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김신영 작가의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를 구매할 때 제목이 비슷한 책이 있기에 같은 분의 것인 줄 알고 결재한 책이다. 도착하고 나서야 작가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미리 알았더라도 그냥 샀을 것이다.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라고 묻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이 책의 저자 박현희님은 고등학교 사회교사이다. 그러다 보니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이라는 부제처럼 사회문제, 정확하게는 학교 안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에 관심이 많다.
왕자는 왜 구두로 신데렐라를 찾았을까
라푼젤은 누구를 위해 머리카락을 기를까
사람이 된 피노키오는 행복했을까
너무 오래되어 진리처럼 통용되는 규칙이나 가치관에 거는 딴지들. 이런 의문과 참신한 시각으로 재해석되는 옛이야기들은 체제 순응적으로만 살아 조금 주눅든 내게 새로운 관점과 함께 은근한 대리만족을 준다.
관용의 마을, 일탈의 마을, 지혜의 마을.
이 책에서 저자는 14편의 동화와 우화를 3개의 주제로 나눠 분류하고 새롭게 해석하고 그 안에서 현재를 찾아낸다.
제1장 관용의 마을
<여우와 두루미>, <늑대와 양치기 소년>, <피노키오>, <아기 돼지 삼형제>가 등장한다.
저자는 그 동안 서로를 배려하라는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여우와 두루미>에서 강자의 전횡에 눈감는 억지 화해의 부당함에, 정직하라는 가르침을 줬던 <늑대와 양치기 소년>우화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소년의 현실에 주목한다.
그 중에서도 눈여겨본 이야기는 <피노키오>를 재해석하는 부분이었다.
카를로 콜로디가 <피노키오>를 발표한 19세기 말은 근대적인 학교가 성립되고 확대되던 시기였다. 산업 혁명으로 사회가 밑바닥부터 재편되면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이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농사일은 아버지를 따라 밭에 나가 일하면서 전수되지만, 공장 일은 그런 식으로 배울 수 없었다. 공장주들은 기본적으로 읽고 쓰고 셈하기를 할 수 있는 일꾼들을 원했다. 노동자의 자녀에게 읽고 쓰고 셈하기를 가르쳐 내일의 노동자로 준비시킬 제도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청에 따라 생겨난 것이 근대적인 학교였던 것이다.
(p.39)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아침마다 갔던 곳. 저자는 우리가 학교에 가야했던 이유에 대해 근대 산업사회에서 필요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읽고 쓰고 셈하기뿐이랴. 시간에 맞춰 자고 일어나기, 싫은 친구와도 잘 지내기, 규칙 지키기... 수업 말고도 학교에서는 배우는 게 많다.
자유분방한 피노키오가 결코 좋아할 수 없는 곳. 학교에 가는 착한 어린이만 진짜 사람이 된다고 어른들이 얘기해도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병약한 제페트 할아버지를 돌봐야하는 피노키오. 선택지가 없다. 좋든 싫든 ‘착한 아이’가 되어 진짜 사람이 될 수밖에.
저자는 피노키오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 온 힘을 다해 학교와 노동이라는 근대 사회의 요구에 저항하던 피노키오가 결국 ‘착한 아이’가 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묻는다.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어 행복했을까?’하고.
하지만 피노키오를 저항했지만 근대 산업사회의 일부로 편입된 안타까운 존재로 보는 것은 과도한 논리의 전개라고 생각한다. 학교가 근대 산업사회의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인건 맞지만 근대 사회가 도래하기 이전의 사회에서도 일부 부유한 계급을 제외하고는 노동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피노키오>는 어린이가 좌충우돌하며 어른으로 커가는 성장소설이다. 피터팬의 마을로 가지 않는 이상 어린이는 어른이 될 것이고, 피노키오는 진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행복하냐고? 어린이의 자유분방함이 오래도록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답은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야한다. 어른의 삶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영원히 어린이로 남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제2장 일탈의 마을
2장에서는 <토끼와 거북이>, <빨간 모자 소녀>, <황금알을 낳는 거위>, <분홍신>, <개미와 베짱이>를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한다.
이 동화들 중에서는 아이들의 입시를 치른 경험이 있어서인지 <토끼와 거북이>우화에서 불공정한 게임의 법칙을 찾아내 현재의 대학입시에 적용하는 대목에 관심이 갔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결과를 예측할 수도 없는 복잡한 게임 규칙을 정해서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어 이익을 보는 이들이 있다. 누구일까, 그들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교육 시장이다. 점점 커져 가는 사교육 시장은 이미 이 나라의 교육 정책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었다. 게임을 복잡하게 만들고, 불안감을 키우고, 그리고 돈을 번다.
정치인들도 한몫 한다. 선거 때만 되면 각종 교육 정책들이 난무하는데, 그 정책들을 보면 하나같이 사교육비 절감을 이야기한다. 선심 공약 치고 이만한 것이 없다. 사교육의 폐해는 누구나 동의하는, 정말 안전한 문제니까. 아무도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학교의 근본적인 사명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p.75)
저자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근면 성실한 거북이의 인간(?)승리로 이해하지 않는다. 어차피 거북이와의 달리기는 토끼에게는 얻을 것 없는 불리한 게임이었다며 이 경주의 배후에 판돈을 노린 제3자가 있을 거라고 예상한다. 그러면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같은 불공정한 게임을 대학입시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자녀의 입시를 치러본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암호문같은 대입 전형들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입시 설명회에 여러 번 참석해야 했다. 그나마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입시 설명회는 아무나 갈 수도 없어서 드라마에서처럼 영향력 있는 엄마들에게 알음알음 이야기를 얻어들어야 했다. 지방은 학원도 서울만 못하고, 입시 정보도 1년 이상 더디다는 맥 빠지는 말들. 아이나 나나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박탈감이 느껴지던지.
저자는 복잡한 규칙을 가진 입시 게임이 입시 당사자 모두에게 불리한 제도라고 말한다.
정말 이 게임에 유리한 참가자는 없는 걸까? 규칙이 복잡하고 자꾸 변한다면 누구에게 유리할까? 규칙을 만드는 사람, 정보를 먼저 얻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활용할 힘을 가진 사람. 다들 목격하지 않았던가.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한 일들. 일선 교사로서 생각하는 바가 많을 텐데 그러한 불공정한 현실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아쉬웠다.
제3장 지혜의 마을
드디어 공주님들이 등장한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라푼젤>, 그리고 <미녀와 야수>.
조심성 없이 자꾸 문을 열어주는 백설공주나 거울에 집착하는 왕비의 사연을 헤아리는 것도 재밌었지만 긴 머리의 공주 라푼젤을 진화심리학으로 해석하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머리카락은 인간의 신체 가운데 가장 선명하게 주인의 건강상태를 보여 줄 수 있는 신체 부위라고 한다.
...
남자들은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보며 건강 상태를 판단할 수 있고, 건강한 여성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보여 줌으로써 자신의 건강 상태를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필요 때문에 남자는 여자의 긴 머리를 좋아하게 되었고, 여자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을 좋아하는 쪽으로 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설명이다.
(p.188~189)
반쯤 이해되고 반은 이해되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건강의 상징이라면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 텐데 머리를 기르고 싶어하는 사람은 대부분 젊은 여성이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진화심리학에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인지, 머리카락 말고도 남성성을 보여줄 다른 것들이 있기 때문인지 궁금해진다.
저자의 견해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동화 속이든 현실이든 약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좋았다.
선생님의 시각으로 동화를 재해석하고 학교의 현실을 짚어보는 책,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줄까》. 중고등학생과 학부모님께 먼저 추천한다.
정말 유쾌하고 즐거운 지식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준 멋진 책입니다. 재미있는 책을 더 재미있게 해주는 올드독의 작가 정우열씨의 보석같은 그림은 최고입니다. 강추강추합니다.“아이들이 자라서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 이들을 지탱해 줄 뒷심은 어디에서 올까? 나는 지금도 굳게 믿는다. 내가 어린 날 보낸 그 어영부영했던 시간들이 오늘의 나를 밀고 가는 뒷심이 되었다고, 그 어영부영했던 시간들 속에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가고, 기상천외한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계속해서 의심하는 동안 우리는 한없이 자유로우며 한없이 새롭다.이 책이 바쁜 어른들과, 그보다 더 바쁜 아이들에게 드리는 열쇳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열쇠를 손에 쥔 이들을 모두 동화 마을로 갈 수 있다. 더 많이 의심하고, 더 많이 질문하면서 어떤 마을이건 마음 내키는 대로 어슬렁거리시라”
자신의 직업 분야에서 롤모델로 삼을 만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복(福)이다. 가까이 있어 곁에서 보고 배울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비록 그러지 못하더라도 나 스스로를 채찍하고 그 분을 보며 감탄하고 한수 배운다는 자세로 낮출 수 있음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런 분을 어떻게 만나며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느냐고? 그 분이 책을 여러 권 내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부수적인 활동도 많이 하시는 걸로 알고 있지만 서울 경기와 멀리 사는 내겐 차라리 책으로 만나는 것이 더 수월하고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 분은 박현희 선생님이시다. 작년에 읽었던 『행복을 배우는 경제수업』(http://blog.yes24.com/document/5270462)의 리뷰에서도 언급했었지만 같은 과목을 가르치시는 박현희 선생님은 어느새 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물론 그녀의 사적인 생활의 면면은 볼 수 없지만 글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교사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아이들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 거시적으로 교육의 변화를 꿈꾸는 열정까지 등 내가 존경할 부분이 가득한 분이셨다.
최근 경제 수업을 하게 되어 박현희 선생님의 『행복을 배우는 경제수업』을 다시 훑어보았다. 그 책에 언급된 토론 수업 관련 책을 샀고 그 책이 토론 연수 교재로도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토론 수업 관련 연수를 신청해서 비록 원격연수지만 다른 어떤 원격연수보다 열청할 생각이다. 이 책을 검색하다가 박현희 선생님의 다른 책 목록들을 입수하게 되었는데 바로 산 책이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이다.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이라는 부제목도 내 눈을 끌 수밖에 없다. 실제 수업시간엔 진도 나가기도 급급하지만(이놈의 학기 집중이수제로 더욱 진도에 연연해하게 된 현실 OTL) 항상 꿈꾼다. 어떻게 하면 더 재미나고 아이들이 활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을 해볼까? 라는 생각을 안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수업이 더 어렵다. 차라리 교과 내용의 지식 전달이 훨씬 편하다.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자료를 준비한다는 것부터, 그리고 이미 굳어버린 수업 태도와 입을 열게 하는 것은 교사의 스킬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시도조차 꺼리게 된다. 그래도 이런 열망이 아직 살아있음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이 책 역시 그런 열정의 한 표현이다. 혹시 이 책의 동화를 가지고 아이들과 토론해볼 수 있진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과 슬며시 부풀어 오르는 희망이 생겼기에 구입한 것이다.
역시 박현희 선생님의 글은 잘 읽힌다. 무엇보다 적절한 예시를 잘 들어주셔서(이럴 땐 학생이 된 기분이다 ㅎㅎ) 더욱 재미가 있다. 박현희 선생님의 학력(서울대 박사과정 수료)을 보면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자랐을 것 같은데 이 책에 담긴 박현희 선생님 자신의 이야기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 그녀는 결코 순종적인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의심이 많고 엉뚱하기도 하고 항상 ‘왜’라는 질문을 달고 있어서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지금의 자신이 있게 한 거름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세상이나 상황을 삐뚤게 보는 시선 덕분에 그는 더욱 독창적인 자신만의 생각을 펼쳐냈고 그것을 현재 교사가 되어 수업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접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수업과 관련 있는 책은 아니다. 15개의 동화를 가지고 그 동화가 전하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뒤집어 볼 수 있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이다.
어렸을 때 만나는 베스트목록들은 죄다 들어있다. 제목에 인용된 [백설공주]는 물론 [늑대와 양치기 소년], [미녀와 야수], [라푼젤], [피노키오], [아기 돼지 삼형제] 등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동화들이다. 너무나 친근한 동화들을 뒤집어 보는 그녀의 눈이 매섭다. 특히 학교나 한국 교육의 상황을 많이 접목하기 때문에 교사들이라면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교사집단은 다른 사회 집단에 비해 체제 순응적이고 상명하복에 익숙하다. 그래서 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편이다. 그러한 성향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투영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도 자기 말을 잘 따르고 별문제 없이 학교를 다니길 원한다. 요즘 세상이 교사에게 지우는 책임이 여기에 한몫 단단히 하는 것도 분명 있다. 그러나 교권도 인권의 틀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교권과 학생인권을 대칭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학교의 억압구조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다. ‘단체’ 또는 ‘전체’를 위해서 ‘개인’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죽어 줘야하는 시스템이 학교다. 그래서 논리적인 설득이 불가능한 강제성이 많다. 헌법에 보장되는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가 우리 학생들에게는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박현희 선생님이 비판하는 학교 제도에 대해서 나와 통하는 부분이 많아서 더 반갑고 좋았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희생되고 있는지, 우리 아이들의 가장 누리고 싶은 권리 ‘마음껏 놀 권리’는 어디로 갔는지. 나나 박현희 선생님께 돌아올 쓴 소리가 벌써부터 들린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랏!” “그건 이상(理想)일 뿐이야!” ㅠ
각 동화들을 어떻게 재해석했을까. 박현희 선생님은 동화 속 주인공만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 등장인물과 시대배경, 작품이 쓰여 진 시기까지 복합적으로 접근하여 추론해서 색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가령 [여우와 두루미]의 경우 사람은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누군가를 싫어할 권리가 있다’며 여우와 두루미의 사이를 굳이 화해시킬 필요가 없다고 한다. 언젠가 아이들의 학기 초 개인 신상 조사서를 거두었는데 한 아이의 답이 인상적이었다. ‘가장 싫을 때’에 대한 질문에 그 아이는 ‘친구랑 싸운 후 억지로 화해시켰을 때’였다. 우리는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훈육 받아 왔고 따라서 그 전제가 잘 지켜지기 위해 싸움 후에는 꼭 화해까지 가야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런데 아이마다 상황이 다르고 모든 친구와 친하게 그리고 사이좋게 지낼 수 없는 게 현실인데도 어른들 특히 학교에서는 ‘학교폭력’이라는 무서운 타이틀 때문에 억지로 화해(어른들 사이에선 ‘합의’라고 하나?)를 시켜 아이들의 속을 더 시꺼멓게 만든다. 여우와 두루미는 달랐다. 꼭 같이 밥을 먹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어설픈 화해는 안하는 것이 낫다. 근본적으로 해야 할 것은 문제해결이지 눈에 보이는 화해가 아니다.
가장 인상 깊게 본 파트는 [토끼와 거북이]였다. 이 동화를 가지고 박현희 선생님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주제로 끌고 갔다.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은 애당초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레슬링이나 유도할 때 체급을 따지지 않는가. 달리기는 체급이 없다고? 그래도 나라마다 거르고 걸러서 잘 달리는 사람들만 나오도록 하는 게 육상경기 아닌가. 하지만 토끼와 거북이는 아예 경기 자체가 성립 되어서는 안 되는 게임인 것을 알면서도 이러한 게임을 진행하게 된 것은 분명 토끼와 거북이 당사자가 아니라 이 게임을 보고 즐기는 제3자가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즉 ‘의자가 부족한 것이 문제이지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는 식의 그녀의 해석이 재미있지 않은가? 전혀 다른 생각들을 쏟아내는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거북이가 토끼를 깨우지 않은 것은 잘 했다고 칭찬한다. 사람들은 거북이가 토끼를 깨워야 더 정당한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하곤 하지만 거북이가 이런 예상을 뒤엎음으로써 이러한 게임을 만든 이들을 조롱할 수 있기에 그럼으로써 더 이상은 이 판은 커지지 않을 것이기에 거북이는 아주 잘했다는 것이다.
그 외 [빨간 모자 소녀]는 “일탈”이란 주제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풍요와 결핍”, [분홍신]은 “허영”,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꿈”이란 주제로 풀어간다. 그녀는 대놓고 외친다.
“미심쩍은 일들로 가득 찬 동화 속 멍청이들의 마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라고.
우리 그 초대에 응해보지 않으련가? 이제는 내가 여러분을 유혹하고 있다. 참! 초대의 문을 두드리려면 이 문제를 맞추셔야 합니다.
"백설공주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왜 자꾸 문을 열어주었을까요?"
<책 속의 책 읽기>
위르겐 슈미더, 『왜 우리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할까 』
카를로 콜로디, 『원작으로 새롭게 읽는 피노키오』
강수돌,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
유아사 마코도, 『덤벼라 빈곤』
이병용, 『장난감을 버려라 아이의 인생이 달라진다』
마크 보일,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
강수돌, 『일중독 벗어나기』
처음 이 책을 봤을 땐 좀 이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뭔 말도 안되는 소리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의 교훈은 상대를 배려하라는 말인데 여우는 먼저 사과한 셈이라고 하지 않나,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 한 것은 심심해서이니 어른들 잘못이라고 하지 않나 왠지 이야기의 중심을 벗어난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건 왠지 내 스타일이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모두가 정해놓은 교훈을 따라갈때, '잠깐!!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않나?'하는게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나는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장담하건데 어떤 육아 서적보다 이 책이 아이들을 이해하는 관점을 보여주는 데는 더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세 개의 마을로 이뤄졌다. 제1장은 관용의 마을로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거나 살았지만 곤경에 처한' 여우와 두루미, 양치기 소년, 피노키오, 아기돼지 삼형제가 나온다.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는 논어의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하기 싫은건 남한테도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요즘 말로 치자면 정말 '쩐다'. 그럼 여우나 두루미나 둘다 '쌍방과실' 일까. 여기는 큰 차이가 있다. 여우는 모르고 한 행동인데 두루미는 알고 일부러 엿 먹이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여우는 그저 생각일 짧아서 두루미를 배려 못한 것이지 일부러 골려 먹으려고 한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서로 잘못한 것은 없는 셈 치면 된다는 생각을 경계한다. 거기에 강요된 화해는 얼마나 위험한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경우라면 그 말은 곧 피해자가 감수하고 가해자는 통 크게 웃어 넘기는 대인배가 되는 그림일 뿐이다.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에서 어떤 말을 할까. 우리는 왜 그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자꾸 하고 또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어른의 통제를 벗어난 아이를 보는 두려움 때문이다. 나도 어릴때 친구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우리 아빠는 다른건 안 때려도 거짓말 하는 건 절대 용서 안해' 이런 식의 말 말이다. 어른들은 항상 아이가 자신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그걸 발견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자꾸 들려주면서 거짓말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피노키오'가 왜 생겨 났는지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내글링크 http://blog.yes24.com/document/6546572) 나는 피노키오야말로 어른들의 두려움과 욕망이 만들어낸 완벽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공부 안하면 잡혀가고,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져 들키고, 학교에 안가면 불에 타는 공포는 아이들에게 심어주기에 얼마나 완전한 교육자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2장은 일탈의 마을이다. 여기는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는 규범을 벗어 던진' 주인공 집합소이다. 거북이는 토끼가 자고 있는 틈을 타서 이겼다. 이건 그렇다면 정당한 게임을 하지 않은 거북이가 잘못인가? 아님 어짜피 다시 하면 이길 수밖에 없는 토끼가 승자인가?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게임을 만든 제3자이다. 사실 이 게임은 승자가 토끼라면 당연한 것 승자가 거북이라면 대박인 게임이다. 토끼 입장에서는 할 이유가 없는 게임이지만 누군가는 부추겨서 게임을 성사시켰을 것이다. 토끼가 잠을 잤던 것은 이따위 말도 안되는 게임은 관심도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거북이는 거북이대로 토끼가 그렇게 일탈하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게임은 게임 당사자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면 판도 커지지 않고 각자가 즐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데에 포인트가 있다.
빨간모자는 엄마가 신신당부한 큰길을 벗어나 '샛길'이라는 일탈을 택한 캐릭터이다. 물론 그 이야기는 여느 동화와 마찬가지로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살아나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훈훈한 결말로 끝난다. 저자는 모두 안정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샛길을 택했던 모든이들에게 사실 우리는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샛길로 갈 수 있게 만들 수 있어야지 왜 우리는 그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일까. 샛길 이야기는 '분홍신'에 가면 더 끔찍하고 비관적으로 그려진다. 검정신을 신을 수밖에 없는 아이가 분홍신을 꿈꾸는 것을 금지하는 사회, 미리 정해놓은 길로 인도하려는 기성세대에 대해 '죽을 때까지 춤출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지막 장은 지혜의 마을이다. 여기는 '우리가 사는 진짜 모습을 그려 보는' 장이다. 드디어 주인공 백설공주가 나온다. 그녀가 자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문을 여는 이유는? 바로 외로웠기 때문이다. 난쟁이들은 낮동안 일하고 밥을 먹으면 이내 잠들고 공주는 말할 상대도 없이 또 하루를 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들 문을 안 열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녀는 능동적으로 친구를 만들기에는 이미 수동적으로 자라왔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왕자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마녀라고 할지라도 문을 열 땐 반가웠을 것이다. 반면에 왕비는 어땠을까. 왕비는 첫번째 부인의 자리를 꿰차기 위해 왕의 마음 속에서 끝없이 싸워야 하기 때문에 외모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를 인정해주는 거울이라는 존재는 -꼭 거울이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책의 일부만 적어볼려고 했는데도 내용이 꽤 된다. 이 책은 이런 식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교훈들에 대해서,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는지. 그 이면에는 피해자나 힘없는 약자가 있는건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학교 선생님이라 아이들의 욕구에 더 민감하고 귀를 잘 기울였는지는 모르겠다. 누구든 부모라면 이 책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을 것이다. 여러 관점도 아니고 주인공의 관점, 혹은 아이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연습이 필요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