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9월의 두 번째
"제임스 A.미치너 "소설(하)"
한 권의 소설이 완성되기 위해 그 글을 쓴 작가가 있고 그 스토리가 더욱 빛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집자가 있다. 그리고 그 책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있고 읽은 후 그 소설에 대해 비평해 주는 비평가들이있다 .
소설이 출판되어 서점에 놓여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그 때부터가 또 다른 시작이다. 많이 읽혀야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좋은 소설이라는 평가도 받아야한다
나도 리뷰를 쓴다. 지금은 간단히 메모 형식으로 쓰고 있지만 한 때는 자세하고 꼼꼼하게 그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적었다. 내가 리뷰를 쓰면서 나름의 원칙을 세운 게 있는데,설사 그 소설이 내 취향에 안 맞거나 뭔가 부족함이 느껴져도 창작의 고통을 뚫고 나온 결과물이고 작가의 창작에 대한 노고는 무조건 인정해주자는 것이었다. 리뷰 몇 줄 쓰는 것도 이리 어려운데 하물며 한 권의 책을 썼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인정을 해 줘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미숙한 독자인 내가 보기에도 좋고 나쁨,완성과 미완성,능숙함과 결핍등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과정이도 나름대로의 색이라 인정해 준다
니 소설을 읽으면서 책읽기에 대한 마음가짐이 좀 더 진지해진다.
소설은 그저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스토리가 담고있는 시대의 모습,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해야함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본다.
''글을 쓸 때 혈관을 통해 뜨거운 피가 흐른다는 강렬한 의식이 없으면, 그 글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글쓰기란 곧 그 신체의 모든 부분을 다 동원해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겁니다. 스트라이버트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죠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그 속에 모든 재료를 다 집어넣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 ( p. 287)'
'예술가는 항상 어느 정도는 사회에 대항해야 하네. 이미 관습화 되어 버린 지식에 대항해서 말일세. 낯선 길을 찾고,기성의 지혜를 논박하고,또 새로운 양상들을 받아들이고 도전하여 재구성하는,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지. 천성적으로 예술가는 반무법자라네. 반고흐는 우리의 색채 감각을 공격했고, 바그너는 음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뒤흔들어 놓았지. 옛날 케임브리지의 그 젊은 친구들은 삶의 예술가들이었다네. 그 점에선 그들을 능가하는 사람들이 없었어. 삶의 중심 지대를 곧장 가로지른 사람들이라네 (p. 320 ~ p. 321)'
'나는 이제 소설이란 실제의 삶 속에서 잉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열정이나 고통을 마치 작가 자신의 것인 양 강렬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뚜렷한 동기 없이 움직이는 잘못 묘사된 인물들이 계몽적인 사상을 전하는 말들로 소설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p. 430)'
'나는 소설가에게 요구되는 통찰력을 가지지 못했다. 내가 가진 것은,어떤 글이 옳은 글인가에 대한 식별력 뿐이었다. 나는 틀림없이 좋지 못한 글을 밝혀 내는 안목은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던 것을 남들이 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는 있었다 (p. 431)'
'지금껏 내가 책을 사랑해왔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책이란 신비스러운 존재였었다. 마치 그것들이 저절로 마력에 의해 솟아나듯이 도서관 책장에 꽂혀 있는 완성된 물건으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p.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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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하)
제임스 미치너 (지음) |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펴냄)
작가와 편집자의 이야기를 담아내었던 상권에 이어 하권에서는 비평가와 독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책이라는 공통의 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책에 대한 애정과 접근법의 방식은 차이를 보인다.
각 장의 화자를 만나게 될 때마다 그들이 어떻게 책을 처음 만났고 그들의 인생에 어떻게 책이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사연을 알아가는 재미가 퍽 컸다.
강의실 벽면에 그려놓은 아트레우스 가의 계보도를 활용한 칼 스트라이버트의 강의법은 실제의 강의에서 사용되어도 꽤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지 마라. 대신 글로 발표하라.> 글로 써서 남기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본문 309페이지), 출판사는 위대한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쓰레기 같은 글들을 파는 것일세(본문 328페이지). 등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를 통해 제임스 미치너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티모시 툴과 제니 소어킨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이들을 편집자 이본 마멜에게 소개해준 칼의 안목은 높이 살 만하지만 요더를 향한 질투와 비평가로 만족하지 못하고 작가로 등단한 무리수에서 천재라 불리운 지식인도 피해가지 못한 인간적인 욕망을 보았다. 그러나 요더를 향한 독설이 단순히 개인적인 질투가 아니라 문학이라는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정체되지 않고 나아가는 변화를 바라고 있었음이기에 이해도 된다.
보통의 사람들은 주로 독자의 입장이고 독자의 시선에서 책을 읽는다. 우연히 읽게된 책 한권으로 인생책을 만나기도 하고 애정하는 작가의 책들을 모조리 섭렵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한다.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티모시 툴의 미완성 유작 원고를 출판하려는 사연에서는 얼마전 읽은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이 떠올랐다. 아마 이본 마멜이 칼 스트라이버트와 제니 소어킨의 협조를 받아 티모시 툴의 유작 원고를 출판하였듯이 그런 과정을 통해 <최초의 인간>도 세상의 빛을 보았을 테니 말이다.
루카스 요더가 독자들에게 받은 편지의 내용은 마치 이쪽 세상 독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속 시점은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이지만 이들의 얘기를 보는 나는 이들의 얘기조차도 독자의 시점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책을 바라보는 시각, 접근법은 모두 다르지만 책을 향한 진심은 모두가 같지 않았을까? 소설 속의 그들도, 소설 밖의 독자인 나도.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의 친구들과 함께 읽는 함유도 도서입니다.
소설(하)는 사실 정신없이 읽은 지가 꽤 되어서.. 서평을 쓰기 전에 차분히 다시 읽으려다가 또 재미있어서 푹 빠져서 읽었다(역시 책은 재독). 3부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는 기기묘묘하고, 4부 독자 제인 갈런드의 이야기는 충격받기에 충분했다. 1부 작가 루카스 요더가 점잖았던 건, 역시나 작가의 음모였어!!!
엘리트 비평가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는 독일 시골에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대학에 갔지만, 입학 전 이미 두 개의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장학금도 받고 높은 학점을 유지하며 여러 교수님들의 선택을 받는다. 일찍이 교수가 되고, 명망 있는 교수의 동반자이자, 카리스마 있는 비평가가 되어 천재 작가의 데뷔 지원군, 다수의 작가를 발굴해 내는 성공 가도를 달린다.
‘편집자 되기’에 강렬한 인상이 있었던 2부 ‘편집자 이본 마멜’의 고군분투와 대비했을 때 3부의 비평가 교수님은 너무 독보적인 코스를 밟는 것처럼 보였다. 비평가란 이렇게 닿을 수 없는 존재인 걸까? 아무래도 3부 비평가의 방점은 다른 곳에 찍혀있지 싶다.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역시 소설가의 세계와 편집자의 세계를 알고, 비평가의 세계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누가 훌륭하고, 누가 그렇지 못한 지에서부터 시작해서 미국 소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교수님 생각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이 모든 생각을 집약시키고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뜻이죠.
3부,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
성독, 성공한 독자
독자의 역할을 맡은 제인 갈런드도 평범한 독자가 아닌 점이 좀 아쉬웠다. 중간에 수많은 독자의 양상을 보여주는 짧은 분량의 내용이 있어서 아쉬움을 조금은 달래주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면, 독자를 대표하기에 제인 갈런드는 독자이기 이전에 부호였다. 물론 부호이기 이전에 독자인 게 맞겠지만, 어쨌든 독자는 누구나 되지만 부호는 누구나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평범한 독자는 아니지 않은가? 독자는 어쨌든 책을 읽는 평범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 내가 너무 상상력이 빈곤했던 것도 같다.
지금껏 내가 책을 사랑해 왔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책이란 신비스러운 존재였었다. 마치 그것들이 저절로 마력에 의해 솟아나듯이 도서관 책장에 꽂혀 있는 완성된 물건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4부, 독자 제인 갈런드
1부~4부의 융화!
사실상 1부, 2부, 3부, 4부의 각 인물들은 해당 분야의 전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표본이고, 이들의 이야기를 연결하는 독특한 소설이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이다. 소설(하)는 4부로 갈수록 소설(상)에서부터 시작한 1부 내지 3부의 내용을 아우르며 큰 조각들을 연결시키고, 스토리를 확장한다. 4부에서 독자를 다루며 이야기가 밋밋해질 것 같다는 우려는 불식되었고, 4부의 충격적인 스토리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3부에서부터 엘리트 비평가님이 좀 위태로웠는데, 성공 가도를 달리는 교수님은 겉보기와는 달리 의외로 완벽하지 않을뿐더러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는 무모함을 자처한다. 좋은 커리큘럼 (나도 꼭 배우고 싶은 계보도)을 강의하는데다가 자신의 입장이 분명한 그가 돌연 진창에 빠지게 되는 건 아닐지 노심초사하게 한다. 혼란스럽고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평가이면서도 소설 창작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걸까?
그런데, 소설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소설이란 장르는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를 아우를 수 있는가! 1부의 고루해 보였던 소설가 루카스 요더, 2부에서 열심히 성장한 편집자, 3부의 미워할 수 없는 비평가, 4부의 부호 독자 외에도 각 분야의 다수의 사람이 등장하고, 4부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신예 소설가들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주요 인물들이 4부에서 얽히고 설키는 모습은 차곡차곡 쌓인 스토리와 결합해서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소설을 둘러싼 다양한 분야를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권의 소설로도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 소설을 사랑하는 분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소설(상)에서 전개되었던 서사가 비평가와 독자의 관점으로 바뀌며 마무리된다.
특히 비평가의 관점은 일반 독자가 느끼기에 다소 거리가 먼 직업이었는데 이번 책을 통해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독자편 또한 어떤 책의 수준을 논할 때 벌어지는 일반 독자 VS 전문가의 관점차를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책을 읽는 이유, 책을 사랑하는 사람과 이를 둘러싼 세계를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는 '소설'에 푹 빠져보시길. 제임스 미치너가 문학을 대할 때 투영하지 않았나 싶은 예술적 관점에 관한 생각 또한 사유의 깊이를 더해준다.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지적 각성의 순간을 꼽는데 그 점에서 한 차원 깊은 곳으로 인도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