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본업'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아마 '직장인'이라 답할 것이다. 내 대부분의 소득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소득으로 발생하니까. 하지만 나는 가끔 번역을 한다. 내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책이 몇 권 되니까, 적어도 번역에서만큼은 부끄럽지만 '프로'로 일을 한다. 대학생 때부터 여러 단체에서 프리랜서 통번역 일을 했고, 지상파 방송국의 온갖 다큐멘터리에서 취재와 영상번역을 했다. 번역 에이전시에서 수업을 들었고, 덕분에 책이 몇 권 나왔으니, 이 정도면 그래도 '프로 번역가'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전히 '직장인'과는 달리 '번역가'라는 타이틀은 늘 부끄럽다.
번역하는 사람으로서, 책을 보자마자 첫사랑을 보는 것처럼 꽂혀버렸다. 그 자리에서 단숨에 다 읽고, 몇 가지 문장은 너무 시리게 마음에 닿아서 적어두었다가, 다시 생각이 나서 한 챕터, 한 챕터씩 다시 읽었다. 세상에 다양한 '전달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번역의 분야는 훨씬 더 다양했다. 책을 쓴 인터뷰어가 나와 같은 일본어 출판번역자라는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인터뷰를 하는 각각의 번역자들만큼이나 인터뷰어의 글과 문장은 살아 숨쉬었다.
번역, 통역자들은 사실 자기 존재를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늘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의 의미를 매끄럽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지만, 거기에 번역자의 색채와 말투, 문체 등이 묻어나도 될까. 혹은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로지 메시지의 전달에 집중해야 할까. 평생을 업으로 통번역을 한 이들도 매 순간 고민하는 문제일텐데, 역시나 프로들의 생각은 다 비슷했는지, 인터뷰에 응해준 각기 다른 분야의 통번역자들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서, 영화 통번역이나 만화 통번역을 하는 사람들은 문화나 감정을 원작을 살리면서도, 도착어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한다. 이 때 그들은 그저 번역하는 사람, 이 아니라 문화의 가교 그 자체이다. 짧고 한정된 시간과 콘텐츠 안에서 어떻게 언어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는가. 번역 AI가 할 수 없는, 인간의 고도화된 지적 능력과 감성이 극도화되는 순간일 것 같다.
반면 군사 통번역, 법률 통번역을 하는 프로들은 또 완전히 다른 통번역의 세계에 산다. 그녀들의 일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누군가의 삶, 정치를 완전히 뒤바뀌어 놓을 수 있는 무게감이 크다. 감정이 섞여서는 안되고, 최대한의 팩트를 그대로 살리는 일. 그저 말을 기계적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전문용어와 상황을 공부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 그리고 외교적인 상황까지 고려하여 군인으로서 통역하는 일. 읽는 내내 무게감과 긴장감에 내가 다 심장이 뻐근해질 지경이었다. 나도 통번역사라 더 공감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담감을 대체 어떻게 견뎌내는 거지.
음악과 수어 통역은 또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글자와 언어로만 번역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분야를 넓히면 수화 통역도, 악보를 점자로 바꾸는 번역(이런 걸 점역이라고 하는데 처음 알았다. 사회의 마이너한 존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직도 내 관심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실감한다)을 하는 분들의 인터뷰는, 비록 수단과 방법은 다를지언정, 삶과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책을 덮고 나니 번역 말고도 다른 시리즈가 많은지, 다큐, 출판, 영화 등 예술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이 보였다. 다들 형식은 다르지만, 사람들 사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남은 시리즈도 다 읽어보고싶다.
번역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필히 추천하고 싶은 좋은 책.
번역을 하지 않아도 말과 글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번쯤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나는 번역가에 대한 동경이 있다. 외국어 원문을 마치 우리 작가가 쓴 것 마냥 자연스럽게 한글 작품으로 풀어내기까지의 고뇌, 마침내 작품으로 출간되었을 때의 희열, 지식노동임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번역가의 생활. 내가 존경하는 수많은 번역가들은 수입의 불안정을 솔직하게 밝힌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말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왜 이 일을 계속 하느냐고 물으면 모두 한 마음으로 말한다. "번역이 좋아서."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번역을 한다.
<번역하는 마음>의 저자 서라미 작가도 번역가이다. 작가이자 번역가이기도 한 저자는 열 명의 번역가들을 만나 인터뷰하며 그들이 생각하는 번역에 대해 묻는다.
먼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번역을 단순히 출판 번역과 영상 번역 두 가지 종류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번역의 세계는 생각보다 많이 다양했다. 출판번역과 영화번역은 기본이고 청각 장애인을 위한 수어 번역과 한국어- 미얀마어 번역, 법률 통번역, 여자 배구 통역사까지. 통,번역의 세계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책 속에 소개되는 번역의 현장은 현장만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청각 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사의 경우 장애인의 현장을 생각하고 함께 누리기 위해 일정 부분 개입이 필요하다. 그들의 불리한 상황을 단지 통역만으로 그치지 않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함께 하게 된다. 프로그램 하나를 보더라도 청각 장애인이 일반 청인 사람들과 공감을 누리며 볼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면 법률 통번역을 하는 현장은 번역가의 개입을 금한다. 기업간 국제 소송, 외국인 재판 통역 등 자신의 번역이 남의 인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므로 관사 하나 하나에도 민감하며 정확도를 가한다.
그럼에도 공통되는 것이 있다면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통역으로 유명한 샤론 최의 인터뷰이다.
통역이나 번역을 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공감이라고 생각해요.
일단 글쓴이의 의도에 공감하고 글쓴이가 느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다음
그의 무의식까지 파악해야겠죠.
글쓴이에게 공감하지 않고서는
조악한 번역만 가능하니까요.
통,번역하는 대상을 철저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 그래서 이지언 여자 배구 통역사는 GS칼텍스 구단과 함께 생활하며 외국인 선수들이 감독의 코치를 하나라도 정확히 전달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언젠가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안현모 통역사가 통역일정에 나서기 전 해당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며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통역하는 사람은 더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해."
단지 언어만 옮기는 게 아닌 독자에게 원저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역할이라고 말하는 김효근 편집자의 말은 우리에게 번역이 언어만 알면 되는 게 아닌 하나의 세상을 소개하는 엄중한 작업이 수반되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번역이 좋지만 번역으로만 지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출판의 경우 자신이 원하는 기획을 출판사가 채택하는 행운을 100% 기대할 수 없고 출판사의 연락을 받아야만 밥벌이가 생긴다는 불안정도 있다. 때로는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자신의 영역에만 갇혀 있지 않기 위해 김영현 번역가는 자신이 아내와 함께 출판사를 차려 원하는 책을 번역하여 출간하고 정다혜 법률 통역사는 더 나은 통역을 위해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음에도 일반대학원 법학과에서 국제법을 공부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미얀마어 통번역가인 강선우 번역가는 미얀마어 사전의 필요성을 체감하며 스스로 단어들을 모으며 자신만의 작업을 해 나간다. 한가지 일을 열심히 하지만 그 안에서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과연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책 속에 소개된 번역가들은 모두 자신이 최고의 번역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역의 두려움을 안고 최고를 위해 최선을 다해 조심조심 두 언어 사이의 다리를 건넌다. 이들의 마음이 결코 번역가로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열심히 살아가보자고 다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