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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 할 일은 끝이 없고, 삶은 복잡할 때
에린남 저
올해 읽은 책 첫 번째로 별 다섯 개. 쌍따봉.
이 책을 읽은 것은 방학 중의 어느 날, 홀로 양평에 갔을 때였다. 매년 그렇지만 연초답게 올 한해는 또 어떤 선생으로, 어떤 아빠로, 어떤 남편으로, 어떤 자식으로 살아야 할 지 고민하는 때였다. 눈길을 걸을 때 자신이 남긴 발자국이 후대를 그른 길로 이끌 수 있으니 조심하라던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얼어서 그 위에 눈이 쌓여 강인지 길인지 모르게 된 하얀 강을 내려다보며 읽기에 이 책을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나를 규정하는 선생, 아빠, 남편, 자식이라는 이름들을 잠시 내려놓고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니, 김용현 선생은 자신의 삶으로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2010년 SBS 방송국에 입사한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자 김광석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는 글쓴이이자 이 책의 주인공 김용현 씨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이큰별 PD의 소개에 일단 끌려 강남 교보문고에서 책을 구입했다. 나도 2011년에 교단에 섰고 롯데 자이언츠는 삶이며 김광석의 노래도 늘 곁에 있기 때문에, 지은이에게 참 쉽게 몰입할 수 있겠다는 흔치 않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렴풋이 소문만 들었지만 투병을 하고 있다는 김용현 씨에게 이 책의 인세가 치료비로 보태진다는 것도 기꺼이 책값을 지불할 이유가 되었고 말이다.
표지를 넘기면 속지 첫 장에 힘겨운 글씨로 '人間(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적혀 있다. <밀정>이라는 영화에 등장한 약산 김원봉이 비슷한 말을 했었다. 자신은 사람의 말을 믿지 않지만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이라고 말이다. 수많은 독립지사들과 민주투사들이 일신의 평안과 가족의 안위 대신 '인간이라면 당연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위해 나섰던 것과 겹친다. 그들과 함께 김용현 선생이 생각하는 '인간'과 '인간의 삶'이란 출세, 부자, 주변의 인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 확실하다. 책을 읽으며 내려다보이는 저 눈길 위에 발자국이 남는다면 씨돌 아저씨의 발자국은 아마, 그 발자국의 왼쪽에 반 발자국쯤 뒤에서 함께 걸으며넛도 먼저 걷는 이가 물에 빠질까 염려하며, 그 가슴 시린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그 발자국일 거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요한, 씨돌, 용현'은 모두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김용현. 부모를 일찍 여의고 보육 시설에서 자랐다. 엄혹하던 군사정권 말기, 그는 국가 권력에 의해 자식을 잃은 부모들 옆에서 자식 노릇을 대신하며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데 앞장섰고, 시민들의 목소리와 군중의 가장 앞 줄에서 전경의 매를 받았다. 30년 동안은 정선의 한 골짜기에서 꽃도, 사슴도, 새들도 사람만큼 귀히 여기며 그들을 감쌌다. 자기보다 남을 위해 살면서도 언제나 진심이었던 씨돌의 삶과 그 순수한 웃음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영혼과 지난 시간에 묻은 때들을 깨끗이 빨아주는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남들을 위해 살았느냐는 물음에 '가족같아서'라는 한 마디의 말과 함께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용현, 요한, 씨돌. '내어준다'라는 서술어가 참 잘 어울리는 삶, 그러므로 그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와 무척이나 닮았다.
그의 삶을 보며 왈칵 흐르는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온전한 감동이다. 한결같이 살아온 한 인간이 주는 감동. 세속의 잣대로는 결코 잴 수조차 없는.
유가협.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국가에 살해당한 자식들의 부모가 모여 서로를 보듬는 곳에. 삼풍 백화점 붕괴현장에. 1987년 6월의 아스팔트 위에도. 정선 봉화치에서 홀로 살아가는 옥희 할머니와 눈밭에 발자국을 남겨 사냥꾼들에게 쫓기는 고라니들의 발자국 곁에도 언제나 용현이, 요한이, 씨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당시에 셋 중 무엇이었든 상관이 없다. 온전히 타인을 위해 삶으로써 자신의 삶마저 행복해지는 이타적인 삶. 병상에 누운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사람을 하늘로 대하는,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주목받거나 보답받기 원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 실제로 이렇게 있어서 너무도 감사하다. 내가 가는 길이 희마할 때 그가 그 자리에 별처럼 빛나니 길잡이로 삼을 수 있겠다.
이정재가 주연한 영화 <사바하>에 수백 년을 살아오며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겨 온 사악한 사이비 교주 유지태가 나오는데, 이 가상의 인물과 정확히 대척점에 실제의 사람 씨돌이 있다.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용감하고 순수한 인간의 감동적인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도 꼭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 내겐 그의 삶을 말로, 글로 제대로 전할 재주가 없다. 그가 쓴 시를 인용한다. 그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와! 아름답다. 우와! 막 쏟아진다.
깜깜한 세상을 밝힌,
아! 소리없이 착한 사람들.
와! 사무친 별, 꽃이여.
새벽 별 반짝이는, 인간미 넘치는
건강한 꿈나라를 엎드려 두 손 모아 비나이다.
저 별들처럼 가리지 말고 만납시다.
야호~ 야호~
영화에서 골목길을 달려가는 배우 모습을 우리는 수 초만에 보지만, 실제 영화를 찍을 때 배우는 몇 십 번을 뛰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거나 접하는 대부분은 한낱 피상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내가 접한 씨돌 선생님의 삶은?
유튜브에서 처음 본 몇 분짜리 삶을 보았다.
그리고 호기심에 인터넷에서 읽은 몇 십분짜리 삶도 접했다.
이대로 그냥 넘길 수 없어 책을 구매하고는 몇 십년의 삶도 알았다.
마지막으로 1, 2부와 이어 추가 제작된 3, 4부짜리 다큐멘타리를 통해서는 기간을 알 수 없을 만큼 장대한 역사를 읽었다.
처음에 접한 몇 분짜리 삶과 장대한 역사에 걸친 삶의 본질이 다르지 않지만, 두 삶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삶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격정의 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 90년대 삼풍백화점의 충격. 보통 자연인의 삶을 다룬 TV프로그램과는 다른 생명 중심의 씨돌 선생님의 삶. 어찌 보면 몇 개의 소재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안에 얼마나 많은 삶과 시간과 고통과 헌신이 있었을지를 감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씨돌
요한
용현....을 통해 역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을 다시 다짐해보았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세상에 살다 가고, 살아 가고, 살아갈 모든 사람들의 삶이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들 하지만, 정말 깊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이가 아니라면 참 적용되기 어려운 말이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과 관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이의 삶에서 의미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범위를 정하고 조건을 좁혀 어떤 이의 삶이 모범적이고 교훈적이며 감동적이기까지 한 경우를 가려내어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일들을 하곤 한다. 혹은 괴짜나 특이한 이력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경하거나 놀랍거나 흥미로운 감동을 전달하기도 한다.
씨돌 아저씨의 삶은 처음엔 독특한 것 투성이였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이상한 사람이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으면서도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던 특이한 사람. 그러나 사람은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는 것, 조금씩 씨돌 아저씨의 삶과 가까워지고 속내가 비춰지면서 이 사람은 우리 사회에 하나의 메시지를 던져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었나,에서 그 사람이 있었기에 우리 현대사의 기초 중 한 부분이 세워질 수 있었던 사실을 발견하는 과정이 다큐멘터리에 잘 담겨 있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의롭다는 것은 옳은 것과 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그의 삶의 행적은 물질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런 어리석음 같은 것을 논하는 짓거리가 가능해진 것도 이런 분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한 사람이었고, 세상과의 바른 관계를 지켜나가기 위해 아주 단순하게 움직였다. 그의 삶에는 욕심이 없었다. 그 욕심 없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의 사연이 하나의 유행에 지나게 되지 않을까 안타깝다.
SBS 방송국 다큐멘터리 제작 팀에서 참 소중한 보물을 기록으로 남겨주었다. 영상의 내용이 책으로 깔끔하게 잘 옮겨졌다. 촬영 대상자와의 인간적인 교감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현대사의 상처도 함께 떠올랐다. 우리의 현대사가 어떻게 이어져왔는지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세상에 살아 계시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특유의 괴짜스러움으로 웃음과 가르침을 전해주실 수 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