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출신의 신도 요리코는 야쿠자 수십 명을 한꺼번에 박살 내는 괴력의 여자다. 폭력을 갈구하는 욕망이 핏 속에 흐르고 있다. 화장이나 쇼핑, 자신을 가꾸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주먹이 뼈에 닿아 부러지는 느낌, 오로지 그것만이 신도 요리코를 살아있게 한다. 그녀는 괴물이다.
독보적인 캐릭터와는 달리 이야기는 좀 갸우뚱하다. 야쿠자와 시비가 붙어 본거지에 잡혀온 요리코는 그곳에서도 한 바탕 난리를 치며 진실로 살아있는 야생의 짐승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그녀를 제압한 건 40킬로그램이 넘는 도베르만이었다. 개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요리코가 개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무슨 수를 써도 말을 듣지 않던 요리코는 야쿠자가 기르는, 처음 본 개를 죽인다고 협박하자 마침내 마음을 꺾는다. 맡겨진 일은 오야붕의 외동딸을 수행하라는 것. 이렇게 요리코는 보디가드이자 운전기사가 된다.
일본의 장르 소설이라는 게 본래 개연성을 주특기로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너무할 때가 좀 있는데 <바바야가의 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야붕의 딸과 요리코가 처음 만나 삐걱대는 대목에서부터 이 소설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물론 장르 소설의 결말은 어차피 다 똑같다. 차이를 만드는 건 그 과정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그런 관점에서 183페이지 밖에 안 되는 <바바야가의 밤>은 우려스러운 점이 많았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여자라는 존재를 움켜쥐고 옭아매는 세상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종이의 양이 너무 적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바야가의 밤>은 한 페이지 안에서 수십 년을 건너뛰는 필살기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 책은 소설 자체보다 그 뒤에 딸린 편집자 후기가 훨씬 뛰어나다. 나는 이 편집자를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통해서 만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도 인상이 깊었다. 구매한 책 사이에 본인이 출간했으나 파본으로 반품된 소설의 일부를 잘라 견본처럼 끼워줬기 때문이다. 그 견본을 읽고 새 책을 사기까지 했다.
<바바야가의 밤>은 삼송의 김사장이라 불리는 이 출판인이 '첩혈쌍녀'라는 시리즈를 기획하며 내보낸 선봉이다. 첩혈쌍녀란 무엇인가? 재잘거릴 첩 + 피 혈 + 짝 쌍 + 여자 녀다. 즉 재잘거리며 핏빛 사건을 해결하는 두 여자,라는 뜻이다.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통적 모험, 탐정물의 서사를 탈피한 낯선 소설들을 소개할 요량. 좋은 기획과는 달리 따라 나온 장수들이 변변치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온몸이 흉기라고 할 만큼 순수한 폭력의 화신인 22살의 신도 요리코. 어느 날 자신을 성추행한 양아치 일당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히던 중 야쿠자 회장의 저택으로 끌려간 그녀는 회장의 딸인 18살 쇼코의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가 되라는 어이없는 협박성 제안을 받습니다. 개죽음만은 피하고 싶었던 요리코는 이후 저택에 머물며 마치 인형처럼 감정도, 표정도 없어 보이는 쇼코의 시중을 들게 됩니다. 어색하고 냉랭하기만 했던 둘의 관계는 사소한 일탈을 계기로 조금씩 녹기 시작했고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까지 꺼내는 단계에 이릅니다. 하지만 야쿠자 저택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태로 인해 두 사람의 운명은 예기치 못한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소피아 베넷), ‘세상 끝의 살인’(아라키 아카네)과 함께 북스피어의 ‘첩혈쌍녀 시리즈’로 출간된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시리즈 명칭에 진심으로 걸맞은 작품으로, 순수한 폭력을 갈구하는 ‘싸움의 신’ 신도 유리코와 ‘야쿠자 회장의 금지옥엽’ 나이키 쇼코가 벌이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편집자인 삼송 김사장 님의 평을 조합해서 정리하면 이 작품의 장르는 ‘심장 떨리는 하드보일드 바이올런스 액션 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훗카이도의 외진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에 의해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요리코는 몸과 마음 모두 폭력이 주는 희열에 빠진 채 성장했습니다. 18살이 되어 도쿄에 온 요리코는 싸움꾼이 되진 않았지만 누군가 시비를 걸어오면 반드시 두 배로 갚아주며 폭력의 쾌감을 만끽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폭력 재능에 반한 야쿠자가 숱한 희생을 치러가면서 그녀를 회장 딸 쇼코의 보디가드로 삼기 위해 끌고 간 것입니다.
“피지컬도 멘탈도 강한 여성, 게다가 싸우기 위한 동기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 오타니 아키라는 영웅적인 여주인공에게 반드시 필요한 ‘싸워야 할 이유’, 즉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를 위한 복수심 같은 것 없이도 순수하게 폭력을 갈망하고 희열을 느끼는 요리코를 창조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멋있으면서도 폭력적인 남성 영웅 중에는 굳이 아무 이유 없이도 매력적으로 그려진 경우가 적지 않으니 오타니 아키라의 일성은 충분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아무튼... ‘보디가드’ 요리코와 ‘아가씨’ 쇼코의 관계가 조금씩 풀어지며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는 지점까지만 해도 ‘오락성이 풍부한 재미 만점의 해피엔딩 액션 스릴러’라고 단정하고 있다가 중반부쯤의 예기치 못한 전개에 꽤 세게 뒤통수를 맞은 순간엔 말 그대로 “헉!”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무자비한 야쿠자의 세계에서 요리코와 쇼코가 말랑말랑한 해피엔딩을 맞이할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지만, 극적인 반전과 함께 이야기의 톤 자체가 처절함과 처연함으로 급변하는 대목에선 단순한 놀람 이상의 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다 읽은 뒤 인터넷서점 출판사 소개글에서 발견한 “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 등을 맡기고 싸우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일본 아나운서 우가키 미사토의 한 줄 평은 그 반전을 읽은 순간의 제 심정을 100%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삼송 김사장 님은 “아주 깜찍한 반전”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묵직한 반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바야가의 밤’은 2021년 제7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장편부문에서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론 신초샤(新潮社)가 주관하는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심장 떨리는 하드보일드 바이올런스 액션 스릴러’지만 동시에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치열하고 리얼한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리코와 쇼코는 연인도, 친구도 아니지만 그 이상의 연대로 묶인 ‘시스터후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마귀할멈 바바야가처럼 “엄청 강하고, 마을사람들이 무서워하지만 착하고 친절한 여자애가 간절히 부탁하면 어려운 일을 도와주기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두 여자가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남성 야쿠자의 세계를 벗어나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은 무척이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사족 1. 요리코가 순수한 폭력의 화신이며 이야기의 주 무대가 야쿠자의 저택인 만큼 꽤 높은 수위의 폭력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사족 2. 오타니 아키라의 또 다른 한국 출간작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진심으로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소설 같은데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한 여자가 여기저기 맞고 엉망인 상태로 차에 태워져 끌려간다. 도착한 곳은 도쿄에서도 부자들이 살기로 유명한 동네에 있는 저택. 차에서 끌어내려진 여자는 힘이 없는 척하다가 기회를 봐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남자들을 때려눕힌다.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보다 못해 성질 나쁜 도베르만 한 마리를 데려온 후에야 여자는 겨우 진정한다. 도베르만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도베르만을 죽이겠다고 남자가 협박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이름은 신도 요리코. 끌려온 곳은 야쿠자 조직 회장의 자택이다. 끌려온 이유는 회장의 금지옥엽 외동딸 쇼코의 운전사 겸 보디가드가 되기 위해서다. 며칠 전 거리에서 요리코에게 시비를 건 남자들을 혼내준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눈여겨 본 모양이다.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인 요리코. 그런데 주인으로 모시게 된 쇼코가 상당히 까다로운 캐릭터다. 나이는 열여덟 살인데 입고 다니는 옷은 옛날 아가씨 같고, 신부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매일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한다. 외모는 고운데 미운 말을 잘한다.
오타니 아키라의 소설 <바바야가의 밤>은 이렇게 만난 요리코와 쇼코, 두 여자가 거칠다 못해 잔혹한 인성을 지닌 남자들의 세계인 야쿠자 조직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결국 서로를 구하는 과정을 그린다. '서로 말을 나누며 각종 사건에 적극적으로 다가가 해결하는 두 여성 주인공의 활약이 담긴 작품들'을 엮은 북스피어 첩혈쌍녀 시리즈 제2권인데, 소설의 내용과 시리즈의 성격이 잘 어울린다. '결혼 제도, 가부장제 등 다양한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는 글을 쓴다'는 작가 소개와도 맞아떨어진다.
주인공 요리코는 다양한 싸움의 기술을 섭렵하고 폭력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의 '조각'과 닮았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요리코는 웬만한 남자들이 겁을 낼 정도로 몸이 크고 단단하고 식사량도 엄청나고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행동을 일절 안 한다는 것이다. 반면 쇼코는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의 총합과도 같은 인물인데, 그런 쇼코가 요리코를 만나 변화하고 성장하며, 요리코 또한 쇼코를 만나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다.
시원하고 통쾌하다. 그리고 애달프고 아프다. 이 책을 읽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드는 기분이었다. 새벽 스탠드 아래에서 단숨에 읽었다.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인덱스를 붙인 곳이 한곳도 없었다.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할 여유를 가질 수도 없을 만큼 몰입도가 높았다. 그래서 서평을 쓰며 책을 다시 뒤적여야 했다.
폭력으로는 누구보다 강자인 여자와 폭력 앞에 가장 연약한 여자. 두 사람이 남자들의 최강인 야쿠자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어느 날 배달 중 시비가 붙어 싸우게 되었는데 그들에게 끌려온 요리코. 야쿠자 두목은 그녀에게 자신의 딸 쇼코의 보디가드를 하라고 한다. 쇼코는 대학생이지만 흰 블라우스에 길고 무거워 보이는 스커트를 입고 까만 애너멜구두에 흰 레이스 양을 신는다. 시대에 뒤처진 그 옷들은 정부와 도망을 간 엄마의 옷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아내를 대신하는 꼭두각시 같다.
요리코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란다. 할아버지는 요리코에게 체력단련과 각종 무술을 가르친다. 왜?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여자에게는 혹독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일까? 언젠가는 혼자 남을 요리코에게 스스로 지키는 법을 알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떠나고 힘을 적당히 사용하며 자신을 지켜나간다. 야쿠자의 세계에 들어간 요리코는 폭력에 환희에 전율한다. 자신이 폭력에 매력을 느끼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쇼코의 약혼자는 이상한 변태 폭력이 취미다. 쇼코와 수업을 빠지고 일탈을 하던 요리코는 그 약혼자와 문제가 생기게 된다. 야쿠자 두목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딸을 서둘러 약혼자에게 보내려 하며 자신이 먼저 딸을 겁탈하려 한다 이를 요리코가 구해주며 두 여자는 도망을 한다.
책은 중간에 엄청난 반전이 숨어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에 맞추어 읽어서 당연히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스포가 될 것이기에 자세히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40년이야, 우타가와 씨.
바바야가의 밤 P174
야쿠자의 집념이 그렇게 강하다니. 무엇이 그 시간 동안 그를 집착하게 했을까? 남자들의 자존심? 야쿠자들만의 특성? 그 집착의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아부었다면 무언 가든 이루지 않았을까? 마지막이 열린 결말이라 할 수 있을까?
편집자 후기의 지하철에서의 이야기는 일반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한 칸의 지하철이라는 같은 공간에 있는지만 남자들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여자들은 모두 주시하는 모습.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밀착하여 추행을 시도하고 스토킹하는 장면. 왜 남자들은 알지 못했을까? 그들은 그러한 상황을 겪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범죄물 소설/영화의 여성 캐릭터가 피해자 입장에서 그려지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아 현실에서 상황이 비슷한데 픽션에서조차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여자가 두목인 영화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조폭마누라>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위기의 순간에는 남자들의 역할이 크게 부각된다.
작가가 바라는 피지컬도 멘탈도 강한 여성, 게다가 싸우기 위한 동기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여성이 현실에는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찾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