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배경이다. 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3층짜리 낡은 아파트.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이 아파트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마치 그 아파트가 세상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처럼.
구두장이 실베스트르와 마리아나 부부는 조금이라도 가계에 보태고자 세입자를 들인다.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에밀리우는 스페인 출신의 카르멘과 사랑스런 여섯 살짜리 아들을 두었지만 갈등이 깊어간다. 신문사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는 카에타노와 주스티나 부부는 2년 전 딸을 잃었고, 아내는 당뇨병에 걸려 뼈만 앙상한 채 겨우 살아간다. 그 옆집의 아름다운 리디아는 사업가인 파울리누의 내연녀로 풍족하게 살아가지만, 엄마는 매달 수금하듯 그녀의 돈을 받아간다. 3층에는 칸디다와 동생 아멜리아, 그리고 칸디다의 딸 아드리아나와 이자우라가 산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사랑하며 얼핏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셀무와 로잘리아 부부가 있고, 그들 사이에는 열아홉살의 매력적인 딸 마리아 클라우디아가 있다. 그들 역시 쪼들리며 살아가면서 딸의 취직 자리를 리디아에게 부탁할 정도다.
소설은 이 여섯 가족의 모습을 돌아가면서 비춘다. 평범한 듯 보였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불화의 씨를 안고 있거나, 붕괴 직전이다(실베스트르의 가족을 제외하고). 카르멘도, 에밀리우도 서로에게 벗어나려 애쓰고, 카에타노와 주스티나는 서로를 빈정거리며 살아간다. 아멜리아는 조카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열쇠를 복제하고 일기를 몰래 들춰본다. 내연녀로 살아가는 딸의 돈을 뜯어가는 엄마는 어떤가? 그런 엄마를 벌레 취급하는 딸은 어떤가? 가족이 따뜻함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저 먼 얘기일 뿐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가족의 비루한 모습을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내면서 사회를 냉철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비루한 삶을 냉철하게 보여주면서도 주제 사라마구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 실베스트르와 아벨의 대화는 이상 사회를 꿈꾸다 좌절하는 이야기이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삶과 사랑에 대해 깊이 이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베스트르가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을 했었다는 설정은 주제 사라마구의 정치적 배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런 정치적 성향은 이 소설에서 매우 희미해 보인다. 이 소설은 이 소설의 쓰여진 시기를 감안했을 때 여성의 주체적인 발언이 매우 두드러진다. 비록 사회적 흐름의 주체로 그려지진 않지만, 폭력적인 남편(아마도 사회를 표상하리라)에 힘없이 굴복하지 않는 여성상은 당시에 그리 흔하게 그려지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이 소설은 주제 사라마구가 죽은 후 출판되었다. 그러니까 유고작인 셈이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 완성한 작품이 아니라 아주 초기의 작품이다. 첫 장편소설 『죄악의 땅(Terra do pecado)』 이후 바로 다음 작품으로 출판사에 투고했지만, 어떤 이유인지 출판을 거절당하고 어느 서랍에서 썩고 있었다. 36년 뒤 우연히 찾게 되었지만, 주제 사라마구는 이 소설의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걸 말하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라고 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했던 얘기를 다른 소설에서 많이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아무리 그가 여기의 얘기를 많이 했더라도 의미가 있다. 그의 소설을 모두 다 읽은 독자만 있는 것은 아니며, 그의 발언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궁금한 이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다른 소설에서의 목소리와 이 소설의 목소리가 동일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서라도 이 소설 자체가 무척 매력적이다. 그가 죽은 후에라도 이 소설에 이렇게 출판된 것을 반가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랜만이다.
소설을 읽은 지가 얼마나 됐는지...
필요한 텍스트만 잡아 읽다 보니,
거참...
뭔가 새로운 변화를 줄 것 같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쓴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유고작!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정말 명작이었다)
(영화도 너무 좋았고)
(주제 사라마구는 이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책이 막 술술 읽히는 건 아니었다.
이유는... 좀 답답한 인생사를 보는 게 유쾌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게다.
결국, <스카이라이트>를 보는 동안 내 오랜 습관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소설의 결말을 확인하는...
(이 버릇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읽으면서 완전 자리 잡았다.)
보통은 아주 극적인 소설을 읽을 때,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걸 견디기 힘들 때 그렇게 확인하곤 했는데...
<스카이라이트>를 읽으면서도 먼저 결말을 확인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젤 뒤의 몇 챕터를 먼저 읽어낸 후,
마음의 안정을 찾고 앞으로 돌아왔다.
우리네 인생사가 그러하듯,
극적 반전은 없었다.
잔잔히 흘러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무얼 바라고 살아가는가?
(바라는 바를 내비칠 수 있는 환경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은 아닌가?)
과연 그걸 위하는 걸음을 내딛고 있는가?
(의지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괄호 안의 또 다른 질문 또한 뒤따라 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긴 했다.
1953년에 쓰여진 이 작품!
리스본의 가난한 이들의 삶을 담은 <스카이라이트>!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닌...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도 아닌...
그저그렇게 살아가는...
그럼에도 각자의 소신은 살아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희망을 품고 사랑하는...
그렇지만 소신, 희망, 사랑... 이 모든 것 또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른다.
다 내 맘과 같지 않게, 때로는 무질서하게, 제각각의 방향으로...
그래서 이런 대사가 나오는 것 같다.
지금은 세뇨르 실베스트르의 말씀처럼 제가 상당히 쓸모없습니다.
하지만 세뇨르 실베스트르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유용함보다는 일시적인 무용함이 더 좋습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유용함이라니!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그런 건... 상상 속에서만 퍼펙트하고 아주 아름답기만 하게 완성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 지점에서 어느 방향으로 스탠스를 잡아야 할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무용함이 정말 좋아 무용함에 머무를지,
무용할 수밖에 없어 무용함에 머무를지,
유용함을 그닥 바라지 않음에도 어쩔 수 없이 유용함에 머무를지,
유용함을 바라고 유용함에 머무를지...
물론 이외에도... 무용함과 유용함 지대를 오가며 살아가는 이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래도 유용함이 좋다.
(나이 들어서일지도;; ㅎㅎ)
다음 사진은 내가 꼽은 몇몇 페이지다.
(위에 쓴 대사 페이지는 제외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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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력을 아니 읽는다곤 하나 10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난 작가를 여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뒤늦게 작가를 알게 된 통에 끊임없이 읽을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핑계만으론 가려지지 아니할 정도로 나의 무지는 실로 크다.
주제 사라마구의 유고작이라고 하기에 대체 이분이 언제 돌아가셨나 싶어 일단 당황했다. 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알고는 더 놀랐음은 물론이다. 스카이라이트는 최근에서야 세상에 알려졌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초판 1쇄가 2021년 7월 14일에 나왔다.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 작품을 썼다.
정확히 어느 시기라 단정하긴 힘드나 작품의 배경이 1940년대 후반이라는 점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194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격동의 시기라 칭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갓 벗어나 대혼란의 시기를 관통 중이었고, 합법적 선거로 당선시킨 히틀러와 나치당에 선동 당했던 지난날의 충격에서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를 두고 신음하기 바빴다. 도시 리스본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살라자르’라는 이름의 독재자가 여전히 건재했다. 이 인물(안토니오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포르투갈 지배는 1932년부터 1968년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1940년대 후반은 이제 겨우 1/3 정도가 경과했을 뿐인 시기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희망을 품자니 어디에서도 근거를 발견할 길이 없을 듯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라니,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기에 앞서 이미 암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고전했다. 다분히 속도 내어 책을 읽는 편인데, 아무래도 입에 달라붙지 않는 외국 이름을 지닌 인물이 꽤 여럿 동시에 등장하다 보니 이를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이들은 각기 독립된 가구를 이루었으며, 마치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는 것처럼 등장인물 간의 마찰 지점 또한 쉬이 발견되지가 않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도시, 같은 주택가에 거주한다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대체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었고, 인물 하나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오랜 기간 알려지지 않았던 소설이 늦게나마 출판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얼지가 난 궁금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아마 많은 이들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시대는 영웅 외에도 다양한 존재를 만든다. 어떤 시대에 태어날 것인가를 정할 수 있었더라면 등장인물들은 굳이 격동의 시기를 택하지 않았을 거 같다. 각자의 처한 상황, 살아가는 모양새는 달랐지만 경제적인 사정은 고만고만해 보였다. 딱 한 가정, 실베스트르와 마리아나 부부를 제외한다면 안정이 없었다. 저마다 자신이 속한 가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고, 가정을 불행의 근원인양 여기고 있었다. 상대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급기야 금기를 향해 손을 뻗는 일이 발생한다. 부정한 일로 생계를 유지하나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제 엄마에게 강탈당하다시피하는 인물도 있었으며, 그를 탐탁찮아 하는 게 분명함에도 제 딸의 안위를 위한다며 직장소개를 부탁하는 부모도 있었다. 하나뿐이던 딸을 잃고는 당장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형태의 가족 또한 등장했으니, 비록 그 안에 속하지 않은, 제3 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나였음에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왠지 모를 불행의 기운이 나에게까지도 미치는 듯했고, 이런 상황에서 홀로 행복을 느끼는 건 혹 죄가 아닐까를 묻고픈 마음까지 들었다.
모든 걸 스스로 택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 아벨의 입장이 어쩌면 나와는 가장 유사했다. 그는 정처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며 모든 걸 경험으로 익혔다는 식의 태도를 견지했으나 실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실베스트르와의 대화는 그에게 깨달음보다는 공허함을 안겨다 주었으며, 왜 그리고 어찌하면 인간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등에 대해 결코 눈뜨지 못한 채 작품 밖으로 사라지고야 만다.
스카이라이트(skylight)는 천장에 난 채광창이다. 채광창은 빛이 오가는 통로로, 그 곳을 통과한 빛은 주변이 어두울수록 더욱 환함을 뽐낸다. 시대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퍽퍽한 삶 또한 어둠에 가까웠다. 실베스트르의 말처럼 그들의 인생 중 스스로 택한 건 거의 없으며, 오히려 떠밀림을 연속 겪은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서도 하늘은 빛을 흩뿌린다. 지금 당장 획기적으로 삶이 나아질 리는 없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 터이나 그래도 희망을 품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지금은 사랑이라는 기초를 하나씩 쌓아 올려야만 하는 시기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무언가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이 표현이야말로 저자의 이번 작품을 가장 잘 말해주는 표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꼭 전쟁 중이 아니더라도, 삶이 나름 풍족하고, 일상에서 부족이나 불안을 느끼지 아니하더라도. 그래도 사랑을 향하여 더 다가가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고.
1952/3/19.수요일. 자정 5분 전. 아멜리아 이모가 오늘 몸시 심술궂다. 내 봉급이 적다는 말을 듣는 게 정말 싫다. 모욕적이다. 나는 사실상 말대꾸를 할 뻔 했다. 내가 적어도 이모보다는 많이 벌지 않느냐고. 하지만 다행히 말을 참았다. 아멜리아 이모도 불쌍하다. (-64-)
1952/3/23 일요일.밤 10시 반. 하루 종일 비가 왔다.봄이라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의 아름다웠던 봄날을 기억한다. 그때는 3월 21일부터 날씨가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오늘은 23일인데도 비만 내릴 뿐 아무런 변화가 없다.아마도이런 날씨 때문인지 몸이 좋지 않다.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157-)
에밀리우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낀 것는 볼품없음.단조로움,진부함이었다.천장의 전등은 그림자를 여기저기 퍼뜨리는 것이 줃된 기능인 것 같았다. 게다가 현대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크롬으로 된 세개의 가지에 각각 갓이 달려 있는 디자인이었으나,절약을 위해 전구 하나에만 불이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카르멘은 부엌에서 깊은 한숨 소리로 계속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녀는 설거지를 하면서 자신의 비참한 삶을 곰곰이 생각하는 주이었다.(-267-)
"아주 조심해야 한다.클라우디야.어디에든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어.다 내가 힘들게 겪은 일이다. 네가 너무 빨리 승진한다면, 동료들이 널 시기할 거야. 그러니까 조심해야 돼." (-292-)
그녀는 사진을 치우고, 집안일에 몰두했다.하지만 아무리 그런 생각을 눌러버리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기억.그리고 뒤늦게 떠오르는 마모로의 기억.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아주 멀어져서 다시 돌아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거리는 것 같았다. (-332-)
"이건 전부 습관이 문제야.담배도 건강에 나쁘기는 마찬가지인데,내가 이걸 포기할 건가. '담배가 당신을 죽이고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담배를 끊을 수 있을 거야.사람은 습관이 생물이야.내가 이렇게 머뭇거리는 건 습관이 낳은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해.난 그저 아직 자유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뿐이야." (-421-)
눈뜬자들의 도시, 눈먼자들의 도시, 돌텟목, 죽음의 중지, 카인,그리고 스카이라이트다.이 책들은 내가 그동안 완독한 소설이며,노벨 문학상 수상 이전에도 좋아했던 작가였다.그를 우연히 알게 되면서,그의 문체,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살펴보았고,세사에 대한 해석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그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인간 사회의 환경 및 기후 문제에 대해 통찰하였고,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미래를 예견하고자 한다. 물론 그가 쓴 죽음의 중지는 인류의 수명이 연장되어, 죽음이 사라지는 궁극적인 이상향이 발현되면, 그것이야 말로 비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그의 초기 문학의 원형에 해당되는 <스카이라이트>는 그의 작품을 애정하는 독자의 입장으로 볼 때,상당히 의아스러웠다.그는 살아생전 이 작품,이 원고를 책으로 엮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주제사라마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면, 나는 이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의 문학의 원형이 되고 있는 이 소설은 1950년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1세기 지금이야 한국의 서울이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의 사회상을 비교해 보면 경제적,문화저그로 별반 차이가 나지 않지만, 1950년대 우리의 삶을 보자면, 포르투갈 리스본의 모습은 상당히 서구화되어 있었고, 포르투갈이 잘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의 내용이 무언가 우리의 삶과 중첩되고 있었다.
소설의 전체 구도는 연예와 사랑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회,가정에서 여성들이 각자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었다.그러나 이들의 삶에 하나의 일기장이 등장하고 있다.아드리아나의 일기 속에는 1950년대 포르투갈 여성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으며,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내밀한 삶이 기록된다. 그 일기를 훔쳐보는 누군가가 있었고,그 하나하나 들여다 보면, 주제사라마구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관찰되고 있다.그릴고 이 소설의 핵심은 아멜리아 이모의 끊임없는 잔소리에 있었다.
21세기 현재 기술적으로 지금은,1950년대 주제사라마구가 이 소설을 쓴 시점보다 살고 있다. 한국은 판잣집에서 살지 않고, 초가집도 없다. 하지만 1950년대 포르투갈 리스본은 서울과 다른 상당히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주인공은 속기를 배우고, 뜨개질을 하였고, 집안일 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여성의 모습이 소설속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그리고 진취적이며, 여성성을 강조한다. 한국의 1970년대 잘살아보겠다는 모습이 이 소설에서,1950년대 주인공들의 삶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책속에 등장학로 있는 페으난도 페소아의 시에 대한 해석, 마리아 클라우디아와 도나 리디아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한 남자 파울리누 모리아스가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내면의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리디아는 모리아스에 적절하게 어필하면서, 여성의 성적인 감성을 노출시키고 있다. 소위 이 소설을 보면, 최근까지도 우리 사회가 허용하지 않았던 노브라, 그 모습이 소설 속에 그대로 표출되고 있으며, 이 소설을 주제 사라마구가 생전에 출간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소위 하퍼리의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 <파수꾼>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 주제사라마구의 <스카이라이트>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파격적이면서,우리의 일상을 반영하고 있다.