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선생님의 책을 쌓아두고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다.
때론 읽었고, 때론 구경했고, 때론 바라본다.
솔직히 김진영 선생님의 전작들은
20번이상씩 읽었고,
이 책도 이미 몇 번 읽었다.
그래도 내가 여전히 이 책의 리뷰를 쓰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 묵직한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전히 묵직한 생각을 가지지 못했기때문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는
선생님의 깊은 글을 이해해야지.
가능하...려나...
https://blog.naver.com/mate3416/222286784246
< 책방 하고 싶은 면서기 >
이 책의 독서후담을 기록하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작업으로 느껴진다.
서평의 차례를 기다리는 책들이 여럿이나 머릿속을 쥐고 있는 이 책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다른 어느 책도, 서평도, 사유도 불가능했다. 정리를 해야만 했다. 취할 것은 취하고, 의아한 것은 더 고민해보고, 글쎄? 싶은 것은 일상 속에서 좀 더 두고 보는 것으로의 정리가 말이다. 장황해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아도르노와 김진영】
『상처로 숨 쉬는 법』은 철학자 김진영이 독일의 사상가 아도르노의 에세이 『미니마 모랄리아』를 주제로 한 강의를 엮은 책이다. 김진영의 철학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일반 대중의 비판적 의식이 지금 우리 시대를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아도르노는 사회구조의 지배적 권력에 대해 한층 더 극명한 부정과 비판을 유지한다. 얼마나 혐오하는지 무엇을 강조하는 행위 역시 권력이라며 글에 따옴표를 넣지 않고 단락 나누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한 결벽의 신념에 김진영은 ‘사유가 왜 이렇게 못되먹었냐’는 우리의 물음을 예측하고 ‘이 강의를 끝까지 견딜 수 있을까’ 걱정도 하지만 아도르노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그래도 해보기는 해봐야’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이르게 되고, 아마도 김진영 역시 일반 대중이 그것―자본주의 권력을 해체하고 빼앗긴 우리의 소중한 무엇을 되찾는 쾌거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에 아도르노를 공부하지 않았을까 싶다.
【고집과 극단】
아도르노의 고집에 질려버렸다. 끝까지, 정말 끝인 끝까지 가봐야 한다. 가보지도 않고 화해하거나 종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긍정의 유혹에 단호하다. 일단은, 우선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래봐야 좋을 게 뭐가… 같은 봉합을 세뇌 당해온 우리에게 어렵지 않을 수 없다. 거북하다. 그래도 들어봐야 한다. 그동안 차단당했던 반론을 깨워 물음표를 던져보아야 한다.
【철저와 정확】
아도르노는 삶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려는 이론, 철학, 희망을 거부한다. 진실을 더 깊이 은폐하기 때문이다. 김진영 역시 유행성 짙은 대중 인문학을 우려한다. 마야의 베일이라 말한다. 쉽고 간단하고 짧게 들여다 본 자기 면죄, 이상한 기술을 경계한다. 깊게, 오래 보지는 않겠다는 회피, 불편해지거나 상처 받지 않겠다는 외면을 짚어낸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면피가 아니라 지금껏의 모든 것과 투쟁하며 그것들의 거짓됨을 간파라고 말한다.
【냉정과 냉철】
진정한 비판주의자는 불평불만을 쏟는 이가 아니라 냉정하고 냉철한 비판적 성찰로 은폐되어 있는 권력을 꿰뚫어 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위치도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개인과 자유주의】
두 철학자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내게 만족스러운 개인이 되고 싶어진다. 수치스럽지 않은 개인이 되고 싶어진다.
우선 개인을 정의해보자. 나이고 당신이고 그다. 훼손되지 않아야 할 각자다. 카테고리화될 수 없다. 취향은 나의 독자성에 대한 열정이다. 타인의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다. 인간적, 정신적, 정서적 욕구를 갖는다. 해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개인 각 개체의 자유는 고유하고 고귀하다.
사회 권력은 개인을 지배함으로써 유지된다. 개인의 정신 자유가 힘을 갖추면 사회는 위험해진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거짓 자유주의를 준다. 목숨을 보장하고 굶주림을 해결해줌으로써 개인에게 전보다 많은 자유와 행복을 베풀었노라 말한다.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 사회 자신을 제도화 하고 섹션을 나누어 개인에게 그 중 어느 곳에 거할 자격을 준다. 그 안에서만 지배력을 갖게 한다. 자유주의의 탈을 쓰고 파시즘을 이룩한다.
의문점. 똘똘한 현대인은 어째서 사회에 순종하는가? 욕구의 장난에 놀림 받기 때문이다. 더없이 귀중한 개인의 욕구를 사회는 무적의 자본주의와 변형된 소비를 통해 거짓으로 채워준다. 채워줬다 다시 빼앗는다. 계속해 개인을 욕망케 하여 언제까지고 장난을 이어갈 수 있다. 더럽혀지지 말아야 할 개인의 무엇들이 농락당한다. 그러한 반복을 학습하며 적―사회는 적이 되고 말았다―으로부터 내면화된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가치로 알고 점점 더 즉각적이고 간단하게 순종한다. 개인이 힘을 줄수록 사회의 승리는 더 공고해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적을 지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이 베푼 은혜에 기뻐하는 동안 개인은 사회와 섞여버렸다. 세상 모든 권력을 쥐고 있던 왕은 이제 세상 모든 것의 모습으로 산재한다. 맹렬한 분노로 쳐부수어야 할 성城은 이제 없고 개인을 둘러싼, 개인이 내뿜는 비가시적 무엇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개인은, 우리는 두렵다. 삶의 부조리와 생의 잔인성을 감지하고 상처받지만 어느 곳의 무엇을 겨누어야할지 알 수 없다. 막막하고 캄캄해서 결국 자신을, 옆의 개인을 공격한다. 잘못 향해진 복수가 이 땅 온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리버럴리즘, 결연히 키워내야 할 태도 아닐까.
【삶과 태도】
어렵다. 악취 풍기는 사회악은 이미 뿌리 내린지 오래인데 나 같은 일개 개인이 무얼 할 수 있을까?
태도. 태도로서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응시하는 습관, 생을 꾸려가는 자존심, 사회권력이 은폐한 썩은 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당참, 가벼운 쾌락과 단순함으로 위장한 이데올로기 따위 너나 먹으라는 비웃음, 그러니까, 나는 훼손되지 않겠다는 콧대.
태도는 어떻게 갖추어지는가? 교양이고 공부일 수 있다. 이 둘은 오직 자신만의 범위를 넓히거나 깊이를 더하는 게 아니다. 태도 하나, 자세 하나씩을 배우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본다’는 자기 관점을 갖는 것이다. 좋은 개인으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다만 앎이라는 것,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것, 기호들 속에서 탈기호를 포착하는 것.
【상처와 나】
자, 긴 설득과 반문을 거쳐 드디어 상처에 닿았다.
『미니마 모랄리아』의 부제는 ‘상처 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고 김진영은 이를 ‘엄청난 고통의 발설’이라 말한다. 어디에선가로부터 성찰이 나왔다는 것은 그 곳에 오래 머물렀다는 것이다. 긴 시선으로 계속해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공황을 앓았던 나로서는 맙소사,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조이는 행위. 엄청난 고통.
상처는 무엇인가? 우리가 반드시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했는데 빼앗겨 텅 빈 장소다. 인간적이고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욕구, 자유와 행복이 있어야 하는데 죄다 빼앗기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곳. 훼손되어버린 생의 가장 귀한 곳. 서러운 장소. 권력들이 흔적을 남기는 장소. 슬프게도.
그대는 이 곳, 상처를 가감 없이 오래도록 들여다볼 수 있는가? 나는 하지 못한다. 심장이 조인다. 아프다. 무섭다.
이 곤혹스러운 행위를 해야만 하는가? 그래야 포착할 수가 있단다. 권력이 낸 상처를 성찰하지 않고는 권력을 알아볼 수 없다. 안개처럼 퍼져있어 그동안 눈치 채지 못했던 사회권력을 개인의 상처를 응시함으로써 포착해낼 수 있다. 나를 할퀸 권력을 통찰해내야지만 해를 당한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다, 벗어날 수 있다. 괴로워도 자신의 상처에 머물고, 나아가 그것을 관통해야 한다. 그렇다고 한다.
상처를 응시하는 것만이 가장 정확하고 유일하며 옳은 방법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겁쟁이여서 그럴 수도 있다. 공황 진단을 받던 날, 의사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덮어두었던 상처를 열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애도였을 것이다. 내 귀한 무엇은 내 밖에 떨어져있었고, 그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상처조차 내려앉지 않은, 텅 빈 공간만이 있었다.
쉽지만은 않았던 독서였다. 익숙지 않은 비판이론과 녹록치 않은 분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국, 상처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힘든데 그래야 한다고 나를 몰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신념에 모두 동의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희망은 지식인에게서만 구할 수 있다는 것, 지식인만이 사회 모순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아름다움을 사회를 위해 써야 옳은 미인이라는 것,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름다움을 활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할 마음이 없다. 긍정은 진실을 은폐할 뿐이라지만, 글쎄.
긴 이야기를 돌아보면, 아도르노를 통해 김진영이 강조한 것은 성찰과 깨어남이다. 우리의 기쁨은 권력이 주는 사탕이 아니라 생에 대한 기쁨이고, 그 생은 우리 각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응시함으로써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고, 저마다의 기쁨으로 소중한 생을 살자는 뜻으로 읽었다. 맞나 모르겠다.
눈물을 쏟으며 상처를 열어보이던 날의 아픔이 아직도 서늘하다. 상처에 관한 이 독서후담을 쓰는 내내 내 심장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래서 나는, 벌어진 상처로 숨을 쉬라는 두 철학자에게 줄 수 있는 대답이 없다.
다만 태도, 그것을 오래 생각하였다는 것, 그 하나로 이 긴 독서후담을 쓸 수 있었다. 이제 모두 썼으니 약을 삼킬 것이다. 매일 밤 애도로 삼키는 그 약을 지금, 내 심장이 아파서. 상처는 그런 것이다.
<상처로 숨 쉬는 법>은 철학자 김진영의 아도르노 철학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가 가진 문제의식을 통해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들을 진단해 보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책을 읽어감에 있어서 아도르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사회의 이야기인 만큼 쉽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아도르노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어려운 부분이 없진 않지만, 충분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으면 하는 바람과 아도르노에 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제목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상처'는 절대 뗄 수 없는 것이라는 것과 '산다'와 '살아있다'의 차이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은폐성의 무게'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질 수 있을까?
저자가 아도르노 강의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은폐시키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뉴스들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그런 뉴스를 바라보면서 단순하게 사실로 받아들인다. 어떠한 생각도 없이 받아들이는 사실들은 어느 순간 기정사실화된다. 또한 '옳다 그르다를 분간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도르노의 사유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우리 삶의 조건들, 속살들을 냉엄한 시선으로 돌아보자고 한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상처는 치유하는 것이 아닌 상처 안에 머물면서 상처를 관통'해야 하는 것처럼 정말 자유로운가 행복한가는 한올의 의심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그것을 항상 생각하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기 합리화를 시킨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이만큼이면 충분하다고.
우리가 쓰는 물건 중에 소비하지 않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물건들이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관계를 맺어가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한 물건들이 인간이기에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세상에 대한 그리고 관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의 영역이 아닌 항상 남을 의식하는 영역이 생겨남으로써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불법을 막기 위한 행동들이 더욱 큰 슬픔을 주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슬픔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당한 분노'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정당한 분노라는 것은 '산다'는 것이 아닌 '살아있다'라는 표현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자신이 선택한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사회나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것도 중요한 것처럼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삶을 사회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리딩 투데이 지원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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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타자에 대한 꿈]
배려는 마음을 살피는 것,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 산업주의가 들어서면서 차이는 배려의 대상이 아닌 차별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왜 그럴까?
가치의 확일화 문제에 있다. 차이가 인정된다는 것은 저마다 다른 가치들이 모두 인정된다는 것인데, 가치가 획일화되어버리면 가치 기준은 오로지 하나이기 때문에 차별이 될 수 밖에 없다. 가치 획일화는 자본주의 구조와 떨어질 수 없다. 이는 모든 객관적 권력이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생존 법칙이 되어버렸다. 아도르노는 생존을 하려면 객관적 권력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회를 현대사회라고 말한다. 배려의 불가능성은 위안과 위로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아도르노는 허위의식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해결할 수 없으며, 객관적 권력의 문제를 통찰과 비판 의식을 통해서 그나마 작은 위안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상품이 된 위안을 '슬픈 무책임'이라고 표현한다. 배려는 우월감을 가진 하나의 권력이 될 수도 있다.
- 배려와 위로, 위안이 쉽지 않으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저자의 말이 깊게 공감된다. 나는 진심을 담는다해도 자칫 섣부른 위로가 될 수도 있기에 위로와 배려는 주고받는 어떤 입장에서도 참 조심스럽다. 그리고 배려를 배려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라면 이렇게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지도 않았을 거라는 말이 와닿는다. 위로가 상처를 부르는 세상. 오직 가치 획일화 문제만일까? 그리고 확 와닿은 말씀, "그 사람의 상처를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 먼저예요. 절대로 사랑이 먼저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