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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프랑스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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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구매 누구나 서로에게 이방인이다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이달의 사락 k****t | 2022.03.25 리뷰제목
중딩 1, 2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물론 다른 역자의 책이었지만. 지금까지 본서의 역자가 이야기하는 그런 번역상의 오류들이 있다는 것은 인식도 못했다. [이방인]은 내겐 그저 짧은 잔상 같은 이미지 몇 개로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장례. 태양. 그날 이후 언젠가의 총격 살인. 오해 받는 재판정. 사형 판결 ... 이 몇가지 이미지가 내겐 [이방인]에 대한 인상
리뷰제목

중딩 1, 2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물론 다른 역자의 책이었지만. 지금까지 본서의 역자가 이야기하는 그런 번역상의 오류들이 있다는 것은 인식도 못했다. [이방인]은 내겐 그저 짧은 잔상 같은 이미지 몇 개로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장례. 태양. 그날 이후 언젠가의 총격 살인. 오해 받는 재판정. 사형 판결 ... 이 몇가지 이미지가 내겐 [이방인]에 대한 인상의 전부였다. 딱히 그에 따른 감상이랄 것도 없었다. 단지 막연히 부조리한 판결이고 한 인간에 대한 깊이 없는 판단이었다는 해석이 당시의 내 감상의 전부였을 뿐이다. 막연히 뫼르소의 정서가 메말라 있었다고 느끼던 것과는 이번 독서로 다른 감상을 갖게 되었다.

 

청소년기의 감상과는 다르게 자칭 청년인 중년이 된 지금의 독서로는 뫼르소는 메마른 인간이었다 거나 뭔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했었기에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과는 다른 감상이 일었다. 

 

[이방인]을 통해 사형을 판결 받은 것은 뫼르소만이 아니고 나 자신까지 였다. 세상의 많은 '나'가 이 소설을 읽으며 사형을 판결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방인은 결코 뫼르소만이 아니라 이 시대에 많은 '나'들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과장된 생각을 품게 된다.

나는 반대로 모든 것이 단순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가 사형받는 이유는 '나'가 결국 타자에게 있어 미지의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방인이었다. 병자를 치료하며 사랑을 말하고 겉옷을 원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며 동행하라던 그가, 칼을 주러왔다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하며 폭력을 행사하기도 마다하지 않던 바로 그였다. 그는 대중에게 단정지을 수 없는, 정형화할 수 없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천국을 말하다가 종말의 시기를 말하면서 너희 세대 안에 그날이 닥칠 거라던 것도 그다. 어느 모로 보나 그 시대 사람들과 지도층들이 불안해 하기에는 충분했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과 어울리던 그였지만 정작 대중들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너희는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살리겠느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대중은 망설이지 않고 도둑인 바라바를 선택했다.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것들이었다. 그는 미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은 나름 신중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있어 이방인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방인들이 우리 시대에는 무수히 흩어져 있지 않나 싶다. 대중은 또 손쉽게 사형을 판결할 것이다.

 

어떻게 나는 사형 집행보다 더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요컨대 그것만이 한 인간이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할 유일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우리는 사형 판결을 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보다 늦게 그런 판결을 받는 사람들을 뫼르소가 느꼈듯, 특권을 지닌 것으로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이들은 심각한 고문 휴유증에 시달릴 것이다.

 

"... ... 그런데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러이러하다.'이네.

우리가 이곳에 끌고 온 사람 가운데 우리에게 끝까지 맞선 자는 아무도 없었네.

모두 깨끗이 치료되었네. ... ...

난 그들이 점점 약해져서 흐느끼며 바닥을 기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네.

그것은 고통이나 공포로 인해 흘린 게 아니라 진정으로 참회하며 흘린 눈물이었네.

심문이 끝났을 때 그들은 단지 인간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지"

 

[1984] 중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을 고문하며 한 이 말처럼 대중의 대다수는 끝내 깊은 고문 속에서 인간의 껍데기가 되어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에 사형 판결을 일찍이 받을 수밖에는 없다. 사형 판결을 받는 이들 역시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도 뫼르소도 진정 그들을 이해한 이들로 부터 사형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사형을 판결하고 교화시키려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오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무엇보다 판결을 하고 교화를 하려는 어느 누구도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이 소송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전부 사실이면서 사실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뫼르소의 변호인에 변론 중에서

 

사람들은 사실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눈에 담기는 것은 오해 이상인 것이 없다. 2+2가 5가 되는 현실에 익숙해져 버린 이들에게는 2+2는 5뿐만이 아니라 1도 2도 3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사실을 판별할 의지를 잃어간다. 그러니 자연히 자유는 구속도 억압도 되고마는 것이다. 서로가 이렇다는 것을 분별하고나면 누구나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고 서로에게 사형을 판결하고야 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악순환은 영원히 지속될수도 있다. [1984]에서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했던 말처럼 말이다. 개인에게서도 사회에게서도 영원히...

 

"여기에서 자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걸세"

 

나는 재판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싶지도 않고 어느 사제에게 교화의 대상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오해 아닌 이해를 받고자 애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당당히 이방인이 될 것이다. 그런채 떠날 것이다. 세상에 머물더라도 세상을 떠나있고 싶다. 그러게 이방인임을 떳떳히 밝힐 것이다. 

 

뫼르소에게서 '나'를 찾은이들은 결국엔 자신이 이방인이었음을 언제나 자각하던 이들일 거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깨닫게 된 이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6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6 댓글 4
종이책 이방인 3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s*******4 | 2022.03.08 리뷰제목
<이방인 중간리뷰 3>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다. 그리고 그의 살인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하지만, 재판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내용은 그가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것보다는 왜 그가 그의 엄마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느냐, 엄마를 왜 양로원으로 보냈느냐 등과 같은 엄마와 그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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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중간리뷰 3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다. 그리고 그의 살인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하지만, 재판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내용은 그가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것보다는 왜 그가 그의 엄마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느냐, 엄마를 왜 양로원으로 보냈느냐 등과 같은 엄마와 그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그의 엄마 장레식때도 애도하지 않고 울지도 않는 냉혈안이기 때문에,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의 분노로 인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라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가 엄마 장례식에 가서 제대로 애도를 표하지 않고 울지 않은 것과 그가 아립인을 살해한 것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검사의 주장이나 증인들의 증언 내용, 배심원들 판단을 보면서 왜 그들은 그의 엄마의 장례식과 살인 사건을 연결지으려 하는 것일까. 

그의 말대로 그 재판 속에 뫼르소 자신은 없었다. 그의 동기, 그의 생각, 판단, 감정 등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고 그들 멋대로 판단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저자인 알베르 카뮈도 그런 타자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물론 뫼르소가 그렇게 사람들하고 원만히 어울려 지내고 감정과 생각을 잘 표현하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에게 사형이란 처벌은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거짓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신념을 가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이었다. 자신의 판결에 대해 받아들이고, 그에게 내려진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는 자신이 가진 신념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자기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것이 그가 아립인을 살해한 죄보다 더 중하고 나쁜 죄일까? 카뮈가 한 말이 심금을 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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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완독 서평] 이방인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s*******4 | 2022.03.08 리뷰제목
"새로운 번역과 해석으로 다시 보는 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p. 16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너무나 유명한 문장이다. 이렇게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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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번역과 해석으로 다시 보는 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p. 16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서 너무나 유명한 문장이다. 이렇게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엄마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 죽음에 대한 슬픔, 애도, 비통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양로원에서 온 전보처럼 다소 딱딱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는 양로원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엄마의 관을 마주하게 된다. 관을 열어 어머니 얼굴을 보겠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 라고 말한다. 몇 번을 물어도 그의 대답은 'No'이다. 왜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것일까. 양로원에서 친하게 지냈던 노인들의 밤샘 조문의 모습과 그의 조문은 상당히 비교된다. 자신의 어머니와 친하게 지냈다던 한 여자분의 끊임없는 울음과도 너무도 대조된다. 그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결코 울지 않는다. 너무나 무심한 태도를 보이고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제 3자가 죽은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된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 상상을 하게 된다. '평상시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나?" '원래 그의 성격이 무심하고 냉담한 성격인가?" 뭔가 분명히 다른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왜 주인공 뫼르소가 이런 태도와 행동을 보였는지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그의 무관심하고 냉정한 태도가 그의 인생을 좌우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마 뫼르소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별로 말도 없고 감정 표현도 서툴고 솔직한 그의 행동이 그를 절망과 불행으로 빠뜨리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장례식 이후 전혀 애도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변함없는 일상을 해나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 함께 수영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말이다.그렇게 언제까지나처럼 변함없는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또 한 번의 일요일이 지나갔고, 엄마는 이제 땅속에 묻혔으며, 나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p. 42-

 

그는 장례식 이후 전혀 애도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변함없는 일상을 해나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 함께 수영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말이다.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게 회사에 가서 일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그런 일상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의 주변 이웃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데 뫼르소는 자신의 아파트 이웃인 살라마노 영감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자신의 개에게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하는 개주인인데 나중에 개를 잃어버리고 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진다.

또한 뫼르소는 같은 층에 사는 다른 이웃인 레몽과 친하게 되는데, 동네에서 그는 여자들로 먹고 산다고 한다. 뫼르소는 그와 친하게 지내며 , 이야기도 나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함께 저녁도 먹는다. 거의 친구같이 친하게 지내지만, 이것이 뫼르소의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왜냐하면 레몽은 아랍인들에게 위협을 받고 쫒기고 있는데, 그 일에 뫼르소에 연루가 되게 된다. 왜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 아랍인이 뫼르소 본인 자신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는 끝내 무엇에 홀린 듯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 

이로 인해 뫼르소는 어떻게 될까. 이렇게 그의 불행의 서막은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와도 같은 것이었다.'

-p.86-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다. 그리고 그의 살인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하지만, 재판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내용은 그가 아랍인을 살해했다는 것보다는 왜 그가 그의 엄마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느냐, 엄마를 왜 양로원으로 보냈느냐 등과 같은 엄마와 그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그의 엄마 장레식때도 애도하지 않고 울지도 않는 냉혈안이기 때문에,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의 분노로 인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라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와 친하게 지내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그의 적이 되어서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다. 

 

그런데 그가 엄마 장례식에 가서 제대로 애도를 표하지 않고 울지 않은 것과 그가 아립인을 살해한 것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검사의 주장이나 증인들의 증언 내용, 배심원들 판단을 보면서 왜 그들은 그의 엄마의 장례식과 살인 사건을 연결지으려 하는 것일까. 

그의 말대로 그 재판 속에 뫼르소 자신은 없었다. 그의 동기, 그의 생각, 판단, 감정 등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고 그들 멋대로 판단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뫼르소는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완전히 폭력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괴물로 바뀌게 된다. 그는 결코 시니컬한 성격의 소유자도 냉혈안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거짓말을 못하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못하고 신념을 믿고 사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데 말이다. 

 

그래서 저자인 알베르 카뮈도 그런 타자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물론 뫼르소가 그렇게 사람들하고 원만히 어울려 지내고 감정과 생각을 잘 표현하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에게 사형이란 처벌은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거짓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신념을 가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이었다. 자신의 판결에 대해 받아들이고, 그에게 내려진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는 자신이 가진 신념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은 과연 범죄인 것일까? 그 소신이 그런 시민 윤리와 통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 소신을 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신념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어느 새 부조리한 인물로 낙인 찍히고 마는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알베르 카뮈- 

 

이 책  「이방인」의 역자 이정서씨는 잘못된 번역과 해석으로 인해 원저자인 알베르 카뮈가 표현하고 하는 의미가 왜곡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원전과 번역 사이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 「이방인」의 내용이 잘못 해석되고 전달된 것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출판사 책과 다르게 원전과 가깝게 해석을 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 프랑스어로 쓰여진 이 책 원문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원문과 가깝게 해석해서 그 의미가 왜곡되지 않게 번역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번역과 해석으로 다시 읽어보게 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그래서 그런지 더욱더  「이방인」 의 주인공인 뫼르소의 고뇌와 진심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그는 냉혈안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소시민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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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잘 번역된 고전 문학이 좋은 이유 평점10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z*****6 | 2022.03.22 리뷰제목
영어통역학을 전공한 지 올해로 사 년째다. 사실 통번역학은 그 언어에 얼마나 능숙한지가 관건이라 교육과정에서 이렇다할 번역의 특징이나 기술은 배우지 않았다. 다만 많은 글을 접하고 직접 번역하는 과정에서 글을 보는 눈이 늘었다. 부모님께서 어릴 적 큰 맘 먹고 사주신 세계문학 전집에 손이 가지 않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맥락 없이 끊어지는 문장이나, 번역투 특유의 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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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통역학을 전공한 지 올해로 사 년째다. 사실 통번역학은 그 언어에 얼마나 능숙한지가 관건이라 교육과정에서 이렇다할 번역의 특징이나 기술은 배우지 않았다. 다만 많은 글을 접하고 직접 번역하는 과정에서 글을 보는 눈이 늘었다. 부모님께서 어릴 적 큰 맘 먹고 사주신 세계문학 전집에 손이 가지 않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맥락 없이 끊어지는 문장이나, 번역투 특유의 단조로운 문장들이 글의 몰입에 방해가 됐다. 그래서 이미 익히 들어온 '이방인'이라는 작품이 새롭게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관심이 갔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이번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에 대해 고찰했다. 그리고 이런 평을 내렸다. 아주 잘 번역되었다.

 

물론 나는 아직 학부생이고, 번역학 자체에 대해선 아마추어 수준도 못된다. 어쨌거나 나의 전공은 영어에 중점이 맞춰져 있고, 이 글은 불어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상하고 잘 검열된 평가라기보단 가볍게 얹는 말 정도로 봐주면 좋을 것 같다.

 

1) 오역에 대한 정정

 

새로운 번역에 중점을 둔 책인 만큼 오역에 대해선 확실하게 교정했다. 또, 오역이지만 너무 오래 사용되어 관형어처럼 굳어진 경우엔 우리에게 익숙한 번역을 사용하지만 거기에 대한 역자의 말을 상세히 적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을 읽지 않았어도 나름 책 좀 읽은 사람들은 알 만한 문장이다. 이 구절은 인터넷에 떠도는 '첫 문장이 인상적인 소설' 같은 게시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러나 역자는 이방인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고 알려진 이 구절에 대해 오역이라고 정확히 짚고 있다. 이게 왜 오역인지 우리가 잘 모르는 불어의 원형과 해석을 함께 적어 설득력을 높였다. 독자들의 흐름을 지키기 위해 익숙한 원 번역을 사용하되 오역에 대한 확실한 피드백이 좋았다. 비로소 작품을 제대로 읽는 기분이었다.

 

2) 문장의 흐름을 고려하는 문체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는 듯하면서도 중간중간 번역투가 느껴진다. 아마 대충 읽고서는 이게 왜 매끄러운 문체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한국인이 쓴 문장에 익숙해진 탓이다. 

기존에 읽은 다른 영미 소설들을 떠올려보자. 대부분 이런 흐름이다.

'오늘이 바로 토요일이었다. 사장은 당연히 내가 일요일까지 쉬게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엄마의 장례를 치르지 않고 어제 치른 것은 내 탓이 아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무가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서 사장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적고 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지만 문장이 길어질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말만큼 끝어미가 다양한 언어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 보통의 번역은 정석대로 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문체를 사용한다. 최대한 말을 단조롭게 줄인다. 뉘앙스 전달이 덜 되더라도 오역의 가능성을 낮추려는 목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나 '~터였다.' '~바이다.' '~하리라'와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이 빠진다면 글에 어쩐지 허전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식 어미 처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만일 이 책이 이 번역본을 통해 처음 한국에 나오는 것이라면 한국식으로 어미를 처리한 게 독단적이고 무지한 행동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방인'은 이미 여러 출판사를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딱딱하게 적힌 번역본의 내용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역자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익히 알려진 작품에 대해선 조금 더 가능성을 열어놓고 맛깔나게 읽을 자격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역에 대한 분명한 교정과 매끄럽고 현장감을 살린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원문은 워낙 유명한 책이니 굳이 말을 얹지 않을 생각이다. 실존주의의 대표로 거론되는 이 책은 아직까지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사상에 의거해 결국 인간은 목적을 갖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점과 인간이 죽음을 깨달음으로써 실존을 깨닫는다는 점 등이 여러모로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철학적 사유를 위한 책은 이왕이면 매끄럽고 정확하게 번역된 책이 좋다고 생각한다. 의미 있는 독서를 한 것 같아 기쁘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2 댓글 1
종이책 이방인 2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s*******4 | 2022.03.07 리뷰제목
<이방인 중간리뷰 2>   그는 장례식 이후 전혀 애도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변함없는 일상을 해나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 함께 수영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말이다.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게 회사에 가서 일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그런 일상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의 주변 이웃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데 뫼르소는 자신의 아파트 이웃인 살라마노 영감과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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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중간리뷰 2

 

그는 장례식 이후 전혀 애도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변함없는 일상을 해나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 함께 수영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말이다.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게 회사에 가서 일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그런 일상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의 주변 이웃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데 뫼르소는 자신의 아파트 이웃인 살라마노 영감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자신의 개에게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하는 개주인인데 나중에 개를 잃어버리고 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진다.

또한 뫼르소는 같은 층에 사는 다른 이웃인 레몽과 친하게 되는데, 동네에서 그는 여자들로 먹고 산다고 한다. 뫼르소는 그와 친하게 지내며 , 이야기도 나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함께 저녁도 먹는다. 거의 친구같이 친하게 지내지만, 이것이 뫼르소의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왜냐하면 레몽은 아랍인들에게 위협을 받고 쫒기고 있는데, 그 일에 뫼르소에 연루가 되게 된다. 왜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 아랍인이 뫼르소 본인 자신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는 끝내 무엇에 홀린 듯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 

이로 인해 뫼르소는 어떻게 될까. 이렇게 그의 불행의 서막은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와도 같은 것이었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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