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을 다시 읽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미 오래 전에 범우사 판과 민음사 판을 통해 읽었고, 지난해에는 새움사 판으로도 읽어, 이방인에 대해서는 나름 정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이번에 나온 현대지성 판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책을 소개하는 문구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yes24 홈페이지에 들어가 읽을 만한 신간이 출간되었는지를 검색하고 있던 중, 화면 상단우측에 작은 면적의 기다란 창에 어떤 문구가 떴다. 재빨리 읽어보니,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이자 20세기 최고의 부조리 소설, 사르트르. 바르트가 극찬한 문체를 생생히 살린, 가장 카뮈다운 번역’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자.’ 하는 기대어린 마음으로 책을 주문했다. 읽어 보니, 지금껏 읽었던 다른 출판사 판들에 대한 경험이 기단역할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에 구체적으로 띄지는 않지만 정말로 문체를 생생하게 살렸기 때문인지, 걸림돌 없이 술술 읽히는 번역의 이정표로 세울 만했다.
1. 우선, 서사적 차원에서 보면, 이방인의 서사는 아주 간단하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수많은 출판사들에 의해 출간되었고, 수많은 독자들에 의해 읽혀온 만큼 내용은 다 드러나 있고, 그래서 스포일러에 대한 염려 없이 간단히 기술해 보면, 뫼르소가 양로원으로부터 엄마의 타계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한 뒤, 해수욕을 하던 중에 전에 회사동료였던 마리와 우연히 만나게 되고, 해수욕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가서 동침하는 등 곧장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같은 층에 거주하는 레몽과 얽히는 바람에 그와 적대관계에 있는 아랍인을 우연히 죽이게 되고, 그로 인해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2. 다음으로, 카뮈가 이방인을 쓴 이유와 배경에 대해 내가 느낀 바를 살펴보면, 이방인은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집필되었다는 게 내 감상이었다. 이는 미리 주어진 카뮈에 대한 이력이 앞질러 감상의 길을 터놓았기 때문인데, 연보에 의하면 카뮈는 은사인 장 그르니에의 권유로 22살 때 공산당에 입당하지만, 당의 명령에 반발함으로써 제명 또는 공산체제에 대한 혐오와 고민으로 탈퇴했다고 한다. 이는 카뮈의 자유를 향한 개인주의적 성향이 발산된 결과로, 카뮈가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에 저항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인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카뮈의 궤적은 전체주의와 한 몸인 국가주의, 가부장적 종교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고, 나중에 아나키스트가 되는데, 이러한 정신적 심리적 편력의 배경과 2차 대전 중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결과물이 이방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뮈의 또 다른 걸작 ‘페스트(전체주의사상의 메타포)’와 같은 집필 동기라는 맥락에서 페스트보다 5년 앞서 씌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주도적 세평은 부조리 차원이나 인간소외 차원에서 씌어졌다고 보는데, 물론 그 평도 틀리지는 않다.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부조리와 인간소외를 유발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방인에는 중의적 부조리와 인간소외가 핵과처럼 들어 있다. 그래서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틀을 벗겨버리고 안쪽의 부조리와 인간소외 부분만으로 평가해도 틀리지는 않지만, 그것은 파생된 결과일 뿐, 애초에 카뮈가 의도한 바는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이 집필동기였다고 내게는 읽혔다. 그것은 작품의 내용을 들어 증거를 댈 것이다. 미리 몇 가지만 말하자면 이방인에 나오는 '군인', '꼭두각시', '자동인형' '1789년 대혁명' 같은 단어들이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한다.
3. 이제 서사를 구축하고 있는 세부 구조물들인 장면들을 이데올로기적, 정신분석학적, 상징적, 미학적 차원 등의 관점들을 동원하여 복합적으로 뒤섞어 보게 되면, 우선 뫼르소는 자폐아적인 측면을 함께 가진 정신박약자다. 그렇다는 점에서 뫼르소는, 지능적으로 정상인과 동등하거나 오히려 뛰어나고, 그 우수성을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죄의식 없이 이용한다고 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와 구별된다. 서사적 측면에서 보게 되면 뫼르소는 자신의 관심분야에만 반응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놀랄 정도의 집중력을 보인다는 자폐적 측면에다 정신박약자, 경계성 지능, 심신 장애자, 즉 소위 말하는 약간의 바보 수준의 의식을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전체주의적 측면에서 보게 되면 지속적인 통제와 프로파간다로 세뇌된 결과, 정신박약자 수준으로 하향평준화 된 전체주의체제 안에서 살고 있는 국민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그 체제, 즉 사로잡힌 올가미에서 벗어나고자 본능적으로 동물적 저항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으리라. -27쪽.
첫 문단에서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진술은 정상인의 정신상태다. 하지만 이어지는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는 진술로 인해 뫼르소의 정신상태가 벌써 의심이 간다. 물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인해, 정상인도 오랫동안 발길을 끊은 상태라면 전보 내용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을 수 있듯이, 아직은 정신박약상태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정상인이라면 ‘아마 어제였으리라.’고 단정 짓지 않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진술이 이어졌을 것이다. 카뮈가 의도적으로 서술해 놓았다고 보는 이런 정신박약의 의심상태는 다음 진술로도 알 수 있다.
*사장에게 이틀 휴가를 신청했는데, 그는 이유가 이유인 만큼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못마땅한 듯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제 잘못이 아닙니다.” - 27쪽.
모친사망을 이유로 휴가를 신청하자, 사장이 못마땅해 할 때, 정상인이라면 “제 잘못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자기 잘못이 아님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이렇게 말했다면, 정상인의 생략 공유성 정신을 갖지 못한 부족한 정신 상태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바보의 전형적 특징인 정직성이 드러나는 첫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보게 되면 이 진술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책임을 전체에게 떠맡기려는 그 체제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엿볼 수 있다.
*나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갔다. 그 서두름, 달음박질, 게다가 버스의 덜컹거림, 휘발유 냄새, 도로와 하늘에 비치는 눈부신 햇빛, 아마도 그 모든 것 때문에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버스가 달리는 내내 거의 눈을 뜨지 않았다.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어떤 군인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는데, 그는 내게 미소 지으며 멀리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기 위해 나는 “예”라고 말했다. -28쪽.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버스는 그 안의 승객들을 한 곳으로 몰고 가는 전체주의체제로, 서두름과 달음박질은 그 체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동으로, 버스의 덜컹거림은 체제의 국민들을 닦달하는 시스템으로, 휘발유 냄새는 체제가 가하는 전체적 고통(같은 공간에서 퍼지는 휘발유 냄새는 모두가 맡을 수 있고 지속적일 때는 냄새로 인해 두통을 느낌)으로, 눈부신 햇빛은 작품 전체에서 줄곧 언급되듯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감시하는 애꾸눈, 즉 파놉티콘의 날카로운 눈빛 또는 전시안의 눈빛이자 체제의 혹독함으로, 설핏 든 잠이나 거의 눈을 뜨지 않은 상태는 체제에 길들여진 국민들의 의식 상태로, 군인의 어깨는 국민들을 통제하는 나치와 스탈린 체제 같은 전체주의의 상징으로, 군인이 미소 지으며 멀리서 오는 길이냐고 물은 것은 이제 체제에 물들어가는 국민을 더 깊이 세뇌시키는 장면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기 위해 “예.”라고 한 말은 벌써 체제가 암울한 상태임을 알게 된 체제 내의 국민의 반응으로 읽혔다. 여기서 숱한 대상을 두고 왜 하필이면 군인인가? 군인은 그저 우연히 만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등장시키기에는 특수한 계층에 속해 있는 대상이다. 그런 까닭에 카뮈가 콕 집어 군인의 어깨에 기대었다고 서술한 것은 치밀한 구성에 따른 결과로, 작품 전체가 군대의 규율과 통제에 따라야 하는 전체주의체제를 그리고 있음을 미리 암시하는 상징으로 보아진다.
그렇다는 점에서 미리 말하자면, 이방인에 나오는 태양을 카뮈가 공산주의에 입당했다가 탈퇴한 과정에 빗대어 상징적 관점으로 볼 때, 멀리서 뜨는 아름다운 아침의 태양은 공산당에 입당하기 전에 느꼈던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희망으로,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은 알고 보니 카뮈와는 너무나 맞지 않아 고통만을 주는 공산체제의 본질이자 파놉티콘의 눈으로, 노을을 남기며 지는 저녁 태양은 카뮈에게 자유의 기쁨을 주면서 멀어져 가는, 카뮈가 탈퇴한 공산주의체제이자 전시안으로 볼 수 있다.
*집에 있었을 때, 엄마는 말없이 시선으로 나를 좇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 양로원에 들어갔을 때 엄마는 처음 며칠 동안 자꾸만 울었다. 하지만 그것은 습관 때문이었다. 몇 달이 지난 후에는 양로원에서 나오라고 하면 도리어 울었을 것이다. 여전히 습관 때문에. - 29쪽.
이 대목은 서사적 관점으로 보면 뫼르소 엄마의 미약한 정신 상태나 심약한 상태를 보여주는 장면이지만,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는 전체주의체제의 감시체계가 두려워 말없이 시선으로 좇거나 침묵으로 시간을 보내는 체제 내의 국민들, 그리고 습관화된 상태는 세뇌로 굳어진 체제 내의 국민들의 의식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화적 차원에서 이 장면의 엄마는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상징으로 읽힌다.
한편, 역시 미리 말하자면, 이방인의 뫼르소나 양로원에서 죽은 엄마나 뫼로스와 사랑을 나누는 마리는 카뮈의 엄마가 분점 투영된 인물들이라고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카뮈의 엄마는 스페인계 알제리 인으로, 귀가 멀고 그로 인해 말이 어눌한 반농아자였다고 한다. 완전 농아자든 반농아자든 정신은 정상인과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간혹 정신이 부족한 경우도 있는데, 어쩌면 카뮈의 엄마는 후자였거나, 전자였다고 해도 어린 카뮈에게는 말없이 보내는 시간이 많고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말도 어눌하게 하는 엄마가 정신이 박약한 상태였다고 느꼈을 수 있고, 그런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나중에 이방인의 인물들에게 분사하여 투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안마당을 가로질렀는데, 거기서 여러 노인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연이어 등 뒤에서 대화가 재개되었다. 그것은 앵무새들이 나직이 조잘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30쪽.
여기서도 전체주의체제의 일상적 장면이 보이는데,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누군가가 지나갈 때 입을 다무는 것이나, 세뇌기제로 사용하는 반복적 프로파간다 요원들과 장치들, 그리고 그들의 반복적 선동 선전에 의해 세뇌된 국민들의, 세뇌된 내용을 반복하면서 사는 삶의 상징인 앵무새가 그렇다. 한편, 신화적 차원에서 이 장면의 노인들이나 앵무새는 역시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상징으로 읽혔다.
*그가 관으로 갔을 때, 내가 멈춰 세웠다. 그가 말했다. “보고 싶지 않으세요?” 내가 대답했다. “예.” 그가 동작을 멈추었고,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거북했다. “왜요?” 그러나 질문에 비난의 뜻은 없었고, 단순히 이유를 알고 싶은 듯했다. 내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 31쪽.
*“장의 인부들이 벌써 와 있어요. 장의인부들에게 영안실로 가서 관을 닫으라고 할 참입니다. 그 전에 어머님을 마지막으로 보시겠습니까?” 나는 아니라고 했다. - 38쪽.
정신분석적 차원에서 이 장면의 뫼르소는 전형적인 정신박약자의 모습을 보인다. 요양원 생활을 하는 엄마와 오랫동안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별했음에도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와 개인적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이거나, 정신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또 누가 있을까? 그리고 역시 같은 관점에서 정신적으로 부족한 죽은 엄마는 뫼르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 속의 모습으로도 읽힌다. 그래서 뫼르소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엄마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편,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여기서의 관은 전체주의체제를, 그리고 죽은 엄마는 그 체제에 길들여진 채 살다가 죽은 국민의 상징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카뮈가 나중의 재판과정을 위한 준비단계로서의 필요에 의해 이 장면을 설정할 때 자신의 관점을 숨기는 중의적 차원에서 마련한 장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은 저물어가는 오후의 아름다운 햇살로 가득했다. - 32쪽.
이미 말했듯이 평생을 전체주의체제에서 살아온 어머니의 죽음은 카뮈가 빠져나온 전체주의체제이고, 아름다운 저녁햇살은 카뮈에게서 멀어져가는 전체주의체제, 감시자의 애꾸눈으로 읽힌다.
*파리에서는 보통 사흘, 가끔은 나흘간 고인을 지켰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시간이 없으며, 사람이 죽자마자 영구차를 뒤쫓아야 하니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문지기의 아내가 말했다. “조용해요, 그런 건 이분께 드릴 말씀이 아니잖아요.” 노인은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다. 내가 끼어들며 이렇게 말했다. “아녜요. 아녜요.”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가 옳고 또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 32쪽.
역시 뫼르소의 정신박약적인 측면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사람이 죽자마자 영구차를 뒤쫓아야 하니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는 노인의 이야기가 옳고 또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정상적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우리 안의 악마성이 문득 발현되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극히 한정적이다. 그리고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뫼르소의 정신박약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카뮈가 의도적으로 이 말을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파리에서는 보통 사흘, 가끔은 나흘간 고인을 지켰다.’는 기술은 파리로 상징되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는 고인의 죽음마저 존엄성이 지켜지지만, 전체주의체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읽힌다.
*유리창 너머로 금세 어둠이 짙어졌다. 문지기가 스위치를 돌리자 별안간 분출되는 불빛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 나는 그에게 전등 하나를 끌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얀 벽에서 반사되는 불빛 때문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설비가 그렇게 되어 있었다. 모두 켜든지 모두 끄든지 둘 중 하나만 가능했다. - 33쪽.
*눈앞에 어둠 한 점 없었고, 물건 하나하나, 모서리 하나하나, 곡선 하나하나가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 35쪽
*그들의 얼굴에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눈이 보이는 게 아니라 주름살의 둥지 한가운데 광채 없는 눈빛만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 36쪽.
여기서도 생활 전반에서 작동하고 있는 감시체제로 숨길 것이 없이 모든 것이 눈부신 햇살(전시안의 눈빛) 아래 드러나거나(모두 켜든지), 완전히 은폐되는(모두 끄든지) 전체주의체제의 상징성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주름살의 둥지 한가운데 광채 없는 눈빛만이 보인다는 기술은 전체주의체제의 국민들의 의식 상태를 외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인다.
*바로 그때, 나는 그들 모두가 문지기를 둘러싼 채 나를 마주하고 앉아 고개를 흔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순간 나는 그들이 나를 심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느낌이 들었다. - 36쪽.
이 대목은 전체주의체제의 인민재판의 상징으로 읽힌다.
*오늘은 풍경을 일렁이게 하는 끓어 넘치는 태양이 이 고장을 비인간적이고 위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 41쪽.
*나는 태양이 금세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벌써 오래전부터 곤충들이 우는 소리와 풀잎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가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 42쪽.
앞서 기술했듯이 끓어 넘치는 태양은 전체주의체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체제를 감시하는 파놉피콘의 눈인데, 체제 내의 국민을 비인간적이고 위압적으로 만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곤충들의 울음소리와 풀잎이 타닥타닥 튀는 소리는 전체주의체제의 지속적인 선전 선동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와 합류했다. 뒤이어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는 다시 들판을 가로질렀고, 여러 차례 그러기를 되풀이했다. 나는 관자놀이에서 피가 뛰는 것을 느꼈다. - 44쪽.
*페레 영감의 얼굴, 흥분과 고통으로 얼룩진 굵은 눈물방울이 그의 두 뺨 위로 흘렀다. - 45쪽.
*또한 교회, 보도 위의 동네 사람들, 무덤 위의 붉은 제라늄꽃, 페레 영감의 기절(마치 해체된 꼭두각시 같았다.), - 45쪽.
페레영감이 장지로 앞장서 가는 이 대목은 체제에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보낸 자의 상징으로 읽히고, 페레영감의 얼룩진 굵은 눈물방울은 체제의 앞잡이로, 완장 차고, 메가폰 잡고 프로파간다 선전요원으로 보낸 세월에 대한 회한의 눈물로 읽히는데, 그렇게 읽히는 건 페레 영감이 기절한 장면을 두고 (마치 해체된 꼭두각시 같았다.)라고 한 서술 때문이다. 여기서 꼭두각시는 전체주의체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단어다. 그런데 카뮈는 전체 소설에서 어울리지 않게도 이 단어를 이 장면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노구 탓에 장지에 도착해 기절한 페레 영감의 모습을 얼마든지 다른 단어를 사용해 묘사할 수 있는데도 굳이 누구나 알 수 있는 꼭두각시라는 단어를 뜬금없이 사용한 것은 혹시 독자들이 이방인을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의 관점으로 읽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조급함이 자신도 모르게 개입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노골적인 작가개입으로 보이는 것이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졌을 때 그녀가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도 그녀를 뒤좇았다. / “내가 당신보다 더 햇볕에 그을렸네요.”- 47쪽.
이 장면에서 마리 역시 태양으로 상징되는 전시안이자 전체주의체제에 길들여진, 뫼르소보다 더 깊이 세뇌된 국민의 상징으로 읽힌다.
*우리가 옷을 다시 입었을 때, 마리는 내가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라면서 상을 당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녀가 언제 상을 치렀는지 알고 싶어 했기에, 나는 “어제”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흠칫 뒤로 물러났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저녁이 되자 마리는 모든 것을 잊었다. ... 나는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영화가 끝날 무렵,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으나 다소 어색하게 마무리되었다. 극장에서 나오자, 그녀는 내 아파트로 왔다. - 48쪽
*그녀가 웃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정욕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점심 식사를 준비하면서 그녀가 별것 아닌 일에 다시 웃었기에, 나는 그녀에게 키스해주었다. - 67쪽.
*저녁에 마리가 나를 보러 왔고, 자기와 결혼하고 싶으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이고, 그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대답한 대로,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아마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 잠시 또 다른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고, 아마 그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만 언젠가 그 때문에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입을 다물자, 그녀는 미소 지으며 내 팔짱을 꼈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73-74쪽.
여기서도 뫼르소의 정신박약적 측면이 드러나는데, 엄마의 장례식 다음날, 우연히 다시 만난 이전 직장동료인 여자와 함께 코미디 영화를 보고, 가슴을 어루만지고, 키스를 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는 정상적인 남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뫼르소의 정상성에서 살짝 벗어난 정신박약적인 측면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리 역시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뫼르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면모를 계속 보이는데, 정상적인 여자라면 아마도 다음 기회로 미뤘을 것이지만, 저녁이 되자 벌써 잊어버리고 뫼르소의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고 뫼르소에게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정상적인 여자라면 관계를 끝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겠지만 마리는 슬픈 표정을 잠시 짓고는 다시 점심준비를 하면서 별것 아닌 일에도 웃고는 하고, 미소를 지으며 뫼르소의 팔짱을 끼고는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백치기와 백치미를 보여준다. 이것은 전체주의체제 내의 국민들이 정신박약 수준으로 의식이 하향평준화 되었다는 설정에 부합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전체 소설에서 영화 장면이 자주 나오고, 스포츠 관람 장면도 나오고, 섹스와 관련된 언급도 자주 나오는데, 누구나 알 듯이 영화와 스포츠와 섹스는 전체주의체제가 국민들의 의식을 본능에 충실한 동물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한 체제 방어적 기제의 일종으로, 카뮈는 그 장치를 작품에 잘 이용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한편, 신화적 차원에서 뫼르소와 마리는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를 한 몸에 지닌 양성구유의 상징으로 읽힌다. 이는 소설 전체에 걸쳐 나오는데, 따라서 뫼르소를 마리로, 마리를 뫼르소로 보아도 다르지 않은, 남녀 모두가 전체주의체제에 길들여진 상징으로 보인다.
*일요일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따분한 기분이 들었다. 일요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 48쪽.
이 대목은 가부장적 종교에 대한 혐오를 시사한다. 카뮈에게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나 가부장적 종교는 모두 하나의 몸인 것이다.
*반바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해군복 차림으로 뻣뻣하게 풀 먹인 옷에 갇힌 듯 거북해하는 두 소년, 커다란 분홍색 리본을 달고 검정 에나멜 구두를 신은 소녀가 지나갔다. - 49쪽.
*뒤이어 동네 영화관들이 거리에 관객의 물결을 쏟아놓았다. 그들 가운데 젊은이들이 평소보다 더 단호한 동작을 취하는 걸로 미루어, 나는 그들이 모험영화를 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 51쪽.
이 장면은 전체주의체제의 정형화된 모습으로, 나치와 스탈린 체제의 청년선동가들의 상징으로 읽힌다.
*여느 일요일과 다름없는 일요일 하루가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이 끝났고, 내일이면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고,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 52쪽.
*엄마의 나이도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틀리지 않기 위해 “예순 살가량”이라고 대답했는데, - 53쪽.
*그는 동네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했다. ... 나는 그가 하는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 56쪽.
*그는 내게 자기 친구가 되고 싶으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고 말했다. - 58쪽.
다시 뫼르소의 빈약한 정신적 측면을 보여주는 장면들의 등장이다. 정상인에게라면 엄마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고, 심리적으로 큰 변화가 이루어진 사건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상인이라면 대부분은 엄마의 나이를 기억한다. 하지만 뫼르소는 엄마의 나이도 정확히 모른다. 그리고 레몽은 동네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보편적 기피인물이지만 뫼르소는 그가 하는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친구가 되고 싶으냐는 레몽의 질문에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고 말하는데,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그런 질문을 받을 기회조차 마련하지 않는다.
*‘내가 너한테 베푼 행복을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알기나 해?’ - 59쪽.
이 대목은 전체주의체제의 배급주의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서는 문장을 따로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나온, 레몽이 무어인 여자 친구에게 모든 생활비를 대어준다고 하는 장면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차버린다는 내용과 자기 품에 안기고 싶게 만드는 내용을 동시에 담은’ 편지를 그녀에게 쓰고 싶어 했다. 마침내 그녀가 돌아왔을 때 잠자리를 같이 하고, ‘절정의 순간’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고 밖으로 내쫓을 작정이었다. - 61쪽.
*“나를 우습게 봤지, 나를 우습게 봤어. 날 우습게 보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주지.” 둔탁한 소리가 몇 차례 나면서 여자가 울부짖었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끔찍했던지 층계참이 이내 사람들로 가득 찼다. - 67쪽.
*경관이 두툼하고 묵직한 손바닥으로 레몽의 따귀를 힘껏 갈겼다. - 67쪽.
*“자네는 젊잖아. 그런 생활이 자네 마음에도 들 것 같은데.” 나는 그렇기는 하지만, 실은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삶의 변화에 관심이 없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누구도 결코 삶을 바꿀 수 없고, 결국 이런 삶이나 저런 삶이나 똑같은 가치를 지니며, 지금여기의 내 삶이 전혀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 - 73쪽.
이 장면들은 위협과 회유, 체제 배신자에 대한 응징, 강제수용소, 체벌, 체제유지를 위한 비밀경찰, 억압과 통제, 제거 등 전형적인 전체주의체제의 특징과 그 체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나는 편지를 썼다. 다소 아무렇게나 썼으나 레몽을 만족시키려고 애썼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61쪽.
이 장면은 집중력과 정직성이 특징인, 뫼르소의 또 다른 측면인 자폐아적인 면모를 나타낸다. 이러나저러나 뫼르소는 정상인의 상태에서 어긋나 있는, 자폐아적 또는 정신박약자 인물임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보인다.
*그녀는 매우 정성스럽게 하나씩 하나씩 거의 모든 방송에 표시를 했다. 잡지가 열두 페이지나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식사하는 내내 그 일을 꼼꼼하게 계속했다. 내가 식사를 끝냈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열심히 표시를 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동인형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재킷을 입더니 밖으로 나갔다.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밖으로 나가서 잠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보도 가장자리를 따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옆으로 비키거나 뒤돌아보는 법도 없이 자기의 길을 갔다. 이윽고 나는 그녀를 시야에서 놓쳤고, 발걸음을 돌렸다. - 76쪽.
이 장면은 뫼르소가 셀레스트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 들어온 여자가 음식을 먹으면서 보인 행동과 식사를 끝내고 나갔을 때의 태도인데, 마치 우리의 과거 블랙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전체주의 감시체제에서의 감시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에피소드는 나중에 재판에서 전체주의가 재판과정까지 감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과관계로 이어진다. 한편 여기서도 카뮈는 자동인형이라는 전체주의체제를 드러내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할 일이 없어 여자를 따라가는 뫼르소의 모습을 통해, 전체주의체제에서는 감시자든 피 감시자든 모두 자동인형의 속성을 띠면서 모두가 피해자라는 의미까지 숨겨놓았다. 물론 할 일이 없어 여자를 따라가는 뫼르소의 모습은 뫼르소의 정신박약 상태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마리와 함께 멀리 나아갔고, 우리는 몸짓이나 만족감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을 느꼈다. - 84쪽.
뫼르소와 마리가 자웅동체인 양성구유, 즉 남녀모두 전체주의체제에 길들여진 괴물 같은 상태로 변한 모습을 보다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태양이 여전히 붉게 이글거렸다. 모래밭 너머로 보이는 바다가 잔물결로 질식할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 91.
이 장면은 전체주의체제의 강령 또는 파놉티콘의 날카로운 눈빛이 뫼르소와 마리에게 자유의 공간인 바다마저 옥죄고 감시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나는 천천히 바위를 향해 걸었고, 태양 때문에 이마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든 열기가 나를 짓눌렀고, 내 발걸음을 방해했다. 그리고 얼굴 위로 태양의 뜨거운 숨결이 확확 불어닥칠 때마다 나를 이를 악물었고, 바지 주머니 속의 두 주먹을 불끈 쥐었으며, 태양을 떨쳐버리고자, 태양이 쏟아붓는 불투명한 취기를 물리치고자 온몸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모래, 새하얀 조가비 또는 유리 파편에서 칼처럼 뿜어져 나오는 햇빛이 눈을 찌를 때마다 턱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오랫동안 걸었다. - 91, 92쪽.
태양으로 상징화되는 전체주의체제, 파놉티콘의 애꾸눈, 전시안에 대한 카뮈의 혐오와 저항을 뫼르소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후광으로 둘러싸인 작고 어두운 바윗덩어리가 보였다. ... 레몽의 적수가 그 자리에 돌아와 있는 것이 보였다. - 92쪽.
*불타는 태양이 두 뺨을 엄습했고, 땀방울이 눈썹 위에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의 장례식 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 한 걸음 움직인다고 해서 태양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칼을 꺼내어 햇빛 속에서 내게 겨누었다. 햇빛이 강철 위에 번쩍하며 튀었고, 그 빛이 눈부신 장검처럼 내 이마를 찔렀다. ... 나는 이제 내 이마 위에서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와 내 앞의 단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번쩍이는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그 불타는 칼은 내 속눈썹을 파고들었고, 고통에 찬 내 두 눈을 후볐다. - 95쪽.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을, 내가 그토록 행복해했던 바닷가의 기이한 침묵을 깨뜨렸음을 알았다. 그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방을 쏘았는데, 총알은 그런 것 같지도 않게 깊이 박혔다. 그것은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 95쪽.
이 장면들에서 눈이 부시도록 밝은 후광으로 둘러싸인 아랍인은 태양, 즉 전체주의체제의 하수인이고, 그의 단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번쩍이는 빛의 칼날은 전체주의체제의 위협이자 날카로운 파놉티콘의 눈빛이며, 아랍인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건 전체주의체제에 대해 그동안 참아왔던 저항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여기서도 뫼르소의 정신박약(전체주의체제에서 하향평준화 된 국민의 정신) 상태가 잘 드러난다. 왜 네 발을 더 쏘았는가? 사실 이 숫자는 뫼르스의 정신 상태를 내시경으로 찍었을 때 모니터상에 드러나는 동일한 그래프 같은 것이므로, 몇 발 덜 쏜 것으로 축소해도, 몇 발 더 쏜 것으로 늘여도 무방한 진술이다. 우리는 모두 다섯 발이라는 모니터에 드러난 그래프를 통해 뫼르소의 정신박약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다. 우선 가능한 추정은 그 첫발이 아랍인의 칼에 비친 햇살이 날카롭게 눈을 찔렀을 때, 그것을 정신박약자의 입장이 되어 보게 되면 공격하는 동물의 날카로운 이빨이 눈을 물어뜯는 듯한 감정으로 느껴지고, 그것을 방어하려는 동물적 본능이 발동하면서 자신의 이빨로 착란하게 되는 권총의 첫발을 발사했다는 것이다. 물론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일반인이었다면 우선 햇살에 비친 칼날의 날카로운 빛을 피해 몸을 좌우로 움직여 피했을 것이고, 보다 성급한 방어수단이라고 해도 허공에 권총을 쏘아 겁을 주는 행동을 취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며, 권총을 자신의 이빨과 동일시하는 착란 상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어서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다시 두 번째 발사를 하고 연이어 세 번을 또 쏘는데, 이 과정 역시 동물성 반응으로 유추할 수 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이나 유튜브에서 사냥개나 양치기 개가 야생동물과 대치하다가 마침내 기회를 잡아 목을 물고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 죽일 때, 첫 번째 시도를 하고 나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여 완전히 절멸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와 같은 내적 본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상인이었다면 첫 발이 명중한 것을 보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는 행태를 보이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첫발에 쓰러진 아랍인의 모습에서 돌연 자신의 우위를 느끼고 그것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정신박약자의 의식이 발동하여 두 번째 발을 쏘았으며, 같은 이유로 나머지 총알을 계속 쏘았거나, 세 번째 발사부터는 정신박약자에게서 분출하는 기이한 재미를 스스로 느꼈을 수도 있고, 첫 발에 아랍인이 쓰러지자, 순간적으로 정상인의 정의감과도 같은 감정이 느껴졌고, 그래서 불의를 응징한다는 차원에서 그 감정으로 나머지 발사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어느 경우든 정신박약자임을 드러낼 뿐이다. 물론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의 관점에서 보면, '한 걸음 움직인다고 해서 태양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아랍인의 칼날에 반사된 태양빛은 감시자의 눈빛인 파놉티콘의 눈빛이고,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여러 발을 쏜 것이 된다.
제2부는 뫼르소가 감옥에 수감돼 있으면서 법정으로 출두하여 재판을 받고, 사형판결을 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때 감옥은 인간의 정신성이 철저히 배척되는 동물적 본능만 가득한 곳으로, 전체주의체제 그 자체이자, 전체주의에 저항하면 부조리한 판결을 받아 죽을 때까지 임시 수감되어 있는 곳에 대한 상징이다. 법정 또한 이미 짜인 각본대로 체제 내의 모든 일이 진행되는 전체주의체제를 암시한다. 그것은 다음 설명으로도 뒷받침된다.
*감옥이 도시 꼭대기에 있었기에, 나는 조그만 창을 통해 바다를 볼 수 있었다. - 112쪽.
감옥이 도시 꼭대기에 있다는 것은 모든 도시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 즉 전체주의체제에서 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면서, 자유의 메타포인 바다로부터 격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음이 아팠냐는 변호사의 질문에,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 103쪽.
*모름지기 건강한 사람이라면 다소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기 마련이었다. / 그는 나로 하여금 법정에서도 예심판사실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기를 약속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천성적으로 육체적 욕구가 감정을 방해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그에게 설명했다. - 103쪽.
*그날 내가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했었다고 말해도 좋은지 물었다. 나는 말했다. “아뇨,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 다른 사람들과 절대적으로 똑같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 104쪽.
여기서 변호사가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했었다고 말해도 좋은지 물은 것은 뫼르소에게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시 어떤 사정으로 또는 천성적으로 슬픔을 못 느끼는 사람이어서 슬픈 감정을 내비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대로 말하면 틀림없이 자신에게 불리해지므로, 그렇다고(슬픈 감정을 의도적으로 억제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아니라고 말한다. 정신박약자임을 나타내는 또 다른 장면인 것이다. 정상인의 정신은 정신박약자의 정신보다 풍부한데, 정신박약자는 상황에 따라 거짓말할 수 있는 정신능력이 부족하지만 정상인은 그것을 할 수 있을 만큼 더 풍부한 것이다. 여기서 만약 뫼르소에게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 유일한 증인은 뫼로소뿐이었다고 하면, 자식이 칼로 찌르는 것을 보았느냐는 변호사나 검사의 질문에, 정상인이라면 자신의 진술로 자식이 사형을 받기 때문에 못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정직을 인생모토로 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못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보았다고 한다면 그는 당장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제 보니, 저, 사람 좀 모자란 사람 아냐?”라는 의심을 받을 것이다. 모자람을 볼 수 있는 것, 거짓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를 알아채는 것, 이게 정상인의 정신이다. 하지만 이 경우 뫼르소는 자식이 사람을 찌르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렇게 정상인과 박약자는 분명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뫼르소는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 다른 사람들과 절대적으로 똑같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라는 서술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뫼르소가 정신박약임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서술 장면은 뫼르소가 정신박약자임을 드러내기 위해 카뮈가 중의적으로 설정해놓은 장치라고 보아진다. 그렇지 않고 뫼르소가 정상인의 정신을 갖고 있는 인물이면서도 오로지 정직한 인물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장면을 넣었다면 정상인 가운데 일반적으로 정직한 사람을, 누가 보아도 정신지체자로 보이는 뫼로소와 같은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모순에 빠진다. 아무리 개성적인 인물을 그린다고 해도 인간이 지닌 보편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개성을 발휘하도록 해야 독자는 납득할 수 있다. 보편성이 없는 개성은 그야말로 미치광이 또는 정신박약자가 아닌가? 그리고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질지라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한 인물로 그리려고 하면 정직함을 유지함으로써 지켜야 할 가치 같은 것이 있어야 개연성이 확보된다. 뫼르소의 경우 전체 삶에서 보인, 일반인의 시선에선 분명 모자란 정신의 결과인 것들을 그렇더라도 정직함이라고 할 경우, 그로써 맞게 되는 불리함을 감수하고라도 지켜야 할 대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그 가치가 무엇인가? 따라서 카뮈가 이 장면을 설정한 것은 뫼르소가 정신박약자로, 다시 말해 전체주의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일반국민의 상징적 인물로 설정한 것이라고 보아지는 것이다. 물론 카뮈가 의도한 전체주의체제 내의 정신박약자(전체주의사상이 결핍된, 완전히 세뇌되지 않은,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적 인물, 전체주의체제에선 이방인)에게는 죽음을 감수하고라도 정직을 유지함으로써 지켜야 할 가치 혹은 획득되는 가치가 있다. 자신 혹은 타인의 자유라는 고귀한 가치.
*“당신의 행동 속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하고 그가 덧붙였다. -105쪽.
재판과정에서도 뫼르소의 정신박약 상태는 계속 노출되고 있다. 엄마의 죽음에 마음이 아팠냐고 묻는 변호사의 질문에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점, 건강한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기 마련이라고 하는 점, 천성적으로 육체적 욕구가 감정을 방해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점,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했느냐는 질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점, 자신이 다른 사람과 절대적으로 똑같다고 믿는 점(수많은 정신박약 상태가 드러났음에도-그건 곧바로 예심판사의 심문 때 드러난다), 뫼르소의 행동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예심판사가 뫼르소에게 하는 말(예심판사 역시 뫼로소의 행동을 독특한 개성으로 보지 않고, 정신박약으로 의심함) 등, 이렇듯 누구나 뫼로소가 정신박약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화가 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느님의 얼굴을 외면하는 사람들조차 하느님을 믿는다고 했다. - 108쪽.
예심판사가 뫼르소에게 심문도중에 묻는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장면은 종교를 빗댄 전체주의체제를 간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뫼르소에게 전체주의나 국가주의나 가부장적 종교는 모두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신문기자들은 벌써 만년필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심하고 다소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유난히 젊은 기자, 푸른색 넥타이에 회색 플란넬 양복을 입은 젊은 기자 하나가 만년필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비대칭적인 얼굴 속에서 아주 맑은 두 눈만 보였는데, 그 두 눈은 나를 유심히 살피면서도 딱히 무언가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 의해 관찰당하는 듯한 기이한 인상을 받았다. - 126쪽.
여기서 뫼로소가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기자의 푸른색 넥타이는 자유를, 회색 플란넬 양복은 전체주의를 상징하는데,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심을 가슴에 품고 있음에 대한 비유이며, 비대칭적인 얼굴은 온전한 정신이 아닌 정신박약의 상징이자,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내면적 얼굴의 상징이다. 따라서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비대칭적인 얼굴에 아주 맑은 눈을 갖고 있으며, 뫼르소가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젊은 기자 역시 뫼르소처럼 내면적으로는 전체주의체제에 저항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유일한 기자임을 보여준다. 이 감옥에서 대칭적이고 정상적인 얼굴은 전체주의에 완전히 영합하는 사람들이고, 모자라는 정신성은 전체주의정신에 모자라는 정신성으로, 전체주의에 완전히 세뇌된 정상상태에서 모자라는 부분만큼 저항정신으로 채워져 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셀레스트가 호명을 받고 일어섰다. 그의 곁에 언젠가 식당에서 보았던 여자, 정확하고 단호한 태도를 지닌 키 작은 여자가 그날의 그 재킷 차림으로 앉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127.
이 장면은 뫼르소가 셀레스트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모든 방송일정을 체크하던 정확하고 단호한 태도를 지닌 인형 같은 여자로, 공판정에도 나타난 것은 이미 말했듯이 전체주의체제가 재판과정도 감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음 서술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그들 가운데 가장 젊은 기자의 시선과 그 키 작은 자동인형의 시선을 느꼈다. - 128쪽.
*나는 회색 양복을 입은 신문기자의 시선과 자동인형 여자의 시선과 마주쳤다. - 149쪽.
여기서 카뮈는 ‘자동인형’이라는 단어를 콕 집어 연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소설이 끝나가는 지점까지 전체주의체제의 국민들을 의미하는 자동인형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이방인을 집필한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회색 양복을 입은 신문기자의 시선과 자동인형 여자의 시선과 마주쳤다고 하는 장면에서는 자유를 상징하는 푸른색 넥타이는 빼고 전체주의체제를 상징하는 회색 양복만 거론했는데, 이 점 역시 자동인형 여자의 의미와 조화를 이루게 할 목적처럼 여겨졌다.
*다시 종이 울리고 피고인석의 문이 열렸을 때, 나를 향해 밀려온 것은 장내의 침묵 그리고 젊은 신문기자가 눈길을 돌리는 것을 보았을 때 내게 일었던 야릇한 느낌이었다. - 150쪽.
배심원들의 평결이 내려지고 나서 뫼르소가 다시 법정으로 들어갔을 때의 분위기인데, 젊은 신문기자가 눈길을 돌리는 것을 보았을 때 뫼르소는 야릇한 기분을 느낀다. 이 장면은 뫼르소가 결국 전체주의체제에 희생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자, 무심하고 다소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닌 전체주의체제에 길들여진 다른 기자들과 달리 반체제 정신을 지니고 있었던 푸른 넥타이를 맨 신문기자 역시도 희생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나도 가끔 개입하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내 변호인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잠자코 있어요, 그게 더 낫습니다.” 어떤 면에서 나를 제외한 채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모든 게 나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내 의견의 청취 없이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 141쪽.
이 장면은 이미 짜맞춰진 결론에 맞게 증인신문, 피고인 신문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나타내는데, 앞서 나왔던 장면들, 그러니까 원장이 어머니가 양로원에 넣은 것을 비난한 사실, 장례식날 무덤덤한 태도,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무덤 앞에서 묵상조차 하지 않고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떠나버린 사실, 어머니의 나이를 모르는 사실 등의 증언(130쪽), 문지기가 증언인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담배를 피웠고, 잠을 잤고, 밀크커피를 마셨던 사실, 권한 밀크커피를 사양하지 않은 사실, 모든 것이 사실인 동시에 아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진술(132쪽), 셀레스트, 마송, 살라마노 영감, 등이 호의적인 증언을 하지만 아무도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는 진술, 레몽의 호의적 증언이 오히려 뫼르소를 도덕적 괴물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더 용서받을 수 없는 치정 범죄자로 만든다는 사실(137쪽), 등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전체주의체제의 선전선동, 기만, 사실 왜곡, 등을 나타낸다.
* “이 사람, 여러분, 이 사람은 지적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는 대답할 줄도 압니다. 그는 낱말의 뜻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행동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143쪽.
이 장면은 검사의 논고 일부인데, 뫼르소가 정신박약자임을 비로소 드러내는 말이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을 일러 지적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정상적인 사람을 말할 때 그래도 지적 능력은 있다고 말하는데, 그 능력은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장면에서 검사가 하는 말로도 알 수 있는데, 지적 능력이 있는 정도라는 것이 대답할 줄도 알고, 낱말의 뜻도 잘 알고 있다는 정도다. 세 살 정도만 되도 대답할 줄도 알고, 낱말의 뜻도 안다. 삼십대 남자가 세 살 정도의 정신 능력을 가졌다면 그게 정상인의 정신을 가진 것인가? 민주주의사회의 법정 같았다면 당연히 정상참작의 작량감경사유에 해당한다. 이 대목은 전체주의체제가 저지르는 사실의 왜곡과 세뇌를 다시 한 번 드러내는 장면이다.
*검사는 내 영혼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고 배심원들에게 말했다. ...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갖출 능력이 없는 것, 그것이 그에게 없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법정에서 관용이라는 정히 부정적인 미덕은 정의라는 더 어려우나 더 고귀한 미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특히 이 사람에게서 보이는 텅 빈 가슴의 공허가 사회 전체를 삼킬 수 있는 심연이 될 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 144쪽.
검사는 어머니에 대한 부덕이 아랍인 살해의 행위를 준비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예고하고 정당화하는 것이었다는 논지를 편다. 정신미약 상태를 도덕부족 상태로 몰아가는 이것 역시 전체주의체제의 억지 꿰어맞춤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그리고 검사가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갖출 능력이 없는 것, 그것이 그에게 없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 역시 뫼르소는 일반인의 정신능력이 없는 정신박약자임을 이미 알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곰곰이 생각해볼 때, 냉정하게 사태를 돌아볼 때, 단두대의 결함은 아무런 기회도, 절대적으로 아무런 기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무슨 일이 있어도 수형 환자의 죽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것은 이미 분류된 사건이요, 확정된 화합물이요, 번복할 수 없는 합의 사항이었다. - 156쪽.
단두대가 완벽하게 작동하는 상태를 오히려 결함이라고 여기는 이 장면에서 단두대는 전체주의체제의 시스템을 상징하는데, 이 체제에서 국민은 분류된 사건이요, 확정된 화합물이요, 시스템의 계획에 따라 소비되는 물건일 뿐임을 나타낸다.
*오랫동안 단두대에 이르기 위해서는 계단을 밟고 처형대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1789년 대혁명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내게 가르쳐주고 보여준 모든 것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 157쪽.
이 대목에서 뜬금없이 1789년 대혁명이 나오는데, 한 차례도 실수를 하지 않는 단두대, 즉 무자비한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대목으로, 이 역시 카뮈가 이방인을 집필한 동기가 직접적으로 노출된 장면이자, 자신의 작품이 의도대로 읽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끝에 끼워 넣은 노골적 작가개입이라고 보아진다.
*기계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 밟는 땅과 같은 높이에 놓여 있다. 그는 마치 사람을 만나듯, 그 기계를 만난다. 그것 또한 난처한 일이었다. 처형대로의 상승, 하늘로의 승천, 상상력은 거기에 의지할 수 있었다. - 157쪽.
역시 전체주의체제의 무자비성, 인간을 기계와 동일시하는, 상상력이라는 인간미가 거세된 전체주의체제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는 내게 들리지 않는 몇 마디 말을 했고, 아주 빠른 어조로 나를 포옹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싫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 166쪽.
뫼르소를 통해 전체주의로서의 종교를 거부하는 카뮈를 다시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제 왜 나는 왜 엄마가 삶이 끝날 무렵에 ‘약혼자’를 가졌는지, 왜 엄마가 삶을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거기, 거기서도, 뭇 생명이 꺼져가는 양로원 주위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욕망이 일었음이 틀림없었다. - 170쪽.
전체주의체제의 희생자인 엄마가 죽음을 통해서야 전체주의체제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대목으로, 전체주의체제가 사라져갈 때야 비로소 삶의 의욕을 느낀다는 것을 암시하는 카뮈의 정신이 녹아 있는 장면이다.
*신호와 별들이 가득한 밤의 어둠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가슴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그토록 형제 같으매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결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도록, 내게 남은 일은 처형일에 모쪼록 많은 구경꾼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기를 소망하는 것뿐이었다.- 171쪽.
신호와 별들이 가득한 밤의 어둠은 전체주의를 상징하는 감시자의 애꾸눈인 태양이 사라진 세계, 감시자가 없는 자유를 얻은 세계, 그동안 감시자의 눈인 태양으로 인해 자신의 눈을 갖지 못하다가 태양이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신호와 별들이라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세계다. 그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감시의 다른 말인 관심으로부터, 즉 전체주의체제로부터 자유를 얻은 해방감)에 가슴을 열었다. 세계(비로소 얻은 자유와 정직의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그토록 형제 같으매((전체주의자들의 눈으로 보면 바보, 정신박약자들이 사는 세상과도 같은 유토피아),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카뮈가 그리는 전망이지만, 작품 내에서는 뫼르소가 정신박약 상태이므로 그동안 전체주의체제를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죽음이라는 변화된 상황(전체주의로부터 해방)에서 느끼는 행복감과 동일하게 느낌). 증오의 함성(전체주의자들이 전체주의로부터 해방된 자에게 지르는 증오의 함성. 그럴수록 해방된 자는 기쁨을 느낌).
4.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방인은 전체주의체제에 강한 혐오와 저항심을 드러내는 카뮈의 사상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카뮈가 직접 한 말로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모름지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이 문장으로 나는 책의 주인공이 연극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사회의 이방인이며, 지극히 사적이고 고독하고 감각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 변두리의 주변인으로 겉돈다. ‘이방인’의 미국판 서문. 1955년 1월 8일, 알베르 카뮈. - 22쪽.
이것은 1942년에 이방인이 출간된 지 13년이 되던 1955년에, 카뮈가 그동안 이방인에 대한 집필동기를 묻는 수많은 질문에 침묵하다가, 이방인의 미국판 서문에서 마침내 한 말이라고 한다. 보다시피 카뮈는 어머니의 장례식이라는 전체주의체제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즉 체제반동적인 사람은 누구나 제거될 수 있다는, 전체주의체제를 은유적으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수첩에서도 카뮈는 한 사람의 명령에 전체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전체주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편, 카뮈는 전체주의체제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연극’이라는 말로 애매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가 원래 의도했던 저항의 대상인 전체주의, 그가 가입했던 공산당의 행태 또는 그 체제를 연극이라고 에둘러 말한 것이나, 출간 후 끊임없이 집필동기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다가 13년이란 세월이 되어서야 미국판 서문에서 마침내 한 대답에서도 이렇게 에둘러 말한 것은, 그 자신은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집필한 것이고 이전까지 유명해 지지도 않았던 만큼 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평론가들이 전체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기본 틀은 빼고, 부수적인 측면인 부조리나 인간소외의 관점에서만 읽고는 칭찬을 해주었고, 이에 어리둥절하여 당황한 나머지 카뮈는 상찬의 흐름에 휩쓸려 속마음을 내보이지 못한 것이고, 비록 본래 의도와는 다르지만 작품에 극찬을 해준 평론가들에 대한 예의 혹은 관계 차원에서 여전히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매하게 말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가 하면 공산진영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던 터여서 작품의 의도를 드러냈다가는 더욱 가열한 비난에 시달릴 것 같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이렇게 느낀 것은 카뮈가 13년이 지나서 한 말이 그의 작품과 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뮈는 같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방인’에서 아무런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그것은 크게 틀린 독법이 아니리라. - 22쪽.
이 진술은 실제 작의는 숨기고 평론가나 독자들의 서평에 영합하는 에두른 표현으로 위장한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텍스트 전체에서 드러나듯 뫼르소는 진실을 위해 의식적인 정신작용을 통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박약인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이미 짜인 대로 죽음이 주어지는 것이다. 주어진 소설 환경에서 뫼르소는 진실을 위해 살겠다는 의식을 갖고 있지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식도 없다. 단지 순간순간 일어나는 내부적 충동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단순한 정신박약자일 뿐이다. 카뮈의 진술처럼 뫼르소가 진실을 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소설 전체에 나온 그의 모든 행위들이 정상인의 의식 상태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가령 페스트의 의사 르외 같은 인물이거나 안중근 같은 인물이어야 한다. 카뮈가 전체주의체제의 실상과 그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이방인을 집필한 게 아니라,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이방인을 썼다면, 순수한 부조리 차원의 소설로 쓴 것이라면, 소설 전체에 나오는 전체주의체제를 상징하는 군인, 앵무새, 인형 등등의 에피소드는 갈 곳이 없어진다. 그 장치들은 소설의 주제에 기여하지 못하고, 카뮈가 순전히 원고지 매수를 늘리기 위해 그냥 떠오르는 대로 끼워놓은 의미 없는 단어나 장면들밖에 안 되는 것이다. 카뮈가 그럴 리가 있을까?
5. 한편, 이방인이 순수한 부조리 차원이나 실존적 차원에서 쓰인 것이라고 인정하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작품을 보게 되면, 이방인은 중의적 부조리를 다룬 작품이다.
뫼로소에게는 정신박약 상태가 실존이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정상상태가 실존이다. 그래서 뫼르소의 상태를 일반인의 실존으로 동일하게 평가하면 뫼로소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그리고 정상인의 입장에서 봐도 뫼로소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가 정상인의 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결코 그가 소설에서 보여준 행위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죽이지도 않았고, 게다가 총을 네 발이나 더 발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형법에서는 정신박약자의 행위에 대해 정상참작을 하여 형을 감경하도록 조문화되어 있다. 여기서 뫼르소의 정신상태가 정신박약자임이 밝혀지고 그에 따라 정상참작에 따라 형량이 작량감경 되었다면 부조리가 발생할 리가 없다. 지은 바대로 벌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상참작을 받아 감경되어야 할 형량이 아니라, 고의로 죽인 정상인의 벌을 받아 사형이 언도된다. 뫼르소가 정신박약상태임을 알면서도 검사는 일반인과 똑같이 취급하여 구형한 것이고, 평결도 일반인과 다름없이 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부조리다. 그런데 죽은 아랍인의 관점에서 보면 정신박약자에게 죽었든 정상인에게 죽었든 생명을 박탈당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에 상응하는 벌을 동일하게 받아야 한다. 그런데 정신박약자라고 해서 감경한다면 죽은 자의 입장에선 억울하다. 원인자가 어떤 자이건 죽음이라는 하나의 결과만 있을 뿐인데, 원인자를 분리하여 감경한다는 것, 이것이 두 번째 부조리다. 그렇다면 어찌해야할까? 이렇게 해도 부조리, 저렇게 해도 부조리라면 어느 쪽 입장에 서야 덜 부조리할까? 오늘날의 형사제도는 산 자에 방점을 둔다. 사형제 폐지를 봐도 알 수 있다. 아무튼 비록 죽은 자에게는 억울한 일이지만, 정신박약 상태가 아니었다면 살인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정을 살피는 것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간정신의 소산이자, 여타 동물의 의식과 구분 짓는 인간의식의 발현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정상인 사람과 정신박약자는 상호 부조리를 느낀다. 정상적 인간의 정신은 자아의 이익과 보호를 위해 움직이는, 존재의 그림자와 같다. 그래서 정상적 인간의 정신성은 여타 동물보다 풍부하다. 이미 예를 들었듯이 자식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증인이 부모밖에 없고, 사실을 정직하게 말하면 자식이 사형을 당할 경우, 부모 입장에서는 거짓말을 해야 정상적인 정신이다. 이때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진술하면 이를 두고 “와, 진짜 정직한 사람이네. 본받을 만한 순수하고 정직한 인간이군.” 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도 정상인이라면 백 명이면 백 명 모두, “아이쿠, 저런 바보가 있나. 저 사람, 저거, 모자란 사람 아닌가? 아, 저 머저리.”라고 말할 것이다. 이때 정신박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직하게 말했음에도 오히려 그 정신이 머저리라고 비난받는가 하면 그 때문에 처벌을 받는 데 반해, 정상적인 사람들의 정신은 부정직한 정신임에도 그 정신이 정상적이라고 평가받는가 하면 그 덕분에 죄를 감경 받거나 면하는 데서 부조리를 겪는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렇다는 사실에서 역시 존재의 부조리를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전체주의의 틀에 넣어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신박약자를 의식수준이 하향평준화 된 체제의 국민들로 놓고, 정상적인 인간을 체제유지자로 놓고 처벌의 논리를 대입하면 상호 부조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6. 미학적 차원에서, 정신박약자의 짧은 한생이 보여준 슬픔은, 슬픔을 부정성이라고 볼 때, 정상인보다 모자란 바보에게서 느끼는 지독한 연민과 슬픔을 자아내는 얼마나 아름다운 부정성인가? 정신의 모자람으로 정직할 수밖에 없는 정직함에서 정신의 풍요로 인해 거짓이라는 정신작용을 사용하여 정직하지 못하게 되는 정상인이 역설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고, 그 반대편에서 정상인으로서 진리와 정의를 위해 권력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정직한 정신작용을 발휘하는 인물을 부각시켜 그에게서 다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뫼르소는 얼마나 아름다운 부정성 정직함을 지닌 존재인가?
7. 앞으로도 또 어떤 출판사가, 내가 다른 지출을 줄이고서라도 다시 한 번 이방인을 사서 읽을 수밖에 없도록, 새로운 문체든, 새로운 해석이든, 새로운 감상이든, 그와 같은 요소가 실린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여, yes24 광고판에서 반짝반짝 점멸하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줄지어 행진해 주었으면 좋겠다.
세계고전을 소개하는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중 '이방인'이다. 오래 전에 읽었는데 다시 받아 보니 이렇게 얇았나? 하는 느낌이다. 작가 연보까지 합해도 200여 쪽이다. 현대지성의 책은 고전을 쉽게 접하게 하기 위해 삽화를 넣어주기도 하는데, 이 책은 특히 칼라풀한 삽화가 이야기를 시각화한다.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인이지만 식민지인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포도농장 노동자였고 어머니가 스페인계의 하녀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가난하게 자랐다. 부조리를 대표하는 <이방인>과 반항의 <페스트>, 사랑의 미완성 소설 <최초의 인간>이 있다.
요양원에 계시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뫼르소는 가는 길에 졸음이 오고 피곤하다. 마지막인데도 엄마의 시신을 보지 않겠다 하고, 엄마가 없었다면 즐겁게 산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뫼르소는 마리와 잠자리를 하고, 이웃집 레몽과 친구집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며 즐긴다. 해변에서 레몽의 여자친구의 오빠가 포함된 패거리와 맞닥드려 레몽이 부상을 입는다. 뫼르소는 해변가를 걷다가 아까 그 패거리 중 한 명을 발견하고는 총으로 쏘아 죽인다.
마음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는 부조리한 사례를 여러 군데에서 만날 수 있다. 먼저 뫼르소는 장례가 끝나고 돌아와 마리와 잠자리를 하고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리가 결혼하자고 제안하자 사랑하지는 않지만 결혼하겠다고 대답한다. 사랑하지 않는데 왜 결혼에는 응하는 것일까? 부조리하다. 또한, 뫼르소의 주변인물로 개를 학대하는 살라마노 영감과 여자친구를 때리는 창고지기 레몽이 있다. 이들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나이스하지 않다. 언제라도 곁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일까? 결국 개가 사라지자 영감은 울고, 떠나버린 여자친구에 레몽은 속이 상한다. 부조리하다.
무엇보다 사건의 내막을 아는 독자로서는 뫼르소가 고의로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데도 검사는 살인이 계획적이었다고 꾸며내고 뫼르소가 냉혈한이자 부도덕한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배심원을 설득해 사형판정을 받게하는 것이 가장 부조리하다. 뫼르소도 말하지만, "살인죄로 기소당한 채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한다"는 것은 법정의 부조리를 보여준다. 사건에만 집중해서 판결을 내야 앞뒤가 맞는데 범죄보다 용의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의해 형이 정해진다. 마지막으로, 부속사제는 자신의 설득이 먹히지 않는 뫼르소에게 화를 내는데, 이또한 부조리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모든 죄인들은 신에게 용서를 빌고 귀화'한다고 믿는 사제를 위해 신을 부정하는 뫼르소가 신념을 바꿔야 옳은 것인지 의문이다.
뫼르소라는 인물은 어찌보면 천하의 불효자이자 살인에도 눈깜작하지 않는 냉혈한으로 보이겠지만, 어찌보면 해탈한 철학자같기도 하다. 사회화가 된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들을 보이고 그에 대한 변명조차 하지 않는 뫼르소를 보며 조리가 맞지 않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남을 위해 나를 바꾸지 않는 뫼르소의 일관성을 통해 일반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행동을 보이며 사는지 그 부조리가 이해되기도 한다.
사회화라는 것이 부조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음 속으로는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하고, 하고 싶지만 반대되는 행동을 해야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적절히 사회화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부조리를 참지못하고, 법망에 걸리는 죄를 지었을 때는 사회에서 쫓겨나는 일밖에 없겠다. 어려웠던 부조리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는 작품이다.
[책 리뷰] 세계고전문학 알베르 카뮈 이방인
죽음 태양 부조리 진실된 삶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윤예지 그림 유기환 옮김 현대지성 펴냄
이해하고자 들자면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성격이지만 일반적 혹은 통념에 비추어 특이한 인물들이 있다. 알베르 카뮈의 실존주의 문학 “이방인” 속 뫼르소가 그렇다. 질문하지 않는 사람 뫼르소, 질문에 대답하기로 일관하는 뫼르소. 이는 세상사에 무심하기 그지없는 그의 성격을 제대로 보여준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어느 날 뫼르소에게 엄마의 죽음 소식이 전해진다. 이것은 그에게 그저 일상의 연장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엄마의 죽음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연연해하지 않는다. 엄마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오열하지도 않는다. 여느 일요일과 다름없는 일요일 하루가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이 끝났고, 내일이면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고,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례식 후 뫼르소는 옛 동료인 마리와 마주쳐 함께 코미디 영화를 보고 밤을 보낸다. 이 역시 그에겐 그저 그런 일상이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이해받지 못할 행동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라고 느끼고 말하는 그는 사람들에게 냉혈한이요 무뢰한이며 사회적 이방인으로 비친다.
레몽을 노리는 아랍인 패거리 중 한 명을 권총으로 쏘기 직전, 뫼르소는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의 장례식 날과 똑같은 태양. 법정에서 뫼르소는 자신이 총을 쏜 경위에 대해 적극 해명하지 않는다. 그저 햇빛에 눈이 부셔서 방아쇠를 당겼다고 말한다.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는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는 종종 누구라도 완전히 불행해지는 법은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는 끊임없이 새벽과 항소를 생각했지만 결국 항소를 포기했다. 그런데 왜 나는 자신의 삶과 생각을 적극적으로 해명하거나 옹호하려고 들지 않는 뫼르소에게 화가 나지 않을까?
살인죄로 기소당한 채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한들 그게 뭐가 중요해?
동일한 상황에 대해 누구는 A라고 판단하고 누구는 B 또는 Z라고 판단한다. 판단하는 이의 마음은 제각각이지만 B에서 Z까지의 판단은 사회적 관습의 허용 범주요 A는 그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기이한 일로 치부당하고 공격 대상이 된다. A는 틀리지 않았음에도 옳지 않다고 평가 당한다. 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뫼르소는 어머니를 도덕적으로 죽인 자는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살해한 자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를 저버리는 사람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소설 "이방인" 속 뫼르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보기에 뫼르소는 표류물이 아니라 어둠을 남기지 않는 태양을 사랑하는 인간, 가난하지만 가식 없이 솔직한 인간이다.' 하나의 죄를 저지른 뫼르소는 그 일 자체가 아니라 A라고 생각한 일, 엄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반적인 인성을 의심받고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다. 뫼르소는 자신의 재판 과정에서도 배제당한다. 모든 게 나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세상은 이토록 허위로 뒤덮여 있고 부조리하다.
뫼르소는 예심판사와 사제가 강요하는 ‘신’에 대한 신앙, 사제의 면회를 거부했으며 그저 죽음을 기다린다. 모두가 다 선택받은 특권자야. 이 세상에는 선택받은 특권자들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 또한 언젠가 단죄받을 거야. 당신 또한 단죄받을 거야.죄를 털어놓고 회개하라고 말하는 사제에게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이야말로 허위적 삶이 아닌 진실된 것이라고 소리친다.
삶을 단순화하려고 하지 않았던 뫼르소, 실제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였기에 사회는 그에게서 위협을 느꼈음이다. 관행을 거부했던 그는 죽음이 확정된 후 오히려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왜 엄마가 삶이 끝날 무렵에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삶을 다시 시작하는 놀이를 했었는지 어렴풋이 이해한다. 엄마도 자신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욕망이 일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세계고전문학 “이방인”은 살인범이자 아주 무자비한 인간으로 규정된 뫼르소를 통해 권력자들이 인간을 어떻게 지배하고 처리하는지를 보여준다. 뫼르소가 무죄라는 레몽의 증언은 묵살되고 흘러간다. 자신들이 만든 틀에 갇히지 않은 자, 어떤 의미로는 이방인인 자들은 그저 계도의 대상이다. 뫼르소가 그 대표적 인간, 즉 이방인이다.
그렇다면 실존주의 철학가이자 부조리 문학의 대표 작가인 알베르 카뮈가 소설 속에서 규정한 ‘이방인’은 누구일까? 아랍인? 뫼르소? 어쩌면 관행을 거부했기에 나쁜 놈이어야만 하는 뫼르소에게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가 이방인? 시점에 따라 누구든 이방인일 수 있다. 어쨌거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은 뫼르소이므로 초점은 그에게 맞춘다.
권력, 부조리, 온갖 허위로 뒤덮인 사회에 휩쓸리거나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택한 삶을 살아가려고 한 뫼르소, 무심한 성격인 그는 희한하게도 레몽과 금새 친구를 맺고 그를 위해 편지를 써주고 증언도 한다. 마리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과 별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저신이 그리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게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이게도 뫼르소는 자신의 일, 즉 사형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변론하는 데는 나서지 않는다. 거짓을 말하려 하지 않고 포장하려 들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으로선 분명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려 들었을 일에 그는 그리하지 않는다. 이것이 뫼르소를 이방인이라고 하는 하는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부조리의 삶에 저항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해가는 뫼르소. 뫼르소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가슴을 연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그토록 형제 같으매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일러스트가 담긴 알베르 카뮈의 짧은 소설 고전문학 “이방인”. 리뷰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고민스러웠는지. 예전과 지금의 독서는 제법 온도 차가 있구나 싶다. 짧은 소설에.무슨 할 말이 그리 길어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야 했을까. 참 대단한 작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카뮈, 그의 소설을 더 읽어보겠다!
카뮈의 이방인은 책 전반에 걸쳐 부조리와 실존주의라는 카뮈의 철학적 신조가 분명히 빛을 발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부조리는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인 세계에 의미와 합리성을 부여하려는 인류의 헛된 시도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 개념은 소설 속 주인공인 뫼르소의 행동과 생각에 반영되어 있다. 그의 외부 세계는 그의 물리적 환경에 대한 감정 없는 관찰에 의해 지배된다. 이것은 책의 처음 두 문장 이후에 분명해진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이 유명한 구절이 그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번역가마다 책마다 얼마나 다르게 번역되었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울 것이다.
주인공인 뫼르소는 따뜻한 여름 저녁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꽃향기 외에는 특별한 기쁨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내면세계, 그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그의 생각은 완전히 무질서하고 비합리적이며 결국 알제리 외곽 해변에서 폭력 행위를 저지르고 나중에 재판을 받게 된다. 그때, 그가 그렇게 한 이유, 즉 카뮈의 실존주의적 관점이 전면에 등장한다. 실존주의는 개인이 의지의 행위를 통해 자유롭고 책임 있는 행위자로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삶의 무의미함은 뫼르소의 체포 이후 더 깊이 탐구된다. 카뮈는 삶에는 목적이 없으며 죽음만이 삶의 유일한 확실성이며 결국 모든 인간이 죽음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삶은 똑같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 뫼르소는 자신이 지금 처형당하든 20년 후 자연사하든 상관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 깨달음은 그를 잘못된 희망과 처형을 피하려는 환상에서 해방시켜 마침내 삶에 만족하고 남은 날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이방인은 세계에 대한 뫼르소의 관심을 반영하며 전체적으로 거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히려 장례 행렬에 내리쬐는 태양을 불평하는 데 몰두한다. 게다가 여자친구 마리의 청혼에도 전혀 무관심하다. 그는 그것이 사회적 규범임을 이해하고 마리가 원하면 결혼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겨우 존재하는 감정에 사용되는 서술어는 단순하지만, 뫼르소가 보는 세계를 설명할 때는 상당히 정교하고 생생해진다. 예를 들면, 작열하는 여름 태양 아래에서 그의 고통을 묘사할 때처럼 말이다.
이방인에서는 카뮈의 철학적 견해와 그의 글 스타일이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부조리와 실존주의에 대한 카뮈의 관점을 탐구하고 싶었든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1942년 알제리에 가보고 싶었든 상관없이 책을 읽는 동안 즐거웠다. 글과 잘 어울리는 일러스트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공들여 번역한 카뮈의 글과 멋있는 일러스트를 보며 느꼈던 즐거움은 누가 읽더라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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