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세상을 뒤집자.
-페트라 켈리
페트라 켈리는 ‘녹색의 잔다르크’로 불린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여성, 환경, 인권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열정적으로 했다. 그녀는 참여와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그녀의 정곡을 찌르는 말은 얼마든지 부드럽게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삶을 되새겨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는 가장 개인적이며 정치적으로 각인되었다.
이길보라의『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보면서 ‘코다의 잔다르크’를 떠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은 낯설은 경험을 통해 코다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코다(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s’ 의 약자로 농인 부모의 자녀를 말한다. 저자는 코다에게 주어진 역경과 고난을 기꺼이 감수한다. 그러면서 눈물대신 “나는 코다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비장애인 세상이다. 결과적으로 장애인은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장애인에 대한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 장애인들을 받아들이기에 현실의 벽은 너무 거칠고 높다. 원하는 학교에 가는 것도 그렇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도 그렇고,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는 게 힘든 것도 그렇다. 장애인에 대한 권리를 마치 혜택으로 주는 관행이 계속되는 한 이러한 모순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코다의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 책임에 비례해서 삶의 의미는 세상을 더 좋게 만들려고 한다. 저자는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가 한국과 일본에서 개봉했을 당시의 경험을 통해 실질적인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한다. 가령, 한국에서 장애인용 복지 카드는 등급에 따라 영화표의 비용을 감면하거나 할인해준다. 반면에 일본은 장애 수당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장애를 증명해야 하는 반면에 일본은 장애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부드럽게 바꾸기 위해서는 장애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장애극복이 아닌 ‘장애해방’이라는 것.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눈물겹다. 그러니 도와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장애 해방은 장애인을 나와 같은 동등한 권리로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몸속에 깊숙이 뿌리박힌 고정관념을 버리고 ‘나’가 ‘너’가 되는 일이다. 장애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타인이다. 이런 점진적인 변화 없이 제도적으로 장애인의 권리를 말하는 것은 공정하면서도 불평등하다.
만약에 당신의 몸이 장애를 가지게 된다면 부끄러워야 할까? 이런 질문에 저자는 청각장애인 어머니가 당신의 수화언어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것을 보여준다. 청각장애인들에게 듣는 언어는 무용지물이다. 이전까지 언어는 듣는 것이 전부라 여겼다. 하지만 청각장애인들의 수화언어를 보면서 언어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수화언어, 즉 시각 언어는 청각장애인들에게 당연한 권리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때 장애인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 부끄러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돌직구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할 주제로 확대된다. 그래서 저자는 어머니를 이어 재차 삼차 장애해방을 거듭 말하는 것이다.
코다 이외에도 저자의 이미지는 로드스쿨러(road schooler: 학교가 아닌 길거리에서 삶을 배우는 사람), 페미니즘, 영화감독, 작가 등등 다양하다. 다양한 이미지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우리 사회의 왜곡되고 은폐된 속살을 거침없이 파고든다. 그녀의 생각은 무모하고 과감한 경험에서 기억되고 발견된 것이고, 굴곡 많았던 자신의 삶에 절망하지 않고 거대한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열린 질문’을 듣고 있으면 답답했던 가슴이 펑 뚫린 느낌이다.
그녀가 세상에 던지는 열린 질문은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닫힌 질문은 말 그대로 폐쇄적이다. 가령, 여성영화감독이라는 차별을 받으면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예’, ‘아니오’라는 이분법적 답변에서 끝나고 만다. 하지만 열린 질문은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즐겁게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가 감독의 상상력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쯤 되면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없는 세상이다.
새로운 물결은 주류의 입장에서 보면 자꾸만 발목을 잡아 위험하다. 하지만 비주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만약 당신이 비주류 즉,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서 그녀의 생각에 등을 돌린다면 우선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봐야 한다. 비주류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악순환이기 때문이다. 비주류는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을 일시적으로 대면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계속해서 차별 없는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동참하게 된다.
그래서 일까? 그녀의 정치적인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에 공감하게 된다. 국민들이 당리당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 정치를 보면서 실망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녀가 정치적인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비평하고 있는 것은 세상을 각자 방식대로 ‘볼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볼 권리에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사회적인 ‘소수자’가 되며 차별을 당하더라도 침묵하고 말 것이다.
그녀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침묵하지 않고 행동했다. 남들이 볼 때 그녀의 행동은 무모하고 때로는 ‘개고생’이라는 쓴 소리를 들을 정도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어떤 일이든지 과정을 생략하면 문제를 정의할 수 없다. 경험은 그녀를 단단하게 보호하고 행동하게 했다. 직설적인 여러 갈래의 목소리를 하나하나를 들을수록 그녀의 정체성이 뚜렷해졌다. 그녀는 ‘아티비스트(Artivist)’로 시각화되었다. 그녀는 예술가이며 활동가였다.
우리는 활동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이유는 간단한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배움은 얼마나 부드러운 활동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