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머리 없던 나의 모습
'공부는 커리큘럼이라도 있는데, 업무는 왜 이렇게 막막하기만 할까.'
수습사원으로 첫 직장에서 무던히도 밤을 새며 되풀이했던 질문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일 머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일은 언제나 기한과 함께 주어졌는데, 대체로 나는 기한을 지키지 못하거나 지키더라도 실수 투성이 결과물을 제출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문제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낯선 일에 적응이 느린 사람이다. 낯선 일을 접하면 사고와 동작이 멈춘다.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든다.
2. 내가 낯선 일에 적응이 느린 것은 사고체계와 관련이 있다. 나는 낯선 대상을 파악할 때 생각으로 다가가지 않고 느낌으로 먼저 파악하려 한다. 느낌은 처음에는 모호할 뿐이다.
3. 느낌으로 대상을 파악하려다 보니 충분한 느낌 자료가 모이기 전까지 나는 대상에 접근하지 못한다. 내면에 쌓이는 느낌 자료는 언어로 변환될 수 없는 것이어서, 이 과정에 있을 때는 스스로도 진도를 얼마나 나갔는지 알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도 나의 업무 상태와 진도를 설명하지 못한다.
4. 느낌의 색깔이 분명해지고 나서야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 분석을 마친 다음, 대상에 대한 '첫 생각'을 갖는다. 업무는 이때부터 시작할 수 있다.
5. 업무를 시작하고 나면 이미 납기는 코앞에 와 있다. 밤을 새워도 납기를 맞추기 어려운 일정이다. 서투른 초급자가 쫓기는 마음으로 밤을 새워가며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일하면 업무 결과물이 좋기는 어렵다.
6. 업무 process 중에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선배들이 하던 대로 따라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나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작업을 수행할 때마다 내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7. 업무를 마치고 나서 그 업무를 돌아보며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면 좋았을텐데 곧바로 다른 업무를 진행해야만 했다. 어려움을 겪는 부분을 선배들에게 질문하며 풀어갈 수도 있었을텐데, 나는 일 머리뿐 아니라 주변 머리도 없었다.
적어놓고 보니 두 가지 마음이 든다.
1) 정말 일 못할 만 했구나.
2) 문제 원인 분석이 매우 상세하군. 이 정도면 나의 메타인지는 괜찮은 것 같은데?
메타인지(Metacognition)
이렇게 본인의 사고 흐름과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인지할 수 있는 힘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부른다. (29p)
메타인지를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일반적인 인지가 플레이어로서의 인지라면, 메타인지는 코칭스태프의 인지를 말한다. 일반적인 인지가 플레이어로서의 나를 관찰한다면, 메타인지는 플레이어로서의 나와 나의 인지방식을 함께 관찰한다.
내가 수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일을 못했던 이유는 메타인지라는 개념을 몰랐기 때문이다. 위에 적은 인지체계를 그대로 계속 사용했던 나는, 어떤 일들은 납기에 맞춰 제출할 수 있었다. 심지어 결과물이 좋다며 기억에 남는 격려를 받는 경우까지 있었다. 반면 도저히 납기를 맞출 수 없는 일을 받았을 때는 결과물을 내지 못하거나 실수 투성이의 결과물을 제출하고서 납기를 더 늘려달라고 납기 마지막 날 상사에게 요청했다. 이럴 때면 점잖은 분노를 받거나 아니면 뜨거운 화에 크게 데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당시 나는 내 성과물이 왜 들쭉날쭉한지 알지 못했고, 당연히 내게 일을 맡기는 사람도 내가 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지 알지 못했다. 감정에 기복이 있는 것처럼 업무에도 기복이 있나보다. 아니면 궁합이 맞는 업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업무가 있나보다. 그저 이렇게 추측만할 뿐, 어떻게 해야 일을 잘 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저자의 특별한 약력 : '일을 잘 한다'는 것
다음은 책 날개에 적힌 저자의 약력이다.
'메타인지' 하나로 글로벌 경영 컨설팅사에서 인턴부터 시작해 최고 임원인 파트너까지 올랐다. 한국 딜로이트에서 인턴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인 최초로 미국 딜로이트의 전략 컨설팅 소속 팀장이 되었다. 이후 한국 딜로이트로 돌아와 최연소로 회사의 지분을 소유한 파트너Equity Partner가 되었다. 재직기간 중에는 한국 딜로이트 컨설팅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포함해 전략 컨설팅 그룹 리더, M&A 컨설팅 리더, 품질 및 위험관리 담당 임원 등의 요직을 거쳤다. 또한 한국 딜로이트 그룹의 생명과학 산업 리더로서 국내 최초로 제약 분야 AI 기반 컨설팅 서비스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딜로이트 유니버시티Deloitte University 아시아태평양 캠퍼스의 유일한 한국인 핵심 교원으로 내부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 고객들에게 교육과 강연을 제공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촉망받던 자리에서 자진 퇴사한 후, AI 기반의 디지털 헬스 스타트업을 창업해 성장시키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저자의 약력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저자의 역량이 충분히 설명된 것 같지 않다. <머리말>에 적힌 저자의 소개를 추가한다.
필자는 재직하던 회사에서 최고로 일 잘하는 경영 컨설턴트였다. 상위 5%에게만 부여하는 최고 평가 등급을 받지 못한 해가 별로 없었다. 재직 기간 동안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9번 올렸다. 이는 회사의 직급 체계가 단순화되면서 향후에도 깨지지 않을 기록이 되었다. 흔히 하는 말로 줄을 잘 서거나 정치력 또는 아부로 이룰 수 있는 성취는 아니었다. 필자가 9번 승진을 하는 동안 의사결정권자인 대표이사는 6번 바뀌었다. 또한 9번의 승진에는 한국과는 환경이 다른 미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미국 평가자와 그들의 평가 체계에 따라 이룬 승진도 포함되어 있다.
(...) 비결이라고 할 만한 개념은 '메타인지'밖에 없었다.
저자는 컨설팅 회사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의뢰인의 요청을 받으면 해당 회사로 가서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업무다. 그의 업무가 일반 회사의 업무와 다른 점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특정 문제 해결의 전문가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전문가인 셈이다. 그런 컨설팅 업무를 주력으로 하는 컨설팅 회사에서 다시는 깨지지 않을 불멸의 승진 기록을 세운 저자가 알려주는 일머리 향상의 비결이 '메타인지'라니. 한번 배워보고 싶지 않은가?
메타인지란 무엇인가?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메타인지는 세 가지 주요요소와 아홉 가지의 세부요소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국제 기자회견이 있었던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몇번이나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끝까지 아무도 질문하지 않아서 결국 첫 질문의 기회는 중국 기자에게 돌아갔다. 이 상황을 메타인지적 인식으로 풀어보자. 여기서 '나'는 기자이다.
1. know-what : 미대통령에게 첫 질문을 하라고? 대체 뭘 질문해야 하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2. know-how / know-why : 이게 질문하란다고 그냥 손들어서 물어보면 되나? 이 내용을 질문해도 되는지 회사에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절차가 어떻게 되지?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대체 왜 이렇게 복잡한 문제가 생기는데 우리들에게 첫 질문 기회를 주는 거야?
3. know-when / know-where : (돌아오는 길에) 아까 거기서 이러이런 질문을 했더라면 좋았을텐데...
4. 계획 : 만일 다음 번에 같은 질문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런이런 질문을 요러요렇게 말하자!
5. 모니터링 : (실제 질문을 한 후에) 이 질문은 좀더 짧게 물어봤으면 좋았겠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었는데 그걸 깜빡했네.
6. 평가 : 질문에 우선순위를 부여해서 메모를 해두자. 메모를 보며 질문하면 문제가 개선되겠다.
7. 의도파악 : 그런데 왜 부장님은 질문 기회가 있을 때 질문하도록 준비하라고 하셨을까? 똑똑한 질문으로 우리 회사의 이미지를 제고하라는 뜻일까?
8. 인지흐름센싱 : 부장님 입장에서 내가 어떤 질문을 할 때 미션을 잘 수행했다고 생각할까?
9. 반응예측 : 오늘 내가 기자회견 장에서 한 질문에 대해 단순 내용 보고를 드리는 게 나을까, 질문 취지를 보고드리는 게 나을까? 두 보고에 대해 부장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
위처럼 메타인지의 요소를 규정한 다음, 저자는 다양한 실무 사례를 들어 메타인지의 작동이 어떻게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를 풍부하게 설명한다. 사례들이 무척 흥미롭고 설득력 있다.
이 책의 미덕 : 군더더기 없이 중요 뼈대로만 쓰여진 업무적 메타인지 학습서
전반부에서 메타인지가 무엇인지를 설명한 다음, 후반부에서 저자는 아래의 네 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컨설팅이 주 업무였던 사람이라 그런지 책이 마치 보고서처럼 쓰여져, 논리적인 주장, 합리적인 근거, 설득력 있는 예시로 논지가 전개되고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이야기꾼의 책이 아니라서 어찌 보면 담백한 글이지만, 그만큼 핵심 내용을 익히고 싶은 독자에게는 발라내야 할 살이 적은, 뼈대로만 이루어진 글이어서 독해가 쉽다.
- 후반부의 네 가지 주제
① 업무적 메타인지를 향상시킬 수 있다.
② AI 시대에 조직의 생존은 메타인지가 좌우한다
③ 조직적 메타인지를 갖추기 위한 다섯가지 방법
④ 글로벌 기업들의 조직적 메타인지 사례
이 책의 의의 : AI시대 인간에게 강조되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이란
이미 AI 시대다. '앞으로 다가올' AI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를 이야기해야 할 때다.
(...) 특히 AI의 범용화가 진행되는 향후 3~5년간은 누구든 특정 영역에 AI 활용의 깃발을 꽂으면 본인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는 개척 시대가 열렸다. (15p)
AI 시대에는, AI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무슨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조직의 생존을 가르는 최상위 의사결정이 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CEO가 내리는 이 의사결정을 이해하고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메타인지가 필수적이고, 메타인지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주어진 업무만 하는 사람들의 과업은 현재 개발된 다양한 범용 AI로 순식간에 대체가 가능한 상황이라 한다. 나의 경우 평소 업무를 잘하게 하는, 일 머리를 좋게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제는 조직생활을 하지 않는 내가 그 관심을 파고드는 건 단순한 지적 여흥이지 않나, 하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메타인지를 배우는 일이 단순한 여흥거리가 아니라 미래 시대의 삶을 대비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니, 웃고 싶은데 마침 누가 간지럼을 태워주는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즐거울 것 같다. 메타인지. 한번 배워보자.
※ 출판사의 선물로 책을 받아 작성한 객관적 서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