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전범선씨에 대한 어느 지식도 없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단지 비거니즘 에세이. 그 한 가지 때문이었다.
진정한 환경보호의 최종점은 비거니즘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인간이 자연에게 최대한 해를 입히면 안 된다며 어떻게든 쓰레기를 줄일 방법을 고민하지만 정작 육식은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비겁함 또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삶에 대해. 제목 그대로 사는 동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삶에 대해서.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의 저자 전범선씨는 밴드 '양반들'의 보컬이자 사랑하는 연인 지지씨와 함께 비거니즘의 삶을 살아간다.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 자문위원이자 비거니즘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활동들을 활발히 하고 있다.
비거니즘은 우리의 밥상을 죽임이 아닌
살림의 먹거리로 채우는 것이 시작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중심 사회가 여성의 몫으로 할당하고 폄하했던 살림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죽임의 문명에서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공통의 적을 갖는다.
우선 저자는 페미니스트이자 채식주의자 지지씨를 만나며 달라진 세상을 이야기한다. 여성에게는 위험의 공간으로 잘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남성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공간이며 폭력으로부터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노출되어 있는 세상. 애인의 눈을 통해 바라본 전범선씨는 기득권의 세계가 아닌 약자의 시선으로 보는 법을 배워나간다.
같은 채식주의자로 동물의 해방을 위해 함께 행동하는 그들의 가치가 같았기에 전범선씨는 애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게 전혀 어렵지 않았다. 만약 전범선씨가 일반 남성들과 다르지 않았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막상 각오를 했지만 저자가 설명하는 채식주의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단순히 고기만을 생각했던 내게 저자는 동물에게 해를 끼치며 만들어지는 모든 제품으로 영역을 확대해간다. 고기는 차치하고 젖소에게 고통을 줘서 짜내는 우유, 그에 따른 유제품 (치즈, 버터), 계란, 라면, 더 나아가 대체육까지 금하며 발효음식, 채식만으로 먹는 자연식물식 위주의 채식주의길은 처음에 정크 비건으로 살아가던 저자에게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하지만 읽어나가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걸 금하면서 왜 사람은 동물을 죽여 먹는 걸 당연시하는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인간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가. 똑같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건만 왜 인간은 동물을 학대하며 착취물을 누리는가. 함께 살아가라고 만들어진 세상에서 정작 한 쪽만이 행복한 걸 평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가장 무릎을 치며 공감한 부분은 조류인플루엔자에 대한 정부의 살처분 비판한 부분이었다.
전염병이 돌기만 하면 무조건 집단 살처분하고 땅에 묻는 모습을 보며 궁금했다. 왜 저들을 치료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한 지인과 나누었을 때 그 지인은 고칠 방법이 없다라는 식으로만 이야기했었다. 그 대답을 들으며 어쩔 수 없는 것일까라고만 생각했는데 저자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코로나가 터질 때 정부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시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염을 최대한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왜 동물에게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지 않는가? 왜 전염병의 원인인 밀집형 사육을 유지하면서 살처분으로만 해당하는가...
아.. 동물들의 사회적 거리 두기, 바로 왜 조류 인플루엔자와 같은 전염병의 원인인 밀집형 사육을 해체하는 것이 바로 첫 걸음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사람과 같은 근본대책이 동물에게 허용되지 않고 죽음을 명하는가... 또다시 조류인플루엔자 소식이 들려오고 있는 이 떄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가부장제는 남자란 자고로 힘이 넘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둘 다 명백한 오류지만 둘이 합쳐져 남자는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쓴다는 미신을 만든다.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은 비거니즘의 실태에 대해서도 저자는 '사냥꾼 남성, 채집꾼 여성'의 기존 이분법을 부정한다. 육식을 선호하는 남성 문화의 배경에 저자는 힘을 강조하는 가부장제 문화에 원인이 있음을 말한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는 읽으면 읽을수록 고민이 많아지는 글이다. 특히 나 혼자만의 식탁이 아니기에 아이들의 식탁을 한꺼번에 바꿀 수 있을까란 고민이 많아진다. 살인적인 밀집형 사육은 반대하면서 그 결과물은 마음껏 먹고 있는 나의 비겁함을 마주하게 된다. 또한 이 글에서 자신있게 비거니즘을 시작하겠다고 나는 말하지 못한다. 다만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채식의 비중을 좀 더 늘리겠다는 것. 그 사소한 시작부터 해보려고 한다.
살고 싶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건 바로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 모두 함께 행복한 길이다. 한 쪽만 행복했던 결과는 이미 우리가 겪어 오고 있지 않은가. 동물의 불행은 결국 부메랑처럼 인간에게 돌아온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 또한 그 결과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나 역시 나보다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주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비거니즘은 취향의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비거니즘. 우리가 가야 할 종착지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별 다섯 개를 먼저 그려야겠다. 너무너무 좋았다는 진부한 말밖에 번뜩 떠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무너무 좋았다. 이 책의 초고는 2021년 첫 열흘 동안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 자락에서 쓰였다. 사랑하는 이와 단둘이 산속 황토집에서 핸드폰을 끄고 지내는 사이, 그들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고- 그 사유의 과정을 글로 남겼다. 그러니까 이 책은 비거니즘과 페미니즘, 평화주의와 생태주의- 또 요가와 로큰롤을 오가는 '사랑'이야기다.
나를 비우고, 특권과 자존심, 자의식을 버리고, 그 자리에 사랑을 채워 넣는 공부를 한다. 눈치 보지 않고 휘뚜루마뚜루 살았던 내가 세상 돌아가는 눈치를 본다. 사랑이란 눈치를 보는 일이다. 우리 모두의 하나뿐인 집, 지구에서 함께 고통받고 살아가는 식구의 안위를 챙기는 것이다. 사랑은 능력주의가 아니다.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자유와 평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사랑은 비거니즘이다. (본문 중에서, 19쪽)
이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느낌표 열 개를 썼다. 그동안 내게 비거니즘은 '채식주의자'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곧잘 글루텐 프리나 키토처럼 다양한 식습관 중 하나로 치환되어 이해되었고, 그들 사이에서도 우유를 먹거나 안먹는 것, 계란을 먹거나 안먹는 것 등으로 계급을 나누는 것 같아 어쩐지 불편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건대 비거니즘은 '철학'이었다. 좀 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채식을 선택했다면, 그 역시 나를 '살리기'위한 것이다. 나를 살리는 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너를 살리는 일. 그 대상이 꼭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오래된 부족주의에 다름 아니다.
해서 '비거니즘'이란 무엇이었던지 다시금 뒤적여본다. 음식, 의복 등 어떤 목적에서든 동물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착취와 학대를 최대한 배제하고, 나아가 인간, 동물, 환경에 이로운 식물성 대안의 개발과 이용을 장려하는 철학과 삶의 방식이라 정의되어 있다. 천천히 따라 쓰면서 '동물'에 다시 한번 밑줄을 긋는다. 임신-출산-육아의 과정을 겪으면서 의식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나는 여성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물에게까지는 그것을 적용시키지 못했다. 여성에 대한 무심한 착취와 학대가 가혹한 것이라면, 동물에게도 마찬가지일 터. 그렇다면 비거니즘은 취향이기 전에 엄연한 정치사상일지도 모르겠다.
요리에는 영 관심도 없고 재능도 없어 아무거나 먹던 날들이 많은 내게, 과일과 곡식으로 야무지게 차린 밥상은 그 자체로 놀라운 것이었다. (사진 한 장 없이 그것들을 상상하게 할 수 있다니!) 식물의 열매인 과일과 곡식을 그들의 '성기'라고 표현한 부분도 신선했다. 사과와 쌀을 먹는 것이 사과나무와 벼의 사랑을 먹는 일이라면, 씨앗을 뿌리는 일은 그들의 사랑을 세상에 나누는 일. 그렇게 사랑이 전해지고, 또 전해지는 선순환적 구조를 상상하다 보니 에덴동산이 이런 곳이겠구나, 생각하게도 됐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그 무엇을 향한 학대나 착취가 없었다. 함께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발 디디고 있는 땅, 먹고 마시는 것 모두가 서로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고 내게로 왔다가 흘러나갔다. 당장 내 삶에 적용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았지만, 그 장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름다웠다.
해서, '지금 우리의 관계는 틀렸다.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완전히 재정립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게 됐다. 하나뿐인 지구라는 집에서 동고동락하는 식구를 전부 아우르는 새로운 집단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하지만 그 경계를 어떻게 허물 수 있을까. 여전히 흑인도, 여성도, 유대인도, 노동자도, 장애인도, 동성애자도- 그들이 그러하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오늘에.
놀랍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비거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설득시킨 그를 따라 오늘 저녁에는 고기를 줄이고, 채소를 올려보려고 한다. 그것이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행동'이므로.
대부분 관심이 가는 분야만 집중하는 편이지만 요즘은 환경 문제를 주목하게 되었어요.
불과 몇 년 사이에 기후 위기를 체감할 정도가 되니, 이건 특정인만의 관심사가 아닌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 것 같아요.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는 전범선님의 비거니즘 에세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어요.
비거니즘은 다양한 이유로 동물 착취에 반대하는 철학이며, 비건 식습관에 그치지 않고 가죽제품, 양모, 오리털, 동물 화학 실험을 하는 제품 등 동물성 제품 사용 등도 피하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을 뜻한다고 해요. 실제로 주변에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사람이 없어서 궁금했어요. 영화 <옥자>를 보면서 인간들의 탐욕스러운 육식 행태가 너무나 추악하게 느껴졌으나 그때문에 육식을 끊지는 못했어요. 완전히 끊을 수 없어서 되도록 덜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자는 지구가 망하기 전에 우리가 자각해야 한다고, 비거니즘에 근거를 둔 생태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선 동물 학대, 성차별, 기후 위기라는 주제가 따로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비거니즘의 시작인 것 같아요. 에세이라고 했지만 내용은 비거니즘과 페미니즘 입문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요.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살림으로 하나 된다. 모두 생존과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비거니즘은 우리의 밥상을 죽임이 아닌 살림의 먹거리로 채우는 것이 시작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중심 사회가 여성의 몫으로 할당하고 폄하했던 살림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죽임의 문명에서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은 공통의 적을 갖는다.
자크 데리다는 그것을 '육식-남근-로고스중심주의 carno-phal-logocentrism'라고 부른다. (35p)
저자가 채식을 시작했을 때 주변 반응은 남성성을 의심했다고 해요. 남자가 힘을 쓰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무식한 논리로 말이죠. 더군다나 페미니스트를 자처했을 때는 에고를 버리고 경계를 허무는 행위였다고 표현하네요. 살림의 시작으로 온전히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비건 페미니스트 연인의 사랑은 살림의 사랑이었다고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당당하고 멋진 것 같아요. 살림이라는 단어가 살아있음, 살려냄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당장 비건이 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왜 비건이 되어야만 하는지 이해했고, 조금씩 변화하겠다는 다짐을 했네요.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라도 바뀌어야 더 이상 지구가 망가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고, 사는 동안 더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비거니즘 에세이' 라는 책의 부제보다 저자의 화려한 이력이 끌렸던 책이었다.
수재 중에 수재만 들어간다는 민사고 출신에 외국 유명대학 졸업자인 전범선 작가
그가 쓴 생각들을 읽어 보자니
과연 동시대사람이 맞을까 싶을만큼 내 생각보다 너무 앞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직 현대사회는 인간사이의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요즘의 말로 편하게 '금수저'하고 불리는 특권층들과 중산층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최하위계층.
나는 늘 인간사이에 존재하는 계급들의 부조리함을 느끼며, 계급들이 사라져 인간은 인간이기에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책의 작가는
인간과 동물사이의 부조리한 관계를 폭로한다.
책을 읽으며, 동물에 대해 이렇게까지 생각했었던 적이 있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점점 확장되어가고 있는 반려 동물들의 영역들을 보며,
인간조차 누리지 못하는 호사를 누리는 반려견, 반려묘들을 보면서
소위 말하는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내 머리속엔 인간 우월주의적인 사상이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나보다.
인간과 동물이 동등한 관계로 살아가는 세상?
인간들 사이에서 조차 저마다의 기준으로 계급이 나뉘는 이 세상에서?
과연 가능할까?
작가가 꿈꾸는 그 세상은 정말 만들어질 수 있을까?
전공이 생명 과학 연구였던지라..
학생시절에 참 많은 실험 동물들을 만나고 필요에 따라 죽이고 했었다.
그런 동물들을 만나고 대하면서 동물들을 죽일 때 불쌍한 마음을 잠시 품은 적은 있지만...
내가 능숙하지 못한 탓에 고통이 길어지다 죽는 동물들을 보며 죄책감과 미안함을 가진 적은 있지만,
실험용으로 사용되는 동물들을 주문하거나 그 동물들을 받을 때는 한번도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실험 동물을 자기 유희를 위해 함부로 다루는 사람들을 보며 같이 분노하고, 욕을 한 적은 있지만,
정복되지 못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동물을 죽이면서 나는 어쩌면, 인류의 과학 발전을 위해 동물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너무나도 당연하게 섭취하는 음식을 보며,
인류의 식량이 되기 위해 죽거나 고통받는 동물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는 나를 되돌아 보게 된다.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이유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때문이다.
남들이 먹으니까 먹는다.
(중략)
만약 인육을 먹는 사회에서 태어났으면 인육도 먹었을 것이고,
고기를 안 먹는 사회에서 태어났으면 안 먹었을 것이다." p.193
당연했던 일들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비거니즘'
조금은 특이한 사람들이나 지향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그들만의 문화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한번도 열어보지 않은 서랍장을 열어준 책이었다.
물론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갑자기 내일 당장부터 고기를 안먹고 비건이 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동물에 대한) 인간의 특권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려한다.
*리뷰어스서평단으로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채식주의자」 동물성 음식을 피하고, 식물성 음식만을 먹는 사람을 뜻한다. 여러 단계를 나누기도 하지만, 동물로부터 파생된 유제품, 꿀, 치즈 등도 먹지 않는 완전 채식을 기준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완전 채식을 하는 사람을 보통 비건이라고 말한다. 비건의 시작은 다양한 이유로 시작한다. 윤리, 동물보호, 자연보호, 반자본주의, 정신수양, 종교, 건강, 미용 등 각자의 이유로 시작한다. 이 중 비건은 윤리와 종교 그리고 가난이 차지한다. 채식인구가 가장 많은 인구가 있는 인도는, 가난으로 인해서 채식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 세계 인구 중 완벽한 채식주의자들을 대략 2억으로 보는데, 그중 1억은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럼 나머지 1억 정도의 인구만이 개인의 목적이 아닌, 공동체와 함께하는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다. 80억 인구 중에 1억은 사실 소수의견에 속한다. 80명이 있는 교실에 1명의 학생이 의견을 낸다 해서 큰 영향력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15년간 비건을 하면서 최근 1년 동안에 크게 경험한 부분이 있다. 윤리적인 시작이었지만, 건강도 챙긴다면 더욱 좋다는 마음이다. 살 빼는 것보다 살지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깡패들은 숙소에서 체중을 늘리기 위해 가축 사료까지도 먹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나는 평생 성인 남성 3~4배까지 먹어도 체중이 늘지 않는 전형적인 마른 사람이었다. F=ma 힘의 공식에서 질량과 속도는 곱하기가 된다. 즉, 힘을 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체중도 필요하든 말이다. 물론, 이소룡처럼 압도적인 속도가 가능하다면, 질량을 무시할 수도 있다. 인간과 비슷한 유인원 중에서 고릴라는 압도적으로 완력이 강하다. 인간보다 작은 침팬지도 팔의 완력이 인간보다 2~3배 높다고 한다.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완력을 포기하고, 뇌의 기능에 집중했고, 대부분 동물보다 느리지만, 그 어떤 동물보다 오래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선택했다.
우리는 조상이 같으니까, 힘센 고릴라의 비밀은 무엇일까? 고릴라가 헬스장에서 중량 운동을 하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힘이 센 동물들을 관찰했고, 단순한 사실을 인지했다. 고릴라와 소는 늘 같은 것 위주로 먹는다. 또한, 힘센 초식동물은 셀룰로스(섬유질)를 장내 박테리아를 통해 아주 높은 효율로 흡수한다. 인간이 대부분 쾌변한다며 내보내는 섬유질은, 본디 생물의 근육을 만드는 굉장히 효율적인 성분이다. 1년 동안 매일 같은 음식을 먹으며, 최대 효율을 얻고자 스스로 실험하였다. 아침은 쌀밥에 무나물, 점심은 쌀밥에 콩나물, 저녁은 쌀밥에 시금치 그리고 가끔 바나나. 체지방 20% 미만에 10kg 이상을 증량하였다. 그저 고릴라와 소가 먹는 것을 따라 했을 뿐인데 말이다.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 이 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저자가 민사고와 옥스퍼드를 나와서 글 쓰고 노래하는 직업을 택한 것과 젊은 나이라는 점이다. 채식주의에 관한 칼럼도 쓰고, 번역과 ‘동물해방물결’이라는 단체의 자문위원 등 다양한 방면에서 채식을 알리는 것에 반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안정적인 집안에서 굉장히 좋은 스펙으로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채우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들 보다 앞선 출발선에서 저자가 택한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찾는 일을 택했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동물을 학대하는 영상은 사회적 문제가 된다. 사이코패스들은 어릴 적 자신보다 약한 동물이나 사람을 괴롭히거나 살해한다. 이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다른 생명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어느 초등학교에서 반년 동안 닭과 돼지를 기르는 실험을 하였다. 아이들이 키운 닭과 돼지를 도축하여 점심 급식으로 내어놓았을 때, 아이 대부분은 식사하지 못했다. 울음을 터뜨린 아이들도 있었고, 다시는 동물 사육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살육하지 않고,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온 동물들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내가 직접 죽이지 않았기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변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는 결국 사회를 방관자들만 살아가는 곳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