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태지원
가나문화콘텐츠/2021.7.7.
sanbaram
일상 속 고민으로 시작하여 그림을 통해 위로를 건네는 글을 쓰면서 그동안 스스로가 인생을 해석해온 방식도 되돌아보았는데, 마음속 깊이 자신을 구박하거나, 몰아세우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솔직한 감정을 감추느라 힘들기도 했는데,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면서 새로운 삶의 해석법을 찾아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저자 태지원은 중, 고등학교에서 약 10년간 교사로 재직하며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의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저서로 <그림이 보이고 경제가 읽히는 순간>, <이 장면, 나만 불편한가요>, <최소한의 경제 법칙> 등이 있다.
<그림으로 나를 위로 하는 밤>은 다섯 가지 주제를 다룬다. ‘1장에서는 내 모습이 밉고 싫어 마음을 추스르기 힘든 날, 위로가 되어주는 그림 이야기를 전하고, 2장에서는 인간관계 또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힘든 순간, 위로를 건네주는 그림 이야기가 담았으며, 3장에서는 인간관계에서 혼란스러울 때 도움이 되는 그림 이야기를 풀었다. 4장에서는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림을 살펴보고, 5장에서는 스스로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에게 맞는 행복이 어떤 건지 혼란스러울 때, 답이 될 만한 그림 이야기를 다루었다.(p.7)’고 말한다. 글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일들이다. 저자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힘들 때마다 그림을 통해 위로 받았던 이야기들이다. 몇 가지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흐는 높은 신분의 화려한 인물이 아닌 노동 계층의 소박한 삶을 그려냈다. <구두 한 켤레>도 고흐의 인물화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구두를 신고 이곳저곳을 누빈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을 보여준다.(p.19)” 구두의 주인이 농촌 아낙네든 반 고흐 자신이든 간에 낡은 신발은 소박한 주인의 삶을 대변한다. 화려하지 않고 변변치 않아 보이는 삶,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소박한 인생이 이 작품 안에 담겨 있다.
“당시 미술학교는 남성에게만 허용된 장소였다. 아르테미시아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입학허가를 받지 못했다.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딸을 위해 아버지는 원근법 표현에 탁월했던 동료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딸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배움의 기회는 얼마 뒤 불행한 사건으로 바뀌었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 만난 타시는 아르테미시아를 성폭행 했다.(p.78)” 재판 이후 아르테미시아는 로마를 떠나 피렌체에 정착하여 예술 활동을 이어간다. 역사나 성서 속에서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준 여성들을 찾아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화폭에 담았다. 특히 여성의 강인한 모습을 강조하는 그림이 유명한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그 대표격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잔은 어느 날 모딜리아니에게 왜 자신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모딜리아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리겠소.” 둘의 결혼 생활이 시작된 후 모딜리아니는 점차 <잔의 초상화>에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한다. 눈동자를 그리지 않는 날도 있었다. 잔의 영혼을 나름대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아직 그녀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느낀 닐도 존재했던 것일까?(p.148)” 아무리 어릴 때부터 보아온 가족이라 해도, 생활을 함께 하는 배우자라 해도 타인은 엄연히 타인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상대방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생각하고 쉽게 판단하는 사고방식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표현으로 드러난다. 그런 말은 상대방을 숨 막히게 만든다. 때로는 상처를 준다. 자신이 만든 틀 안에서 상대의 전부를 판단하는 건 위험한 착각일 뿐이다.
“월터 랭글리의 작품 <슬픔은 끝이 없고>는 인생의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림 속에서 유일한 희망을 보여주는 건 위로를 건네는 노인의 존재다.(p.202)”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쳐오거나 깊은 외로움과 절망에 사로잡힐 때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건 누군가의 위로와 온기다.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어딘가에 드러내 보이고 누군가가 이에 공감해줄 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은 점차 끝을 보인다. 외로움과 고통, 불안에 지배당하는 날을 누구나 겪는다. 스스로가 바다 한 가운데 홀로 떠 있는 섬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 순간 외롭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고 스스로를 허약한 사람이라 탓할 필요는 없다. 외롭고 슬프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날도 존재함을 인정하자. 타인에게 기댈 줄 아는 것도 일종의 용기다.
“학부모들을 상대로 사춘기 아이들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강사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부모의 믿음’이라 강조했다.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에 매일 자기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실감하며 상처받는 중이라고 이야기했다.(p.221)” 겉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아이들 모두 부모의 믿음을 절실히 원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까봐 두려워서 자기 아이에게 부모가 “안 된다, 안 된다”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한 번 크게 아이에게 발등을 찍히고 만다는 심정으로 믿어주라는 것이 강연의 요지였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기대와 칭찬, 격려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의 믿음이 간절한 시기를 거쳐 보았기에 이 효과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고 말한다.
“램브란트의 작품<돌아온 탕자>은 인간의 용서와 무한한 사랑, 치유를 보여준다.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얼굴은 밝은 빛으로 강조되어 있다.(p.231)” 그의 손은 아들의 어깨를 따뜻하게 둘러싸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버지의 왼손은 핏줄이 서 있는 남성의 손 형태를 보이고, 오른손은 상대적으로 여성의 손 형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형태의 두 손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을 함께 나타내고자 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힘겨운 생활 끝에 초라하기 짝이 없는 행색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그대로 감싸 안는다. 아들을 탓하거나 추궁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아이가 울음을 터트릴 때, 지금 울고 있는 네 마음이 어떤지 물어본다. 그러면 아이는 마음을 꺼내놓는다. 제 마음을 설명할 수 있는 아이는 강하다는 것이다. 초라하고 구차한 마음까지 숨김없이 기꺼이 꺼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브뤼헐의 작품 속 <아이들의 놀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이들이 하는 행위에는 공통점이 있다. 거대한 목적을 염두에 둔 채 하는 행동이 아니다. 아이들은 순수하게 놀이 자체에 몰입한다. 소똥이나 빗자루 등 별것 아닌 것도 장난감이 된다. 유치해 보이지만 재미있는 일에 몰입하는 순간의 기쁨을 작품은 나타내고 있다.(p.248)” ‘어른의 재미’는 다르다. 성과를 드러내는 일이나 남의 눈에 그럴듯해 보이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어른은 주식 투자나 부동산 투자, SNS 팔로워 늘리기 같은 행위에 재미를 느낀다. 물론 노력을 통해 성과를 내는 일은 흥미롭다. 그러나 일상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일들로 가득 차 있을 경우, 삶의 재미가 떨어진다. 게다가 성과가 오르지 않으면 더 이상 흥미롭지도 않다. 자기계발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위해 하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재미있는 행위’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린아이처럼 장난감이나 피규어를 수집하는 것을 즐기는 이들을 일컫는 ‘키덜트’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어딘가에는 어린 아이 때 충분히 누리지 못한 놀이를 더 즐기려는 욕구가 남아 있다. 당신 마음속의 어린아이는 성숙이라는 이름 뒤로 소멸해버린 것이 아니다. 유치하고 쓸데없는 행동이라도 감행해본다면 삶의 재미가 찾아올 수 있다. (p.251)”
“오스트리아 화가 요하네스 굼프의 <거울 앞의 자화상>은 차별화된 개성을 지닌 작품이다. 그림 속 화가는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p.256)” 그는 자기 얼굴을 그대로 보고 자화상을 그리는 게 아니다. 거울 속에 담긴 자기 얼굴을 머릿속에 아로새긴 다음, 이를 화폭에 담아내는 것이다. 즉, 그림 속에는 서로 다른 얼굴이 세 개 존재한다. 그의 진짜 얼굴, 거울 속에 비친 얼굴, 화폭에 담긴 얼굴. 한 작품 안에 담긴 화가의 세 가지 얼굴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거치는 다양한 얼굴 페르소나를 떠오르게 한다. 그동안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벗으면서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어왔다. 그런 행동들이 가식이거나 내 자아를 배신하는 건 아니었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일련의 행위였을 뿐이다. 중요한 건 이상적인 페르소나를 만들어 머릿속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유한하고 부질없는 생애를 한 장의 그림으로 압축한 화가가 있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이다. 푸생의 <세월이라는 음악의 춤>이라는 작품 역시 고전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다양한 상징으로 가득차 있는 그림이다.(p.313)” 이 작품 한 가운데에서 춤을 추고 있는 주인공들을 살펴보자. 가장 왼쪽의 여인은 장미 화관을 쓰고 아름다운 푸른 상의를 입은 화려한 모습을 한 채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쾌락’이라는 가치를 의미한다. ‘쾌락’의 오른쪽에 있는 머리에 고급스러운 진주 장식을 하고 흰 옷을 입은 여성은 ‘부’를 의미한다. 화려한 ‘쾌락’과 ‘부’에 비해 오른쪽 빨간 옷을 입고 등을 내보이며 춤추고 있는 여성은 다소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자세히 보면 신발도 신지 않고 있다. 이 여성이 의미하는 건 ‘가난’이다. 진주 화관을 슨 ‘부’는 ‘가난’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가난’의 손을 잡지 않고 있다. ‘가난’과 ‘쾌락’ 사이에는 뒷모습만 보이는 남성이 있는데, 그는 영광과 승리를 의미하는 월계관을 쓰고 있다. 그가 의미하는 건 ‘근면’이다. 사람들은 근면하게 살다보면 후일 영광과 성공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월계관은 영광과 성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쾌락과 부, 가난과 근면 모두 즐겁게 춤을 추고 있지만, 그들 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p.316)” 그 유한한 시간을 생각해보면 ‘쾌락’, ‘부’, ‘가난’ 등의 가치나 상태는 큰 의미가 없다. 언젠가 한정된 시간 속에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조건이 충족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미래의 행복보다 지금 움켜쥘 수 있는 행복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흩어질 행복이라면, 시시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움켜쥐고 싶다.p.319)”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기에 현재의 생활에서 지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으로 위로하는 밤>을 권하고 싶다.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태지원
가나문화콘텐츠/2021.7.7.
일상 속 고민으로 시작하여 그림을 통해 위로를 건네는 글을 쓰면서 그동안 스스로가 인생을 해석해온 방식도 되돌아보았는데, 마음속 깊이 자신을 구박하거나, 몰아세우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솔직한 감정을 감추느라 힘들기도 했는데,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면서 새로운 삶의 해석법을 찾아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저자 태지원은 중, 고등학교에서 약 10년간 교사로 재직하며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의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저서로 <그림이 보이고 경제가 읽히는 순간>, <이 장면, 나만 불편한가요>, <최소한의 경제 법칙> 등이 있다.
<그림으로 나를 위로 하는 밤>은 다섯 가지 주제를 다룬다. ‘1장에서는 내 모습이 밉고 싫어 마음을 추스르기 힘든 날, 위로가 되어주는 그림 이야기를 전하고, 2장에서는 인간관계 또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힘든 순간, 위로를 건네주는 그림 이야기가 담았으며, 3장에서는 인간관계에서 혼란스러울 때 도움이 되는 그림 이야기를 풀었다. 4장에서는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림을 살펴보고, 5장에서는 스스로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에게 맞는 행복이 어떤 건지 혼란스러울 때, 답이 될 만한 그림 이야기를 다루었다.(p.7)’고 말한다. 글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일들이다. 저자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힘들 때마다 그림을 통해 위로 받았던 이야기들이다. 몇 가지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흐는 높은 신분의 화려한 인물이 아닌 노동 계층의 소박한 삶을 그려냈다. <구두 한 켤레>도 고흐의 인물화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구두를 신고 이곳저곳을 누빈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을 보여준다.(p.19)” 구두의 주인이 농촌 아낙네든 반 고흐 자신이든 간에 낡은 신발은 소박한 주인의 삶을 대변한다. 화려하지 않고 변변치 않아 보이는 삶,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소박한 인생이 이 작품 안에 담겨 있다.
“당시 미술학교는 남성에게만 허용된 장소였다. 아르테미시아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입학허가를 받지 못했다.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딸을 위해 아버지는 원근법 표현에 탁월했던 동료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딸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배움의 기회는 얼마 뒤 불행한 사건으로 바뀌었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 만난 타시는 아르테미시아를 성폭행 했다.(p.78)” 재판 이후 아르테미시아는 로마를 떠나 피렌체에 정착하여 예술 활동을 이어간다. 역사나 성서 속에서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준 여성들을 찾아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화폭에 담았다. 특히 여성의 강인한 모습을 강조하는 그림이 유명한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그 대표격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잔은 어느 날 모딜리아니에게 왜 자신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모딜리아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리겠소.” 둘의 결혼 생활이 시작된 후 모딜리아니는 점차 <잔의 초상화>에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한다. 눈동자를 그리지 않는 날도 있었다. 잔의 영혼을 나름대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아직 그녀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느낀 닐도 존재했던 것일까?(p.148)” 아무리 어릴 때부터 보아온 가족이라 해도, 생활을 함께 하는 배우자라 해도 타인은 엄연히 타인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상대방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생각하고 쉽게 판단하는 사고방식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표현으로 드러난다. 그런 말은 상대방을 숨 막히게 만든다. 때로는 상처를 준다. 자신이 만든 틀 안에서 상대의 전부를 판단하는 건 위험한 착각일 뿐이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창 옆에 앉아 조용히 책에 몰입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평화로움 그 자체다. 초록색 의자, 초록잎이 풍성한 화분, 창의 반 정도를 채우고 있는 나무의 초록빛.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이다. 이런 그림 한 점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때론 누군가의 말보다 그림 한 점이 커다란 위로가 되기도 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니까. 저자 태지원은 10여년간 교사로 일했는데, 지금은 휴직을 하고 남편을 따라 중동의 작은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낯선 환경에서 불안함, 외로움을 느낄때 미술사 관련책을 보았고, 그림 속 풍경과 화가의 인생에서 위로를 받았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지혜를 얻었다고 한다. 그 시간들이 이 책 속에 담겨 있었다. 저자는 어떤 고민을 했었고, 어떤 그림들을 통해 위로 받고 단단해질 수 있었을까? '당신만 그런게 아니라는 위로' 라는 프롤로그에 벌써 내 마음은 움직이고 있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기도 하니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때로 돌아가고싶어? 라는 질문을 주고 받은 경험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고3으로 돌아가 미친듯이 공부를 해보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3~4살일때로 돌아가서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으로 바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질문이고 답임을 잘 알고 있다. 이효리가 과거에 대해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을때 남편 이상순이 그렇게 말했다한다. "그때는 또 그럴 이유가 있었던 거야."라고. 저자가 그 장면에서 깨달았던 것처럼 나도 그런거구나 공감할 수 있었다. 모든 행동을 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순간의 판단이 중요할 뿐, 후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아내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구해서 나오던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깨는 바람에 에우리디케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신화 속 한 장면으로만 생각했던 그림이었는데, 저자의 말을 듣고 나니 이 그림이 다른 의미로 보였다.
과거의 어떤 시점을 돌아보며 마음 아파하고, 그 시점의 나를 탓하고 후회하며 보낸다.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현재로 나아갈 힘이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과거를 자꾸 돌아보며 후회하지 말라는 금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p 65
좋은 일이 있을때 마음껏 축하해주는 것은 쉽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며칠 전 후배가 건강이 많이 좋지 않다고 전화를 해왔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주 봐왔던 그림인데도 더 오랫동안 바라봤다. 하던 뜨개질을 멈추고, 얼굴엔 주름보다 더 큰 안타까움을 담고, 등에 가볍게 올린 할머니의 손은 아무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위로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듯했다. 두 손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는 젊은 여인의 고통도 그대로 전해져와서 너무도 짠하게 다가오는 그림이었다. 누구나 힘든 일 없이 사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럴때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이 그림을 그린 저자 월터 랭글리도 슬럼가에서 삶을 시작했고, 질병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가난의 풍경에 익숙했다고 한다. 자신디 노인의 저 따뜻한 손길을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외로움과 고통, 불안에 지배당하는 날을 누구나 겪는다. 스스로가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있는 섬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 순간 외롭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고 스스로를 허약한 사람이라 탓할 필요는 없다. 외롭고 슬프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날도 존재함을 인정하자. 타인에게 기댈 줄 하는 것도 일종의 용기다. -p 203
인생의 각 지점마다 가슴 뛰는 일이 존재했지만 30대 후반이 되자 설레는 일은 현저히 줄었고, 삶이 재미없어졌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뭔가를 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성과를 내야하고, 그렇지 않은 일에 돈과 시간, 노력을 들이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하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그런 무기력감에 휩싸인 저자의 마음을 잡아끌었다는 피터르 브뤼헐의 <아이들의 놀이>. 무엇이 저자의 마음을 건드렸을까? 저자는 거대한 목적을 염두에 둔 행동이 아니라 순수하게 놀이 자체에 몰입하는 순간의 기쁨을 보았다 .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놀이는 제각각이지만 정말 진지하게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뭔가를 하고 있는 것 자체로서의 즐거움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현재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앞으로도 어린 나를 허(許)하려고 한다.
하고 싶지만 유치하다는 이유로,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일에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이유로 한사코 피하고 있는 일이 있는가. 늘 효휼적인 일만 할 수 없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면 감행해보기를 바란다. 특정 나이에 맞는 놀이를 정할 필요는 없다. 당신 안의 어린 아이를 이따금 허(許)하자. 유치해지는 만큼 건강해질 것이다. -p 251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그런데' 라는 문장이 가장 많이 떠올랐다. '내 모습이 밉고 싫어 마음을 추스르기 힘든 날, 인간관계 또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힘든 순간, 인간관계에서 혼란스러울때, 위로다운 위로가 필요할 때,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울 때 ' 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쓰여진 이 책을 읽다 보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평소 고민했던 것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성취하는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육아를 하면서 힘들어 하고, 낯선 곳에서 외로움을 견뎌야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그림을 보면서, 화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로를 받고 힘을 내게 되었던 순간들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저자 덕분에 '그림의 힘'을 다시금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힘들때 나를 위로해주는 무언가를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까싶다.
* 사랑님 책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마음 무거운 일이 많았는데 많은 힘이 되었어요. ^^
위로 받고 싶은 날 그림을 만나다
그림을 보면서 그림이 가진 기술적이거나 미적인 요소에 중심을 두고 그림을 작가 개인의 삶과 역사적 맥락에서 알아가는 것이 너무 재미있고 그림이 가진 매력에 빠져보는 시간이 좋다. 작품을 알아가면서 어쩌면 미지의 세계에서 모든 게 신비롭게 여겨지듯 하나하나를 알아가는 게 설레면서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림을 감상하면서도 실제 나의 삶과 연결해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경지엔 이르지 못했던 내게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이라는 책은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해줄 것 같아 책이 내 손에 도착하기 전부터 기다려졌다.
작가 태지원은 교사 생활을 10년 정도 하고 지금은 잠시 휴직을 해 남편을 따라 중동의 작은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며 브런치에서 작가로 활동 중이다. 작가가 낯선 환경에서 생활하며 불안감과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평소 글쓰기와 그림을 좋아하던 것을 바탕으로 브런치에 매거진을 열고, 일상 속 고민을 화가의 이야기와 함께 담아 글을 올렸고 그렇게 연재한 이야기를 엮은 글로 제8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이 책이 출판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괴롭고 고통스럽고 슬플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피하고 싶은 감정이나 사건들은 나 혼자만 겪는 불행이 아니라는 것을 그림의 감상을 통해 지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준다.
나를 사랑하기 힘든 밤, 상처가 아물지 않는 밤, 관계에 답을 몰라 헤매던 밤, 위로다운 위로가 필요한 밤,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운 밤이라는 다섯 개의 큰 틀로 나뉘어 있다. 매회 에피소드마다 작가의 실제 겪었던 일로 이야기를 시작해 그림을 소개하며 그 그림을 보며 우리는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는지 결국 우리는 슬프고 지치고 힘든 상황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1장 / 나를 사랑하기 힘든 밤, 그림을 읽다
◆39세에는 빛나는 커리어우먼이 될 줄 알았건만
작가는 젊은 시절에 30대 후반이면 자신은 빛나는 커리어우먼이 되어있을 거로 생각했었지만 현실의 모습에선 육아에 지쳐있고, 휴직 상태이며, 외모도 가꾸지 않아 초라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을 때 위로를 얻을 수 있는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소개된다. 평생동안 꾸준히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바로크 시대의 거장 화가 렘브란트 판레인은 젊은 날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시절과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며 노년기의 빈곤한 삶을 살아간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초상화를 남겼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그가 자기 인생을 미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년으로 갈수록 그의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한물 간 화가’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자신의 자화상을 실제보다 아름답게 꾸미려 하지 않았다. 화려했던 젊은 시절에 비해 노년으로 갈수록 명성과 사회적 · 경제적 지위가 초라해졌으나, 그림을 놓지는 않았다. 후일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의 화가’로 미술사에 의미 깊은 이름을 남겼다. (p.30)
지금의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고 슬퍼 보이고 현실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현재를 버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나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 나온다고 작가는 말한다. 나도 젊은 날 내가 중년이 되면 전문직으로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직장 내에서도 분명 인정받고 일하는 엄마인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 상상했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생각도 못 해봤던 전업주부의 역할을 하며 내 삶이라는 건 가족들을 챙기는 것이 가장 큰 목표가 되어버렸고 여전히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는 동료들을 부러워하며 그냥 현실에 안주한 내 모습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이 참 초라하게 여겨졌던 게 아마도 30대 후반까지 심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아픈 아이들 돌보면서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고 아이는 건강해졌지만 내가 쌓아오던 경력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아 내내 그 미련을 떨치지 못하며 우울한 생각에 젖어있었다. 아이들이 자랐지만, 온전히 마음 놓고 다시 직장에 복귀할 수 없었던 상황이 지속되면서 아마 내 성취감은 바닥을 쳤던 것 같다. 그러다 지금의 현실을 인정하고 지금 내가 전업주부로서 할 수 있는 것 중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을 부담 없이 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학부모 교육과 강연회를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지금 내 모습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처럼 부모도 지속적으로 좋은 부모가 되는 공부를 해야함을 깨달았다. 취미생활도 하게 되고 좋은 인연들과 나눔의 시간을 가지면서 나의 현실과 상황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내가 원했던 모습이 짠하고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분명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옆에 있어 주는 든든한 엄마의 역할은 잘해 나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미래엔 분명 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 꿈꿔본다.
미래의 자화상은 내가 그리는 것이다. 현재의 내 모습을 미워하지 않고, 앞으로 더 나은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 39세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일 것이다. (p.39) |
2장 / 상처가 아물지 않는 밤, 그림을 읽다
◆인간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
작가는 남편을 따라 중동으로 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육아나 생활 정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깊은 인간관계로의 발전까지 생각할 수 없으니 외로움은 더 커져갔다. 그렇다고 성향이나 취향이 맞지 않는 사람과 친구로 지내기 위해 계속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은 화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아를에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되지만 세상과 사람, 예술을 바라보는 견해가 달라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했고, 결국 고갱과 다툰 고흐는 정신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된다.
고흐는 아를에 정착하는 데 도움을 준 지누 부인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교양과 품위를 갖춘 인물로 표현했다. 반면 고갱은 지누 부인을 싸구려 술집 여주인의 모습으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 고갱과 친분을 쌓고 가깝게 지내던 인물들을 뒷배경에 호색한과 술꾼처럼 그려 넣어서 고흐와 전혀 다른 입장차이를 표현했다.
맞지 않는 관계, 마음이 변한 관계에 매달리고 이를 붙잡으려 노력할수록 관계는 손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아이들이 유치원시절 같은 또래의 엄마들과 교류를 하며 알게 된 한 친구는 유쾌한 말투와 똑 부러진 살림 솜씨로 혀를 내두르게 했고 이 친구를 통해 육아 정보도 많이 알게 되어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이 친구는 상대방이 가진 장점을 단점으로 받아들였고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는 게 일상적이였으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은 완벽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친구의 개인적 아픔을 알았기에 나는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지만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가장 최고여야하는 마음가짐이 너무 부담스러웠고 그 친구를 만나면 받게 되는 스트레스에 지쳐가고 있었다. 차라리 그 친구에게 신경 쓸 시간에 가족에게 그리고 고마운 사람에게 더 잘하면 내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 점차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래 나랑 맞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며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고 결정을 하게 되니 한결 내 마음도 편했다. 물론 그렇게 정리하기까지 친구가 내게 느낀 섭섭함도 컸었고 나 또한 마음이 편치 못했지만 난 더 생산적인 생각을 하고 싶었고 더는 그 친구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기에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가끔은 그 친구 생각이 나지만 아마도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여겨진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냥 우린 서로 맞지 않았던 거로.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에 유통기한이 있듯 이 관계도 유통기한이 다 되었구나. 이제 놓아두어야겠다.’ 이제는 안다. 관계의 유통기간이 끝났을 때는 손에 쥐고 있던 힘을 푸는 편이 낫다는 것을, 맞지 않는 관계를 억지로 끌고 갈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다. (p.101) |
3장 / 관계의 답을 몰라 헤매던 밤, 그림을 읽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약간의 자유를 얻는 방법
작가는 착하고 이타적인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켰는지 궁금해하면서 이야기의 중심에는 항상 타인이 있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것을 표현한 그와 달리 자신은 그런 면을 밖으로 표현하지만 않았을 뿐 그런 마음을 교묘히 숨기고 산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를 통해 발견하게 되니 그의 행동이 불편했다고 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힘들어질 때면,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삼중 초상화를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찰스 1세는 자신의 대리석 흉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반 다이크에게 삼중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이탈리아에 있던 조각가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에게 흉상을 제작하기 위한 자료로 보냈다. (중략) 삼층 초상화에서 왕의 얼굴은 정면, 옆면, 그리고 4분의 3 정면으로 담겨 있다. (중략) 왕은 자신감에 찬 시선과 품위 있는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중이다. 마치 한 명이 여러 자아로 분열되어 있는 듯 보이는 모습이다. 작품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나의 자아가 셋으로 나뉘어 내가 또 다른 나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p.181)
많은 사람들은 주변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랑과 걱정을 할 수는 있지만 각자 자신에 관한 생각만으로도 고민하기에도 바쁘다. 내가 하는 행동이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노심초사하고 내 실수를 지적하거나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고민하지만 실제로 주변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내 말과 행동이 남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나도 누군가의 앞에 나서야 할 때 실수는 하지 않을지, 누군가에게 실망을 끼치지 않을지 걱정을 자주 하게 되는데 이게 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주변의 기대와 부응에 나를 맞추기보다 소중한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차피 나에 대해 가장 많이 걱정하고 고민하며 관심을 기울이는 건 나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지 만,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나를 사랑하고 아끼며 생각할 사람 역시 나다. 내 실수나 잘못, 실패. 인생사가 남들의 머릿속에 거대하게 자리 잡을 거라는 생각은 버릴 필요가 있다. 약간은 뻔뻔하게, 약간은 바보처럼 실수하며 살아가도 괜찮다. (p.184) |
4장 / 위로다운 위로가 필요한 밤, 그림을 읽다
◆위로받고 싶어 카톡을 친구 목록을 뒤적이던 밤
누군가에게 힘겨운 마음을 호소하고 싶어서 카톡 친구 목록을 뒤적였지만 섣불리 연락할 수 없었던 작가는 그런 자신이 누군가에게 쉽게 기대지 못하는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서러움과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는 서툰 인간이라는 사실에 눈물을 쏟아냈다고 한다. 척박한 현실과 고통을 견디게 하는 담담한 위로의 힘을 화폭에 담아낸 화가 윌터 랭글리가 소개된다. 19세기 영국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슬럼가 생활을 거쳐 가난한 이들의 힘겹지만 일상적인 풍경을 담아내 성공한 화가라고 한다. 랭글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슬픔은 끝이 없고>는 고요한 바다를 배경으로 젊은 여인은 슬픔에 차 있지만 뒤 배경에 자리한 바다는 평온해 보인다. 무심한 바다와는 다르게, 젊은 여성을 위로하고 있는 노년의 여성을 통해 그의 손에 담긴 온기가 전해져 온다.
<슬픔은 끝이 없고>는 인생의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림 속에서 유일한 희망을 보여주는 건 위로를 건네는 노인의 존재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쳐오거나 깊은 외로움과 절망에 사로잡힐 때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건 누군가의 위로와 온기다.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어딘가에 드러내 보이고 누군가가 이에 공감해줄 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슬픔은 점자 끝이 보인다. (p.202)
이 그림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픈 아이를 돌보며 아이 앞에서 울 수 없으니 혼자 몰래 울었던 기억들이 생각났다. 너무 힘들었지만 누군가에게 나의 상처를 쉽게 보여주기 싫었고 가족들에게도 힘든 내색을 하기도 싫었다. 그런 날들이 연속이었고 마음도 몸도 지쳐있을 때 고맙게도 내 속내를 다 보여주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며 그들로 인해 나는 조금씩 마음의 여유도 생겼고 아픔을 나눌 수 있다는 걸 경험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들은 나에게는 소중하고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나를 다독여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내 마음을 다 보여 줄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축복이라 생각된다.
외로움과 고통, 불안에 지배당하는 날을 누구나 겪는다. 스스로가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있는 섬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 순간 외롭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고 스스로를 허약한 사람이라고 탓할 필요는 없다. 외롭고 슬프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딘가에 기대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날도 존재함을 인정하자. 타인에게 기댈 줄 아는 것도 일종의 용기다. (p.203) |
5장 /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운 밤, 그림을 읽다
◆“망하면 어때”라는 말이 더 힘이 되는 이유
작가는 일기를 쓰며 의도치 않았지만 결론이 항상 마음속의 긍정을 강요하며 ‘잘 될거야’라는 최면을 스스로에게 걸고 있음을 깨닫는다. 일기에서조차 내면의 진정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지 못하고 긍정을 강요하고 있으니 거짓말로 착한 결과를 적고 있었다는 것이다. 절대 열어보면 안 된다는 경고가 있었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는 상자를 열게 되고 상자 안에 있던 질병, 욕심, 시기, 질투 등의 부정적 감정과 가난과 전쟁, 질병 등 인간에게 고통을 불러오는 재앙이 세상으로 튀어나오게 된 것이다. 판도라가 놀라 다시 뚜껑을 닫아버리지만 상자 속에 남은 것은 ‘희망’이라는 존재라는 게 신화의 주된 이야기다. 이 판도라의 상자 신화 이야기를 담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판도라>가 소개된다.
많은 이들이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희망의 가능성을 강조하며 어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반대로 희망은 세상 밖으로 빠져나간 고통과 재앙을 다시 상자 속으로 끌어와 가둘 수 없다. 재앙이나 불행을 단순히 ‘희망’이라는 심리 상태만으로 막을 수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뜻하는 대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모두 다 ‘그래 좋아질 거야’하는 마음만 먹으면 좋게 해결되는 것도 사실 너무 허무맹랑한 기대이지 않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기대를 하게 되고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으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하지만 정말 희망을 품어도 되지 않을 일은 마냥 마음속에 붙잡아 두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며 ‘망해도 괜찮다’라며 다른 일에 다시 집중하는 것도 나를 위한 위로가 될 것이다. ‘그래 망하면 어때. 해본 게 어디야. 괜찮다’라고 나 자신을 다독여 주고 싶다.
감정을 다 터트린 후 마음을 비워내고 나면 보인다.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 가라앉은 희망이. 현재 상황이 괜찮다는 억지 왜곡도 아니고,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헛된 망상도 아니다. 상황이 좋아진다는 기대를 걸지 않아도 그저 내 길을 걸을 수 있는, 괴상하지만 작은 희망, 역설적이게도 “망하면 어때”에 담긴 희망과 용기가 우리의 하루를 버티게 할 수 있다. (p.300) |
총 35편의 에피소드가 실린 이 책의 내용을 다 소개할 수 없어 아쉽지만, 하나하나가 나에겐 큰 위로가 되었음을 말하고 싶다. 미술감상 초보자인 내게 그림을 통해 정말 내 속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위로를 해주듯 그렇게 이 책과 나는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기며 그림을 보며 너무 좋아서 손에서 놓기가 아쉬웠고 또 편하게 잘 읽히니 너무 빨리 책의 끝을 만나게 되는 걸 최대한 미루고 싶었던 책이기도 했다. 그만큼 내 이야기를 써놓은 듯한 글에 공감하게 되고 뛰어난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아도 충분히 내 등을 토닥여주는 듯 괜찮다는 위로를 전달해주었다. 평소 알았던 작품들도 있었지만 몰랐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가장 좋았던 점은 그림을 통해 이런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동이 차곡차곡 쌓였다는 것이다. 평소 그림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리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가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고 이런 위로를 나에게 전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림 감상 초보자인 나도 미술작품에 대한 감상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 나도 그림을 보는 것을 넘어 나만의 감상법으로 그림을 읽어 보려 한다.
이 책은 그림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나 그림을 잘 모르지만 그림이 어떻게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지 궁금하신 모든 분께 권해드리고 싶다. 알고 있던 그림들도 색다르게 만날 수 있고 그림을 몰라도 편하게 작가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그림에 빠져있는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명화를 봐도 그게 왜 유명한지 잘 모르는 사람도 어떤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본능적 자극 요소가 있다. 내용을 읽어야 이해가 되는 글과는 달리 직관적인 이미지로 전체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고전 명화는 작가의 역사나 시대 배경을 알면 더 재미도 있고 이해도 되나 그림을 보는데 꼭 그런게 필요하진 않다. 그저 보는 것 만으로도 위로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림을 잘 모르지만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위로도 받고 그림도 볼 수 있는 이 책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솔직히 이야기 하면 위로라는 주제보다 그림에 얽힌 작자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이 책이 주는 위로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그림을 통해 저자가 느낀 점을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에 의거해서 에피소드를 풀어내고, 독자는 반대로 그 에피소드에 공감을 먼저 하고 그림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일 게다.
그러면서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공감적 위로를 저자와 독자 모두가 교류하는 것이다.
이건 사실 친구간에 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런 친구가 없거나 아무리 친구라도 그런 이야기의 교류까지 하지 못할 때 이런 글을 읽고 위로 받을 수도 있겠다.
이 책은 프롤로그 부터 '당신만 그런게 아니라는 위로' 를 받는 것을 표방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 나만 그럴 수도 있는 - 지극히 개인적 감상을 이야 하자면 -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라는 위로는 어떻게 보면 나는 특이한 사람이 아니구나, 나는 튀는 사람이 아니구나 라는 식의 소속감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남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도 한 몫 할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공감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외로움에는 그게 특효약이다.
그런데 이게 좀 과하면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데 공감을 받는데 너무 집착하게 된다. 누가 인정을 해주면 그게 옳다고 생각해 버릴 수 있다.
개인적인 취향을 고르는 데도 남의 의견을 꼭 들어보고 싶어 하거나 다수에게 결정을 대신 맡기기도 한다. 그러다 반발에 부딪치면 과민 반응을 하게 되고 침울하게 된다. 너무 남에게 좌지우지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공감에 집착하는 사람은 공감을 받지 못하게 되면 자기 성향에 맞는 곳을 찾아 나서서 위로를 받는다.
'나만 그런' 사람에 가까운 사람도 '나만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 에서는 '나만 그런게 아닌 사람'이 된다.
특정 성향이 있는 양 극단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면 반응도 정 반대이다. 그저 '답정너' 식 위로를 받으려면 맞는 성향의 커뮤니티에 가면 된다.
그런데 그런 답정너를 옳다고 착각하는데서 문제가 더 발생하기도 한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는 소속감에 너무 집착을 하게 되면 다른 면을 수용하기 힘들다. 다른 타인에게 '우리는 그런데 너만 그렇지 않구나' 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없었는지 잘 생각해 보라. 솔직히 나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 다름에 우리는 너무 민감하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 다른 의견을 내면 과민 반응을 하거나 비웃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그게 무슨 다른 사람에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에도 비웃는 시선을 보이곤 한다. 따돌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소속이나 주류의 흐름,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과하게 몰입한다. 그런 따돌림을 당하지 않고 싶어하는 생각이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위로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지는 않을까 생각해 봐야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면 정말 개인적인 취향이나 생각을 과하게 공감받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성향을 보이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많다. '나만 그런게 아니다' 라는 인정을 받고 싶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너만 그렇게 불안해 한다' 라는 인상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것보단 '나만 그런' 게 좋다. 내가 결정해도 되는 문제는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결정을 맡기는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판단해야 될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집중할 뿐이다.
나만 그런 것은 나만의 개성을 나타내줄 수도 있다. 조금 특이함을, 다름을 인정할줄 아는 것도 공감이다.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공포감에서 벗어나는게 필요하다
나만 그런게 아닌면은 지금까지 집단사회문화에서 많이 겪었고 싫든 좋든 따르게 되어있다. 개성을 중시하는 나조차도 그렇다. 나도 보통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면이 분명 존재한다. 그것을 감추려고 하기 보다는 나만 그렇다 그게 뭐 어때서 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즉 분별력이 필요하다.
나만그런게 아니거나 나만 그렇거나 그 자체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다수의 법칙은 민주주의의 의결권인 것이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 필요 없는 요소도 있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위로는 그게 아닌 것도 안다. 하지만 사람은 의외로 다른 상황에서 같은 논리를 들이밀게 된다. 이것이 굉장히 심한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모아니면 도를 선호하는 것이다. 정치 이야기를 할 때도 물론 그렇고 중도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만 그래도 괜찮을 때' 와 그저 '나만 그런게 아님을 통해 위로를 받을 때' 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부터 인식하고 위로를 받든지 말든지 해야하지 않을까?
소설 은교에서 나오듯 별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답게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은 아름답다는 것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이 공포가 될 수도 있고 그저 담담하게 보일 수도 있고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슬픈일이 있으면 슬픈 노래가 슬프게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지겹고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다. 왜 너는 슬픈 노래를 듣고 슬프지 않니? 수준이 낮구나 라며 대중가요에 수준을 논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그건 바로 그 사람 자신의 인식력과 공감력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알게되고 그림이 주는 위로를 발견하는 과정은 좋았다. 물론 예술의 가치는 답이 없다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해석이나 의미를 다르게 두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 그래야 옳다 라고 까지 할 수 있다.
그림에서 내 나름의 위로를 발견하는 것도 좋다. 저자는 자신이 받은 그것을 공유함으로서 예시를 주고자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이 책에 나오지 않은 그림을 볼 때도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예시.
거기에 반드시 존재하는지도 모를 의미를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저 느낀대로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아픔을 그렸지만 나는 행복을 발견한다면 그게 예술의 가치다. 모르면 모르는데로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좋다. 무슨 의민지 알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는 것일 수도 있다.
[네이버 문화충전200% 카페를 통해 책을 제공받은 뒤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