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맞으러 간 아내를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이 책에 대한 인터뷰의 영상을 뒤에 타고 있던 딸과 함께 시청할 때 였습니다.
올해 3월 안으로 죽을거라는 '시안부 선고' 받은 교수님은 "사람이 죽는 순간일지라도 작가는 그 죽음을 써내려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앞에서 뭔가~ 무너지는 저의 자신을 감출 수 없어 딸이 보는 앞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날 저는 서점을 딸과 가서 이 책을 집어 들고는 마치 애인같이 여기며 한장 한장 읽어내려갔습니다.
저의 인생에는 참다운 스승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국민학교(초등)시절 반 대표로 달리기 계주의 주자로 나갔다 '역전을 당했다'며 테니스 코치시며 담임선생님이셨던 그분은 스텐드에 앉아있던 전학생 앞에서 저에게 따귀를 날려 그자리에서 자빠졌고 그때의 수치심을 잊지못하고 살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수치심이란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자란 '건강치 못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자라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성장은 퇴행이나 마음은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 앞에서 눈물을 감추는 거짓된 모습보다, "나도 너처럼 참 연약한 아비야!" 라는 진솔한 나의 모습을 보일 때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수치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가치관을 새롭고 하거나 변화시키는 위력은 어디서 나올까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질문의 답을 20년이 훌쩍 넘어 외국사람의 논문을 보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던 이어령교수님을 보며 현 한국의 교육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 을 만들어 내는 것 같은, 현 정규교육의 현실의 벽이 높다한들, 수만가지 질문을 솔직하게 답해줄 수 있는 '참 스승'과 '참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한 이때,
이어령 교수님이 지나간 자리.... 당신 스스로는 외로웠고, 그 누구도 곁에 없다고 하신 푸념 뒤에는 그리고 그 죽으심 뒤에는....
이렇게 가슴 한곳에 멍울이 맺혀, 뇌에 파동을 가져다 주고 삶에 대해 고뇌하고 내 자신을 진실되게 직면하며 인생을 되돌아 볼수 있게 하신 그는
'글 재주꾼, 생각의 재주꾼, 사람을 살리는 참 시인' 이라서 저는 그 앞에 고개를 숙여보냅니다.
'나중에 만나면 참 감사했다'는 덕담을 나눌 그 날을 고대하며 저도 '인생의 마지막 때'를 잘 기다리며 이겨내고 부끄럽지 않는 부모이자 스승이 되기위해 오늘도 살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김지수 지음 / 열림원
암을 앓으면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순간에 깨달음을 마지막까지 전해준 선생의 대화에 감탄과 뭉클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선생은 단순히 이런 감정만 느끼라고 마지막 대화를 남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부터 자네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네. 이 모든 것은 내가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들이야. 어둠의 팔목을 넘어뜨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지.”23쪽
그가 받아낸 전리품을 아낌없이 독자에게 더 전해주었다.
그의 전리품은 철학적이고 문학적이며 과학적이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신적인 이야기를 건드려 주었다.
선생이 말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하루아침에 알게 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자기 삶에서 알게 된 깨달음이었다.
“여섯 살 때 일이야. 애들은 개구리 잡으러 가고 참새 잡으러 가는데 나는 혼자서 대낮에 굴렁쇠를 굴리며 놀았다네. 보리밭 오솔길에서 굴렁쇠를 굴리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어. 여섯 살짜리 아이가 죽음을 느낀 거야. 그늘도 다 사라진 정오였네. 한낮이 되면 그림자가 싹 사라지잖아.”
“존재의 정상이잖아. 뭐든지 절정은 슬픈 거야….
정오가 지나면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생긴다네. 상승과 하락의 숨 막히는 리미트지. 나는 알았던 거야. 생의 절정이 죽음이라는 걸. 그게 대낮이라는 걸.” 57쪽
절정의 순간이 죽음이라는 것을 어린 여섯 살에 깨닫고 당신의 죽음이 싹터서 평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는 선생의 말은 감탄을 연발하게 했다. 모든 것이 끝나서 암울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 두려움이 죽음이라 생각했는데 최고의 순간이 죽음이라고 하니 놀라웠다.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떨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죽이라고 하니 경이로운 것 같으면서도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죽음에 관한 생각을 달리 가지게 했다.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네…. 옛날엔 묘지도 집 가까이 있었어…. 역설적으로 죽음이 우리 일상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었던 거야. 신기하지 않나? 죽음의 흔적을 없애면 생명의 감각도 희미해져.”
“현대는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네. 그래서 코로나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거야. 팬데믹 앞에서 깨달은 거지.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걸.” 70~71쪽
삶은 자체가 죽음이다. 모두가 죽으니까. 그 옛날에는 삶 속에서 죽음이 늘 존재한다는 것을 늘 인지하고 살았다. 노상 보니까. 하지만 현대는 죽음을 지워버리고 죽음을 잊고 살아간다. 우리는 죽음만 잊고 산다 생각하지만 죽음을 잊으므로 생명의 감각까지 잊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죽음이 우리 곁에, 우리 일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우리의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로 전 세계인이 외면했던 죽음을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우리도 죽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언제나 죽을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마스크 한 장, 그게 생명이었어. 전 인류가 죽음을 잊고 돈, 놀이, 관능적인 감각에만 빠져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든 거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덮여 있던 유리그릇 같던 주검을 발견한 거야.” 72쪽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애야, 밥 먹어라.’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중략)….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인제 그만 놀고 생명으로 오라는 부름이야…. 그렇게 보면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지.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니까.” 156쪽
“5월의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세계의 한복판에. 생의 가장 화려한 한가운데.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야. 고향이지.”157쪽
선생이 말하는 죽음은 참 아름답다. 엄마의 품, 장미밭 한복판, 생의 가장 화려한 가운데, 고향. 어둠이 아니라 빛.
그동안 가졌던 죽음에 대한 어두운 생각을 뒤집어 놓는 말들이었다. 진정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로써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 당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아름답게 받아드리는 모습이 정말 귀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죽음이 아름다우니 죽음에게로 당장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우리 모두 죽음에 갈 테니.
그가 죽음을 절정, 아름다움이라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지금 살고 있는 생명, 삶을 귀하게 얘기라고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넌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167쪽
인터뷰한 저자도 선생의 질문에 뜨끔 했다고 한다.
스스로에게도 물어본다. 난 존재했나? 나답게 세상에 존재했나? 나만의 이야기로 존재했나
나의 마지막에 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당당하게 답할 수 있을까
망각했던 죽음에 들켜 불안해하다 정오의 태양 아래 사라져버리는 그림자가 되지 않을까
결국 죽음은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존재시키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177쪽
“세상은 생존하기 위해서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178~179쪽
“한순간을 살아도 자기 무늬로 살게” 180쪽
죽음에 대한 깨달음으로 지금 나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의식주에 얽매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도 자기 무늬로 즐겁게 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이 하라는 대로 공부하고, 일하고, 돈을 벌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즐겁게 하는 삶은 분명 아니다. 내가 즐거워서 하는 삶은 무엇일까? 가난해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 가다 보니. 어린 시절 내가 좋아서 했던 것이 무엇인지 망각해버렸다. 우리가 잊고 있던 속에 진실이 있다(72쪽)고 했다.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려 그 진실을 찾아야 한다. 아직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오랜 시간 잊고 있다 보니 진실을 기억해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 떠올릴 것이다. 찾아낼 것이다. 그래야 내가 죽음 앞에서 나는 존재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는 내내 이어령 선생님이 다독다독 달래주기도 하다, 어떤 때는 따끔하게 혼내주는 것 같았다. 은유와 비유로 설명하는 그의 철학을 다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알려주려고 애쓰는 마음은 그대로 느껴졌다.
우리에게 이런 참 스승이 있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했다.
비록 이제는 영의 세계로 스승은 떠났지만, 마지막 그의 말은 글이 되어 오래도록 우리가 스스로 진실, 보물을 찾도록 안내해 줄 것이다.
이어령 선생님의 말처럼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가 이 인터뷰의 핵심이다. 돌아보면 선생이 이 시대에 태어나 대중 앞에 서서 쓰고 말한 모든 것도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처럼 삶도 마찬가지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다. 언제쯤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될까. 마지막의 내 모습은 어떨까.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아픔없이 홀가분하게 세상과 작별하고 싶다. 그러기위해서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태해진 나에게 너무 필요한 책이다. 살자 . 제대로 죽기 위해서 제대로 살자!
나는 평생 도전이 필요한 인간이었네. 계속 쓰고 또 쓰고 다시 썼네.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다시 하는 거라네. 니체도 다르지 않아. '운명이여 오너라.'위인들이 거창해보여도 그렇지가 않아. 지면 또 한번 부르짖을 뿐이지.
머리 나쁘다. 기억력이 안좋다.
태어난 게 왜 이모양일까.
그만 불평불만하고
다시하고 또하고 계속 하면 된다.
그렇게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지.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어. 비어서 웃고 있지.
무조건 뭔가 채우기 위해 살았는데 이제는 비우기에 집중하려 한다. 부족하다고 계속 불평하며 뭔가 해야 한다고 바둥거리며 채워도 목이 말랐는데 이제는 이유를 알거 같다. 영혼없는 채움이 나를 더 지치게 했다.
빈 공간이 있어야 숨 쉴 수 있고 뭔가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쓸데없는 생각을 비우며 생각의 중심을 찾는 삶을 살자.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도 모르는 거야. 책 많이 읽고 쓴다고 크리에이티브가 나오는 것 같아? 제 머리고 읽고 써야지. 일례로 번역은 창조지만 학술 논문은 창조가 아니거든.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말고 마음가는 대로 독서를 하라는 이어령 교수님의 말씀이 감사하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 없이 재미있는 곳만 읽어도 된다는 말 덕분에 부담없이 더 즐겁게 독서할수 있을거 같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바로 눈앞의 일에만 신경 쓰고 복권이 얻어걸리길 바라는, 그런 허황된 생각으로 내 인생을 낭비하는 건 아닌지. 그냥 가던 길 간다. 다른 길 가면 불안해서 매번 같은 길만 가니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한다.
여태까지 쌓아온 경력이 아쉬워서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계속 불평불만하지 말고 꿀벌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내 길을 만들어 보자.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뭐가 있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내가 그 길을 가면 된다.
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네. 눈동자의 빛이 꺼지고, 입이 벌어지고, 썩고, 시체 냄새가 나고......그게 죽음이야.
우리가 덮어두고만 싶은 것은 바로 죽음이다. 진실이지만 죽음은 두렵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진다. 삶에 끝이 있기때문에 삶을 더 의미있게 농도있게 살수 있다. 코로나로 죽음은 언제든 바로 지금나에게 올수도 있다는걸 알았다. 지금 그냥 내가 흘려보낸 시간들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마지막은 변하지 않는다. 바로 죽음이다.
한밤의 까마귀는 울지만, 우리는 까마귀를 볼 수도 없고 그 울음소리를 듣지도 못해.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분명히 한밤의 까마귀는 존재한다네. 그게 운명이야.
우리가 느끼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지만 운명은 존재한다. 운명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우리는 운명이란 걸 믿는다. 다양한 인과관계가 섞이고 섞여서 여러사건이 일어나고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절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이 재밌는거 아닐까.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이라고 해버리면 패자는 변명거리가 생겨.'내가 지는 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운이 없어서'라고. 숙명론, 팔자론으로 풀어버리면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 났어'로 모든 걸 덮을 수 있네. 가난해도, 실패해도 '팔자' 핑계대면 그만이거든. 그런데 인생의 마디마다 자기가 책임지지 않고 운명에 책임을 전가하는 건 고약한 버릇이라네.
이런 환경에서 이만큼하면 잘한거지뭐. 이건 내 팔자야. 딱 여기까진가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걸보니 내 운명인가보다.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냥 내가 이렇게 사는건 다 팔자라고 생각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안좋으면 자꾸 안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냥 다 팔자려니 했다.
정말 죽도록 노력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느정도한 노력으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운이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 운이란것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운도 노력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니 운을 논하기 전에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네. 그게 싱킹맨thinking man이야.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사고해야 하네. 어른들은 머리가 굳어서 '다 안다'고 생각하거든.'다 안다'고 착각하니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거 묻지 말라'고 단속을 해.
학창시절때 질문을 얼마나 했을까. 수업때 선생님말은 다 맞다고 생각해서 그냥 외우기 바빴다. 교과서내용부터 필기를 달달외우면 점수가 잘 나왔다. 그러니 굳이 시간낭비하며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이 하라는 것만 하면 원하는 점수가 나오니까. 이렇게 대학생이되니 여전히 질문하기가 어렵다. 뭔가 물어보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만 가능했다. 당연히 모르는게 있을수 밖에 없는데 왜 그렇게 주저했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었다고 어른이 아닌데 어른이니까 이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쓸데없는 자존심때문에 아는척 하면서 살았다. 모르면 인정하고 질문하면서 배워나가면 되는데 말이다.
수업을 할때 마치기 전에 꼭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라고 하지만 거의 하지 않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학교 수업은 비슷하게 진행되나보다. 일괄적인 수업을 통해 익히고 시험보고 평가받는 시스템.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면서 전보다는 나졌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갈길이 멀다.
면접이야말로 나에 대해 생각하고 답을 해야 하는데 어려워하는 이유는 본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를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니 자기자신에 대해 흥미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면접준비를 하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를 알아간다면 다른 세상에도 더 관심이 생기지 않을까.
한국 유학생들이 유학가서 지적받는게 뭔 줄아나? 문제를 구체화하지 않고 일반화한다는거야. 한국인들은 공통적으로 거대담론을 좋아해.
뭔가 구체화 하기 위해서는 많이 알아야 하기때문에 일반적인 사실을 말하는게 편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얘기를 해야 어디든 끼기 싶다. 뭔가 구체화하면서 심오하게 들어가면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면접강의할때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자기소개다. 자기의 특별한 강점이나 특기를 말하는 걸 아주 어색해한다. 모든 지원자가 말하는 일반적인 사실만 말하다보니 자신의 강점이 전혀 부각되지 않는다.
우린 이렇게 학습되어 와서 자신을 어필하는 걸 힘들어 한다. 자신을 구체화하면서까지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학창시절에 나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은 전혀 없었다. 일반적인 지식을 머리 속에 구겨놓기 바빴다. 그런 일반적인 사실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렸을 때부터 '원래 이런거야' 에서 탈피해서 다양한 케이스를 통해 일반론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배울수 있기를 바란다.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춤이 된다네.
나에게 있어서 일상이 목적이 되는 건 뭘까. 일은 힘들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다. 살기 위한 수단이다. 나에게 목적 없이 즐겁고 행복한 것은 바로 독서다. 이젠 독서가 일상이 됐다. 어디를 가도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책이다. 독서하면 일상이 춤이 된다.
interest라는 영어 단어는 관심, 재미라는 뜻도 있지만 이익, 이자라는 뜻도 있어. 우리가 이익을, 이자를 내려면 애초에 관심 있는 것, 흥미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해. interest가 출발이지. 그게 모든 일의 순서고 이치라네.
내가 학창 시절에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영어였다. 영어만은 잘하고 싶었다. 기본기를 전혀 잡지 않고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교과서를 통째로 다 외워버렸다. 영어는 항상 다 맞거나 한 개 정도만 틀렸다.
중 3 때 담임선생님은 외고를 추천해 주셨고 원서까지 썼지만 예비소집일 날 학교에 가니 접수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난 공부 하느라 접수를 엄마한테 부탁했는데 엄마는 그걸 아주 소중하게 보관만 해 놓으셨다. 그렇게 난 외고 시험을 보지도 못하고 일반고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서 영어와는 전혀 다른 화학을 전공하였지만 영어는 꾸준히 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시드니로 어학연수를 갔다 온 후 영어가 더 좋아졌고 그 어려운 IMF 때 영어 덕분에 바로 전화영어 강사와 교환학생 매니저로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가르치면서 영어는 더 늘었고 에미레이트 항공사 첫 면접에 합격했다.
지금도 영어 면접 코칭을 하며 영어 덕을 보고 있다.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 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관찰이 이뤄지고,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소중한 한순간 한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 행복과 슬픔 그리고 고난과 아픔 등, 순간순간의 조각들이 모여서 내 삶을 만든다. 인생의 다양한 모양의 조각들이 서로 맞춰지면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든다. 그렇게 우린 삶을 살아간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생각이 아니야. 상기하는 거지. 이미 알던 것을 깨워서 흔드는 거지. 책이라는 건 그렇게 흔들어주는 역할을 해. 머리를 진동시키는 거지.
자기 계발서를 멋도 모르고 읽었을 때 처음엔 흥미롭고 배울 점이 많았는데 비슷한 종류의 책을 읽다 보니 그 내용이 그 내용인 거 같아서 한동안 읽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는 내용을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게 삶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내용은 비슷할지라도 읽을 때마다 내가 느끼고 배우는 점은 분명 다르다. 그렇게 다시 한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며 보완할 점을 찾는다면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내가 될 수 있다.
프로세스! 집이 아니라 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나. 나는 멈추지 않았네. 집에 정주하지 않고 끝없이 방황하고 떠돌아다녔어.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거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은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꿈을 위해서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막상 꿈을 이루고 나면 갑자기 허무해진다. 이걸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목표를 이루고 나면 후련할 줄만 알았는데 시원섭섭하다. 과정을 즐겨야 목표의 달성 유무에 상관없이 삶에 감사할 수 있다. 죽어라 노력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목표 지향적이라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좌절감에 한동안 동굴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안에서 나를 끊임없이 학대하며 못살게 군다.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으니 그 시간이 더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 절망 속에서 나를 꺼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목표 달성에 실패했어도 그 과정 속에서 배우며 조금이라도 성장했다면 충분히 그 시간은 의미가 있다. 그런 프로세스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꿈은 깨지지 않고 지속된다.
지우는 기능과 쓰는 기능을 한 몸뚱이에 달아놓은 그게 우리 인생이잖아. 비참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고 망각과 추억이 함께 있으니 말일세.
평생 기억하고 싶은 추억과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아픔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우고 싶은 아픔은 가슴속에 박혀 트라우마로 남는다. 망각하고 싶은 슬픔을 당장 지워버리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아픔과 슬픔을 적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렇게 힘들었고 아팠는지 왜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쓰다 보니 마음이 정리가 돼서 그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 더 빛날 수 있는 건 이런 아픔과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하고 망각하며 살아간다. 망각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괴로울까. 하지만 망각되지 않아 힘들고 아픈 과거도 계속 기억하고 싶은 추억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너무 행복해도 너무 슬퍼도 내 삶의 한 조각이니까...
옛날에는 아무리 못 살아도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었네. 요즘에는 천하 없는 재벌이라도 힘들어. 병원에서 태어나고 병원에서 죽지. 살고 죽는 게 병인가? 탄생이 병이고 죽음이 병이냐고? 생사의 문제가 낯선 사람들의 공간에서 다뤄지니 안타까워.
'집에서 태어나서 집에서 죽기'
가장 어려운 일이다. 거의 대부분 병원에서 태어나고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 난 절대 연명치료는 하지 않을 거고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가지고 싶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내 집에서 나의 삶을 정리하고 편안하게 미소 지으며 눈 감고 싶다.
'디지로그'라는 말을 내가 알고 썼겠나?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함께 있어야 행복한 세상이라고 했는데 지금이 전부 그런 세상이거든.
모든 생활패턴이 디지털로 연결된다. 알람부터 스케줄러 그리고 이메일까지. 우리는 디지털 세상이 가장 편하고 행복할거 같았지만 디지털 속으로 들어갈수록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손편지를 주고 받았던 그런 설렘을.
난 여전히 문자나 톡보다는 손편지가 좋다. 우린 행복과 편안함이 공존하는 디지로그 시대에 살고 있다.
내 딸 민아는 죽기 전에 정말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네. 일 년간 한국에서 내 곁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지. 죽음에 맞서지 않고 행복하게 시간을 쓴 거야. 암에 걸렸어도 영적인 힘으로.
내가 암에 걸려서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면 난 어떻게 이 소중한 시간을 보낼까. 이민아 목사님처럼 행복하게 마무리하고 싶다. 내가 살아온 시간을 감사하면서 조금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렇게 행복하게 웃으며 삶을 매듭짓고 싶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그게 자족이지. 자족에 이르는 길이 자기다움이야.
누가 아무리 맞는 길이라고 얘기를 해도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돌고 돌아 실패하고 넘어졌어지더라도 원하는 길을 간다. 그 과정 속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보고 내가 원하는 길을 찾는다.
어렸을 때 아무리 부모님과 선생님이 이렇게 살아라. 이런 사람을 만나라 많은 조언을 해줘도 그냥 흘려듣는다. 분명 나중에 후회할 일이 있다. 나 또한 부모님 말 안 들어서 고생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더 강해졌다. 이미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야 진정한 내 삶이다. 타인에게 조언을 받을 수 있지만 타인은 절대 내 삶에 개입할 수 없다.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인생에서만이 내가 원하는 나를 만날 수 있다.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바쁘게 무리 지어 다니다 어느 순간 딱 필름이 끊기 듯 정지되는 순간, 죽음을 느끼는 거야. 정적이 바로 작은 죽음이지. 우리가 매일 자는 잠도 작은 죽음이거든. 우리가 침묵의 소리를 들을 때, 그걸 잡아채야 해.
죽음은 정지다. 비행하면서 모든 것이 멈춘 적이 있다. '이제 다 끝났구나. 죽는구나. 근데 왜 여기서. 엄마 보고 싶은데. 내가 원하는 끝은 이게 아니었는데'
순간의 정적과 고요는 나를 작은 죽음으로 이끌었고 감사하게도 눈을 떴다.
죽음은 어느 순간이 될지 그 누구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죽음보다는 죽음을 알아채고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 주어진 이 순간을 감사하면서 의미 있게 살고 싶다.
그렇다면 돈이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해. 내가 돈의 주인이 되면 돈은 나의 최고의 협력자고, 하인이 되면 나는 최악의 인간이 되는 걸세.
돈 걱정 없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을의 입장이 되는 나는 진심으로 돈의 주인이 되고 싶다. 돈에 끌려다니는 인생은 행복하지 않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내 역량 이상으로 수업을 해서 건강이 안 좋아지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돈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순간 나라는 자아는 없어지고 돈 때문에 사는 불쌍한 신세가 된다.
어렸을 때는 제발 부자였으면 하고 바랐다. 그냥 부자인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때보다 지금이 조금 나은 상황이지만 난 여전히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 물질적인 욕구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삶은 피페해진다. 돈의 주인이 돼서 즐겁게 일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나니 가장 아쉬운 게 뭔 줄 아나?' 살아있을 때 그 말을 해줄걸'이야.
그때 미안하다고 할걸. 그때 고맙다고 할걸.....
지금도 보면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죽음이나 슬픔이 아니라네. 그때 그 말을 못 한 거야.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흘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없을 때 그 상실감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제발 있을 때 잘하라는 말처럼 정말 평상시에도 매번 잘하고 싶지만 항상 행동은 마음과 다른 길을 간다. 엄마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서 고생했으면서도 여전히 안 듣는 거 보면 죽어서나 정신 차릴까 무섭다.
엄마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여서 마음이 저리다. 매일 전화해야지 하면서도 일주일을 넘기고 한 달 지나서야 엄마보러 가는 못된 딸이다.
하지만 엄마 폰에 난 '천사 둘째 딸'로 저장되어 있다.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을 꽁꽁 숨기지 않고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마음을 전하는 둘째 딸이 되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알고 보면 가까운 사람도 사실 남에게 관심 없어요. 왜 머리 깎고 수염 기르면 사람들이 놀랄 것 같지? 웬걸. 몰라요. 남은 내 생각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도 '남이 어떻게 볼까?' 그 기준으로 자기 가치를 연기하고 사니 허망한 거지.
다들 바쁜 일상을 살아간다. 내 삶은 나답게 살아가면 된다. 주변 시선에 흔들리며 타인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누군가에게는 칭찬을 들을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는 비난을 듣는다. 이미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고 절대 행복하지 않다. 나의 가치는 남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면 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목적 같은 것 없어. 생명, 살아있는 것.
그게 세상이라네. 눈물 나는 세상이라네.
살아있음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잠에서 깨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건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다. 이런 커다란 축복을 단지 숨만 쉬면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 반성한다. 살아있는 한 못할 건 없다. 진정 내가 하고자 한다면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값어치를 할 수 있다. 그러니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자. 헛되이 보내지 말고.
어느 날 물고기가 물었어. '엄마, 바다라고 하는 건 뭐야?'
'글쎄, 바다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걸 본 물고기들은 모두 사라졌다는구나.' '물고기가 바다를 나오면 죽어요. 그 순간 자기가 살던 바다를 보지요. 내가 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상태, 그게 죽음이에요.
내가 살던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을 갈 때만이 내가 살았던 공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던 길과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 세상눈이 아닌 저세상눈으로 바라보며 죽음을 실감한다. 이 세상의 모습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도록 행복을 마음에 각인하며 삶을 진정으로 느끼며 제대로 살고 싶다.
지금 죽음 앞에서 생명을 생각하고 텅 빈 우주를 관찰하면, 다 부정해도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어요. 숨을 쉬고 구름을 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숨을 쉬고 있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게 산다. 이렇게 눈을 뜨고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받은 일인데 말이다. 건강했을 때는 모르다가 아프면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처럼 왜 꼭 상실하고 나서야 더 간절해질까. 지금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 자체를 온전히 즐기며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하루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티였어.
모든 게 선물이라고 깨달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가끔은 왜 이 세상에 와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나에게는 왜 이렇게 힘든 일만 일어날까.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할까. 난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야.' 한번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나라는 존재는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세상이 그저 미워진다.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과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힘들일 이 있어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이겨낼 수 있다. 그렇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행복을 나눌 수 있다.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의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어요. 요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서 그래요.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덮으니 어리석어요. 부디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잘못한 게 있거나 실수를 하면 인정하지 않고 몰랐다고 하며 넘어간다. 한 번은 이런 방법이 통할 수 있지만 반복되면 그건 내가 알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과거 자신의 잘못을 자꾸 생각하면 부끄러우니까 그 사건 자체를 내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내가 선택한 과거만이 머릿속에 남아있다면 그건 진실이 아니다. 자신이 잘한 거만 말하고 자신의 부족한 점은 무작정 덮으려고만 한다면 절대 발전할 수 없다.
우리시대 최고의 지성 이어령이 죽음을 앞두고 우리의 삶에 대한 자신의 지혜를 담담하게 전하는 책이다. 김지수 기자와의 대담 형식으로 전달한 내용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가 될 것 같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처럼 이들의 만남은 가을 단풍, 겨울 산, 봄의 매화, 그리고 여름 신록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1년에 걸쳐 열여섯번 이어진다. 이 인터뷰에서 스승은 밤새 팔뚝씨름을 하며 새로 사귄 ‘죽음’이란 벗을 소개하며, 남아 있는 세대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지혜를 쏟아낸다.
코로나19로 주위에서 많은 죽음을 보게 되는 시기이다. 감염 위험 때문에 제대로 된 작별을 못하기도 하고, 기저질환이란 이유로 죽음이 일방적으로 본인의 귀책사유로 매도되는 듯한 안타까운 모습을 목도하기도 한다. 아무렇지 않게 발표하는 오늘은 몇 명이 사망했다고 뉴스에는 통계만 있을 뿐 소중한 하나하나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가족의 죽음일지라도 그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치환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스승은 암에 걸린 자신의 처지를 지금까지 철창 속에만 있던 호랑이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일로 비유하면서 자신의 죽음이 주는 느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스승은 여섯 살 때 처음 죽음을 느꼈다고 한다. 대낮에 굴렁쇠를 굴리며 놀다가 정오가 되었는데 그늘까지 다 사라진 정오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뭐든지 절정은 슬픈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준다. 정오는 그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생기는 상승과 하락의 숨 막히는 리미트인데, 정오의 순간에 문득 생의 절정이 죽음이라는 걸, 그게 대낮이라는 걸 알았다며, 죽음이 삶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기자와 스승은 삶과 죽음 속에 담겨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계속한다. 평상시에도 다양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살아왔다는 스승은 죽음을 앞에 놓고도 이해되지 않는 부문에 대한 질문을 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죽음을 마주한 채 살아온 스승이기에 전할 수 있는 지혜들을 사랑, 과학, 종교, 꿈 등 다양한 주제들과 비유들을 동원해 우리에게 하나씩 풀어놓는다. 해박한 지식과 문제를 보는 날카로운 시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는 “재앙이 아닌 삶의 수용으로서 아름답고 불가피한 죽음에 대해 배우고 싶어” 하는 제자의 물음에 은유와 비유로 가득한 답을 내놓으며,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렇기에 스승은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육체가 사라져도 말과 생각이 남게 되기 때문에 자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글을 쓰고 말하겠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작가인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다고 말에 정말 대단한 분이란 생각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낭떠러지가 아니고 돌아가야 할 새로운 고향일 뿐이다.
우리는 유언으로 몇 마디 남기기도 힘든데 스승에게는 책 한 권으로 자신의 생각을 다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평소 자신의 생각을 거쳐 하나하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왔기 때문에 그만큼 생각의 깊이가 있으면서 폭도 넓은 사고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이 책은 '음습하고 쾌쾌한 죽음을 한여름의 태양 아래로 가져와 빛으로 일광욕을 시켜준'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하면 코끝의 바람 한 줄기도 허투로 마실 수 없는 거라네. 그래서 사형수는 다 착하게 죽는 거야. 마지막이니까. (170쪽)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238쪽)
내 삶 혹은 죽음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스승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스승이라고.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5쪽, 프롤로그 中)
[수업을 시작하며]
지난 이십 년 동안 발상(發想)과 발성(發聲), 즉 어떤 생각을 하고 그것을 소리내어 말하거나 글로 써내는 일에 대하여 배우고 또 익히는 중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서부터 <이어령, 80년 생각>까지 이어령 선생님의 책과 언론 인터뷰를 교재로 삼아 (2년 전이 아니라 20년 전부터 나 혼자만의) 비대면 수업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번 학기가 마지막 수업이 될 수도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과 함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받아든다. 선생님의 수많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27년간 한 길을 걸어온 김지수 기자가 '삶 속의 죽음' 혹은 '죽음 곁의 삶'이라는 커리큘럼으로 매주 화요일마다 선생님과의 대화 속에서 건져올린 선물과도 같은 그의 지혜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펴낸 책이다. 나 또한 기꺼이 마지막(이 결코 아니길 바라는 바람으로) 수업의 청강생이 되기로 한다.
[수업중]
한밤에 눈 뜨고
죽음과 팔뚝씨름을 한다.
근육이 풀린 야윈 팔로
어둠의 손을 쥐고 힘을 준다.
식은땀이 밤이슬처럼
팔목을 꺾고 넘어뜨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어둠이
팔뚝을 걷어 올리고 덤빈다.
그 많은 밤의 팔뚝을 넘어뜨려야
겨우 아침 햇살이 이마에 꽂힌다.
심호흡을 하고 야윈 팔뚝에
알통을 만들기 위해
오늘 밤도 눈을 부릅뜨고
내가 넘어뜨려야 할
어둠의 팔뚝을 지켜본다.
(20~21쪽, 「어둠과의 팔씨름」)
밤마다 죽음과 팔씨름을 하는 기분이 어떨지, 또 그가 얼마나 외롭고 지난한 시간을 견뎌냈을지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그 어둠 속에서 빛이자, 그 싸움에서 전리품과 같은 깨달음을 마지막 수업을 통해 독자와 나누고자 하는데, 옆자리에 죽음과 함께 한밤을 누웠다 다시 눈을 뜨는 그의 글과 말들이 어쩐지 유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늘 그랬듯이 자신만의 수사학(레토릭)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며, 독자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한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30쪽, 퀴블러 로스의 말)
최초로 죽음학을 강의했던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했다. 정작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음 앞에 서게 되자 '죽음은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자기에게 덤벼드는 일'이라 말하며 다른 사람들의 전철을 밟는 모습을 보였다. 언제부턴가 책이나 영화에서 종종 마주하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이 그리 낯설지 않다. 이어령 선생님은 여섯 살 때 처음 죽음을 느꼈는데, 대낮에 굴렁쇠를 굴리며 놀다가 그늘까지 다 사라진 정오(가 지나면 다시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생기지만)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그는 어째서 가장 찬란한 한낮에 그러한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존재의 정상이잖아. 뭐든지 절정은 슬픈 거야.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에도 그런 구절이 있어. 분수는 하늘을 올라가 꿈틀거리다, 정상에서 쏟아져 내린다····· 상승이자 하락인 그 꼭짓점. 그 절정이 정오였어. 정오가 그런 거야. 시인 이상의 『날개』에도 정오의 사이렌이 울려. 그 순간 주인공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꾸나'라고 속삭이지. 정오가 지나면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생긴다네. 상승과 하락의 숨 막히는 리미트지. 나는 알았던 거야. 생의 절정이 죽음이라는 걸. 그게 대낮이라는 걸."
(55쪽, 「대낮의 눈물, 죽음은 생의 클라이맥스」 中)
글쓰기 영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는 글 쓰는 사람은 매번 패배하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그가 계속 쓰는 까닭은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며,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육체는 사라질지언정 그의 말과 생각은 책이라는 그릇에 담겨 죽음과 삶에 대한 의미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우물이 되어주리라. 평생 우물을 파는 사람이었던 그의 마지막 갈증을 채우는 일이 바로 '사람이 어떻게 끝나가는가'를 보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에게 글쓰기는 종교와도 같기에 죽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보지만, 암세포가 그의 모든 지식과 생각을 지워버리는 지우개로 작용하여 글이 쉬이 써지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게 바로 죽음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지우개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작고 아름다운 것들, 세 줄로 된 글을 써나간다.
발톱 깎다가 / 눈물 한 방울 / 너 거기 있었구나, 멍든 새끼발가락
내 작은 잔디밭 / 날아온 참새 한 마리 / 눈물 한 방울
(65~66쪽, 「쓸 수 없을 때 쓰는 글」 中)
평생 글을 쓸 때 '관심, 관찰, 관계' 라는 세 가지 순서를 반복하며 스토리를 만들어왔다는 그는, 관심을 가지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을 하면 자신과의 관계가 생긴다고 말한다. 문득 인간극장에서 (나 혼자) 절찬상영중인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지나간 장면들에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더라면 (나 자신을 포함한)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서 덜 상처받고 더 즐겁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들지만, 이제라도 매 신(scean)을 찍을 때마다 삼관(三關) 정신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한 번밖에 못 만난다······ 그건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가슴이 저며오는 거야. 지금 이 순간은, 오늘 이 하루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지. 내 앞에 연필 한 자루도 바삐 걸어가는 행인 한 사람도 새롭게 보이는 거야. 마치 사형수가 보듯 세상을 보는 거지."
(160~161쪽,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中)
그렇다면 젊은 날의 스승은 어떻게 사랑을 했을까? 대학시절 좋아했던 한 여학생이 전차가 갑자기 서는 통에 균형을 잃고 흐트러진 자세를 보였는데, 마치 고양이나 자벌레 같이 느껴져서 연애 감정이 달아났다는 그의 말에 과연 관찰다답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럼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선명한 사랑의 두 장면이 남아 있는데, 하나는 교차하는 전차와 전차에서 자신과 어느 여학생의 눈동자가 완벽히 일치했다가 비껴가던 순간이고, 다른 하나는 어릴 적 전동말을 타는데 상대편에서 움직는 말에 놀라 울먹이는 이름 모를 소녀와의 눈맞춤이다. 그는 타자와 내가 하나 되는 흔치 않은 그 순간을 가르켜 '사랑' 혹은 '상호성'이라 부른다.
당신은 운 좋은 인생을 살았는가? 제자의 이어지는 물음에 스승은 답한다. 태어난 것 자체가 운을 타고난 것이며 운 나쁜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다고.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걸 알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지혜의 출발선으로 여겼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그리스의 운명론은, 너와 내가 우연히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불교의 연기론과도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상대를 비방하려는 게 아니라 납득이 안 가면 질문을 하는 본능을 따라갔어. 그런데 질문을 받으면, 다들 자기를 무시하고 놀린다고 착각하는 거야. 질문 없는 사회에서 자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라네. 그런 문화 속에서 나는 사랑받지 못했네.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
(97쪽,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는 즐거움」 中)
평화롭기보다 지혜롭기를 바랐던 인간 이어령은 여섯 살때부터 끊임없이 질문을 이어오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외되고 외로웠다고 고백한다.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이유로 사회성을 의심받기도 하였으나, 그 자발적 외로움이 억압과 관습의 중력으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가벼워지는 힘, 즉 경력으로 변해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는 원천이었음을 일깨워준다.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서로의 것이죠."
"컵에 달렸으니 컵의 것이겠지만, 또 컵의 것만은 아니잖아. '나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중략) 이런 생활 속의 생각이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되고 소설이 되고 철학이 되는 거라네."
(124~125쪽, 「손잡이가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 中)
꿈은 이루는 게 아니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스승은 죽고 나서도 할 말을 남기는 사람이다. 자기와 같은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은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지 되묻는다. 투병중에도 쓸 수 없을 때 쓰는 글 '눈물 한 방울'(늙은이의 세 줄 일기)을 통해 할 말을 전하고 있어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답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빌어 아흔아홉 마리 양처럼 제자리에서 풀을 뜯으며 정해진 대로 살기보다는, 돌아온 탕자 같은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게 훨씬 행복한 삶이라고 덧붙인다.
"눈물 한 방울이 내가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네."
"아······ 88년 통찰의 결론이 눈물 한 방울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래. 이 시대는 핏방울도 땀방울도 아니고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네. 지금껏 살아보니 핏방울 땀방울은 너무 흔해. 서로 박터지게 싸우지. 피와 땀이 싸우면 피눈물밖에는 안 나와. 피와 땀을 붙여주는 게 눈물이야.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울려야 천 리를 달리는 한혈마가 나오는 거라네."
(210~211쪽, 「눈물은 언제 방울지는가」 中)
올해 초에 읽었던 <이어령, 80년 생각>에서 코로나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눈물 한 방울'의 힘이라고 말했던 대목이 떠오른다. 대립과 분열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는 현실에서 자기가 아닌 타인을 위해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눈물은 곧 관용을 의미한다. 이렇게 진지한 순간에도 스승은 유머를 잊지 않는다. "'홍도야 울지 마라'를 한 글자로 줄이면? 뚝!" 다시 눈물 얘기로 돌아가본다.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주며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이 흘리는 눈물을 이해하는 거라고 힘주어 말한다.
[수업을 마치며]
배움에 왕도가 없고 배움은 끝이 없다는 말을 모르지 않는다. 아이를 기르고 가르치는 게 육아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아이를 통해 내가 깨우치고 성장할 때가 더 많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는 존재라고, 그게 바로 실존이라는 스승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다.
아울러 '지혜를 가진 죽는 자'라는 말도 곱씹어본다. 지혜로운 인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법을 알법도 하나 언젠가 죽고마는 존재이다. 아이러니하다는 건 알겠으나 그 정확한 의미까지는 간파하지 못하니, '아, 이러니' 난 지혜롭지 못한건가 싶기도 하다. 신은 죽지 않고, 다른 생명체는 죽어도 자기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모른 채 그냥 살지만, 인간은 죽음의 의미를 알기에 슬퍼하고 또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는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다.
수업을 듣는 내내 교실의 맨 앞자리에 앉아 그의 육성을 듣고 기록한 김지수 기자가 부럽기도 했지만, 내게도 그의 지혜를 나눠주고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줘서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점점 더 많은 청강생이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죽음을 겪고 글로 쓴 사람은 (있을 수) 없는 까닭에, 죽어감에 대하여 치열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한 이야기가 더욱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의 삶 혹은 죽음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아보는 일도 유의미하리라 생각한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당신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습니까?"
(291쪽, 「마지막 선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