다소 곡해해왔음을 깨달았다. 물론 모든 독자의 깨달음은 다를 테고, 때때로 어떤 사례는 들은 불편할지도 모른다. 작가 역시 “뭔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것이 '옳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거나 나도 그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문화가 옳고 무엇을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독자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p.189)”라고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차이를 아는 것 아닐까. 너와 내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이해하는 것 아닐까. 그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그 가치를 다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일 문화의 맥을, 심리적 차이를 정확하게 짚어낸 책이다.
'지피지기'는 작가가 도와주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백전불패'를 할지, '이해와 발전'일지 결정하는 것 역시 각자 몫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나아감을 위해 후자인 편이 좋겠지만 말이다.
훌륭한 읽기였다.
겨울방학이 되면서 조카는 그동안 끊고 지내다시피 하던 만화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조카의 어깨너머로 '원피스'를 함께 보면서, 루피는 왜 그렇게 동료들을 모으며 해적왕이 되려고 하는 건지 궁금했고, 도저히 쓰러질 것 같지 않을 도플라밍고와 싸우면서 자신의 필살기를 업그레이드하는 루피를 신기해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소싯적에 즐겨보던 드래곤볼도 손오공의 필살기는 회를 거듭할수록 강해졌고 적들의 레벨도 더 높아져만 갔다. 내가 일본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소년 만화영화(강백호,김전일,라이토,코난 이 자식들 잘 살고 있냐ㅋ)와 러브레터, 아무도 모른다 등의 영화가 전부이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가면라이더 시리즈에 푹 빠졌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이라는 책을 발견했을 때, 일상적인 호기심이 발동해서 서평단 신청을 했고 감사하게도 서평단 선정이 되었다.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의 저자인 문화심리학자 한민 선생은 이 책을 통해 거듭거듭 밝힌다. 문화는 커다란 코끼리와 같아서 한 단면만 보고서 모든 것을 일반화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개인이 느끼는 한 나라의 문화는 마치 코끼리에 붙어 있는 개미가 느끼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코끼리의 코에 붙어 있는 개미가 코끼리가 거대한 뱀이라고 느끼거나, 항문 근처에만 머물러 있던 개미는 코끼리가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큰 구멍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처럼 개인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이들과 교류하며 지내기 때문에 자신이 들은 것이라 해도 충분히 편향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것들이 쌓이면 어떠한 문화에 대해 고정관념과 편견이 생기게 된다. 내 경험이나 내가 아는 사람의 경험은 문화 전체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과 같은 책이 왜 필요한 거냐? 고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시원하게 답을 드리자면 이 책은 코끼리 전체를 보는 방법 즉, 문화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려준다. 문화 전체를 이해하는 방법은 문화의 기능에 주목하는 것이다. 문화의 기능이란 그 문화가 일어나는 이유와 그 이유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조사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근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스.우.파를 통해 센 언니가 주목받는 사회적 배경을 유추해 본다. 그에 더해 수다의 최고 재미는 비교가 아니겠는가. 한국 스우파의 센 언니에 대한 비교 대상은 일본의 귀여운 소녀들이다. 한국의 센 언니가 나타나게 된 배경은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일본의 귀여운 소녀들의 등장 이유는 여성이 약자라는 그들의 인식 때문인데 강자와 약자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에도 막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일본은 오이디푸스 신화의 부친 살해가 일어나지 않은 얼마 안 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각 나라마다 근대의 시작점에 부친 살해에 해당하는 기존의 지배세력을 전복시키고 과거의 질서와 권위를 거부하는 단계가 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의 시작을 알린 것이 기존의 지배계급이었고, 2차 세계대전 후 미 군정에 의해 사회 개혁이 이루어질 때에도 천황을 비롯한 기존의 권위는 그대로 유지됨으로 근대 이후 한 번도 기존의 권위를 타파하고 새 질서를 구축한 적이 없었다.
한국의 경우는 타인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한 경우이다. 일본에 의한 강제 합병 이후 기존의 권위와 질서는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근대 이후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무력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진 자녀들은 새로운 아버지가 등장할 때마다 부당하게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을 물리치고, 자신이 주체로 서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지배세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고, 새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다 커서도 아버지의 권위에 의존하는 옆집 자식들은 자신의 앞날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의지를 갖기 힘들지 않을까. 스스로 바꾸어야 할 갈등이나 문제를 만나면 아버지의 등 뒤에 숨거나 자신의 내적 세계(히키코모리) 혹은 이세계(일본에서 인기몰이 중인 장르, 주인공이 갑자기 다른 세상에 떨어져 영웅이 된다)로 들어가 버리지는 않을지 심히 걱정된다. 이러한 걱정을 하고 있는 나는 이미 선을 넘는 한국인 오지라퍼이다.
책 속의 내용을 맹신해서는 안 되겠지만,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다. 한국의 대인 관계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가 '오지랖'인 것도 그랬다. 최근, 선을 넘는 오지랖의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지만 긍정적인 부면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옛이야기 '은혜 갚은 까치'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까치를 살려준 조상님으로부터 2001년 일본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목숨을 잃은 이수현님,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치지 못하고 구호 활동을 하시는 분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청소년에게 술 담배를 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어르신들이 계신다. 이러한 오지랖은 더 크게는 IMF 금 모으기, 태안 유조선 사고 수습, 코로나 사태에 의료인들의 자발적인 희생으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비교 대상인 일본은 어떨까. 선을 긋는 일본인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민폐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동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5년 이슬람 무장 테러 단체 IS에 납치되어 살해당한 기자의 부모가 "제 자식 문제로 민폐를 끼쳐 죄송하다"라는 인터뷰가 그 증거로 언급되는데 나 역시도 그 인터뷰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입장이 된 적은 없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민폐를 끼쳐 죄송한 것이 자녀의 죽음보다 더 중한 일본인(아마, 모든 일본인이 그렇지는 않겠지..)도 선을 넘는 경우가 몇 가지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탈아입구脫亞入歐' 사상인데,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주장으로 아시아 나라들은 미개하여 같이 지내봤자 득 될 것이 없으니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함께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유럽과 함께 하고자 했던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세계를 분할 지배하겠다는 망상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했음에도 '탈아입구'사상은 일본의 대외 인식에 여전히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 사상은 일본의 문화콘텐츠에도 영향을 미쳐 들장미소녀캔디, 베르사유의 장미, 건담, 진격의 거인(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하울의 성'도 마찬가지일듯.)까지 유럽인의 외모를 하고 유럽인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들은 일본인 그대로의 행동을 한다. 그것은 아마도 일본인들이 바라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가하면, 선을 넘는 것을 주제로 하는 일본 만화영화도 있다. '원피스'의 해적들은 전설의 보물을 찾아서 그랜드라인을 넘어 신세계로 항해한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유럽인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동경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선을 넘은 '원피스'의 해적들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벽을 찾는데 망망대해에서 그들을 보호해 줄 벽은 다름 아닌 '나카마'이다. 나카마란 일본 특유의 소집단 문화로 우리말로 옮기자면 '동료'가 될 것이다. 바다 괴물과 싸우다 팔 하나 잘려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샹크스는 나카마를 위해 무엇이든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너 내 동료가 돼라!'하고 외치는 루피는 자신의 목숨엔 아랑곳없이 나카마에게 무서울 정도로 잘해준다.(집착한다!) 이 책에서는 원피스를 예로 들었지만 내가 보기엔 또 다른 만화영화 '나루토'를 관통하는 주제도 나카마의 중요성이다. 나루토는 나카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사스케는 나카마와의 유대를 끊으려 하기 때문에 빌런으로 취급받는다.
생각의 흐름대로 서평을 작성하다 보니 글이 길어졌는데, 자정까지의 기한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책을 통해서 내가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 예를 들면 서두에 언급했던 일본 만화 주인공의 필살기는 왜 계속 업그레이드되는지, 일본에는 왜 변신물이 많은지에 대해서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문화적 이해에서도 통하는 불변의 법칙인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앞으로 일본 문화를 접하면서 '이게 뭐지?'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때 이 책의 내용을 한 번 더 떠올리게 될 것만 같다.
뿐만아니라 한국인 특유의 정, 드립 문화, 신명, 찢었다라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도 함께 얻었다. 부정적으로만 여겼던 한국인의 오지랖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낼 수 있도록 더 큰 이해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겠다는 결심도 굳혔다. 아마도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의 저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이 책은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건설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길잡이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소개
▷ 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 한 민
▷ 부키
▷ 2022년 01월 20일
▷ 396쪽 ∥ 500g ∥ 140*210*30mm
▷ 일본문화
P.17 「먹방의 나라 한국 vs 야동의 나라 일본」 “야동과 먹방은 일본과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입니다. 그리고 그 둘의 공통점은 포르노…….라는 점이죠. 《중략》 먹방은 아프리카 TV, 유튜브 등 1인 미디어의 등장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현상입니다. 먹방은 외국에서 food porn이라 불리고 있는데요. 섹스나 식사나 인간의 원초적 행위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포르노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입니다. 《중략》 일본을 일컫는 말 중에 ‘성진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의 선진국이라는 뜻이죠. 사실 일본의 성 문화는 그 섬세함과 적나라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책의 처음부터 왜 먹방과 야동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는지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적나라한 야동이라고 하면 유럽과 북미가 압도적으로 수위가 높다. 일본의 야동은 한국의 애로 비디오처럼 연기에 가깝다. 일본은 일찍이 서구에 대한 빠른 개방으로 기초과학, 문학, 기술, 법률 등이 매우 잘 구축되어있다. 성에 대한 개방의 정도는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유교적인 성 개념과 서구적인 성 개념 중 어느 것이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즈음 텔레비전의 채널은 수백 개가 넘는데, 채널을 돌리면 10개 중 4~5개는 다음과 같다. 음식이나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다. 한국은 먹는 프로그램과 트로트에 끓고 있다. 먹방은 ‘미식’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음식이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위 말이다. 음식에 대한 가장 하위의 욕구는 배를 채우는 것이고, 이 수준이 만족하면 점점 맛을 찾게 된다. 한국이 1인당 GDP를 2만 달러 돌파의 시기가 2007년이고, 일본은 1989년에 2만 달러를 돌파했다. 40년 가까이 세계 경제 2위 국으로서 일본은 이미 다 경험해 본 일이라 생각한다.
P.128 「선을 넘는 한국인 vs 선을 긋는 일본인」 “한국인 대인 관계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단연 ‘오지랖’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절 때마다 취준생들을 괴롭히는 친척들의 오지랖이 먼저 떠오릅니다. 《중략》 그러나 한국인들의 오지랖이 부정적인 편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지언정 중생들의 목숨을 구하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왔습니다.” “일본은 어떨까요? 일본인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습니다. 첫째, 민폐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동기에서입니다. 즉 ‘조용하고 깨끗하고 질서 잘 지키는 일본’이 작동하는 원리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둘째, ‘온가에시’라 하여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데요. 은혜를 입고도 갚지 않으면 이는 온을 입힌 상대와 사회에 엄청난 민폐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밥 한번 먹자’는 오지랖 적인 사고의 핵심이다. 유독 빚보증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은 곳이 한국인이기도 하다. 반면에 불필요한 일에 서로 참견하지 않고,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는 일본식의 대인 관계를 깔끔하고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정치적인 부분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국은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적이 있다. ‘촛불혁명’이라 불리는 비폭력 혁명이다. 국민은 무장하지 않았고, 의회는 탄핵을 발의했고, 사법부는 탄핵을 가결한 민주주의의 정수를 보여줬다. 이게 한국인 오지랖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신천지를 비롯한 각종 종교적 비리와 정치인과 공공기관의 조직적인 비리는 오지랖의 나쁜 예라 하겠다. 혁명이 필요할 때가 있고, 질서가 필요할 때가 있다. 한국식의 ‘오지랖’도 일본식의 ‘온가에시’도 둘 다 매력적이다. MZ세대는 이 둘을 잘 조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종의(악기) 나라 vs 칼의 나라” 에필로그 마지막에 나오는 작가의 생각이다. 한국인이 썼으니 ‘국뽕’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이젠 BTS가 나올 때마다 조금은 부끄러워진다. 문화적 자격지심이 얼마나 심각하면, 온갖 단어 앞에 K를 붙일까 하고 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책의 소재는 재미있고 51%는 동감하거나 공감이 간다. 하지만 일본을 이해하기는 49%가 부족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