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고양이 집사'란 이름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에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주인'인 인간을 동등한 친구사이도 아닌 '자신의 종'으로 격하시켜버리는 동물을 집에서 기르는 것이 '내 기준'에서는 절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양이를 집에서 기르는 것이 아닌 고양이를 '기꺼이' 섬기며 살아가며 기쁨과 행복을 논하는 '별종(스스로를 '고양이 집사'라 일컫는 사람)'들과는 상종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난 베르나르의 <고양이>도 별로였더랬다. 그래서 1권을 읽고 나서 2권을 마저 읽지도 않았더랬는데, '그래픽노블'로 다시 나왔다길래 꺼내 들어봤다. 웹툰은 읽는데도 별로 시간을 빼앗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웬걸 읽자마자 느낌이 확 달랐다. 소설책으로 처음 접했을 때에는 별난 고양이가 등장해서 저 잘난 맛에 사는 재수탱이(?)의 독백 나레이션만 눈에 들어왔었는데, 웹툰으로 읽으니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었다. 먼저 프랑스 빠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내전상황'이 눈에 들어왔고, 그로 인해 인간세상은 피폐해졌으며, 그렇게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엔 쥐떼들이 점령하면서 전염병인 '페스트'가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페스트...유럽의 인구 절반을 죽음으로 몰고간 지독한 질병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주인공이 '고양이'였다. 쥐떼를 내몰고 페스트를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영웅 아니냔 말이다. 내가 놓친 것은 2권부터 펼쳐질 '쥐와 고양이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고양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강렬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었다면, <고양이>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힘, 지식, 그리고 소통'에 있다. 프랑스혁명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앙시앵 레짐(혁명전 구체제)'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실현시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평가한다. 이제 <고양이>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인간들의 세상은 끝없는 내전으로 스스로 타락하고 끝내 몰락하고 만다. 그렇게 인간들의 삶은 피페해지고 '페스트' 같은 전염병이 돌아 절멸의 위기까지 치닫게 된 셈이다. 이렇게 인간이 무력해진 도시를 점령한 것은 다름 아닌 '쥐떼들'이었다. 하지만 쥐떼들은 인간들이 애써 만든 '문명'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저 파괴를 일삼는 '야만'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인간들이 남긴 '문명'을 이어받은 것이 피타고라스라는 '똑똑한 고양이'였다.
고양이 피타고라스는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온갖 스트레스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았기에 이마 한복판에 '제3의눈'이라는 USB 장치를 달고서 인간들이 일구어낸 문명(컴퓨터 인터넷망)과 접속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내전이 한창일 때 피타고라스는 차곡차곡 지식을 담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뇌를 '저장장치' 삼아서 말이다. 비록 고양이라서 '인간의 언어'는 구사하지 못하지만, '바스테트'라는 엉뚱한 고양이를 만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바스테트가 엉뚱한 고양이인 까닭은 그녀가 '종간소통'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종끼리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고양이였단 말이다. 그래서 끝없이 바스테트는 생쥐와도, 금붕어와도, 그리고 인간과도 갸르릉거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로 서로의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끝없이 시도를 한다. 결국 그 '종간소통'이 성공을 이루고, 고양이는 인간과 사자와 힘을 합해서 야만스런 쥐떼의 공격을 막아내고, 다시금 문명을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로 자리 잡는다는 내용이 이 소설의 줄거리였다. 즉, 사자의 힘, 피타고라스의 지식, 그리고 바스테트의 소통으로 야만을 몰아내고 문명을 새롭게 일구는 업적을 남긴 것이다. 물론, 사자의 힘은 '인간들이 다루는 무기의 힘'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암튼, 이 웹툰으로 인해서 소설 <고양이>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베르나르는 <고양이>에 이어, <문명>과 <행성>이라는 '고양이 시리즈'를 펴냈다고 하는데, 모두 읽어보려 한다. 물론 '내 기준'에서 고양이는 완전히 흡족할 수만은 없겠지만, 이 책으로 인해 '나의 지적호기심'을 자극받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