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대작 사건이라고 나무위키에 설명되어 있는 이 사건은, 조영남이 대중에게 보여 주었던 '화투' 그림이(당연히 그가 그렸을 것이라 여겨지는) 사실은 다른 작가가 대신 그려줬다 하여 사기죄로 기소당한 사건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영남 사건'이라고 하면 다들 돌아오는 첫 마디는 '자기 그림은 당연히 자기가 그려야 하는 거 아냐?'이다. 심지어 조영남은 그것을 '관행'이라고까지 했으니 반감은 더 높아지기만 했다. 관행이라는 단어는 이미 그 단어 안에 '내가 잘못하긴 했지만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조영남 개인을 위한 반론이 아니라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건의 본질을 적어 놓은 글이다. 리뷰에 앞서 개인적으로 진중권처럼 모두까기 스타일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에 중립이라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생각일 뿐 이현령 비현령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조영남 사건에 대해서는 그의 주장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책으로 들어가 보자.
논점은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의문으로 크게 세 가지를 다뤄본다.
1. 그림을 자신이 그리지 않고 어떻게 자기 그림이라고 팔 수 있나.
2. 자신이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지 하지 않은 것이 부작위 기망이 아닌가.
3. 왜 진중권은 예술이 성역이라도 되는 양 검찰의 기소를 비판했는가.
1. 그림을 자신이 그리지 않고 어떻게 자기 그림이라고 팔 수 있나.
이 주제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한 뒤샹의 '샘'을 다시 거론할 수밖에 없다. 잘 알다시피 뒤샹은 독립예술가협회 연례 전시회에 기성품인 소변기를 사와서 서명하고 출품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서명과 연도를 남기고 전시를 한 것 밖에 없음에도 왜 이 사실은 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인식이 될까. 그것은 그가 한 행위가 기존의 틀에서 탈피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기성품인 변기를 전시하는 것은 당시에는 미친짓이었지만 이는 미술의 개념을 '시각적인 것에서 개념적인 것'으로 변화(개념적 전회)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5,60년대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팝아트가 등장하면서 '관념과 실행의 분리'가 창작의 하나의 방식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마르셀 뒤상 전, 국립현대 미술관, 2018~2019]
샘 이후 그리고 앤디 워홀이나 데미안 허스트 등 현대미술은 바로 '콘셉트'를 중심으로 작품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인상주의는 과거 사실주의 기법에서 탈피해 얼마나 작가의 감상을 담느냐가 중요했지만, 현대미술에 와서는 그것을 어떻게 '잘'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떤 아이디어를 어떻게 표현하려 했는냐가 중요하게 된 것이다. 조영남의 '화투그림'은 그다지 관심없는 사람도 알 정도로 인지도가 있는 작품이다. 조영남은 그 작품을 송기창 화백에게 그리게 했고, 이는 현대 미술의 보편적인 제작 방법이다. 실제로 조영남도 앤디 워홀을 언급하며 그러한 방식을 따랐다고 말을 했다. 조영남이 그리라고 해서 그린 화투 그림과, 송기창 화백이 그냥 집에서 똑같이 화투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조영남의 사인이 없다면 그것은 조영남의 작품이 아니다. 당연히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지지도 못한다. 실제로 송기창 화백이 백만원씩 받고 팔았다는 두 점도 조영남의 인정이 없으니 그의 작품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송기창으로 인정될 경우 누가 이익을 받는가의 관점으로 그것을 가진 사람이 고발을 한 것이 아닐까 하기도 한다.
2. 자신이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지 하지 않은 것이 부작위 기망이 아닌가.
결국 이 사건의 본질은 작가의 물리적 개입이 얼마나 중요성을 띄는가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미리 알렸어야 하는가도 쟁점이 되었다. 실제로 그가 사기죄로 기소된 것에는 자신이 그린 것처럼 보여졌으며, 그것이 가격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과거(50~60년대)에는 실행을 대행시키는 것 자체가 작품 콘셉트의 일부였지만 지금은 정상적인 방법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무조건 알려야 하는 것도 알리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만약 그것을 적극적으로 숨기기 위해 '내가 다 그렸다'고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사기죄를 성립시키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리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요즘 현대 미술은 다 그렇게 한다고 일일히 설명하는 것 역시 이상하다. 심지어 그들이 자꾸 차별화 시키려는 앤디워홀의 경우에도 자신이 직접 작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표했다가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말을 바꾼 경우도 있다고 저자는 예로 든다.
[hi pop, 거리로 나온 미술전, 강남M컨템퍼로리, 2017~2018]
그것은 지금까지 현대미술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인데 그렇다면 미술 관계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조영남에 대해 비난하면서 그가 관행에 역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되려 지적한다. 워홀이나 뒤샹은 그걸 해냈지만 그걸 단순히 흉내낸 것은 전혀 예술이 아니고 돈벌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대체 그것은 어떤 기준인가. 미술계의 관행을 깨야 하는 것이 조영남인가 미술계인가. 그들이 조영남을 비난하는 것은, 조영남이 한 행위가 현대미술의 보편적인 방법임에도 그가 워홀이나 뒤샹을 흉내낸 것은 아무런 의식없이 단순히 흉내를 냈다는 것으로 분류하며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그가 그린 그림을 예술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하려면 과거의 것들을 부정해야 하므로, 단순히 평가적 차원에서 작품을 폄하하면서 그것이 마치 예술의 범주에 속할 수 없는 것인양 이야기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
3. 왜 저자는 예술이 성역이라도 되는 양 검찰의 기소를 비판했는가.
예술의 영역이므로 법원이 판단할 내용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오해하기 딱 좋은 주제도 없다. 실제 당시 한 방송에서 변호사는 사기 사건임에도 예술이 성역인양 말하는 것처럼 진중권을 몰아 세우기까지 했다. 저자는 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를 법원의 판단까지 가지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는 이유는 이러하다. 현대미술의 통상적인 작법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 그림을 대신 그리게 한 것은 작품을 구성하는 중대한 요건을 흠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으로 하여금 그것이 자신의 작품인양(?) 믿고 사게 한 것은 사기사건이고 이는 예술의 영역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예술이냐 아니냐가 사건 구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미술의 일반적인 작법이라면 무죄가 되고, 특수한 상황이라면 유죄가 된다? 그리고 그걸 법에서 판단한다.
그렇다면, 뒤샹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뒤샹은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사와서 자신의 작품인양 사인해서 전시했다. 그리고 그 작품이 원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큰 금액을 받고 팔렸다면 뒤샹은 사기꾼이 되는가. 만약 여기에 법적인 잣대를 들이 댔다면 현대미술은 과거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술의 영역에서 이것을 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기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가 법원의 판단으로 가려질 수 없는 것은 작품으로 보는가와 사기로 보는가가 동일선상에 놓이면서 작품 자체를 법적인 영역에서 구분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것은 예술이니깐 법으로 잣대를 들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에서 그런식으로 몰아 세우기에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다. 본질은 조영남 사건이 유죄로 판결 받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정의가 남아있고, 그것은 반대로 법원이 판단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키스해링 전, 동대문 DDP, 2018~2019]
그럼에도 불구하여 여전한 의문
이 사건은 1심에서 유죄 판결이 났지만 2심에서 무죄로 판결이 내려졌다. 송기창 화백 역시 이 작품의 저작자는 본인이 아니라고 하고 있으며 그것은 현대미술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이 당시의 사건을 다룬 몇 개의 뉴스를 찾아봤다. 그들은 심지어 반론하는 사람 한 명도 없이, 변호사는 사기사건이라고 단정하고 미대 교수는 그런 관행 같은 건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조영남이 그림을 맡기면서 본인이 돈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한 점당 10만원 정도의 대가를 지불한 것이 비난의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은 사건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한 비난은 피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대작이 불법이라거나 고지를 하지 않는 것이 불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당시의 방송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현대미술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 아닌 전문가가 대체 앤디 워홀의 경우와 조영남의 경우가 왜 다른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였다. 당연히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의 논리는 차라리 앤디워홀은 유명한 거장이 되었으니 되는 것이고, 조영남은 미술을 전공하지도 유학도 가지 않았는데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라는 말이 차라리 솔직했을 것이다. 일전에 리뷰한 적이 있는 'Why Your Five Year Old Could Not Have Done That'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은 그저 캔버스에 세로로 칼자국을 새겨 놓은 것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섯살 짜리도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한 것은 작품이 아니고 폰타나의 작업이 작품인 것은 그가 의도를 가지고 캔버스에 담았으므로 작품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영남의 작업은 미술은 잘 알지도 못하고 그냥 흉내내는 것이므로 뭘 갖다 붙여도 말이 안되고, 앤디워홀은 의식을 갖고 과거의 관행을 무너뜨려서 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셈이다. 조영남이 워홀처럼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방식으로 하는 모든 현대미술가들이 다섯살짜리가 종이게 칼자국을 내는 것처럼 형편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두고 두고 앞으로도 이해를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이 책에 대해서 주변에 이야기를 해도 그다지 수긍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아래는 항소심 재판부의 주요 판결 요지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러나 "이 사건의 미술작품은 화투를 소재로 하는데, 이는 조영남의 고유 아이디어"라며 "조수 송모씨는 조씨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술 보조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미술사적으로도 도제 교육의 일환으로 조수를 두고 그 과정에서 제작을 보조하게 하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며 "보조자를 사용한 제작 방식이 미술계에 존재하는 이상 이를 범죄라고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작품 구매자들은 구매 동기로 여러 사정을 고려하는 점을 보면 작가의 '친작' 여부가 구매 결정에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정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구매자들의 주관적 동기가 모두 같지 않은 만큼 조씨에게 보조자 사용 사실을 고지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https://m.yna.co.kr/view/AKR20180817093700004
[연합뉴스, 2018.8.17]
재판은 이제 최종심의 판결을 남겨두고 있다. 저자의 주장이 특히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전통적인 방식의 회화에 대한 인식(그림은 직접 그리는 것)이 대중에게는 쉽게 가시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기망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했을 경우가 아니고, 단순히 이를 예술이라고 볼 수 있느냐 없느냐는 법원의 판결에 공을 넘겨서는 안된다는 것에 나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겨울왕국의 애니메이션 스텝이 한국인으로만 구성되었다고 해서 그 영화를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할 수 없고, 유희열이 작곡한 노래를 객원 싱어가 불렀다고 해서 그 가수의 노래가 되는 것도 아니다. 미술은 그 물리적 작업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영역이었던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개념은 희미해진지 오래다. 현대미술이 콘셉트에 기반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작업은 부수적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마지막으로 워홀의 말을 옮겨 본다.
누군가 나 대신 내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실크스크린을 해서
내 그림이 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면
아주 멋질 것이다. (p.21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학 스캔들
이 책은
이 책 『미학 스캔들』은 <누구의 그림일까?>라는 도발적 부제가 달려있다.
그림을 둘러싼 스캔들이 일어났는데, 그 본질인즉 그 그림을 누가 그린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스캔들? 그림을 둘러싼 스캔들에, 그 내용이 누가 그린 것인가가 문제되었던 스캔들이라면
이쯤 말했으면 어떤 짐작가는 사건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 가수 조영남의 그림을 두고 그 그림을 누가 그린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 소송으로 비화, 결국은 법정다툼까지 하였으니, 그게 스캔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사건에 대하여 진중권도 논의를 보탰는데, 그런 논의의 전말을 이 책에 담아놓았다.
이 책의 내용은
가수 조영남이 그림을 그렸고, 그걸 팔았다. 화투를 화폭에 담아놓은 것인데, 그게 대작이라는 것이다. 대작(代作), 다시 말하면 누군가 대신 그려주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조영남 그림 대작’ 사건이다.
당시 한바탕 나라가 시끄러웠다. 그 후 격렬한 논쟁을 낳았고, 급기야 검찰은 “조 씨에게 (사기의) 기망행위가 있었다”라고 보고 법원에 심판을 구했다.
그런 재판이 벌어지자, ‘조영남은 사기꾼’이라고 매도당했고, 지금까지도 조영남은 매스컴에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과연 그 사건, 어떻게 된 것일까
여기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인 진중권은 차근차근 그 사건을 풀어 내 보인다.
이 책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장에서 8장까지는 과연 그림은 누가 그리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집중해서 다루고 있다.
9장과 10장은 조영남 사건에 대하여 진중권이 의견을 밝힌 것이다.
11장에서 13장까지는 진중권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에 대한 진중권의 반박
14장은 이 사건의 법적 측면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실질적으로 세부분으로 보아도 된다.
1-8장, 9-13장 그리고 14장.
그러니 일반 독자들은 1장을 읽은 다음, 9장을 읽고 다시 2장부터 읽으면 사건 실체가 이해가 잘 될 것이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조영남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한 다음에, 거기에 약간의 가필을 거쳐 자기가 그린 그림이라 했다는 것이 사건의 실체다.
그럼 과연 그렇게 해서 나온 그림은 조영남이 그린 것인가, 아닌가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먼저 미술계에서 검찰에 낸 고소장 일부를 소개한다.
서양에서는 예부터 조수를 써서 미술품을 제작하는 전통이 있었고 중세 때는 길드 체제에서 장인과 조수, 도제로 이뤄진 미술 공방이 그림을 생산해냈으며, 길드 체제가 약해진 르네상스 이후에도 렘브란트나 루벤스, 다비드의 예에서 보듯 조수를 고용해 그림을 그린 유명 화가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래 화가의 개성과 어떻게 그리느냐는 문제에 중점을 두게 되면서 미술품이 예술가의 자주적 인격의 소산이라는 의식이 강화되었고, 19세기 인상파 이후로는 화가가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것이 근대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습니다.
(201쪽)
이 고소장의 내용을 읽으면,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그럼 그렇지, 화가가 직접 본인의 손으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려야지, 그게 당연하지. 다른 사람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했다면, 그건 본인이 그린 게 아니지!
그정도로 알고 있는 우리 상식은 위의 글을 아무리 읽고 뜯어보아도 잘못 된 게 없어 보인다.
그럼, 일반인인 우리와 다른 전문가 진중권의 눈에 위의 글은 어떻게 보였을까
진중권은 단박에 저 고소장의 허점을 잡아낸다.
“그들이 재구성한 미술사에는 ‘현대 미술’의 역사가 통째로 빠져있다.”
여기, <‘현대미술’의 역사>라는 말을 읽자마자, 위의 고소장에서 ‘근대미술’이라 했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어? 거기는 근대만 언급했네, 그럼 현대는 어떻다는 거지?’
진중권은 이어 말한다.
“거기에는 다다도 없고 구축주의도 없고 바우하우스도 없다. 미니멀리즘도 없고 개념미술도 없고 팝아트도 없다. 한마디로 모던에서 후기모던과 포스트 모던으로 이어지는 20세기 미술 전체를 괄호치고 21세기의 미술을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에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다.”
(201쪽)
정말, ‘오마이 갓!’ 이다.
감쪽같이 넘어갈 뻔했다. 이래서 전문가가 짚어주는 게 필요한 게다.
고소장에서 <인상파 이후로는 화가가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것이 근대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읽으면서 인상파니 근대미술이니 하는 말에 감쪽같이 넘어갔다는 말이다.
인상파 이후 근대에는 화가가 자기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는데, 그럼 그 전과 그 후에?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르는 나 같은 문외한은 그냥 무심히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중권은 이 책 1장에서 8장까지 긴 글을 통해 미술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다른 사람의 붓으로 도움을 받은 것도 본인이 그린 그림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장에서 8장까지 읽으면서, 지금까지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이라면, 그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그린 줄 알았는데, 그래서 천정화를 그린 미켈란젤로 같은 경우도 하루 종일 천정 아래 지지대에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고 주야장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 상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조수가 있었다! 그림을 대신 그려주는!
다시. 이 책은? - 그럼, 현대미술은
조영남을 사기죄로 단죄하기 위하여 내민 고소장에 빠진 부분, 진중권이 예리하게 지적한 ‘현대 미술’에서는 그림을 누가 그려야만 그렸다고 하는지 잠깐 살펴보자.
<뒤샹에 의하면, 미술은 망막적 현상에서 개념적 현상으로 바뀐다. 이것이 뒤샹이 20세기 미술에 일으킨 개념적 혁명의 시작이었다.> (173쪽)
그러니 굳이 원작가가 손수 붓을 들고 여백의 여백까지 다 채워 넣어야만, 그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 시대는 이제 지난 것이다.
<카메라가 발명됐다고 회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진이 등장한 이상 회화는 더 이상 과거의 회화일 수 없다. 회화는 자신을 재정의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현대’의 회화로 거듭났다.> (196쪽)
그렇게 현대 회화는 거듭났지만, 우리나라의 미술계는 거듭나지 못한 것 아닌가
뒤샹의 소변기를 보면서, 앤디 워홀의 팝아트에 열광하는 그 사람들이 ‘화가가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것이 근대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외치는 그런 행태는 언제, 사라질 것인가?
이 책을 읽으니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드레퓌스 사건>
에밀 졸라까지 나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끝내 제대로 바로 잡지 못했던 진리.
그 진리는 어떻게 해야 바로 잡을 수, 바로 설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책 읽었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제목이 가장 인상 깊었던 추리 소설을 꼽아 보라고 하면 에거사 크리스트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꼽고 싶다. 접속사여야 하는 ‘그리고’ 앞에는 아무 말도 없고, 문장을 마무리 짓는 말은 “아무도 없었다”다. 참으로 허무하지 않은가. 소설 내용도 그렇지만 소설의 제목 때문에 가장 눈에 뛰는 책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에거사 크리스트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였다.
추리 소설속에서는 사라지고 죽임을 당한 것 때문에 책에서 웬지 모를 한기가 풍겼다면, 21세기 우리 사회는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프레임. 프레임과 프레임이 싸우고, 어느 한쪽 프레임이 다른 프레임을 압도하면, 사회를 달군 갈등은 순식간에 식어버리고, 얼어버린다. 그리고 시민들은 다른 뜨거운 게 없는지 찾고, 기자들은 또다시 뜨거운 것을 공급하기 위해서 만들려고 하고 찾아다니기도 한다. 프레임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은 우리 사회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뿐더러, 계속해서 우리의 반지성을 자극하고 악순화시키며, 그럼으로서 우리의 지성을 퇴화시키고, 의식있는 사람들조차 인간에게 가졌던 가능성을 져버리게 만든다. 어쩌면 이 책을 소개하는 글에 나오는 조영남씨의 위작 사건 같은 경우에도 이와 같은 면이 상당할지도 모르겠다.
김학의 스캔들, 미학 스캔들
김학의 스캔들 하면 당신들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덜떨어지게 웃고 있는 남성이 여성을 부둥켜 안고 춤 추는 듯한 모습. 박근혜? 아니면 당시 사건을 무마했던 검찰?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해당 사건에는 적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다. 얼마 전, 재판에서 김학의에 대하여 무죄가 선고 됐지만, 법원에서의 무죄는 김학의가 무고한 사람이고 선한 사람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검찰의 공소 사실로서 김학의를 처벌하는 데 무리가 있다는 것 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사회를 보는 것은 상당히 단조롭다. 무죄라고 하여 그 무죄를 휘감고 있는 온갖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것들이 일반화 될 수 있는 게 아닌데, 우리 사람들은 무죄의 프레임 혹은 유죄의 프레임 안에서 번번히 실수를 하기 일수다. 그리고 이와 같은 프레임의 문제를 적절히 지적하고 깔 수 있는 것은 전문가 뿐이지 않을까 싶다.
진중권씨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그가 진보적이건 혹은 보수적이건 상관 없이 그를 좋아한다. 그것은 바로 그가 지성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 또한 그렇다. 다시 조영남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위작? 무죄? 유죄? 사기? 조영남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지금 머릿속을 떠다니는 단어들을 생각해 보자. 만약 떠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기사를 검색했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자들 또한 해당 분야에 대해서 전문성 있는 기사를 쓴 사례가 상당히 드물며, 기자들 또한 해당 포인트가 흔히들 이야기 하는 ‘팔리는 기사’가 아니란 것을 잘 안다.
그런 저에서 이 책 <미학 스캔들>은 해당 문제를 드러내는 데 있어 거의 정점에 있다고 하지 않을까 싶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미학과 관련해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하여 진중권씨은 현란한 지적 플레이를 볼 수 있는 책이다. 미술사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여러 논쟁들을 재미있게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미학사 속의 다양한 갈등들을 통해서 독자에게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한다.
나에게 있어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1장 “‘그의 손으로’_ 미켈란젤로 혼자 다 그렸다고?”의 부분이었다. 우리가 흔히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하면 미켈란젤로가 모두 그것을 손으로 조각하거나 그렸다고 생각하는데, 진중권 씨는 이 책 <미학 스캔들>에서 미켈란젤로가 작품을 만들었던 당시의 다양한 정동을 입체적으로 전달해준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오로지 진중권씨의 전문 분야인 미학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습득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비판적 읽기’는 단순이 이 책을 넘어서 우리 삶 곳곳에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