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픔이었다. 누군가 기억해야 할 일이 아닌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슬픈 역사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영화 ‘김복동’을 보기 전까진 위안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할머니는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셨지만 꿈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하지만 영화 ‘김복동’이 할머니들의 꿈과 정신을 이어받아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뒷얘기와 감독의 고민과 심정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겹쳐지니 잠시 잊었던 그때의 감동이 다시 떠올랐다. 저자는 책을 쓴 이유가 영화를 제작하며 지나온 시간들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책을 덮고 그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그리고 잊지 말자 다짐해본다.
사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억의 주머니가 있다. 그 주머니에 무엇을 담을지는 각자의 맘이지만, 덩이 덩이 담긴 주머니 속 기억들은 이후의 나를 이룬다.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게 보통이고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지라, 비록 작고 볼품없는 주머니일지라도 그 속엔 반짝이는 무언가는 있을 터. 그 반짝이는 기억들은 고된 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열네 살, 꽃 같은 나이에 군복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을 믿고 나선 후 십 년 가까이 성 노예 생활을 하고 몸과 마음이 망가져버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이 책은 그 할머니들 중 한 분인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감독의 제작 일지다.
할머니들의 기억 주머니엔 무엇이 남아있을까. 나이가 들어 기억이 흐릿해질수록 크기가 작아지고 속이 성기어지더라도, 주머니 속 그 악몽 같은 기억들은 그분들에게 여전히 고통이다.
그 주머니에 압정을 쑤셔넣은 자들은 왜 사과하지 않는가.
용서해 줄 마음이 있으니 잘못을 인정하라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절규에 그들은 왜 묵묵부답인가.
어처구니없게도 우리 정부는 2015년, 과거 만행을 지우기에 급급한 일본 정부로부터 단돈 10억 엔을 받고 위안부 합의 조약을 체결,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한다. 일본 정부는 대통령과 합의가 됐다면서, 정작 피해자인 할머니들께 용서를 구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시험 보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답안지를 건넨 격으로 나선 우리 정부는 더 이상 할머니들의 조국이 아니었다.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고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진정 피해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용건을 뺀 나머지만 정리하고 털어버린 그들은 이 책을 보고, 영화 김복동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친일파는 21세기인 지금도 실재한다.
얼마 전 전범의 후손인 아베 총리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를 주도했던 기시다가 일본의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그 나라의 진정성 어린 사과와 반성은 아직 먼 이야기로만 느껴져 마음이 안 좋다.
[김복동은 달리는 차 안에서 가만히 창밖을 바라본다. 명예를 찾고 싶어 시작했던 싸움,
시간이 어느새 30년이 흘러 있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다면, 아예 신고하지 말고 살걸"
김복동의 상념은 더 깊어간다. p.267]
가슴이 알알해진다. 외면한 건 아니었지만, 더 알려 하지 않았고 더 분노하지 못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 목덜미가 저리다.
몸이 상해가면서까지 기억할 수 있게 영화를 만들어준, 기록하여 책으로 내준 송원근 감독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희망을 잡고 살아.”
내가 기억하는 영화와의 만남은 2019년이지만
‘김복동 할머님의 시간’은 차마 헤아릴 길이 없고
함께 만드신 모든 분들의 세월은 길고 힘드셨다.
제대로 잘 헤아리려 있는 힘껏 애쓰지 않고 보았다는
뒤늦은 한탄과 자책이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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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나는 이 치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 삶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죽기 전에는 사과 받을 수 있을까.
그때 나는 무엇이었는가.
언니는 왜 나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을까.
미안하다는 말로 내 상처가 나을 수 있을까.
세상 어디에, 내 속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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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차가웠지만, 김복동의 삶은 사람이 품은 온기로 따스했다.
그것이 영화 속에 녹아 있다.
차가운 현실과 연대의 따스함이
색 보정 작업을 통해 잘 구현되길 바란다고 김 감독에게 말했다.
‘현실은 차갑되, 사람은 따뜻하게.’ (...)
사실 뉴스타파에서는 색 보정 작업을 할 기회가 거의 없다.
색 보정에도 테마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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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영화 보며 울고 책 읽다 울고...
피해자도 개인도 아닌 인권운동가로 사시다 가신 분에 대해
좀 더 뜻을 잘 헤아리는 후대가 되고 싶다.
16살에 끌려가 23세에 돌아왔다.
환갑이 다 되어 세상에 일본군의 만행과 자신의 존재를 증거로 알린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2011년 12월 14일 ‘평화의 소녀상’, ‘평화비’가 1천수요시위를 기리며 세상에 자리했다,
전 세계를 다니며 싸우는 중에 대신 돈 받고 끝냈다는 제 나라 정부,
문서상 국적은 같아도 친일극우라는 본질을 자랑질하는 이들의 조롱이 이어졌다.
2019년 1월 28일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이는 구십 넷 이름은 김복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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